‘그래서 나한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거였어.’윤혜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푸른 섬에 눈길을 빼앗긴 윤아름을 돌아봤다.윤아름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듯, 맑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윤혜인은 마음을 굳히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윤아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게임 하나 해요...”원진우는 차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운전하는 경호원은 고속으로 차를 몰며 윤혜인이 타고 도주한 검은 차량을 추적했다.그러던 와중 차량이 눈에 보이자 경호원은 차를 세우며 보고했다.“대표님, 저 앞에 있습니다.”원진우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차 안을 들여다봤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말 들을 애가 아니지.”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원진우는 생각에 잠겼다.‘찾으면 어떤 벌을 줘야 할까. 다리 힘줄과 손 힘줄을 끊을까, 아니면 독을 써서 목소리를 없앨까... 아니면 둘 다 한꺼번에 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그는 특히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도망치려 한 점에 분노했다.‘제 엄마를 유혹해 나를 떠나려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곧 원진우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차량의 전력 시스템을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겨우 15분이 지났다.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앞쪽에 사람이 없는 교회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주변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교회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원진우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가슴과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그 후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수색해.”건장한 경호원 네 명이 흩어져 교회 곳곳을 뒤졌다.그렇게 모든 곳을 수색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
원진우가 점점 다가오자 윤혜인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숨겨둔 막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원진우가 맨손으로 막대를 가볍게 붙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은 막대를 빼앗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그 순간, 원진우는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고 그녀를 다락방 유일한 창틀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목이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두 손으로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이 다락방은 지상에서 족히 10미터는 넘게 높았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이 순간, 원진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의 눈에 더 이상 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처음에는 딸에게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난 것은 원진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누구든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심지어 친자식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윤혜인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진우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아직도 말 안 할 거냐?”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이 말과 함께 윤혜인의 몸 반쯤이 창밖으로 나갔다.“멈춰!”갑자기 아래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윤혜인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경천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빠가... 오빠가 드디어 왔어...’원진우가 서둘러 나왔던 탓에 데려온 네 명의 경호원은 이미 곽경천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 원진우도 곽경천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무슨 날인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군.”“이 미친놈! 내 여동생 당장 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곽경천이 외쳤다.원진우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곽경천을 겨누며 말했다.“뭐? 날 죽
이 향기는 그 남자에게서만 나는 것이었다.‘설마...’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윤혜인은 창가로 달려갔다.아래에는 한 남자가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 주변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그 외의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오빠...”윤혜인이 막 소리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좀 끌어 올려 주지 않을래?”윤혜인은 옆을 돌아보았다.이준혁이 두 손으로 교회 옆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눈을 두 번 깜빡여보았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이준혁이었다!조금 전 그가 원진우를 붙잡고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었다!윤혜인은 십여 미터 높이에 있는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옆에 있는 남자를 다시 바라봤다.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너무나 위험한 행동이었어. 미친 게 분명해...’그때 곽경천이 올라와 윤혜인을 밀어내고 이준혁을 십자가에서 끌어 올렸다.무사히 땅에 내려오자 곽경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행히 성공했군.”사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계획이었다.한 명은 아래에서 원진우의 주의를 끌고 다른 한 명은 위에서 습격을 가하려는 전략이었다.하지만 이 계획은 너무나도 위험했다.윤혜인이 말했다.“오빠, 엄마는...”하지만 윤혜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경천이 말을 잘랐다.“걱정 마. 엄마는 이미 찾았고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고 계셔. 곧 가서 뵐 수 있을 거야.”가장 위험하다 생각하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윤혜인은 윤아름을 차 근처 덤불 속에 숨겨 두었었다.그녀는 일부러 흔적을 남겨 원진우를 교회로 유인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이제 남은 건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곽경천 일행이 반드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이준혁까지 올 줄은 몰랐다.윤혜인의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바닥에 내던져진 지팡이를 보며 그 남자가 얼마나 다급해 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조금 전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이준혁은 윤혜인이 고통 속에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는 다급히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다.“혜인아, 혜인아...”윤혜인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눈앞에 서 있는 이준혁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를 꼭 끌어안았다.그러고는 흐느끼며 말했다.“준혁 씨,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남자는 윤혜인이 자신을 꼭 안고 있는 동안, 그녀를 더 단단히 안아주며 떨리는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괜찮아, 나 괜찮아...”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러 번 윤혜인을 달래며 이준혁은 그녀가 조금씩 진정되기를 기다렸다.하지만 그녀의 울먹임을 멈출 줄을 몰랐다.“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다음엔 절대 하지 마요...”그러자 이준혁은 그녀의 귀 옆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봐. 나 이렇게 멀쩡하잖아.”자신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이준혁의 태도에 윤혜인은 화가 났다.“다음에도 그런 일이 또 있게 된다면 나 진짜 준혁 씨랑 다시는 안 볼 거예요. 농담 아니에요!”이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 다음부터는 정말 신중하게 행동할게.”그러나 속으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너랑 관련된 일은 예외고.’이준혁은 윤혜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절대 침착할 수 없었다.그녀가 곁에 없으면 매 순간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으니 말이다.잠시 후,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혜인아, 나랑 함께할 생각 있어?”‘함께’라는 말이 마치 끝없는 힘을 지닌 주문처럼 들렸다.이 말을 다시 듣자 윤혜인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지기 시작했다.‘함께’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만이 아닌 고난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했다.돌아온 이후, 이준혁은 모든 고난을 혼자 견디며 윤혜인에게는 그 고난의 흔적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아니,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윤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준혁을 사랑하고 있었다.윤혜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게 준혁 씨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심장이 빨리 뛰는 것뿐일 수도 있죠. 병원에 가서 진찰이라도 받아보는 게...”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가볍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도 두 입술이 강렬하게 얽혀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바닥 난방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공기는 그들의 숨결을 더욱 뜨겁게 달궜고 공기 속에는 짙은 긴장감과 설렘이 가득 찼다.이준혁의 단단한 손이 윤혜인의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가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녀에게 다가섰다.처음에 입맞춤은 따뜻하고 차분했지만 점차 이준혁의 강한 의지가 실려 진하게 변해갔다.그에게 이끌려 정신을 놓아버린 윤혜인이 무의식적으로 가벼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윤혜인이 막 회복한 게 아니었다면 이준혁은 이 순간을 더 오래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그가 마침내 자신을 놓아주었을 때,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려 이준혁의 손에 의지해야 했다.붉게 물든 작은 얼굴이 물방울이 맺힌 복숭아처럼 빛났다.이준혁은 굳게 다물어진 입을 조금 풀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알겠어? 이건 단순히 심장이 빨리 뛰는 게 아니야.”그러고는 진지하게 덧붙였다.“난 너를 원해. 매 순간, 항상.”그러자 얼굴이 더 붉어진 채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또... 또 그 소리예요?”그녀는 수줍어하며 남자를 나무랐고 이준혁은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농담이 아니야. 비록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내 인생에서 너만이 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을 수 있어.”말을 마친 그는 다시 단단한 팔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빨갛게 달아오른 작은 얼굴이 이준혁의 어깨에 기대진 채 윤혜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고요한 침묵이 이어진 후, 이준혁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혜인아, 나는 수년간 너를 잃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살았어. 한 번, 또 한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혼란스러웠어. 네가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게 아니라 순수한 사랑을 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어젯밤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작은 몸으로 웅크리고 있던 네 모습이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돌아. 지금 네가 이렇게 멀쩡히 내 앞에 앉아 있는데도 난 여전히 두려워.”이준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에 섞인 떨림을 가라앉히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내가 너를 찾지 못했거나 늦게 도착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그 결말이 너무 두려워.”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정말 말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설령 네가 나를 가엾게 여긴다고 해도 괜찮아.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너와 아이들을 지켜줄 거야.”이제 와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는 것을 이준혁은 잘 알고 있었다.어제는 윤혜인에게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했던 그가, 지금은 그녀의 동정을 간절히 구하고 있으니 말이다.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는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었다.심지어 그 강한 자존심도 윤혜인의 앞에서는 망설임 없이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다.그는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혜인아, 이기적인 부탁인 건 알지만 너한테 부탁하고 싶어...”잠긴 듯한 이준혁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다시 나와 함께해주면 안 돼?”방 안에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윤혜인은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윤혜인은 생각했다.‘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내가 마음이 부족해 보였나? 그래서 자신감을 잃었나?’곧 윤혜인은 이준혁의 허리를 감싸며 손끝으로 그의 어깨뼈를 만졌다.뼈마디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깡마른 몸이었다.그곳에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싸우며 생긴 수많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이 사실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가슴은 미칠 듯이 아파왔다.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던 남자는 천천히 그녀를 꼭 붙잡았던 손을 풀었다.그러고는 숨을 가다듬으며 가능한 침착한
이준혁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윤혜인이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살짝 얹으며 막았다.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예전에 내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고 준혁 씨를 거듭 거절했던 건 어쩌면 본능적인 자기방어였던 것 같아요.”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더 일찍 깨달았다면 덜 상처받을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차분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말했다.“난 준혁 씨랑 함께하고 싶어요.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요.”“이건 동정이 아니에요. 그저... 내가 준혁 씨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그러자 이준혁은 윤혜인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녀를 자신의 몸에 깊이 새겨버리겠다는 듯이 강한 포옹이었다.윤혜인이 실제로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이준혁은 그녀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이 세상에 방법이 있다면 내 마음속을 보여주고 싶어. 그 안은 온통 너로 가득 차 있고 너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야.”이 말과 함께 그는 진심이 담긴 입맞춤을 그녀에게 전했다.이번 입맞춤은 서두르지 않았고 완벽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그 안에는 끝없는 갈망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입술과 혀가 얽히고 서로의 숨결이 섞이며 공기는 더욱 짙어졌다.다리가 아직 불편했기에 이준혁은 윤혜인과 함께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이어갔다.곧이어 이준혁이 윤혜인의 환자복을 풀려는 순간, 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막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흉터가 있어서 보기 흉해요.”윤혜인은 제왕절개로 출산했다.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흉터가 남지 않을 수는 없었다.게다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라, 의사에게 문의해보니 흉터 연고를 최소 반년 이상 사용해야 눈에 띄는 효과가
꿈같던 시간이 지나고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혜인아, 사실 내 다리가 완치 불가능한 건 아니야.”잠시 멍하니 이준혁을 바라보던 윤혜인의 귀에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훈이가 이미 나를 위해 인공관절 치환 수술을 준비해 줬어. 그리고 그 성공률도 이미 검증된 상태야.”“뭐라고요? 진짜예요?”윤혜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진짜야. 일주일 전에 수술 계획을 확정했어. 봄이 오면 바로 수술할 수 있을 거야.”“일주일 전이요?”윤혜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며 물었다.“그럼 주 비서님은 알고 있었어요?”이준혁은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알고 있었어.”“그런데도 나한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결정적인 순간, 윤혜인은 일부러 더욱 과장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주 비서한테는 내가 벌을 줄 거야.”이준혁이 태연하게 말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를 탄페니아로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데에는 주훈의 역할이 컸음을 그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만약 윤혜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자신의 감정을 계속 숨겼더라면 이준혁은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또다시 그녀를 놓쳤을 것이다.“됐어요...”윤혜인은 주훈의 선의도 이해했다. 어쩌면 주훈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관계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자존심을 중시하는 두 사람이 함께하려면 외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벌하지 말고 나 대신 고맙다고 전해줘요.”윤혜인이 조용히 말했다.소중한 시간을 다행히 이제는 더 이상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만족해했다.“준혁 씨.”“응?”“내 손 꽉 잡아요. 이제 더는 놓으면 안 돼요?”“응. 이번에는 평생 놓지 않을게.”그렇게 며칠 동안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함께 다녔다.매번 윤아름을 만나고 돌아와 병실에 있을 때면 지독히도 붙어있었다.이준혁은 병실 한쪽을 아예 사무실로 만들, 윤혜인이 쉬는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