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건물 아래에는 무장을 한 특수 요원들이 가득 서서 그들을 막아섰다.“이곳은 출입이 불가능합니다!”W는 혼혈아로 성격이 매우 불같아 바로 검은 옷을 입은 특수 요원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훈이 재빨리 W를 붙잡아 막았다.“경거망동하지 마!”주훈이 W를 꾸짖었다. 이곳 한국에서 그는 W가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도록 반드시 신경 써야 했다.“안녕하세요.”주훈은 명함을 내밀며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말했다.“저희 대표님이 안에 계십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죄송합니다. 공무 수행 중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즉시 철수하십시오.”W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주훈이 그를 강제로 끌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건물에서 멀지 않은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초조해진 W가 물었다.“무슨 상황이야?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지?”주훈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가 특수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질서 있게 대피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곧바로 정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 주세요.”주훈은 전화를 끊지 않고 그쪽의 답변을 기다렸다.5분 후, 정보센터에서 답이 왔다.“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 다량의 폭탄이 설치된 것 같아요.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피해야 한다고 합니다.”주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누가 폭탄을 설치한 거죠?”상대편이 답했다.“찰스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찰스... 찰스...’주훈은 머릿속으로 이준혁의 최근 일정을 빠르게 훑어보았다.그리고 갑자기 비 내리던 밤에 이준혁의 팔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문득 깨달은 듯 소리쳤다.“20일 전에 북안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 줘요!”상대편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략 10분쯤 지나자 타이핑 소리가 멈췄고 정보센터가 답했다.“20일 전에 발
이선 그룹 정보부의 해석에 따르면 그때 사용된 폭탄은 찰스 일가가 계획한 것이었다.그리고 에단 찰스의 추적 명단에는 윤혜인이 올라가 있었다.당시 그는 차량에 탑재된 블루투스 기능으로, 기술 조사 결과 실제로 서울에 오지 않았고 원격으로 명령하며 마치 게임을 하듯 사건을 조종하고 있었다.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에단 찰스는 몇 년 동안 한국에 오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주훈은 에단 찰스가 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 갑자기 나타난 것과 폭탄 사건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고 심지어 이 사건이 이준혁의 목적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정보센터는 이어서 말했다.“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그래요. 말해봐요.”“그 애첩이 서울에 와서 죽었다는 겁니다.”주훈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 사람은 왜 서울에 왔죠?”“그 애첩의 할머니가 1/4 한국 혈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할머니가 고향을 방문하면서 그 여자도 함께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이 말에 주훈은 더욱더 이마를 찌푸렸다.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졌다.애첩의 죽음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었고 목적은 에단 찰스의 복수를 유도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설마 대표님께서? 대표님께서 이렇게까지 한 목적은 뭐지?’그러다 주훈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아마 찰스 가문의 추적 명단과 관련이 있을 거야...’주훈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W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에단 찰스의 총애를 받던 그 여자, 나도 알아.”주훈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네가 어떻게 알지?”“잊었어? 우리 할아버지는 북안도 출신이고 아빠는 한국으로 이주해서 엄마를 만났잖아.”W는 가족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편이었기에 주훈은 짜증이 난 듯 말했다. “중요한 부분만 말해.”그러자 W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북안도에서 찰스 가문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알 거야. 에단 찰스가 그 여자를 유독 아낀 이유는 그녀가 에단 찰스와 똑같이 잔인하고 냉혈한 성격을
“이제 모든 게 끝났어.”원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준혁아, 도대체 무슨 뜻이야...”이준혁은 갑자기 마음을 열고 설명하기 시작했다.“왜 내가 이 결혼식을 반드시 해야 했는지 알아? 네 오래된 친구를 불러오기 위해서야.”원지민은 점점 더 두려워졌다.“오래된 친구? 무슨 소리야.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이준혁은 힌트를 주듯 말했다.“5년 전 혜인이가 다리에서 떨어졌을 때, 너와 함께 일했던 그 친구 말이야.”그 순간, 원지민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준혁이가 알고 있는 거였어!’“네가 말하는 그 사람은 설마...”하마터면 이름을 말할 뻔했지만 즉시 입을 다물었다.원지민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결코 인정해서는 안 됐다.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준혁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그러나 증거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5년이 지난 일인데 에단 찰스가 목숨을 걸고 증언해 줄 리는 없지 않은가.‘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거야.’그때 대부분의 일은 임호가 처리했지만 원지민이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에단 찰스와 접촉한 것이었다.에단 찰스 같은 사람은 소위 잔챙이들과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그가 일을 맡는 이유는 오로지 자극을 즐기기 때문이었다. 하여 고용주가 직접 자신에게 찾아와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요구했다.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일을 맡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용주를 역으로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그래서 에단 찰스를 만나는 일은 매우 위험했다.하지만 원지민의 삼촌과 찰스 가문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원진우의 이름을 대고 나서야 에단 찰스는 원지민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그녀는 이야기를 하러 갔다.그녀는 에단 찰스가 거짓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비밀 연
이준혁의 차가운 비웃음이 귀에 닿는 순간, 원지민은 마치 커다란 벼락에 맞은 것 같았다.‘어떻게 나를 지켜본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거지?’모든 일을 비밀스럽게 처리했지만 이준혁은 원지민의 문제를 깨닫고 난 후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그는 윤혜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상황을 하나씩 드러내며 칠판에 정리했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모든 인물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한 후 그가 마주한 것은 원지민의 집요하고 무서우며 어두운 본모습이었다.그 순간 이준혁은 원지민이 한숨이라도 붙어 있는 한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윤혜인은 원지민에게 계속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원지민이 임호라는 희생양을 세운 탓에 그녀는 아마도 손쉽게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준혁은 원지민이 원했던 결혼식을 계획한 것이었다.조금 전까지도 이준혁은 원지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그녀가 사실을 고백하고 서울에서 자수하기만 한다면 이준혁은 더 이상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을 것이었다.하지만 원지민은 죽어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짧은 몇 분 동안 원지민의 마음속에는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지금 넌 날 모함하고 있는 거야!”원지민은 오랫동안 써온 가면을 벗지 않았다.‘난 절대 인정하지 않아!’그러나 이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며 차가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너는 이천수, 그리고 한구운과 결탁해서 아름이와 내 어머니를 납치했지. 그리고 차를 준비해 아름이와 어머니를 치려 했고 그 대사도 네가 시켜서 처리한 거야. 또 나와 혜인이의 첫 아이도 네가 부추긴 일이었어.”이준혁은 원지민을 문짝에 몰아붙이며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직설적으로 말했다.“원지민, 네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어.”“아아!”원지민은 비명을 질렀다.“넌 미쳤어...”그녀는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문손잡이를 돌리려 했지만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살의를 품은 이준혁의 눈이 원지민을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원지민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날 내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극을 찾아다니지 서울에 특별히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다.이준혁은 원지민에게 친절하게 말했다.“에단 찰스가 온 이유는 본인이 가장 총애하던 애첩이 죽었기 때문이야.”“애첩이 죽었다고? 그게 왜 여길 포위하는 이유가 되는 거지? 난 에단 찰스의 애첩을 죽인 적이 없는데...”원지민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두 눈에 공포가 가득 차 이준혁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설마... 네가 한 거야?”이준혁은 얇은 입술을 비틀며 냉소를 지었다. 그 침묵은 곧 인정과 같았다.사실 그가 한 일은 아니었다.찰스는 적이 많았고 그의 애첩은 오는 길에 원한을 가진 적들에게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서울에서 벌어진 일이 우연이었을 뿐이었지만 이준혁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해 에단 찰스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의 계획은 찰스를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이준혁은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에단 찰스가 살아 있는 한, 그는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애첩이 죽은 만큼 에단 찰스는 본인의 성격상 복수를 위해 상대방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었다.그래서 그는 곧바로 원지민과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꾸몄다.방황하던 그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소꿉친구가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깨달았고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그 후 매일같이 애정을 과시하며 국내외의 화제에 오르내리게 했다.이준혁은 에단 찰스가 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 도착하는 시점에 맞춰 특수 요원들에게 자신이 적극 협조해 에단 찰스를 잡을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이번만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찰스를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하지만 이준혁은 에단 찰스의 세력을 과소평가했다.그는 결혼식장 건물 안에 수많은 폭탄을 은밀하게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했다. 다행히 이준혁은 선견지명이 있어 찰스가 도착하기 전에 모든 사람을 비밀리에 대피시켰다.지금 이
원지민은 온몸에 힘이 빠져 벽에 기대며 중얼거렸다.“이준혁, 너는 완전히 미친놈이야!”“원지민, 이건 네가 치러야 할 대가야.”남자는 한 치의 연민도 없이 조롱했다.원지민은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느꼈다. 정말로 무너진 것이다. 모든 게 끝나버렸다.하지만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죽는다면 그렇게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이준혁, 네가 이긴 것 같아?”원지민은 냉소하며 말했다.“사실 넌 이기지 못했어. 넌 세상에 네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나라고 선언했잖아. 결국 널 사랑하던 그 여자는 깊이 상처받았을 거야!”이 말에 이준혁의 평온하던 얼굴이 급격히 차가워졌다.그의 얼굴은 살벌하게 굳어졌고 무자비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시간이 있다면 네가 곧 직면할 일이나 생각해.”그는 차갑게 말했다.“난 아무 상관 없어.”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떨던 원지민은 빠르게 태도를 바꾸었다. 그 변화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네가 나랑 함께라면 그렇게 두렵지 않을 것 같아. 죽는다고 해도 함께 죽으면 죽은 후에도 연인이 될 수 있잖아. 그거 괜찮지 않아?”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이준혁은 차갑게 말했다.“원지민, 누가 너를 죽게 한다고 했어?”그러자 원지민은 고개를 들어 이준혁을 바라보며 의문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었다.툭.그 순간, 하나의 주사기가 원지민 발치에 떨어졌다.이준혁은 말했다.“넌 살길을 시도해볼 수 있어.”하지만 원지민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물었다.“왜 나한테 이걸 주는...”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곧바로 알아차렸다.“이준혁, 네 의도는 날 죽이는 게 아니구나!”역시나 수많은 음모를 꾸민 여자인 만큼 그녀의 머리는 순식간에 돌아갔다.“내가 에단 찰스를 죽이게 만들고 그 후에 공포 속에서 내 남은 인생을 살게 하려는 거지? 하루하루가 찰스 가문에게 쫓기며 지옥 같은 삶을 살도록 만들려는 거야. 그렇지?”이준혁의 눈에 핏기가 서리며 살기 띤 빛이 스쳤다.“죽음을
이준혁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경악에 휩싸였다.“뭐라고 했어?!”원지민은 미친 듯한 표정으로 얼굴에 추악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네가 사랑하는 그 여자가 임신했어. 그리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네 아이일 거야...”그녀는 일부러 말을 끊으며 의미심장하게 남겼다.이미 이준혁이 원지민을 죽이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 이상 그녀도 가만히 머리를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차라리 끝까지 싸우고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후에 함께 망가져 버리는 편이 나았다.이준혁의 얼굴에 있던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는 한걸음에 원지민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원지민의 옷깃을 움켜쥐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무슨 뜻이야...”하지만 원지민은 미친 듯한 웃음을 지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그러자 이준혁은 더욱 미친 듯이 그녀를 흔들며 소리쳤다.“말해! 그건 어떻게 안 거야!”그러나 원지민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그저 섬뜩한 웃음소리만 낼 뿐이었다.“하하하하하...”마치 자신만 알고 있는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처럼 정말로 기뻐하는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원지민은 진정으로 기뻤다.그녀가 아는 바에 따르면 윤혜인은 한구운이 사람을 시켜 다시 끌어온 상태였다.어쩌면 모든 일이 이렇게 맞아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두려움보다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윤혜인이 이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원지민은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이준혁은 원지민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혼란스러웠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판단으로도 원지민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혜인이는 왜 임신했으면서 나에게 알리지 않았지?’하지만 이준혁은 이 기간 동안 원지민과 에단 찰스를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런 이유로 윤혜인이 말하지 않은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그가 알고 있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이준혁은 그저 윤혜인의 미래를 최대
“하!”이준혁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너 정말 내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거지? 그래야 에단 찰스가 오면 네가 혐의를 벗을 수 있으니까.”원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준혁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벌레 같았다. 그녀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냈으니 말이다.곧 이준혁은 손을 뻗었으나 원지민에게 닿지는 않았다.그러고는 마치 거리를 두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시늉만 하며 말했다.“원지민, 꿈도 꾸지 마. 내 아이와 혜인이, 그리고 내 어머니가 받은 상처가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원지민은 그 말에 온몸이 소름 돋았다. 마치 독이 있는 전갈이 그녀의 머리 위를 기어 다니며 언제든지 찌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너...”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창문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원지민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안으로 뛰어들었다.“짝짝짝!!!”큰 박수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그들의 앞에 선 사람은 바로 에단 찰스였다.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리고 비꼬듯이 말했다.“두 분 정말... 애정이 넘치네요!”그 순간, 공간은 마치 지옥으로 변한 듯 차갑고 끔찍한 공포로 가득 찼다.눈이 휘둥그레진 채 실 같은 공포에 원지민은 온몸이 칭칭 감겨있었다.“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요...”떨리는 목소리는 원지민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찰스 같은 피에 굶주린 광인을 마주하는 사람은 누구든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었다.이때, 이준혁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그는 원지민 앞에 서서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에단 찰스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당신 누구야?”그는 마치 최고의 남편인 척 애절하게 말했다.“이 사람 해치지 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한테 하라고.”“쿵쿵!!”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각각 이준혁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웁!”이준혁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
‘이건 협박이잖아. 전부 육경한이 이미 써먹고 남긴 수작일 뿐이지.’그는 사람과 협박을 주고받으며 말싸움으로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실질적인 상업 전쟁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말 몇 마디로 강한 척하며 겁을 주는 방식은 방현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역시나 방현수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지?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도 모자라 내 자식들까지 망하게 하겠다는 건가?”‘돌봐주긴 뭘!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육경한 이 녀석, 결국 내 자식과 손주들을 협박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성대하게 열어주겠다고? 파렴치한 놈, 칼로 사람의 가슴에 직접 찔러 넣는 것처럼 아픈 곳만 골라 찌르다니!’분노한 방현수는 가슴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이놈의 자식, 내가 못할 줄 알아? 내 나이에 이 늙은 뼈다귀가 뭘 더 아끼겠어? 네가 그 여자 때문에 친척이고 뭐고 다 끊겠다면 난 자네 미우 그룹 대문 앞에서 죽어버리겠어! 정말 나한테 망신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벌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정말 모든 사람들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하지만 육경한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번 해보시죠. 다만 그 뒤로는 대표님의 사생자들조차 돌볼 수 없게 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방현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가 알기로만 해도 서울에 세 명, 아르틴국과 리셀국에도 각각 있고 유학 중인 손주들도 세 명이 있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결혼하고 자식 낳는 걸 지켜보지도 못하고 떠나실 건가요?”그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아마 대표님께선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육경한이 자신의 속내를 샅샅이 조사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방현수는 말을 잃었다.심지어 사생자들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니, 육경한은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육경한! 자네 정말 그 미친 여자를 위해 우리 방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거야?”방현수는 분노에
육경한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다.방현수의 말은 듣는 사람을 우롱하는 태도로 육경한을 바보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오랜 시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단단히 단련된 육경한은 누구보다도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제가 대표님을 존경하는 건 사실입니다. 대표님은 저희보다 먼저 사업을 시작하셨고 경험도 풍부하시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시 대표님께서도 충분히 이익과 손실을 따져본 후 결정을 내리신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때 대표님께서 그 프로젝트를 받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제 죄책감을 조금 더 이용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프로젝트를 수락하신 순간, 저희 관계는 돈과 물건이 모두 깨끗이 정리된 상태가 된 겁니다. 방씨 가문이 그동안 가져간 이익은 투자 대비 몇 배, 아니 몇십 배나 됩니다. 지금 와서 이 일을 다시 꺼내 드시는 건 저로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 문제를 거론하신다면 저도 공공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할 겁니다. 상관없거든요.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육경한의 긴 발언은 방현수를 완전히 말문 막히게 만들었다.그는 육경한이 평소 강단 있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침착한 목소리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하지만 방현수도 노련한 사람이었다.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그는 표정을 비틀며 말을 꺼냈다.“육경한, 자네 말은 내가 잘못했다는 뜻인가? 내가 늙은 몸으로 직접 찾아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나온다니... 나더러 죽으라는 건가?”목소리가 떨리는 채로 방현수는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려쳤다.그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카드는 바로 죽음을 빌미로 하는 협박이었다.그는 자신의 나이를 무기로 삼아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방씨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방현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민기는 어찌 됐
육경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통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키가 큰 체구와 균형 잡힌 몸은 우뚝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서른 살이라는 남자의 가장 좋은 시기에 성숙함과 재력, 자신감까지 더해져 그의 매력은 한층 빛났다.그는 알고 있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또 하나의 배은망덕하다는 낙인이 찍힐 거라는 것을.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왜냐하면 방씨 가문을 등지는 또 다른 한쪽에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남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그의 곧은 자세와 당당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응접실 안에서 방현수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육 대표, 요즘은 당신 얼굴 보기가 이렇게나 힘들어졌네.”육경한은 그에게 다가가며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찾아오시니 미우 그룹으로서는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언제든 들러주시면 좋겠습니다.”방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여기 앉아 있는다고 해서 방씨 가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우리 방씨 가문에는 고작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는데... 둘 다 감옥에 들어갔어. 이봐, 육 대표.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육경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전 방씨 가문을 직접적으로 해칠 이유도, 의도도 없습니다.”하지만 방현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그 여자가 한 짓이나 네가 한 짓이나 뭐가 다르단 말이야? 자네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 여자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겠어? 자네는 그냥 작게라도 손을 써서 그 여자가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야 했어.”육경한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그 영상을 경찰에 넘길 거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이 말은 완
소원은 진아연의 방 한가운데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 사진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진이었다.게다가 사진 위에는 자신을 저주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이로써 소원은 선미가 진아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게 아니면 두 사람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고 원한도 없는데 왜 소원을 저주했겠는가?밖에서 집주인 아주머니는 계속 분노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던 중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아! 귀신이다! 아아아악!”소원은 놀라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비명 소리가 난 곳은 화장실이었다.화장실로 다가간 소원은 욕조 안에 누워 있는 선미를 발견했다.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선미의 손목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고 욕조의 물은 그녀의 입술 바로 아래까지 차 있었다.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물이 코까지 차올라 익사할 뻔한 상황이었다.그 끔찍한 장면은 누구라도 충격과 공포를 느낄 만큼 끔찍했다.하지만 소원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며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그리고 집주인 아주머니를 부축해 집 밖으로 나왔다.집 안은 발을 딛을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소원은 아주머니를 계단에 앉혔다.아주머니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셔츠의 단추를 풀어준 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소원은 진아연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어 숨을 확인했다.미약하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이 상황을 보며 소원은 진아연 스스로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대체 누구의 원한을 샀길래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걸까?’소원은 진아연을 미워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다룬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악인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과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경찰은 현장을 조사했고 진아연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소원과 집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차를 타고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했다.한편, 미우 그룹.
‘만약 현재가 날 모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앞쪽에서 택시 기사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소원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고 서현재와 관련된 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의문점이 드러나리라.택시에서 내린 소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선미가 살고 있는 곳은 고급스럽지 않은 낡은 아파트 단지였다. 건물은 오래된 데다 주변 환경도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영숙이 준 주소를 따라 1층에 있는 선미의 집을 찾은 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다시 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선미 출근한 거예요?”“아니야. 그 애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사흘째 안 나왔어.”영숙이 물었다.“거기 아무도 없니?”소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네, 조금 전부터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도 없어요.”“저 죽일 놈의 계집애 혹시 도망친 거 아냐?”영숙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나한테 1억 6000만 원 갚지 않았거든.”과거 선미가 저지른 사고로 생긴 빚의 일부는 방민기를 잘 구슬려 덜어냈다.방민기는 몸이 불편해도 마음은 따뜻했고 선미가 그의 취향을 잘 맞춰준 덕분에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었다.하지만 선미가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여권과 신분증이 모두 영숙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더욱이 선미의 성형미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만큼의 가치는 없었기에 그녀를 위해 헌신하려는 남자도 없었다.소원은 말했다.“그럼 제가 더 알아볼게요.”그녀는 선미의 직장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고 집 안에서도 전화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때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단으로 올라오다가 소원이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아가씨, 여기 사는 여자 찾으시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아줌마, 혹시 아세요?”“알죠. 여기 집도 내가 세 준 거니까요
소원이 집을 나선 후,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영숙에게 연락해 선미의 거처를 물었다.주소를 받은 소원은 택시를 타고 선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차 안에서 소원은 내내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것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기 때문이다.사실 처음에는 소진용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소진용은 늘 강인한 사람이었다.한이 그룹이 그동안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겪었지만 소진용은 늘 이를 버텨냈었다.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한 번은 큰 실수가 발생해 회사가 파산하고 수십억대의 빚을 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그때 아버지는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었다.“걱정하지 마라.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일 뿐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있잖아. 파산하면 어때? 천천히 갚으면 되고 집을 팔고 전세로 가도 괜찮아. 결국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결국 그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었고 소진용의 뛰어난 스트레스 대처 능력과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큰 힘이 되었다.그런 소진용이 왜 그때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소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파산과 청산을 맞닥뜨린다 해도 과거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게다가 그녀와 전미영에게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은 소진용답지 않은 행동이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문투성이였다.머리가 터질 듯 아픈 소원은 눈을 감고 천천히 진정하려고 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겠다고.잠시 후 소원은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차량이 멈춰 있는 순간, 옆 차선의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서현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소원은 깜짝 놀라 입을 열었지만 ‘현재야’하고 나지막한
“알겠어요, 언니. 꼭 그렇게 할게요.”강민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둘은 어느새 안상철의 집 근처까지 도착했다.이곳은 20년 넘게 재개발되지 않은 오래된 동네였다. 현재는 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만약 철거가 시작되고 나서 이곳에 왔다면 안상철의 집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안상철의 집은 매우 낡은 삼층짜리 오래된 건물 안에 있었다.소원은 3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과연 안상철이 여전히 여기 살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게다가 안상철이 정말로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었다.잠시 후 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나타났다.노인은 물었다.“누구를 찾으시는 겁니까?”소원은 노인을 알아보지 못했고 집 안을 둘러봤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르신, 혹시 여기가 안상철 아저씨 댁인가요?”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상철? 그런 사람 모르오.”소원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어르신, 이 집에 새로 이사 오셨나요?”그러나 노인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우리 집에는 나랑 아내밖에 없소.”소원은 다시 물었다.“그럼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노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곧 소원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어르신,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돈 달라는 거요? 돈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찾으시오.”그러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소원은 한숨을 쉬었다.“...”안상철은 이미 이사 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단서가 끊긴 것이다.강민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제가 나중에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안상철 가족의 출입국 기록을 한번 확인해볼게요.”하지만 강민혜는 팀장이 아니라 일반 경찰관이었기에 이런 일은 정식 절차를 거쳐야 했다.이번에는 주소를 얻은 후 바로 오긴 했지만 그녀
“찾을 수 있을 거예요.”소원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그건 예전에 안상철의 딸 덕분이었다.한 번은 그 아이가 병을 앓던 날, 폭우까지 내리던 날씨 속에서 안상철이 딸을 데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마침 그때 소지용이 안상철에게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걸었고 통화 중 안상철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소진용은 사정을 듣고 바로 차를 몰아 그 아이를 병원까지 데려다줬다.소원 역시 그때 차에 동승했으며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이를 돌봐줬던 기억이 있었다.“그럼 다행이네요.”강민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그녀는 당찬 성격으로 팀에서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소원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수줍음을 타는 모습이었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민혜 씨, 괜찮으면 저를 언니라고 불러요. 소원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게 들리잖아요.”강민혜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했다.“그럼 제가 소원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강민혜는 소원과 자신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소원은 명문가의 장녀였고 자신은 후원이 필요했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생활 방식부터 교육까지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하지만 다른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공적인 태도로 대할 수 있었던 그녀도 소원만큼은 다르게 느꼈다.직접 만나본 소원은 소진용처럼 정직하고 선하며 강한 사람이었다.소원 가족은 강민혜에게 은인이었고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민혜 씨 같은 동생 있었으면 참 좋았겠어요.”만약 동생이 있었다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렇게나 버거운 시간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더 안정적이었을 것이다.소원은 강민혜를 보며 어릴 적 부모님이 동생을 낳으셨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난 아기가 떠올랐다.그 사건으로 온 가족이 한동안 큰 슬픔에 잠겼었다.비록 아무도 그 아기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잊지 못하
“알겠어요, 여보.”윤혜인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아, 그리고 다음 주에 센디오로 출장 가야 해.”윤혜인은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비록 이씨 집안은 재력이 풍부했지만 윤혜인은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산후 우울증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이다.일은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다행히 이준혁은 그녀의 복직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다른 남편들처럼 집이 넉넉하니 아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며 남편을 보살피라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윤혜인의 복직을 먼저 제안한 사람도 이준혁이었다.그는 그녀의 감정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말했다.“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일하러 나가도 돼.”윤혜인은 그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다음 주?”이준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일정 조정해서 데려다줄게.”“괜찮아요. 당신 일도 중요한데요.”윤혜인은 남편이 자신의 일을 제쳐 두는 게 부담스러웠다.“걱정 마. 잘 조정할 테니까. 내 아내만큼 중요한 건 없어.”이 말에 윤혜인의 가슴은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알겠어요. 내 일도 이틀 정도 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 이번 기회에 휴가처럼 보내요.”아이가 생긴 이후로 둘이 함께 여행을 간 건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게다가 집에는 문현미와 홍승희를 비롯한 여러 도우미들이 있어 아이들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좋아. 벌써 기대돼.”이준혁은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여보, 지난번에 내가 사준 그 잠옷 가져갈 수 있어?”“그거요?”윤혜인의 얼굴이 빨개졌다.그 잠옷은 일종의 코스튬 같은 옷이었다.그녀가 과거 이선 그룹에서 이준혁의 비서로 일했을 때 입던 정장을 변형한 스타일이었다.하지만 원래 정장보다 훨씬 노출이 심했고 필요한 부분이 다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응. 난 당신이 그거 입은 모습이 너무 좋아.”그는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그 잠옷을 입은 윤혜인을 보면 그는 스스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