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이준혁은 비웃듯이 말했다. “사랑이라니, 그건 네가 스스로 만든 핑계일 뿐이야. 넌 내가 너에게 굴복하길 원했지. 오랜 시간 동안 쏟아부은 것 때문에 이제는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 후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사랑이라는 그 위대한 단어로 네 악행을 덮으려 했고.”“원지민, 넌 정말 역겨워.”이준혁은 짧은 한마디로 자신의 감정을 끝맺었다.그 말은 그가 원지민을 진심으로 역겨워한다는 것을 분명히 표현했다.눈빛에는 다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깊은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그 광경은 원지민에게 마치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준혁아!”이준혁의 칠흑 같은 눈동자는 차가운 독기마저 띠고 있었다.“내 이름 부르지 마. 너는 자격이 없어.”그가 한 자 한 자 내뱉은 말은 마치 고추 물을 묻힌 칼날처럼 원지민의 얼굴을 베어냈다.‘역겨워... 자격이 없어...’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자 원지민은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고 하얗게 질렸다.격한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야 원지민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그리고 이제는 어떤 가식도 없는 진짜 본모습을 드러냈다.“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결혼한 걸 알고 있어. 네가 사랑하는 여자는 이미 너를 떠났어. 내가 없으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녀는 비웃듯이 크게 웃었다.“이준혁, 그렇게 잘난 척해봤자 결국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잖아. 넌 절대 내 곁을 떠날 수 없어.”점점 광기에 휩싸인 원지민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난 내가 원하는 건 절대 놓치지 않아. 너도 예외는 아니야!”그러자 이준혁은 차갑게 말했다.“보아하니 널 과대평가했군. 넌 후회할 줄 모르니 말이야.”원지민은 더욱더 자랑스럽게 웃어댔다.“내가 왜 후회해야 하지? 나는 절대 지지 않아!”후회는 약자들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
이준혁의 눈빛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너무 늦었어.”“넌 미쳤어!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원지민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넌 아직도 내가 너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는 거야? 내가 죽으면 너도 살아남을 수 없어!”“당연히 믿지.”이준혁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깊고 검은 눈빛에서 모든 걸 꿰뚫는 듯한 빛을 내뿜었다.“네가 날 구할 수 있다는 건 맞아. 하지만 그게 내가 생각할 능력조차 없이 침대에 누워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꼴로 살아남는 거라면 말이야.”원지민은 그 말에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굳어졌다.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원지민이 가지고 있는 약이 이준혁을 살려낼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그가 생각 없는 시체처럼 누워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그것은 죽지는 않겠지만 살아있는 게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할 수 있는 삶이었다.이천수와 한구운이 완전히 제거된 후 지금 이 상황에서 이준혁은 이씨 집안의 유일한 친손자로서 어떤 상태로든 살아있는 것이 중요했다.비록 마비 상태가 되더라도 그 존재 자체로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그러면 원지민은 이준혁의 아내로서 이선 그룹의 업무에 개입할 수 있고 그 이익을 조금씩 자신의 손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순간적으로 상황이 변했음을 깨달은 원지민은 드러난 거짓말을 잠시 잊고 다시 모른 척하며 말했다.“준혁아, 내가 하는 모든 건 너를 위해서야. 이 약도 삼촌께 부탁해서 겨우 얻어낸 거라고. 삼촌이 이 약을 구하려다 얼마나 많은 용맹한 부하들을 잃었는지 알아?”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이 약은 북안도의 무녀 가문이 소유한 것이었다.무녀들은 북안도에서 특별한 존재였고 그들은 어떤 세력의 위협도 받지 않았다.이 조건은 섬에 처음 들어갈 때부터 협상이 끝난 것이었다.게다가 무녀 일족은 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자급자족을 숭상하며 외부의 화폐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그들만의 작은
“아!”김성훈은 돌면서 외쳤다.“고마워! 정말 고마워! 넌 내 여신이야!”그가 안고 도는 탓에 여 박사는 어지러워하며 소리쳤다.“김성훈! 나 토할 것 같아! 빨리 내려놔!”“미안, 미안...”김성훈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두 손을 꼭 잡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정말 고마워. 네 노력 덕분에 돌파구를 찾은 거야. 내 친구... 이제 살 수 있게 됐어!”그들은 매일 4시간밖에 자지 않고 각종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며 실험실에 갇혀 지냈다.한 달 동안 실험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끝에 마침내 치명적인 주사제의 성분을 밝혀냈다.처음 이 독액을 연구한 유전자 전문가는 이 주사제가 해독할 수 없다고 했지만 성분이 밝혀진 이상 이제 해답이 없는 건 아니었다.여 박사는 그에게 말했다.“가장 시급한 건 네 친구에게 다른 주사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거야. 그래야만 목숨을 구할 수 있어.”“맞아, 맞아! 지금 바로 전화할게.”김성훈은 즉시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핸드폰이 꺼져있었다.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꺼져있었다.당황한 김성훈은 주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연결되었다.“주 비서님, 지금 어디에 있죠? 준혁이는요? 핸드폰이 왜 꺼져있죠?”“김 대표님, 이 대표님은 지금 결혼식장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 결혼식장 밖에 있어요.”“...결혼식장?”김성훈은 실험실에 오래 틀어박혀 있었기에 그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그렇습니다.”주훈은 설명했다.“오늘이 대표님과 원지민 씨의 결혼식입니다.”“뭐라고요?!”김성훈은 충격을 받았다.“준혁이가 원지민과 결혼을 한다고요?”“네, 그렇습니다.”주훈이 대답했다.“막아요! 빨리 막아요! 준혁이는 절대 원지민과 진심으로 결혼하려는 게 아니예요!”김성훈은 믿을 수 없었다.그가 아는 이준혁이라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었다. 설령 세상이 뒤집혀도 그는 원지민을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주훈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건물 아래에는 무장을 한 특수 요원들이 가득 서서 그들을 막아섰다.“이곳은 출입이 불가능합니다!”W는 혼혈아로 성격이 매우 불같아 바로 검은 옷을 입은 특수 요원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훈이 재빨리 W를 붙잡아 막았다.“경거망동하지 마!”주훈이 W를 꾸짖었다. 이곳 한국에서 그는 W가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도록 반드시 신경 써야 했다.“안녕하세요.”주훈은 명함을 내밀며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말했다.“저희 대표님이 안에 계십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죄송합니다. 공무 수행 중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즉시 철수하십시오.”W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주훈이 그를 강제로 끌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건물에서 멀지 않은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초조해진 W가 물었다.“무슨 상황이야?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지?”주훈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가 특수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질서 있게 대피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곧바로 정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 주세요.”주훈은 전화를 끊지 않고 그쪽의 답변을 기다렸다.5분 후, 정보센터에서 답이 왔다.“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 다량의 폭탄이 설치된 것 같아요.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대피해야 한다고 합니다.”주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누가 폭탄을 설치한 거죠?”상대편이 답했다.“찰스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찰스... 찰스...’주훈은 머릿속으로 이준혁의 최근 일정을 빠르게 훑어보았다.그리고 갑자기 비 내리던 밤에 이준혁의 팔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문득 깨달은 듯 소리쳤다.“20일 전에 북안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 줘요!”상대편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략 10분쯤 지나자 타이핑 소리가 멈췄고 정보센터가 답했다.“20일 전에 발
이선 그룹 정보부의 해석에 따르면 그때 사용된 폭탄은 찰스 일가가 계획한 것이었다.그리고 에단 찰스의 추적 명단에는 윤혜인이 올라가 있었다.당시 그는 차량에 탑재된 블루투스 기능으로, 기술 조사 결과 실제로 서울에 오지 않았고 원격으로 명령하며 마치 게임을 하듯 사건을 조종하고 있었다.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에단 찰스는 몇 년 동안 한국에 오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주훈은 에단 찰스가 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 갑자기 나타난 것과 폭탄 사건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고 심지어 이 사건이 이준혁의 목적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정보센터는 이어서 말했다.“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그래요. 말해봐요.”“그 애첩이 서울에 와서 죽었다는 겁니다.”주훈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 사람은 왜 서울에 왔죠?”“그 애첩의 할머니가 1/4 한국 혈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할머니가 고향을 방문하면서 그 여자도 함께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이 말에 주훈은 더욱더 이마를 찌푸렸다.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졌다.애첩의 죽음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었고 목적은 에단 찰스의 복수를 유도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설마 대표님께서? 대표님께서 이렇게까지 한 목적은 뭐지?’그러다 주훈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아마 찰스 가문의 추적 명단과 관련이 있을 거야...’주훈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W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에단 찰스의 총애를 받던 그 여자, 나도 알아.”주훈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네가 어떻게 알지?”“잊었어? 우리 할아버지는 북안도 출신이고 아빠는 한국으로 이주해서 엄마를 만났잖아.”W는 가족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편이었기에 주훈은 짜증이 난 듯 말했다. “중요한 부분만 말해.”그러자 W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북안도에서 찰스 가문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알 거야. 에단 찰스가 그 여자를 유독 아낀 이유는 그녀가 에단 찰스와 똑같이 잔인하고 냉혈한 성격을
“이제 모든 게 끝났어.”원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준혁아, 도대체 무슨 뜻이야...”이준혁은 갑자기 마음을 열고 설명하기 시작했다.“왜 내가 이 결혼식을 반드시 해야 했는지 알아? 네 오래된 친구를 불러오기 위해서야.”원지민은 점점 더 두려워졌다.“오래된 친구? 무슨 소리야.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이준혁은 힌트를 주듯 말했다.“5년 전 혜인이가 다리에서 떨어졌을 때, 너와 함께 일했던 그 친구 말이야.”그 순간, 원지민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준혁이가 알고 있는 거였어!’“네가 말하는 그 사람은 설마...”하마터면 이름을 말할 뻔했지만 즉시 입을 다물었다.원지민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결코 인정해서는 안 됐다.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준혁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그러나 증거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5년이 지난 일인데 에단 찰스가 목숨을 걸고 증언해 줄 리는 없지 않은가.‘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거야.’그때 대부분의 일은 임호가 처리했지만 원지민이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에단 찰스와 접촉한 것이었다.에단 찰스 같은 사람은 소위 잔챙이들과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그가 일을 맡는 이유는 오로지 자극을 즐기기 때문이었다. 하여 고용주가 직접 자신에게 찾아와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요구했다.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일을 맡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용주를 역으로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그래서 에단 찰스를 만나는 일은 매우 위험했다.하지만 원지민의 삼촌과 찰스 가문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원진우의 이름을 대고 나서야 에단 찰스는 원지민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그녀는 이야기를 하러 갔다.그녀는 에단 찰스가 거짓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비밀 연
이준혁의 차가운 비웃음이 귀에 닿는 순간, 원지민은 마치 커다란 벼락에 맞은 것 같았다.‘어떻게 나를 지켜본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거지?’모든 일을 비밀스럽게 처리했지만 이준혁은 원지민의 문제를 깨닫고 난 후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그는 윤혜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상황을 하나씩 드러내며 칠판에 정리했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모든 인물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한 후 그가 마주한 것은 원지민의 집요하고 무서우며 어두운 본모습이었다.그 순간 이준혁은 원지민이 한숨이라도 붙어 있는 한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윤혜인은 원지민에게 계속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원지민이 임호라는 희생양을 세운 탓에 그녀는 아마도 손쉽게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준혁은 원지민이 원했던 결혼식을 계획한 것이었다.조금 전까지도 이준혁은 원지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그녀가 사실을 고백하고 서울에서 자수하기만 한다면 이준혁은 더 이상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을 것이었다.하지만 원지민은 죽어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짧은 몇 분 동안 원지민의 마음속에는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지금 넌 날 모함하고 있는 거야!”원지민은 오랫동안 써온 가면을 벗지 않았다.‘난 절대 인정하지 않아!’그러나 이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며 차가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너는 이천수, 그리고 한구운과 결탁해서 아름이와 내 어머니를 납치했지. 그리고 차를 준비해 아름이와 어머니를 치려 했고 그 대사도 네가 시켜서 처리한 거야. 또 나와 혜인이의 첫 아이도 네가 부추긴 일이었어.”이준혁은 원지민을 문짝에 몰아붙이며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직설적으로 말했다.“원지민, 네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어.”“아아!”원지민은 비명을 질렀다.“넌 미쳤어...”그녀는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문손잡이를 돌리려 했지만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살의를 품은 이준혁의 눈이 원지민을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원지민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날 내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극을 찾아다니지 서울에 특별히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다.이준혁은 원지민에게 친절하게 말했다.“에단 찰스가 온 이유는 본인이 가장 총애하던 애첩이 죽었기 때문이야.”“애첩이 죽었다고? 그게 왜 여길 포위하는 이유가 되는 거지? 난 에단 찰스의 애첩을 죽인 적이 없는데...”원지민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두 눈에 공포가 가득 차 이준혁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설마... 네가 한 거야?”이준혁은 얇은 입술을 비틀며 냉소를 지었다. 그 침묵은 곧 인정과 같았다.사실 그가 한 일은 아니었다.찰스는 적이 많았고 그의 애첩은 오는 길에 원한을 가진 적들에게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다.서울에서 벌어진 일이 우연이었을 뿐이었지만 이준혁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해 에단 찰스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의 계획은 찰스를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이준혁은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에단 찰스가 살아 있는 한, 그는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애첩이 죽은 만큼 에단 찰스는 본인의 성격상 복수를 위해 상대방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었다.그래서 그는 곧바로 원지민과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꾸몄다.방황하던 그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소꿉친구가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깨달았고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그 후 매일같이 애정을 과시하며 국내외의 화제에 오르내리게 했다.이준혁은 에단 찰스가 인터내셔널 호텔센터에 도착하는 시점에 맞춰 특수 요원들에게 자신이 적극 협조해 에단 찰스를 잡을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이번만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찰스를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하지만 이준혁은 에단 찰스의 세력을 과소평가했다.그는 결혼식장 건물 안에 수많은 폭탄을 은밀하게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했다. 다행히 이준혁은 선견지명이 있어 찰스가 도착하기 전에 모든 사람을 비밀리에 대피시켰다.지금 이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