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는 귀가 빨개지며 불안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이신우, 아버지가 없다고 네가 함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그렇다. 나타난 사람은 오랫동안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이신우였다.그는 젊었을 때 한 여자를 두고 이태수와 갈등을 빚은 후, 더 이상 이선 그룹의 일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하지만 이태수가 그를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태수는 그의 재능을 높이 사서 손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그러나 이신우는 사랑에 미쳐 있던 사람이었다.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남청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고 이태수는 그가 그 여자와 도망가려 한다고 오해해 이를 막으려 했다.그 결과 이신우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잃고 말았다. 그 순간이 그들의 인연을 영원히 끊어 놓았다.이후 이신우는 상처를 안고 먼 타지로 떠나 자신의 사업을 일구었고 이씨 집안과는 완전히 거리를 두었다.이태수도 자신의 생각이 있었다. 명씨 가문의 그 아이는 부모를 모두 잃고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그때 이신우는 겨우 18살에 불과했고 그런 아이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이태수는 그들의 관계를 강하게 반대하며 막았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신우가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을 때 두 사람의 인연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들은 다시는 이어질 수 없었다.이태수는 그 후로도 이신우에 대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많은 후회를 품고 있었다. 당시 이신우를 막지 말고 오히려 도와주었더라면,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결말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태수도 예상하지 못한 사실은 이신우가 사랑했던 그 여자, 윤아름이 바로 윤혜인의 친모라는 사실이었다.이준혁이 사랑한 여인과 이신우가 사랑한 여인이 같은 모녀 관계였던 것이다.이것이 이신우가 윤혜인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고 배려해 온 이유였다. 윤혜인의 눈 속에서 과거 그가 사랑했던 윤아름의
한구운은 자신과 이천수가 이미 공모하여 이씨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있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떨궜다.이제 그와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악명 높은 배신자들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었다.그는 충격에 휩싸여 이천수를 노려보며 물었다.“저 말들... 사실이에요?”이천수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 한구운을 바라보지 못했다.하지만 한구운은 그의 회피를 허락하지 않았다. 곧 한구운이 차분하지만 무겁게 말했다.“대답해요. 저들이 말하는 게 사실이냐고요.”이천수는 마치 누군가에게 뺨을 맞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대답할 수 없었던 그는 손가락으로 이신우를 가리키며 반박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분명 이씨 집안의 사람이야!”그는 매우 교묘하게도 화살을 이신우에게 돌렸다.“지금 이씨 집안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나를 공격하는 거지? 네 의도를 누가 모를 것 같아?”이천수는 참으로 영리했다.그는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대체로 재벌 가문에서는 비밀과 음모가 있기 마련이고 형제들 간의 경쟁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재산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에서는 서로의 민낯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천수는 이 논리를 이용해 사람들의 의심을 이신우에게 돌리고자 했다.게다가 이천수는 자신의 출생 비밀과 관련된 증거를 모두 없앴다.‘내가 조금만 조심한다면 누구도 내가 이씨 집안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어!’이러한 생각에 확신을 갖고 이천수는 한구운의 손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구운아, 나를 믿어라. 내가 널 반드시 이씨 집안의 상속자로 만들 거야. 넌 내 아들이고 이씨 집안의 진정한 사람이야!”하지만 한구운의 주먹은 점점 더 강하게 쥐어졌다.‘왜, 왜 또다시 난 속은 거지?’한구운은 분노에 휩싸인 채 결혼식장을 나가버렸다. 이천수의 처참한 외침은 그의 뒤에서 계속 이어졌지만 한구운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한구운의 눈빛은 이제 완전히 차가워졌다.처음에는 충격과 불
한구운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이천수는 그를 해외로 보내 최고의 치료를 받게 했다.그의 마음속에는 이준혁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고 만약 이준혁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아들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이준혁 덕분에 자신이 이태수의 신뢰를 받아 오늘날의 영광을 이룩할 수 있었음을 말이다.결국 이천수는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모습을 비추는 거울 속에서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이신우는 매서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네 신분을 증명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곧 이신우는 손뼉을 치자 한 비서가 상자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천수는 그 상자를 보자마자 경악했다.“이, 이건...”당황한 그가 두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어떻게 이런 일이!’이신우가 가져온 상자는 이태수가 금고에 숨겨둔 것과 똑같이 생겼던 것이었다.‘하지만 그 상자는 내가 이미 없애버리지 않았었나?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낯익지 않아?”이내 이신우는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그때 그건 가짜였어. 이게 진짜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천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이태수는 역시 노련한 인물이었다.죽기 직전, 그는 금고 속의 중요한 증거를 교묘히 바꿔치기해 두었고 진짜 증거는 이신우에게 넘겼던 것이다.이천수는 갑작스런 깨달음에 고개를 젖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태수, 당신이 살아있을 때 내가 얼마나 공손하게 존경을 표했는데... 끝까지 날 믿지 않고 이런 술수를 써왔군...”그는 하늘을 향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당신은 날 한 번도 믿지 않았던 건가?!”이신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아버지가 그 상자를 나에게 넘길 때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알아?”이태수가 남긴 말이 궁금해 이천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절대로 이걸 꺼내지 말라고 하셨지. 아주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이신우는 덧붙였다.“아버지는 너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네가 눈을
이천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감싸 안았다. 이준혁의 발차기가 거의 그의 무릎을 부서뜨릴 뻔했던 것이다.“이 자식...”하지만 이천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준혁은 한 장의 사진을 그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그 사진에는 강가에서 누군가가 자루를 강에 던지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이천수는 몸을 떨며 물었다.“너, 너 이걸 어디서...”이준혁은 차갑게 말했다.“이천수 씨, 당신이 주 집사님을 살해하도록 사주한 것에 대한 모든 증거를 경찰에 넘겼습니다.”경찰들이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그들은 경찰증을 보여주고 수갑을 꺼내 이천수의 손목에 채우기 시작했다.상황을 깨달은 이천수는 발악하듯 몸부림치며 소리쳤다.“이 자식, 네가 날 함정에 빠뜨린 거야! 이건 다 너 때문이야!”이준혁은 그에게 다가가 결정을 내리듯 낮게 말했다.“증거는 충분해요. 당신은 이제 바깥세상의 햇빛을 볼 수 없을 겁니다. 주 집사님께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할 거예요.”이천수는 미친 듯이 발악하며 소리쳤다.“난 안 가! 아무도 날 쓰러뜨릴 수 없어! 네가 뭔데 감히...”그러자 이준혁은 조소를 지으며 속삭였다.“지하에 내려가면 할아버지께 절 많이 해요. 그리고... 내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에게도.”“아이...”이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뭘 알아낸 거야?”이준혁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었다.“당시 송소미가 혜인이를 납치해 우리 아이를 유산하게 만든 일, 당신과 원지민도 연루되었죠?”이 말에 이천수는 한 걸음 비틀거렸다. 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토록 비밀스럽고 오래된 일이 어떻게 이준혁의 손에 넘어갔을까 매우 의문스러웠다.이준혁은 흥미로운 듯 무심하게 말했다.“당신을 도와 일을 처리했던 비서를 찾아냈거든요.”그러자 이천수는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 비서는 이미 차 사고로 죽었는데!”이준혁은 설명했다.“그 비서 사실 죽지 않았어요. 당신이 자기를 제거할까 봐 죽은 척 한 거지. 그 사람은 살아서 당신 손아
이천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충격에 빠졌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그동안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칭송받던 천재가 얼마나 무서운 면모를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그가 한때 ‘아들’이라 부르던 이준혁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정말로 이준혁은 이천수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그는 수십 년 동안 이씨 집안에 몸담았지만 이방인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아무리 그가 모범적인 사람처럼 행동하고 귀한 옷을 입어도 본질적으로 여전히 임산이었다.그것이 이천수가 이선 그룹을 빼앗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이유였다.그는 한구운에게 자신이 이씨 집안의 진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한구운이 이씨 집안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냈다.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이준혁, 넌 정말 길러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구나!”이준혁은 차갑게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자신이 저지른 악행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데. 앞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고통은 인과응보일 뿐입니다.”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이천수 씨, 당신의 인생은 이제 끝났어요. 당신이 애지중지하던 아들도 절대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 테니 두고 봐요.”그러자 입술이 시퍼렇게 변하며 이천수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너... 너 정말 독한 놈이구나!”“남의 목숨을 함부로 짓밟을 땐 그렇게 당당하더니 내가 반격하니까 독하다고요? 난 단지 정의를 되돌리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저지른 짓의 1%도 되지 않아요.”분노에 찬 이천수가 고함을 질렀다.“너한테 남은 길은 이제 없어.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데? 내가 널 키웠는데 이선 그룹을 나한테 넘길 바에는 남한테 넘기겠다는 거야?”그는 자신이 엄청난 비밀을 폭로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놀라지 않은 채 오히려 평온한 태도로 대답했다.“작은아버지가 돌아
“누가 먼저 죽나 어디 한번 보자고!”이천수는 이준혁에게 독설을 남기고 두 명의 경찰에게 끌려나갔다.이천수가 떠난 후, 현장은 다시 조용해졌다.이준혁은 무대로 돌아와서 바로 선언했다.“죄송합니다, 여러분. 예상치 못한 일로 모두의 기분을 망쳤습니다.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호텔 연회장으로 이동해 식사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사람들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후에 결혼식을 계속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어차피 결혼이라는 건 혼인신고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결혼식은 치르든 말든 상관없었다.이번 소동을 통해 이준혁의 존재감은 더 확고해졌고 누구도 그를 쉽게 흔들 수 없게 되었다.사람들은 이준혁에 관한 가십거리를 감히 더 두고 지켜볼 수 없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곧이어 직원들이 손님들을 안내해 모두 퇴장시켰고 현장은 다시금 고요해졌다.그 자리에는 원지민만 남아 어리둥절해 했다.왜 결혼식에 온 손님들이 전부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직 반지 교환도 하지 않았고 어떤 절차도 진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준혁은 코사지도 꽂지 않은 상태였다.원지민은 이 상황에 관해 묻고 싶었으나 이신우가 이준혁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마음속 불안감과 상상의 나래는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귀를 기울이며 이준혁과 이신우가 무슨 말을 나누는지 듣고 싶어 했지만 너무 멀어서 그들의 대화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이신우는 이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음에는 뭘 할 생각이야?”“저녁 연회는 삼촌이 신경 안 써도 돼요. 나가셔서 손님들을 안심시키고 전부 안전한 통로로 옮겨서 다른 건물로 대피시키세요.”이신우는 떠나기를 거부하며 말했다.“그건 내 비서가 처리해줄 거야. 뭘 하려든 내가 함께하마.”“삼촌, 우리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요.”이준혁은 미소를 지으며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다.“삼촌은 밖에 계셔야 해요. 만약을 대비해서 뒷수습을 해 주셔야 하니까요.”이신우는 오랜 침묵 끝에 속에 담긴 우려를 드러냈다.“사실 나는 네
이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원지민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원지민은 속으로 불안했지만 애써 자신을 달래며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왔는데... 준혁이가 나한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이미 온 세상에 우리 둘이 결혼한다고 알렸는데 날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까 그 일 때문에 불길하다고 생각해서 결혼식 장소를 옮기는 거지? 그럼 난 축하주를 바꿔야 하나?”이준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말했다. “필요 없어.”얼굴이 굳어졌지만 원지민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준혁아, 아까 사람이 많아서 설명할 틈이 없었는데 청첩장 일은 사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사람들이 나한테 강요한 거야!”눈물을 참는 듯 그녀는 눈가를 가리며 이준혁의 반응을 살폈다.속으로는 한구운을 원망하며 욕하고 있으면서 말이다.결국 그는 이씨 집안의 사람도 아니었고 이천수의 유일한 자식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다.‘그날 그렇게 뻔뻔하게 말할 때 난 왜 한구운의 말을 믿었지?’ 이천수와 한구운은 이씨 집안의 사람들과는 달랐다.이씨 집안의 사람들은 당당하고 정직했지만 이천수와 한구운은 그렇지 않았다.원지민은 자신이 그동안 눈이 멀었다고 자책하면서도 다행히 자신이 한 행동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다는 점에 위안을 삼았다.“준혁아...”그녀는 이준혁이 여전히 반응이 없자 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한구운이 나한테 찾아와서 준혁이 네가 이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고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청첩장을 준 거야. 준혁이 네 명성을 지키려고 한 거였어.” 그 변명은 말도 안 되는 구멍투성이였지만 지금 원지민은 더 나은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준혁은 살고 싶다면 그녀의 말에 따라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녀는 그에게 핑계를 대주면서 스스로도 숨통을 틔웠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원지민은 다시 한 번 덧붙였다.“정말로 그 사람들이 이렇게 소동을 일으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이준혁은 비웃듯이 말했다. “사랑이라니, 그건 네가 스스로 만든 핑계일 뿐이야. 넌 내가 너에게 굴복하길 원했지. 오랜 시간 동안 쏟아부은 것 때문에 이제는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 후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사랑이라는 그 위대한 단어로 네 악행을 덮으려 했고.”“원지민, 넌 정말 역겨워.”이준혁은 짧은 한마디로 자신의 감정을 끝맺었다.그 말은 그가 원지민을 진심으로 역겨워한다는 것을 분명히 표현했다.눈빛에는 다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깊은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그 광경은 원지민에게 마치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준혁아!”이준혁의 칠흑 같은 눈동자는 차가운 독기마저 띠고 있었다.“내 이름 부르지 마. 너는 자격이 없어.”그가 한 자 한 자 내뱉은 말은 마치 고추 물을 묻힌 칼날처럼 원지민의 얼굴을 베어냈다.‘역겨워... 자격이 없어...’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자 원지민은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고 하얗게 질렸다.격한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야 원지민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그리고 이제는 어떤 가식도 없는 진짜 본모습을 드러냈다.“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결혼한 걸 알고 있어. 네가 사랑하는 여자는 이미 너를 떠났어. 내가 없으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녀는 비웃듯이 크게 웃었다.“이준혁, 그렇게 잘난 척해봤자 결국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잖아. 넌 절대 내 곁을 떠날 수 없어.”점점 광기에 휩싸인 원지민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난 내가 원하는 건 절대 놓치지 않아. 너도 예외는 아니야!”그러자 이준혁은 차갑게 말했다.“보아하니 널 과대평가했군. 넌 후회할 줄 모르니 말이야.”원지민은 더욱더 자랑스럽게 웃어댔다.“내가 왜 후회해야 하지? 나는 절대 지지 않아!”후회는 약자들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