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자신은 입사해서 한 번도 ‘회장님댁 아가씨’ 노릇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다른 사람들이 다들 퇴근해도 자신은 남아서 야근을 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대했다. 그런데 이런 엔딩을 맞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회사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혼자 걸었다.한선우가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마트에 가서 간식거리와 식자재를 사서 그대로 컨피티움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니 지오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뛰어나왔다.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오를 내려다보았다.“인제 날 좋아해 주는 건 지오 밖에 없네.”지오가 ‘야옹~’하며 편안한 듯 눈을 감고 여름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지오가 웃었다.“멸치가 먹고 싶구나? 알았어, 해주지.”점심에 최하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은 지오와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소파에 앉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최하준은 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직 집이 환했다.여름은 소파에 앉아서 지오 입에 소시지를 넣어주고 있었다.“내가 없으니 애한테 그런 정크푸드를 먹이는 겁니까?”쌀쌀맞은 최하준의 시선이 테이블에 있는 각종 간식거리로 향했다. 감자 칩, 닭발, 닭꼬치, 쥐포⋯.지오의 입가에 뭔가 양념이 묻어있는 것도 같았다.“그냥 맛만 보여준 거예요. 아주 조금만.”여름이 소심하게 손가락으로 아주 작은 양을 재보이는 시늉을 했다.“지오가 너무 덤벼서 어쩔 수 없⋯.”“고양이가 뭘 압니까. 다 사람이 알아서 조절해 줘야지.”최하준은 화가 나서 테이블의 간식거리를 싹 치웠다.“앞으로 집에서 이런 정크푸드 금지입니다. 이런 냄새도 싫습니다.”여름은 속상했다. ‘세상에 간식 냄새 싫다는 사람이 다 있네.변태인가⋯.’그러나 여름은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당신 말이 맞네요, 쭌. 앞으로는 이런 거 안 먹을게요.”“거울이나 보시죠. 얼마나 가증스러운지⋯.”최하준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양이를 안고 안방으로 가버렸다.“배고프지 않아요? 국
“아아니, 수건을 당기면 어쩝니까!”눈앞의 광경에 당황한 여름은 얼른 눈을 가렸다. 그런데 손에 하얀 수건이 들려있는 게 아닌가!‘설마⋯⋯ 당황한 나머지 내가 수건을 잡아당겼나?’“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상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강여름 씨, 당신처럼 후안무치한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습니다.”여름은 울고 싶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러그에 걸려서 미끄러진 거라고요.”“저는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만. 핑계가 너무 빈약한 거 아닙니까?”최하준은 여름의 말을 믿지 않았다.여름은 자포자기한 듯 털어놓았다.“너무 퍼펙트한 바디를 보니까 뇌 정지가 와서 그만⋯.”최하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한다고!“그래서 지금 날 탓하는 겁니까?“아니, 그게 아니고요. 내가 아직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겁니까. 나가세요.”최하준의 태양혈이 벌떡거렸다. 최대한 화를 참는 중이었다.“아, 알겠어요. 나가요. 나가면 되잖아요.”여름이 허둥지둥 나가려고 했다.“잠깐!”뒤에서 짜증이 폭발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은 주고 가시죠.”손을 내려다보니 수건이 들려있었다.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여기 있습니다.”정신을 차리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와 수건을 최하준의 품에 안겼다.여름의 시선을 보고 최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정말 뻔뻔하다니까.’여름은 문을 ‘쾅’ 닫고 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귀까지 빨개졌던데 부끄러워 하는 건가?어쨌든 귀엽네.’그런 일을 겪고 나자 계속 거실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여름은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그러나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얼마나 있었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숨을 고르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자는 중이에요. 내일 얘기 해요.”“잔다면서 어떻게 대답합니까?”상대의 저음이 들렸다.“억지로 열기 전에 문 여시죠.”밀려드는 수치심에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다가
여름은 곧 집으로 올라가서 방에 있는 물건을 챙겨 나왔다.새벽 2시였다.한밤중에 친구를 깨울 수가 없어서 차를 끌고 근처의 5성급 호텔로 갔다.로비에서 여름은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직원은 곧 카드를 돌려줬다.“죄송합니다만 이 카드는 안 되네요.”당황한 여름은 곧 다른 카드를 꺼내 건넸다.몇 장을 내밀어 보았는데도 모두 쓸 수가 없었다.그제야 집에서 카드를 모두 정지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돈은 꽤 벌었지만 모두 착실히 어머니에게 드리고 있었다.그리고 평소에는 강 회장의 카드를 썼는데 그 카드가 모두 정지된 것이다. 이제 월급 통장에 연동된 현금카드밖에 남지 않았다.직원은 좀 퉁명스러워졌다.“고객님, 호텔에서 나가서 왼쪽으로 300m 정도 가시면 모텔이 있습니다.”여름은 화가 났다.“이 호텔은 사람을 이렇게 대하라고 교육받나요?”“사실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5성급 호텔은 비싸답니다.”여름은 분노했다. 이런 모욕은 처음 당했다.“돈 없다고 누가 그래요? 내가⋯.”여름은 현금 카드를 내밀다가 멈칫했다.이 호텔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라고 해도 40만원은 줘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직장도 없고 살 곳도 없는데 몇 푼 안 되는 돈을 다 써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그냥 그리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딱딱한 직원의 말이 돌아왔다.여름은 굴욕감에 목이 메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트렁크를 끌고 발길을 돌렸다. 모텔마다 만실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겨우 2만 원짜리 싸구려 모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여름은 누군가가 이런 모텔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 고등학교 동문 단톡방에 올린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한편, 최하준은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장이 직접 나와서 진찰을 했다.입술을 꾹 다물고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대충 결혼해 버린 것이 너무나 후회됐다.15분 뒤 응급 진료실 문이 열렸다.안에서 원장
최하준이 말했다.“그렇군요. 고양이는 임신하면 어떤 증상이 있는지, 어떻게 관리하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원장 선생님이 한참을 설명하더니 고양이 태교 수첩을 건네며 당부했다.“임신 기간에는 특히 영양에 신경 써 주십시오. 댁의 고양이는 워낙 약해서 유산될 수 있어요. 곁에서 잘 보살펴 주실 분이 필요합니다.”최하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양이를 기르는 건지 공주마마를 모시고 사는 건지⋯.’최하준은 곧 여름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번에 너무 심하게 대한 것 같았다.‘됐어, 집에 가서 이제부터 일단은 나가란 소리만 안 하면 되겠지, 뭐.”최하준은 컨피티움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불을 켰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작은방에 아무도 없었다. 걸려있던 옷도 모두 사라졌다.여름이 가버린 것이다.잔뜩 인상을 썼다.안겨있던 지오가 힘없이 ‘야옹~’ 하고 둘러보더니, 실망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짜증이 났다. ‘뭐, 잘됐네. 애초에 그런 여자랑 너무 얽히는 건 좋지 않았어. 이혼할 때도 깔끔하고⋯. 지오를 돌봐줄 이모님을 한 분 구해야겠다.’******오전 10시.여름이 몽롱한 채 소파에서 눈을 떴다.어젯밤 들어와 보니 침대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딱 봐도 시트를 갈지 않은 상태였다. 여름은 위생이 신경 쓰여 침대보다는 좀 나아 보이는 소파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세수를 하려는데 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얘, 남편하고 같이 사는 거 아니었니? 오밤중에 싸구려 모텔은 왜 갔어?“어떻게 알았어?”“고등학교 동창 단톡방에 올라왔던데?”윤서가 불쾌한 듯 말했다.“진가은 고것이 글쎄, 네가 그렇게 아가씨 노릇을 하더니 강여경이 돌아오자 집에서 쫓겨났다고 얼마나 뒷담화를 했는지 소문이 쫙 퍼졌어.”여름은 그저 ‘어~’하고 듣기만 했다.진가은도 동성의 명문가 출신이었다.그러나 매력적이고 성적까지 우수한 여름을 늘 질투했다. 그 때문에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가은이 이런 상황을 고소해 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넌 화도 안
채시아가 선글래스를 벗더니 비아냥 거리는 시선으로 여름을 쳐다보았다.“잘 됐네. 계속 이렇게 둘러대면서 살 수는 없지. 꼭 이렇게 직접 다 까발려야 되겠니? 정말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애네.” 그 얼굴을 보니 여름은 자신의 인생이 갑자기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한선우도 채시아도 오로지 자신이 상속녀라는 것만 보고 만났던 것이다.“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윤서가 분노했다.“예전에 진가은이 자기를 얼마나 괴롭혔는지도 잊고, 애초에 여름이가 곡을⋯.”“됐어, 옛날 얘기 그만해. 이제 나랑 쟤는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야.”채시아가 다급히 말을 끊었다. “임윤서, 세상에는 주변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이 있어. 멀리하는 게 좋아.”“시끄러워. 친구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도와주는 거지 버리는 게 아니야!”윤서가 소리 질렀다.“그냥 말 섞지 말자.”여름이 냉랭한 얼굴로 윤서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우리 밥 먹으러 온 거잖아, 가자.”세 사람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윤서가 여름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쟤 미친 거 아니니? 네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아니었으면 지금의 시아가 있었겠냐고? 진가은이 전에 얼마나 저를 괴롭혔는데, 같이 노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네.”여름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넌 화도 안 나니? 막 욕이 나오지 않아?”“욕하면 뭐가 달라지니?”여름은 쓸쓸하게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그냥 이게 내 현실이지. 낳아준 부모님도, 죽마고우로 자란 선우 오빠도 날 버렸어. 가족도, 애인도, 직업도 없는데 오죽하겠어.”그런 여름을 보고 있자니 윤서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화도 났다.“아빠가 그러시더라. 강여경 밑에서 일하려면 TH에 남고 아니면 나가라고.”여름이 서글프게 웃었다.“그러기 싫대서 쫓겨난 거야.”윤서가 위로했다.“됐어. 네 실력이면 어디서든 잘 될 거야.”그러고 있는데 직원이 두 사람을 막아 섰다.“실례합니다, 예약은 하셨나요?”“네, 네. 실장님하고 통화했어요.”윤서가
여름은 고개를 들어봤지만 끌려나가느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쏟아지는 햇살 아래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더블 쟈켓을 입은 남자는 사뭇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또렷한 콧날에 깊은 두 눈, 날렵한 눈썹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최하준⋯.이렇게 빨리 다시 그 남자를 만나게 될 줄 몰랐던 여름은 멍해졌다.게다가 이런 처참한 꼴로⋯.망했다. 이대로 끌려가 이혼을 당할 지도 모른다.옆에 있던 이지훈이 다가와 여름의 몰골을 가만히 보더니 바로 분위기를 파악했다.이전에 파티에서 본 적이 있었고, 여름이라면 동성 명문가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우수 인재였다.그런 여름이 이런 낭패한 꼴이라니 드문 광경이었다.이지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분은 혹시 자네의⋯.”최하준이 이지훈에게 경고의 눈짓을 보냈다.이지훈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여름아, 괜찮아?”이때 윤서가 종업원을 확 밀쳐내고 여름을 부축했다.“괜찮아.”여름이 괴로운 듯 최하준을 흘끗 보더니 대답했다.윤서는 그제야 최하준을 알아보았다. 잘생긴 것은 알았지만 대낮에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만한 미모였다.윤서뿐 아니라 진가은, 강여경, 채시아 세 사람의 시선도 그에게 향해 있었다. 이런 미모와 아우라는 처음이었다.대체 누구람?최하준은 꼼짝도 않고 서서 눈썹을 찌푸렸다. 검은 눈동자가 류 실장에게로 향했다.“여기선 고객을 이렇게 대접합니까?”류 실장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최하준을 알지는 못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동성 최고의 명문가 자제인 이지훈이 함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였다.류 실장이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 진가은이 생긋 웃으며 나섰다.“지훈 씨, 친구분이신가 봐요? 두 분이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내가 오늘 친구들이랑 밥을 먹으려고 예약을 했거든요. 그런데 임윤서랑 강여름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룸을 내놓으라는 거야⋯.”“진짜 뻔뻔하네, 우리가 예약한 걸 너희가 협박해서 빼앗은 거잖아?”윤서
최하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가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방금 이 분들처럼 나가시게 될 겁니다.”여름은 깜짝 놀랐다. 최하준을 보는 여름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 갔다.이렇게까지 편을 들어줄 줄 몰랐다. 갑자기 상대가 너무나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강여경과 친구들은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진가은이 버럭 화를 냈다.“당신이 뭔데? 우리가 누군지 알아?”최하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가은을 똑바로 쳐다봤다.이지훈은 웃음을 띠고 근처에 있던 종업원들을 둘러봤다.“이거 내가 직접 사장님께 전화를 해야 하나? 이분들 보내드리는데 힘들 좀 쓰시죠?”월인의 사장도 이지훈에게는 굽신거리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직원들은 즉시 달려들어 강여경과 친구들을 와락 끌고 나갔다.정성스럽게 차려 입은 세 사람은 곧 봉두난발이 되었다. 신발이 벗겨지기도 하고, 강여경은 스커트 자락이 찢어지기까지 했다.여름과 윤서는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류 실장은 두 사람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여름은 최하준을 흘끗 보았다. 최하준이 아무 말이 없자 여름이 입을 열었다.“저 두 분이 오지 않으셨으면 아마 쫓겨난 건 저희였겠지요. 용서 못 합니다. 직접 사장님께 말씀드리겠어요.”이지훈이 웃었다.“직접 찾아가실 것 없습니다. 제가 사장님에게 전화하겠습니다.”류 실장은 비참함에 힘이 쭉 빠졌다.윤서는 그저 통쾌할 뿐이었다. 이때 여름이 최하준의 곁에 서 있는 걸 보더니 가만히 기회를 노리다가 어깨로 툭 쳐버렸다.정신을 팔고 있던 여름은 졸지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최하준의 품으로 쓰러졌다.여름이 이렇게 가까이에 붙은 건 처음이었다. 은은하고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하준의 몸에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날 줄은 몰랐다. 성격과는 전혀 달랐다.그러나 최하준의 시선이 느껴지자 여름은 흠칫해서 빠져나오려고 허둥거렸다.“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됐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최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매운 걸 못 먹거든요.”“알지, 알지. 말 안 해도 내가 다 알지.”윤서가 깔깔거리며 여름의 손등을 도닥였다.친구까지 이렇게 놀리려 드니 여름은 울고 싶었다.내내 조용히 있던 최하준이 눈을 들어 맞은 편에 앉은 여자를 훑어봤다.오늘 여름은 핑크색 니트를 입고 나왔는데 네크라인까지는 우윳빛 피부였지만 목 위부터는 새빨갰다. 자그마한 귀도 끝까지 새빨개져 있었다.최하준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얼른 차를 한 모금 마셨다.윤서는 어이없어 하더니 스마트 폰을 들고 친구랑 통화하는 시늉을 했다.“월세 들어간다고? 그 아파트 괜찮은 것 같더라. 한 달에 15만 원이면 된대.”이지훈이 말했다.“15만원에 무슨 괜찮은 집을 구합니까? 왜요? 누가 집을 구합니까?”윤서가 한숨을 쉬었다.“우리 여름이요. 어쩌겠어요? 집에서 쫓겨나서 갈 데도 없는데, 돈도 없어서 어젯밤에는 모텔에서 잤다니까요. 창문도 없고, 시트는 세탁도 안 했지, 위험하게스리 보안도 엉망이더라고요.”여름은 가만히 차만 마셨다. ‘잘 한다, 내 친구. MSG 잔뜩 뿌려서 상황을 잘도 만들어내는구나.’최하준이 거의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살짝 인상을 썼다.이지훈이 원망하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어쩌자고 이렇게 연약한 와이프를 그런 데 재웠어? 너무 하는 거 아닌가?”여름이 MSG를 더 했다.“다 제 탓이에요. 지오에게 소시지를 먹여서 밤에 토했거든요. 쫓겨날 짓을 했어요. 아 참, 지오는 좀 어때요? 괘, 괜찮나요?”이지훈이 웃었다.“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지오는⋯.”“안 좋습니다.”최하준이 얼른 말끝을 잘랐다. “말로는 백날 사과해 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이지훈의 표정이 미묘했다. ‘히야, 이 친구 너무 하네. 제수씨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곧 여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오가 좋아져서 최하준의 분노가 가라앉아 자기편을 들어준 줄 알았던 것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