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가능성이 있어.’생각을 바꾸니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화이트 색상 롱 드레스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뜻밖에 최하준이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쭌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오늘 처음이었다.‘담배 피우는 모습도 멋지네. 잘생긴 남자는 뭘 해도 다 예뻐 보인다니까.”“쭌, 이 의상은 어때요?”여름이 최하준 곁으로 다가가서 살며시 소매를 잡아당겼다.아까보다 노출이 적어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청순한 요정 같은 모습이 오늘 밤 사람들 시선을 집중시킬 것이 뻔했다.최하준은 오늘 저녁 약속에 여름과 동행하고자 한 일을 후회했다.‘이 정도면 꽁꽁 숨겨둬야 할 판이로군.’“갑시다.”최하준이 담배를 끄고 앞장서서 걸어갔다.드레스가 길어서 들어 올리고 걷느라 여름의 걸음이 느렸다. 돌아보더니 최하준이 다가와 그대로 안아 올렸다. 여름은 저도 모르게 최하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날렵한 남자의 턱선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그 바람에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왔다.“쭌, 처음 입었던 파란색 드레스 말이에요… 노출이 심해서 신경 쓰였어요?” 여름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했다.최하준이 고개를 숙여 깊고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입에는 미소가 묻어 있었다.“혹시 낮술 했습니까? 아까부터 쭉 이상하네요.”여름이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물어 본 내가 바보지.’최하준은 차 문을 열어 뒷좌석에 여름을 던져 넣으며 역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답했다“명색이 내 와이프인데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웃음거리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여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다시는 말 거나 봐라.’차는 이지훈의 집 정원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 초대된 손님들이 무척 많았다. 고급 외제 차들이 즐비했다.TH그룹과 한주그룹 차는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아쉬움이 몰려왔다. ‘내가 외삼촌 팔짱을 끼고 있는 걸 보면 한선우가 아마 깜짝 놀라서 뒤집어질
“지훈이 동생 이지솔 씨.”애교 섞인 목소리에 당황하여 최하준이 급히 소개했다.“누구신지? 누군데 오빠를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거죠?”이지솔이 언짢은 투로 말했다.“아, 안녕하세요. 저는 최하준 씨 여자 친구 강여름이라고 해요. 들어보셨을 거예요. 제가 이름이 좀 알려져서…..”최하준은 여름의 과감한 연기에 만족스러워서 입꼬리가 올라갔다.이지솔은 눈을 크게 떴다.‘뭐 이렇게 낯짝이 두꺼운 여자가 다 있어?’“하하, 그러시구나. 몰라봐서 미안해요. TH그룹의 바로 그 강여름 씨? 시골에서 올라 온 동생한테 상속권 싹 다 뺏기고 쫓겨난 그분? 우리 하준 오빠가 언제 이렇게 눈이 낮아졌는지 믿기지 않네요.”한꺼번에 여러 대 펀치를 맞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솔리, 말조심해. 내 여자 친구야.”최하준이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이 여자는 오빠랑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이지솔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어디가 안 어울리죠? 딱 봐도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우리 애들도 아주 예쁠걸요.”여름이 지지 않고 응수했다.“흥, 머리도 유전이라던데.”이지솔이 입을 씰룩거리며 조롱했다.두 여자가 지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자 최하준은 골치가 아파졌다.“그만. 아직 할아버지께 인사도 못 드렸어. 너도 가봐야 하지 않아?”최하준은 이지솔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휙 몸을 돌려 여름을 데리고 연회장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걸어가는 내내 여름은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화가 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요즘 잘 먹고 잠도 잘 자더니 얼굴이 뽀얗게 살이 올랐군. 정말 사랑스러운걸.’최하준이 참지 못하고 여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애가 어린 데다 응석받이로 자라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뭐야, 이지솔 편들어 주는 것처럼 들리는데?’“안심하세요. 당신의 '솔리'에 대해서 더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이게 신경 쓰는 거 아니면 뭡니까?”최하준이 눈썹을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하준 오빠한테서 당장 떨어져. 오빠는 네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지솔이 도도한 태도로 공격했다.‘요것 봐라?’여름이 재미있다는 말투로 되물었다.“못 하겠다면? 우리 하준 씨는 너를 그쪽을 동생으로만 생각하던데?”“그런 거 상관없어. 하준 오빠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집안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성사가 되지 이건 뭐 말이 안 되게 기울잖아. 뭐, 설사 네가 오빠 옆에 있다 해도. 잠깐 놀다 금방 싫증 낼걸? 오빠네 집에서 가만둘 거 같아? 너 같은 거 뼈도 못 추리고 쫓겨날 거다!”이지솔은 악담을 퍼붓고는 거들먹거리며 휙 가버렸다.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신에게는 혼인증명서가 있지 않은가.연회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윤서와 만났다.“이게 바로 그거야. 내가 하준 씨 술 먹일 사람들을 좀 배치해 두긴 했는데, 만약 안 먹히면 이걸 써. 잊지 마. 두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나올 거야.”윤서가 여름의 손에 물건을 슬쩍 쥐여 주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았다.“혹시… 부작용이 생기는 건 아니지?”“안심해. 몸에 해로운 거 아니야. 절대로.”‘더 많이 더 오래 흥분하게 만들 뿐이지.’그러나 윤서는 뒷말을 속으로만 담아두고 입 밖에 내지 않았다.“나중에 알게 되면 화낼 텐데?”여름은 계속 꺼림칙했다. “화가 왜 나? 아침에 눈 떴는데 너처럼 예쁜 여자가 옆에 누워있으면 왜 화가 나겠어? 아마 더 좋아할걸? 최하준도 남자야!”윤서의 말에 마음이 동요했다.잠시 후, 최하준이 돌아왔다.그러나 연회장 입구에서 낯선 남자에게 붙잡혔다.“최하준 선생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제가 한 잔 드려도 될까요?”“많이 드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전부터 이런 사람들이 많아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제 손이 부끄럽네요. 딱 한 잔만 받아주세요.”“비키시죠!” 최하준이 참다 못해 뿌리치고 지나쳤다. 눈빛은
망설이던 최하준이 고개를 숙이고 여름이 내민 음식을 받아먹었다.“아~아.”“…….”여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손이 없나? 자꾸 나한테 먹여 달래?’하지만 찔리는 짓을 한 터라 한 접시를 착실하게 다 먹였다.배가 좀 찼는지 최하준이 몸을 일으켰다.“갑시다.”“지금 바로 가요?”‘저기요, 8시도 안 됐다고! 지금 이대로 가면 곧바로 날 의심할 텐데.’“네, 지금. 가기 싫으면 남아서 밤새고 노시던가.”어차피 할아버지께 여자친구를 보여주러 온 형식적인 자리이니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더 있어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고집 부리는 것을 보고 여름은 할 수 없이 최하준을 따라 연회장을 나섰다.차에 탄 후 여름은 할아버지가 주셨던 돈 봉투를 건넸다.“넣어둬요.” 최하준이 무덤덤하게 말했다.“이렇게 많은 돈을… 제가 어떻게 받아요?”“그게 무슨 큰돈이라고….”최하준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 내가 돈 없다고 조롱하는 거겠지?’여름은 고개를 떨궜다. 곧 있으면 몰아칠 사나운 비바람을 기다리며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컴피티움에 돌아오니 여름은 그제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말없이 최하준의 상태를 살폈다. 불안했다.‘미안해요, 쭌. 앞으로 잘할게요. 오늘만 날 좀 봐줘요.’******최하준은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서재에서 화상회의를 시작했다.회의 중간에 갑자기 몸이 더워졌다. 자켓을 벗어도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변호사님, 괜찮습니까? 얼굴이 빨간데요….”회의에 참석한 직원이 최하준을 걱정해 주었다.“몸이 안 좋네요. 내일 다시 진행하시죠. 최영도 쪽은 바짝 주시해 주시고요.”컴퓨터를 껐다. 침실로 돌아와 차가운 물로 다시 샤워를 했지만 직감적으로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왜 이러지? 오늘 저녁에 내가 먹은 게 없는데?’잠깐, 아까 강여름이 준 음식을 먹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이런.... 강여름이 감히?’‘탕!’하고 최하준이 욕실문을 걷어차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최하준의 얼굴이 잠시 악마처럼 보였다.‘이러지 말 걸!’“이런 더러운 짓을! 당신은 내 믿음을 짓밟았어!”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강여름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최하준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다른 사람 술수에 놀아나는 것이었다.여름을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지만, 막상 부드러운 피부에 손이 닿자 이성이 사라졌다. 최하준은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욕구에 여름을 침대 위로 던졌다.얇은 옷이 찢어져 버렸다. 최하준은 마지막 자제력을 짜내어 벌떡 일어났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샤워실로 뛰어들었다. 다시 샤워기를 틀었다.쏟아지는 물소리가 여름의 가슴을 힘껏 난도질했다.여름은 찢어진 옷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내가 싫어? 손도 대기 싫은 거야? 하긴, 원래 날 싫어했지.’잘못된 선택이었다.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었다. ‘도대체 내가 뭐에 씌워서 그랬지?’******40분이 지났는데도 샤워실 물소리가 멈추지 않았다.혹시 사고가 나지 않았나 용기를 내어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괜찮아요? 미안해요. 내가 좀 도와….”“입 다물어요. 죽어도 당신 같은 인간에게 닿고 싶지 않습니다.”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젖은 최하준이 여름을 노려보았다. 욕망을 누르는 남자의 눈빛이 붉었다.여름은 경악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먹인 겁니까!”극심한 분노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최하준이 여름을 샤워실 안으로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찬물을 세게 틀고 샤워기 아래에 여름을 집어 넣었다.차가운 물이 온몸에 쏟아지자 덜덜 떨렸다.숨이 막힐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제서야 최하준이 여름을 놓아주었다. 최하준은 욕을 하며 문을 걷어찼다. 되는 대로 옷을 집어 걸치더니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여름은 허겁지겁 욕실을 빠져나가 쫓아갔지만 잡을 수 없었다.******밤 12시.이지훈은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수
이지훈이 눈썹을 올리며 은근하게 물었다.“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는데 진짜 감정이 하나도 안 생겼다고?“감정?”최하준이 비웃었다.“너는 주방에 일해 주시는 분하고도 감정이 생기더냐? 예전 같으면 참아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대로 못 참아.”이지훈이 에라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아니면, 뭔가 방법을 강구해 보든지. 밖을 못나오게 한다거나.”최하준은 입가가 굳어지면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안 그래도 호시탐탐 날 덮칠 기회만 노리는데 그랬다가는 아주 미쳐버릴걸. 문이란 문은 다 부숴버릴지도 모르지.”“…….”이지훈은 그 장면을 잠시 상상하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나 좀 가만 내버려 두라고. 물이나 좀 줘.”최하준은 다시 입이 마르는 것 같았다.******새벽 4시, 수액을 다 맞고 나자 겨우 열이 내려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집에 들어서자 여름이 소파에서 자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푹 잠이 들어 있었다.‘혼자서 자면 무서워서 악몽을 꾸느니 어쩌니 하더니 혼자서 잘만 자네.전부 거짓말이었던 거야.‘나는 오밤중에 병원에 가게 만들고 저는 집에서 편히 잤단 말이지.’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소파로 다가갔다.“좀 일어나 보시죠.”여름이 흠칫 놀라며 일어나 앉았다. 최하준이 사신 같은 목소리로 맞은편 소파에서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여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왔어요? 이, 이제 좀 괜찮아요?”“덕분에 밤새 병원에서 치료 받고 왔습니다.”어젯밤 상황이 다시 떠오르니 더욱 모욕적으로 느껴졌다.“내 평생 당신하고 혼인신고 한 게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그 집에 갇혀있을 때도 구하러 가는 게 아니었다 싶군요.”여름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화가 날 만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주의할게요.”“앞으로?”최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우리 사이에 ‘앞으로’가 있을 것 같습니까? 보기만 해도 역겹습니다. 더러워요!”최하준의 말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여름의 눈시울이
“오버 하지 마.”여름은 쓴웃음을 지으며 윤서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윤서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미안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봐.”“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었어. 게다가 난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잖아. 결혼해서 선우 오빠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여름은 이제 막막해졌다.윤서가 한숨을 쉬었다.“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이제 와서 다 때려치우고 이혼이라도 하게?”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래, 이혼해야 하는 거 아닐까?’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최하준은 나가고 안방 문이 열려있었다.여름은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부터 최하준은 완전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여름을 답답하게 했다.대충 라면을 먹고 났는데 도재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 대표네 별장 투시도 나왔니?”“다 됐어요.”“그렇구나. 그러면 네가 도면이랑 투시도 가지고 진영그룹으로 한 번 방문해 줄래? 양 대표가 쪼더라고.”“그럴게요.”서둘러야 한다. 급히 옷을 입으면서 네비에 진영그룹을 검색했다.******진영그룹 사무실은 동성 그린생태지구에 있었다. 주변에는 높은 건물들이 즐비했다.프런트로 가서 방문 이유를 설명하자 곧장 올라가라는 안내를 받았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옆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내렸다. 뒷모습을 보니 한선우의 어머니 양수영이였다.양수영은 여름을 보지 못한 채 백을 들고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이때 ‘띵’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 이상했다.지난번에는 W팰리스에서 한선우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양수영을 만나다니 너무 공교로웠다.‘잠깐, 여기 대표도 양 씨인데 혹시 오빠네 어머님과 친척 아닌가?’전에 대단한 친척이 있다고 한선우가 자랑한 적도 있었다.머리에 찌르는 듯한 두통이 왔다. 갑자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여름은 회장실로 들어갔다.양유진이 손님과
혹시나 젊은 혈기에 충동적으로 별장 설계를 포기한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양유진은 여름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그렇군요. 그럼 도면 설명 좀 드릴게요.”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답에 여름은 마음을 놓고 대화를 이어갔다.양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쪽 전문이 아니라서 자세한 도면은 봐도 잘 모른다.여름이 책상 맞은편에서 설명을 했기 때문에 도면이 거꾸로 보여서 좀 불편해 보였다.양유진이 자신의 오른편을 가리키며 말했다.“이쪽으로 오시죠.”허락을 얻자 여름은 책상을 돌아 양유진의 오른쪽으로 가서 허리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도면을 짚으며 말했다.“책장이 부족할까 봐 이쪽에 한 줄을 이렇게….”양유진은 여름의 손가락을 보았다. 가늘고 길었다. 자신에게 바짝 붙지도 않고 어깨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 냄새가 느껴졌다.매장에서 늘 맡는 진한 향수 냄새가 아니라 이렇게 자연스러운 향기를 풍기는 냄새를 맡으니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양유진은 가만히 곁에 있는 여름을 곁눈질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머리에 하이넥 니트를 입은 여름은 맑은 눈동자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조금 초췌해 보였지만 그게 오히려 더 보호 본능을 부추겼다.“어떻게,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시나요?”여름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좋네요. 아주 좋습니다.”양유진은 조금 당황했다. 사실 지금까지 여름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여름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그 후로도 여름은 20분 정도 도면을 설명했다. 고객들은 언제나 조금씩 수정을 요청하기 마련이다. 디자이너의 제안을 고객이 100% 수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양유진은 단박에 OK를 했다.“좋네요. 더 수정할 것 없으면 내일부터 바로 시공 들어가면 되겠네요.”“그렇게 빨리요? 길일 안 받으시고요?”“전 그런 거 안 믿습니다. 빨리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