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젊은 혈기에 충동적으로 별장 설계를 포기한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양유진은 여름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그렇군요. 그럼 도면 설명 좀 드릴게요.”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답에 여름은 마음을 놓고 대화를 이어갔다.양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쪽 전문이 아니라서 자세한 도면은 봐도 잘 모른다.여름이 책상 맞은편에서 설명을 했기 때문에 도면이 거꾸로 보여서 좀 불편해 보였다.양유진이 자신의 오른편을 가리키며 말했다.“이쪽으로 오시죠.”허락을 얻자 여름은 책상을 돌아 양유진의 오른쪽으로 가서 허리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도면을 짚으며 말했다.“책장이 부족할까 봐 이쪽에 한 줄을 이렇게….”양유진은 여름의 손가락을 보았다. 가늘고 길었다. 자신에게 바짝 붙지도 않고 어깨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 냄새가 느껴졌다.매장에서 늘 맡는 진한 향수 냄새가 아니라 이렇게 자연스러운 향기를 풍기는 냄새를 맡으니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양유진은 가만히 곁에 있는 여름을 곁눈질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머리에 하이넥 니트를 입은 여름은 맑은 눈동자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조금 초췌해 보였지만 그게 오히려 더 보호 본능을 부추겼다.“어떻게,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시나요?”여름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좋네요. 아주 좋습니다.”양유진은 조금 당황했다. 사실 지금까지 여름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여름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그 후로도 여름은 20분 정도 도면을 설명했다. 고객들은 언제나 조금씩 수정을 요청하기 마련이다. 디자이너의 제안을 고객이 100% 수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양유진은 단박에 OK를 했다.“좋네요. 더 수정할 것 없으면 내일부터 바로 시공 들어가면 되겠네요.”“그렇게 빨리요? 길일 안 받으시고요?”“전 그런 거 안 믿습니다. 빨리
여름은 깜짝 놀라서 웃었다.“아유, 아녜요. 그냥 뚱냥이에요..”“에이, 전에 내가 자기 남편한테 물어보니까 임신했다고 자기 입으로 그러던데.”“제 남편이오?’‘설마하니 최하준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최하준이 가끔 지오랑 산책을 나가긴 하지만 지오는 임신하진 않았는데….’“다른 분이겠죠.”“아닌데. 내가 노안이 오기는 했어도 자기네 남편 생긴 게 오죽 눈에 띄어야 말이지. 이 동네에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 보기가 쉽나, 어디? 어지간한 연예인 저리 가라 할 미모더구먼. 그리고 우리 애가 그 집 애랑 얼마나 잘 논다고.”주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네 고양이를 들어 보였다. 지오가 친한 친구를 보더니 바로 반응을 보였다.‘이게 대게 무슨 일이람? 지오가 임신이라니? 아니, 잠깐! 지오가 암컷이었어?이제껏 수컷인 줄 알았는데?이름도 남자애 같지 않나?’“아유, 저 배를 봐요. 딱 봐도 임신했지. 남편이 말도 안 해줬어?”“그게….”‘와…진짜!’“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고양이를 처음 키워봐서 잘 몰라요.”여름은 동네 주민과 뻘쭘하게 인사를 나누고 후다닥 택시를 타고 동물병원으로 갔다.의사가 초음파를 보더니, 안경을 추어 올렸다.“곧 출산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머릿속이 어지러웠다.‘머시라?임신했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곧 출산이라고?’“예정일은 열흘 정도 남았어요.”의사가 말했다.“그동안 주의해서 돌봐주세요. 그래도 털이 반질반질한 게 보니까 영양 상태랑 체력은 좋은 것 같네요. 자연 분만은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저기 혹시, 고양이도 임신하면 입덧 하나요?”“그런 애들도 있죠. 특히 초기에는 식욕 부진이 올 수도 있고요.”“…….”병원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른다.머릿속에는 ‘속았다!’는 생각뿐이었다.출산일부터 거꾸로 계산해 보니 지난번에 토해서 병원에 데려갔을 때 최하준은 분명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터였다.지오는 여름이 소시지 같은 걸 먹여서 토한 게 아니라 입덧을 한 것이었다.그러니까 그동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동네 사람한테 다 들었어요. 동물병원까지 가서 물어봤다고요. 곧 출산이래요. 내가 뭘 잘못 먹여서 토한 게 아니라 입덧이었대요!”말을 하다 보니 점점 더 화가 났다.“최하준 씨, 사람 바보 취급하니까 재미있던가요?”최하준은 좀 난감해졌다.“강여름 씨, 이건 짚고 넘어가죠. 내 집에 먼저 들어와 살겠다고 한 건 그쪽입니다. 나는 그냥 강여름 씨가 들어와서 나한테 잘 보일 기회를 실컷 준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날 속인 것에 감사하라는 이 말인가요, 지금?”여름이 이를 갈았다.“들어올 때 엄청 기뻐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목숨도 두 번이나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나 아니었으면 여기서 이러고 한가하게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을 텐데요.”최하준은 인상을 찡그렸다.‘애초에 갈 곳이 없대서 좋은 마음에 재워줬더니 정말이지 앞뒤 분간을 못 하는군.그런데 이런 나에게 그따위 유치한 수단을 써?그리고서 감히 날 지적하는 거야?’“……”여름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생명의 은인? 그래, 좋지, 그렇다고 이렇게 날 함부로 대해도 되나?뭐, 나도 좋은 뜻으로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건 아니니까.할 말은 없지.’여름이 아무 말도 못하자 하준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강여름 씨, 반성하셔야겠습니다. 이게 지금 무슨 태도입니까? 우리 지오가 임신해서 손길이 필요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우리집에 재워줄 필요가 없어요.”여름은 그 자리를 어떻게 벗어났는지 기억조차 안 났다. 너무 화가 나서 아무나 잡고 한 판 붙고 싶었다.최하준과 함께 살고 나서부터 내면의 폭력성이 느는 것 같았다.이제 와서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을까?이렇게 험난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최하준을 유혹하지 않았을 것이다.******아무리 마음이 힘들어도 일은 해야 한다.8시 반, 여름은 차를 몰아 W팰리스로 갔다.지난번에 최하준이 들어갔던 별장을 지나는데 보니 강여경과 이민수가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저건 최하준의 별장인데, 정말로 강여
여름은 양유진의 별장으로 돌아와 기사들에게 공사 준비를 시켰다.여름은 하루 종일 공사 현장을 지휘했다. 오후가 되자 양유진이 금일봉을 들고 찾아왔다.두툼한 봉투를 여름의 손에 쥐여주자 여름은 뜻밖의 선물에 놀랐다.“대표님,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양유진이 여름을 바라보았다.“별 거 아닙니다. 어제보다 안색이 더 창백한데요. 감기 걸린 거 아닌가요?”“네. 뭐 그냥 가벼운 감기겠죠.”양유진이 부드럽게 말했다.“얼른 퇴근해서 쉬세요. 공사장은 착착 돌아가고 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저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 아닙니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도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데…. 아침저녁 얼굴 보는 최하준보다 낫네.’최하준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여름에게 어디 아픈데 있는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하긴 뼛속까지 나한테 원한이 사무쳤는데 관심은 무슨….저렇게 세심한 남자랑 살면 평생 행복하겠지?’“고맙습니다, 대표님.”여름은 인사를 하고 퇴근하려고 했다.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머리에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다행히 양유진이 얼른 여름을 부축해 주었다.그러다가 양유진은 여름의 손이 엄청 뜨겁다는 것을 알았다.“열이 높은데요. 병원으로 갑시다.” “괜찮은데….’“괜찮은 척하지 마십시오. 우리집 공사하다 쓰러지면 다 내 책임이라고요.”양유진이 여름을 안아 자기 차에 태웠다.차에 타자 여름은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잠들었다.몽롱한 가운데 누군가가 내내 자신을 안고 있는 걸 느꼈다.손이 찔리는 느낌도 있었고 누군가가 물을 먹여주기도 했다.깨어나 보니 병상에 누워있고 손등으로 수액이 들어오고 있었다.양유진이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다.“열이 39.8도가 넘었습니다. 하마터면 산재 처리할 뻔했습니다..”“죄송합니다. 폐를 끼쳤네요.”여름이 일어나 앉으며 연신 사과를 했다.“제가 잘못해서 감기 걸린 거예요. 일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어제 감기약을 먹어서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심한지 몰랐어요
최하준이 퇴근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여름이 돌아오지 않았다.‘지오는 신경도 안 쓰고 아주 상전 나셨군!’“지오야, 가자! 과일 사러 가자.”최하준은 지오를 품에 안았다.배가 부른 지오가 움직이기 귀찮아 하악질을 하며 반항을 해보았지만, 집사가 지오의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단지 입구 쪽에는 상가가 있었다. 최하준은 되는 대로 아무 가게나 들어가 과일을 고르기 시작했다.‘뭘 사지? 강여름은 왜 아직까지 안 들어오는 거야?’입구에 서 있던 주인 여자가 저세상 미모인 남자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뭔 일이래? 벌써 몇 번을 돌고도 아무것도 안 사잖아? 그러면서 가게 밖만 쳐다보고. 나랑 뭐 어떻게 해보려고 왔는데 차마 용기가 안 나는 건가?’주인 여자가 살짝 부끄러워하다가 용기를 내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주인 여자가 놀라서 고개를 빼고 보니 길 가에 고급 외제차가 서 있고 거기서 예쁘장한 여자가 내리는 게 보였다.‘뭐야, 이제 보니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으러 나온 거였어?’저렇게 잘 생겼는데도 상대가 바람이 나는구나. 안 됐네.******도로변.여름이 막 양유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최하준이 지오를 안고 성큼성큼 다가왔다.어깨 위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은 최하준의 모습은 마치 무슨 영화 속 빌런이 등장하는 장면 같았다.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은 웬일로 12시도 안 됐는데 집에 왔대?’어쩌면 이렇게 남자가 바래다 줄 때마다 최하준을 마주치게 되는 건지.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최하준이 문 앞까지 나와 자기만 기다리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그러나 이제 곧 또 화내고 난리가 나겠지.그래서 여름이 먼저 선수치기로 했다.“오늘은 몸이 안 좋으니까 화 내려거든 내일 해요.”최하준은 뚜껑이 열렸는지 입을 열자마자 이성을 상실했다.“아픈 게 아니라 남자랑 노느라고 피곤하신 거겠지. 아주, 지난번에는 SUV더니 오늘
“그래, 법적으로 당신 부인이죠. 알아요. 그렇지만 당신이 어디 나를 아내 취급해준 적이 있기는 한가요? ”여름이 비아냥거렸다.“당신 눈에 나는 세상 최고로 뻔뻔한 인간이겠죠.”‘한선우보다, 강여경보다 더!’기왕 이렇게 된 거 애걸복걸해서 뭐 하겠는가.여름이 조곤조곤 말로 때려오니 짜증이 났다.“알긴 아는군요”“그래요. 전에는 그걸 몰라서 나에게도 기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닌 줄 다 알아요. 그러니까 저한테서 신경끄시죠! 우린 그냥 계약 결혼한 사이잖아요. 애초에 내가 그렇게 죽자사자 매달려서 들어와 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얽힐 일도 없었을 텐데.”“죽자사자 매달린 것도 기억난다니 다행입니다.”최하준은 화가 난 나머지 이제 말을 가리지 않았다.“나도 당신한테서 신경 끄고 싶은데, 밖에 돌아다니다가 무슨 바이러스라도 묻혀 와서 감염시키지나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난 불결한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하! 불결이라고!’여름은 이제 분노가 치솟아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여름은 원래 지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감안해 몸이라도 풀면 나갈 생각이었다.그러나 이제는 한시도 그 집에 남아있고 싶지 않아졌다. 여름은 핏기 가신 입술을 열었다.“좋아요. 더러운 내가 최하준 씨 집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나가드리겠습니다.”“그건 또 무슨 새로운 수작입니까?”최하준이 냉소를 지었다. 그렇게나 호시탐탐 자기 침대를 노리는 여름이 집에서 나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여름은 신경 쓰지 않고 힘껏 최하준의 손을 뿌리쳤다. 집에 가서 트렁크를 꺼내 부랴부랴 물건을 챙겼다.원래 물건이 많지 않았던 터라 정리는 곧 끝났다.문 앞에서 여름을 보고 있던 최하준은 열이 뻗쳐서 단추를 신경질적으로 풀었다.‘적당히를 모르는군, 몇 마디 했다고 정말 짐을 싸?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반성할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다른 남자 차를 타고 돌아 오지만 않았어도 내가 뭐라고 할 일도 없잖아?’여름은 트렁크를 끌고 나와 최하준의 카드를
드디어 해방이다.40분 뒤, 여름은 윤서네 집에 나타났다.윤서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하품을 하면서 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왜 또 싸웠어? 이번에는 며칠 있다가 갈래?”“안 싸웠어. 이제 진짜로 안 돌아갈 거야.”여름이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갔다.“장난치지 말고, 결혼까지 했는데 이러고 그만둔다고?”여름이 파리한 입술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장사할 때마다 벌 수 있나. 밑질 때도 있는 거지.”윤서의 입이 쩍 벌어졌다“진심이야?”소파에 앉는 여름은 병색이 완연했다.“어, 피곤해. 이제 진짜 너무 지쳤어.”윤서가 이마를 찡그렸다.“감기 걸렸니?”여름은 거의 울 뻔했다.“어, 남들은 다 알아보는데 그 남자만 모르더라. 나도 따스하게 배려받고 싶다고. 아무리 한선우의 외숙모라고 해도 사랑도 못 받는 허울뿐인 외숙모라면, 강여경한테도 조롱이나 받을걸.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윤서가 잠시 여름을 살폈다. 오랜 친구의 감으로 이번에는 여름이 정말로 포기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 잘했다. 이제 여기서 살아. 어쨌든 나도 이제 혼자니까.”“그럼 쓰나. 너희 오빠는 어쩌고?”윤서가 얼굴을 붉히며 여름을 한 번 째려봤다.“안 한다니까. 사귀면 꼭 그런 거 하는 줄 아니?”“그렇지만 사귄 지 1년은 됐잖아?”여름이 눈을 깜빡였다.“네가 그렇게 유교 걸은 아닌 것 같고, 그럼 너희 오빠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웬일이래?”“그런 거 아니야.”윤서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난 잘 지내고 있다고!”여름이 ‘아이고~’ 소리를 냈다.“그냥 회사 물려받은 지가 얼마 안 돼서 할 일이 많아서 그래.”윤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못 만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전에 따로 집 구하라고 했던 건 선우 오빠가 자꾸 찾아오니까 그런 거고. 이젠 오지도 않더라.”한선우 이름이 나오자 웃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주 강여경한테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나 보지.”
골프장.최하준이 골프채를 휙 휘두르자 공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도 찾을 수 없었다.이지훈이 옆에 서서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최하준을 훑어보고 있었다.여름이 떠나고 나서부터 내내 저런 얼굴이었다. 이지훈도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제수씨 아직 안 왔어?”“나가서 죽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최하준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배에서 눈치도 없이 ‘꾸르륵’ 소리가 났다.이지훈이 뻘쭘해서 콧등을 비볐다.“제수씨가 해주는 밥을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제수씨 없다고 밥까지 굶는 건 좀….”“누가 그 사람이 한 밥을 좋아한대!”최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그 사람 없으니까 다이어트 되고 좋네.”“…….”이지훈은 처음으로 친구에게서 츤데레 냄새를 맡고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다.갑자기 강여름이 존경스러워졌다. 만약 자신이 최하준과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 벌써 돌아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모레 강여경하고 한선우 약혼식이라서 제수씨도 갈걸. 그 집에서 나한테도 초대장 보냈던데. 어떻게, 내가 가서 한번 잘 말해 볼까?”최하준이 눈썹을 쓱 올렸다.“할머님 팔순 잔치 아니고?”“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이지훈이 고개를 저었다.최하준의 눈이 다시 서늘해졌다. 그 집안에서 할머니 팔순 잔치는 해드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이 바보가 무슨 모욕을 당하려고 또 거길 가?’“잘 말해 보긴, 뭘? 다 수작이라니까? 두고 보라고, 약혼식 직전에 무슨 수를 쓰든 나한테 연락할 거야.”그 순간 스마트 폰이 울렸다. ‘하여간 love’에게서 톡이 왔다.“이거 보라고, 바로 톡 왔지.”최하준이 SNS를 열었다. 여름이 6번에 나누어 1,200만 원을 보냈다는 메시지였다.최하준의 얼굴이 굳었다. 이지훈이 어깨 너머로 흘끗 보더니 의아해 했다.“어우, 돈 많은 분이 자네에게 작업 거는 거야?”“응.”최하준의 얼굴이 풀렸다.‘그럼 그렇지, 이것도 새로운 수작이구나.’대화창에 ‘상대방이 메시지를 입력 중입니다’라는 알림을 보고 눈치챈 것이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