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해방이다.40분 뒤, 여름은 윤서네 집에 나타났다.윤서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하품을 하면서 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왜 또 싸웠어? 이번에는 며칠 있다가 갈래?”“안 싸웠어. 이제 진짜로 안 돌아갈 거야.”여름이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갔다.“장난치지 말고, 결혼까지 했는데 이러고 그만둔다고?”여름이 파리한 입술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장사할 때마다 벌 수 있나. 밑질 때도 있는 거지.”윤서의 입이 쩍 벌어졌다“진심이야?”소파에 앉는 여름은 병색이 완연했다.“어, 피곤해. 이제 진짜 너무 지쳤어.”윤서가 이마를 찡그렸다.“감기 걸렸니?”여름은 거의 울 뻔했다.“어, 남들은 다 알아보는데 그 남자만 모르더라. 나도 따스하게 배려받고 싶다고. 아무리 한선우의 외숙모라고 해도 사랑도 못 받는 허울뿐인 외숙모라면, 강여경한테도 조롱이나 받을걸.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윤서가 잠시 여름을 살폈다. 오랜 친구의 감으로 이번에는 여름이 정말로 포기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 잘했다. 이제 여기서 살아. 어쨌든 나도 이제 혼자니까.”“그럼 쓰나. 너희 오빠는 어쩌고?”윤서가 얼굴을 붉히며 여름을 한 번 째려봤다.“안 한다니까. 사귀면 꼭 그런 거 하는 줄 아니?”“그렇지만 사귄 지 1년은 됐잖아?”여름이 눈을 깜빡였다.“네가 그렇게 유교 걸은 아닌 것 같고, 그럼 너희 오빠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웬일이래?”“그런 거 아니야.”윤서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난 잘 지내고 있다고!”여름이 ‘아이고~’ 소리를 냈다.“그냥 회사 물려받은 지가 얼마 안 돼서 할 일이 많아서 그래.”윤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못 만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전에 따로 집 구하라고 했던 건 선우 오빠가 자꾸 찾아오니까 그런 거고. 이젠 오지도 않더라.”한선우 이름이 나오자 웃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주 강여경한테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나 보지.”
골프장.최하준이 골프채를 휙 휘두르자 공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도 찾을 수 없었다.이지훈이 옆에 서서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최하준을 훑어보고 있었다.여름이 떠나고 나서부터 내내 저런 얼굴이었다. 이지훈도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제수씨 아직 안 왔어?”“나가서 죽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최하준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배에서 눈치도 없이 ‘꾸르륵’ 소리가 났다.이지훈이 뻘쭘해서 콧등을 비볐다.“제수씨가 해주는 밥을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제수씨 없다고 밥까지 굶는 건 좀….”“누가 그 사람이 한 밥을 좋아한대!”최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그 사람 없으니까 다이어트 되고 좋네.”“…….”이지훈은 처음으로 친구에게서 츤데레 냄새를 맡고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다.갑자기 강여름이 존경스러워졌다. 만약 자신이 최하준과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 벌써 돌아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모레 강여경하고 한선우 약혼식이라서 제수씨도 갈걸. 그 집에서 나한테도 초대장 보냈던데. 어떻게, 내가 가서 한번 잘 말해 볼까?”최하준이 눈썹을 쓱 올렸다.“할머님 팔순 잔치 아니고?”“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이지훈이 고개를 저었다.최하준의 눈이 다시 서늘해졌다. 그 집안에서 할머니 팔순 잔치는 해드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이 바보가 무슨 모욕을 당하려고 또 거길 가?’“잘 말해 보긴, 뭘? 다 수작이라니까? 두고 보라고, 약혼식 직전에 무슨 수를 쓰든 나한테 연락할 거야.”그 순간 스마트 폰이 울렸다. ‘하여간 love’에게서 톡이 왔다.“이거 보라고, 바로 톡 왔지.”최하준이 SNS를 열었다. 여름이 6번에 나누어 1,200만 원을 보냈다는 메시지였다.최하준의 얼굴이 굳었다. 이지훈이 어깨 너머로 흘끗 보더니 의아해 했다.“어우, 돈 많은 분이 자네에게 작업 거는 거야?”“응.”최하준의 얼굴이 풀렸다.‘그럼 그렇지, 이것도 새로운 수작이구나.’대화창에 ‘상대방이 메시지를 입력 중입니다’라는 알림을 보고 눈치챈 것이다.
“같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 거북하게 만드네. 언니랑은 너무 다르시다.”“그러게. 아까 강여경 씨는 다과도 직접 챙겨주시던데.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끼고 키워서 잘 가르쳤을 텐데 성격 엉망이네.”여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단정하게 회색 슈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다가와 여름의 앞을 막고 섰다. 말투가 살짝 싸늘했다.“TH디자인그룹과 한주그룹이 인연을 맺는 좋은 날이라 다른 하객도 많고 시아도 왔는데 어째서 이분께만 이럽니까?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 유튜버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찍고 싶으면 좋은 기사로 사람을 띄워주시던지요.”키가 훤칠하고 차림새만 봐도 어떤 신분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기자들이 우물쭈물 흩어졌다. 여름은 결국 참지 못하고 ‘풉!’하고 웃어버렸다.“윤 대표님, 멋지네! 회장님이 되시더니 역시 아우라가 달라. 어쩐지 우리 윤서가 그렇게 푹 빠져 있더라니.”바로 윤서의 남자친구 윤상원 회장이었다.“말도 말아요.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윤서가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지. 들어갑시다.”윤상원이 웃었다.여름이 막 고개를 끄덕이는데 노란 V넥 드레스를 입고 스틸레토힐을 신은 여자가 우아하게 다가와 상원에게 팔짱을 꼈다.“오빠, 왜 그렇게 빨리 가? 따라오다가 넘어질 뻔했잖아.”여름이 그 사람을 쳐다봤다. 윤상원이 대답했다.“신 회장님네 따님 신아영 씨입니다. 이 친구도 약혼식에 초대받았어요.”“아~, 이 분이 팔짱을 끼길래 윤서한테 뭔가 미안할 일이 있나 싶어서 놀랐네요.”윤상원에게 팔짱을 낀 손을 보며 여름이 놀리듯 웃었다. 윤상원이 흠칫하더니 팔을 보더니 얼른 빼냈다. 그러면서 약간 어쩔 수 없다는 듯 신아영에게 말했다.“아영아, 말했잖아. 이제 다 컸는데 아직도 애기 때처럼 이러면 사람들이 오해한다니까.”“습관이 돼서 그러지. 그리고 이런 파티에 오면 나도 모르게 오빠가 내 파트너 같은 생각이 들어서.”신아영이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여름에게 말했다.“언니, 저 윤서 언니랑도 친해서 밥도 같
“천 국장님, 얘가 저희 둘째입니다. 애가 얼마나 대범하고 착한지 경찰수사에도 협조해서 불법 영상 촬영조직을 검거했잖아요. 아유, 큰 애 결혼하면 얘도 얼른 짝을 지어줘야 하는데, 댁에 아드님이….”천 국장은 이 말을 듣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동성에서 여름의 부적절한 사진이 돌아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감히 어디에 들이대는가 싶었다.“아하핫, 네. 훌륭한 인재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들 녀석에게 이미 여자친구가 있네요. 아이고, 이거 오 회장님 아니십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하하”천 국장은 얼른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갔다.강태환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여름아, 걱정하지 말거라. 이 애비가 오늘 꼭 네 짝을 찾아주마.”이들 부부에게 이미 마음을 접은 듯 여름은 사뭇 평온한 얼굴이었다.“아직 연기 안 끝나셨어요? 입구에 기자들도 잔뜩 불러 놓으셨던데 이제 곧 TH그룹은 부녀간 사이가 좋다는 둥, 사랑스러운 모녀라는 둥 기사 나갈 건데 이제 그만 하셔도 돼요. 오늘 저는 할머니 생신 축하해 드리러 온 거예요. 다른 건 관심 없어요.”이정희가 화를 꾹 눌렀다.“강여름, 양심은 뉘 집 개한테라도 던져줬니? 네 아빠랑 내가 널 올바로 키워본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잘못을 했으면 고칠 생각은 안 하고 나가서 집안 망신을 시키질 않나, 어? 양심이 있으면 생각을 좀 해 봐라. 우리가 여경이 문제 말고 너한테 못 해준 게 뭐니? 격리시켰던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지.”“말씀 잘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 아빠를 미워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저를 낳아주고 키워주셨다고 내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여름은 화가 나서 말했다.강태환이 말했다.“무슨 소리냐? 우리가 언제 네 목숨을 가지고 놀아? 그 집이 낡기는 했어도 그렇게 죽니 사니 할 만한 곳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널 굶기길 했니, 옷을 안 입혔니?”여름은 놀랐다.‘그 노인은 엄마 아빠가 보낸 사람이 아니었나?’자세히 생
여름이 강여경을 보더니 비웃었다.“내가 더 예쁘다고 질투해? 할 말 있으면 제발 그냥 대놓고 말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까지 말고. 그 예쁜 입 가지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저 그거 놀려서 나쁜 짓은 다른 사람 시키고, 저는 뒤로 빠져서 순진하고 연약한 척하는 것뿐이지.” “그런 뜻이 아니야. 난 진심으로 네가 예쁘다고 말한 것뿐인데….”억울하다는 듯 강여경이 눈시울을 붉혔다.한선우는 도저히 계속 두고 볼 수가 없었다.“강여름, 적당히 해라. 처음부터 네가 여경이를 괴롭힌 거잖아.”“이거 보라고, 또 다른 사람이 너 대신 나서주잖아.”여름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한선우는 화가 나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태환이 언짢은 듯 말했다.“됐다,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여름이 넌 룸으로 가서 할머니랑 있다가 이따 연회 시작되면 그때 나오거라.”“할머니께 인사만 드리고 갈 거예요.”“이따 할머니 식사나 하시게 하고 가라. 얼마 전에 쓰러지셨는데 중풍이 와서 혼자서 식사도 못 하신다.”강태환이 짜증스럽게 뱉었다.믿을 수가 없었다. 여름이 겨우 한 달 남짓 할머니를 못 뵌 것 뿐인데 그 사이에 중풍이라니….“왜 이제야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말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니?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거 말고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다고.”여름은 홱 돌아서서 룸으로 들어갔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웬 부인이 옆에서 할머니께 빨대로 물을 마시게 해드리고 있었다.눈물이 절로 나왔다.“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그간 할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릴까 싶어서 일부러 찾아뵙지 않았었다.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빼면 이 집안에서 여름을 가장 아껴주신 분이었다.이정희와 강태환은 어릴 때부터 여름에게 가혹하고 냉정했지만, 할머니만은 더할 나위 없이 여름을 사랑해주었다.그러나 여름이 유학을 간 후 할머니는 플럼가든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하셨다.“어르신이 이제 귀가 잘 안 들
“알겠어요. 가요.”여름은 조용히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나갔다. 여름과 강태환 부부, 한선우는 모두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앉아서 보니 양유진이 다른 테이블의 주빈석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먼 친척이라고 하지 않았나? 왜 선우 오빠네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앉아 계시지?’게다가 최하준은 외삼촌이라는 사람이 막상 잔치에는 얼굴도 들이밀지 않았다.진가은, 채시아처럼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도 모두 참석을 했다.여름이 속으로 비웃었다. ‘강여경이 나랑 안 친한 인간들하고 인맥 만드느라 애썼네.’곧 약혼식이 시작되었다.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친지와 지인들이 참석해 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다. 마지막에 한선우와 강여경이 무대에 올랐다.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강여경과 검은 수트를 입은 한선우가 함께 서 있으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무대 아래 하객들이 수군거렸다.“여경이가 시골에서 자랐다는 데도 아주 우아하고 단정하네. 한선우가 한눈에 반할 만 하구먼.”“그러게 말이야. 작년까지만 해도 여름이랑 약혼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가 여경이를 택했다면서. 하긴, 사람이 행실이 방정해야지.”“그렇지, 그렇지.”“……”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여름의 귀에까지 들려왔지만, 여름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할머니 식사를 도와드렸다.그런데 채시아가 무대에 올라 반지를 전달하는 게 아닌가.채시아가 마이크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제가 선우 오빠하고 안지 7~8년 됐는데요, 저한테는 그저 멋진 오빠예요. 여학생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았다고요. 그런데도 누구한테 마음을 주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오빠의 마음을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경이가 심장에 여름 햇살처럼 스며들었나 봐요.” 채시아는 ‘여름 햇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조롱하듯 여름을 쳐다보았다.“여름아, 너도 오빠네 커플 축복해 줄 거지?”채시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여름의 심장을 찔러왔다. 채시아는 여름이 아니었으면 한선우를 알지도
여름이 한 짓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의 모함이었다.이런 영상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강여경이었다!강여경이라면 자신의 약혼식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충분히 여름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대체 누구 짓이야? 원래 준비했던 USB는 어떻게 된 거야?”이정희가 화를 냈다.홀 매니저가 급히 뛰어왔다.“죄송합니다. USB가 바꿔치기 되어 있었습니다. 저희도 지금 막 알았습니다.”“누가 이런 지저분한….”양수영이 욕을 했다.채시아가 급히 외쳤다.“어머님, 누군가가 약혼식을 망치고 싶어 하나 봐요!”“그런 것 같구나. 어떤 놈인지 반드시 잡아내야 해!”이때 이미경이 우물쭈물 일어섰다.“제가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까 작은 아가씨가 수상쩍게 영상실 쪽으로 가는 걸 봤습니다.”여름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여름은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강태환이 노기 어린 눈으로 여름을 노려봤다.“네가 벌인 짓이냐?”여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평소 집에서야 그렇다 치고,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정희도 거들었다.“정말 너무 하구나. 사람 마음이 그렇게 억지로 되는 거니? 선우가 어려서부터 동생처럼 대해 줬더니 착각도 유분수지.”양수영이 덧붙였다.“다들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 선우랑 여름이가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서 선우가 여름이를 동생처럼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감정이라는 문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안 그러니, 선우야?”한선우는 저도 모르게 여름을 쳐다보았다. 여름의 검고 또렷한 눈동자가 한선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한선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여름과의 관계가 깨끗하다며 해명했다.“미안하다, 여름아. 내가 오해하게 했구나. 정말 난 너를 동생처럼 생각했어. 너에 대해서는 남매 같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거야. 사랑한 게 아니라.”그 말을 들은 여름은 화도 내지 않고 그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평온한
“뭐야, 오늘이 어르신 팔순이었어?”“너무하네. 노인네 살면 얼마나 산다고 팔순 잔치는 거하게 해드려야지.”강태환은 화가 나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했다. “난 지금 약혼식을 망친 책임을 묻고 있는 거다. 말 돌리지 말거라! 할머니 생신은 안 그래도 조금 있다가 말할 참이었어!”“좋아요. 그러면 그 얘기를 해보죠. 어떻게 이제 막 온 간병인 말만 듣고 딸을 그렇게 몰아갈 수 있어요? 여기 CCTV 있죠? 저는 들어와서부터 밥 먹으러 나올 때까지 할머니하고 룸에만 있었어요. 이런 7성급 호텔에 CCTV가 없진 않겠죠?”여름이 한 마디 던졌다.“제가 영상실에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다면 오늘 말로만 사과하는 게 아니라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어요.”“네가 사람을 시켜서 했을 수도 있지.”이정희가 참지 못하고 뱉었다."이모님은 제가 영상실로 가는 걸 봤다면서요. 그러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여름이 반격했다.하객들이 웅성거렸다. 양유진이 씩 웃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면 보안실에 가봅시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이정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여경이 힘없이 말했다.“우리가 정말 여름이를 오해한 걸 수도 있잖아요. 조사를 하더라도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다들 배고프실 텐데.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고….”“강여경 말 한마디면 그냥 이렇게 넘어가야 해?”여름이 차갑게 웃었다.“아까 다들 나에게 한 마디씩 할 때, 내 감정이 어떨지는 생각해 본 사람 있어?“그만해. 이따가 조사해 보자고 얘기 끝나지 않았어? 뭘 더 어쩌자는 거야?”한선우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선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어른들이 다 나서서 일일이 사과라도 해야겠어?”“그 입 다물어. 오빠의 그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갔던 게 내가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날 동생처럼 생각한 거니? 내가 증거도 없고 끽소리 못할 줄 알았나 본데, 톡에 남은 그 수많은 기록은 어쩔 거야?”그러더니 여름은 이미 준비되어 있던 음성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