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채시아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뭐가 이게, 저게야. 우리가 7~8년은 절친으로 지냈는데 사진을 한두 장 찍었니? 굳이 꺼내서 보여주게 만들지 마라.”여름의 시선은 침착하게 연회장의 하객들을 둘러보더니 마지막에 강태환 부부에게서 멈췄다.“CCTV 뒤져볼 것 없습니다. 어쨌든 조사할 기회도 안 주실 테죠. 더 이상 이 자리에 못 앉아 있겠네요. 솔직히 여러분들 하나하나 연기 보고 있으려니 구역질 나서요.”여름은 말을 마치더니 마이크를 탁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쿨하게 테이블에서 뛰어 내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연회장을 떠났다.연회장의 양가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한선우가 그중 가장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한선우 아버지가 웃으며 다가왔다.“이제 다들 식사하시죠. 두 사람은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좀 쉬지. 피곤하겠어.”그러면서 한선우에게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 한선우는 이를 갈며 무대를 내려가 뒤로 돌아나갔다.******엘리베이터 앞.여름은 초조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했다. 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두 집안 사람들이 어쩌지 못한 것일 뿐이었다. 이제는 혼자만 남았으므로 해코지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엘리베이터는 30층이 넘는 고층에 올라가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강여름, 나 좀 봐!”단단히 화난 한선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돌아보니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여름은 한선우가 자신에게 이렇게 화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여름은 선우가 손을 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불안에 떨고 있는데 커다란 사람이 그보다 더 빨리 여름의 앞을 막아 섰다. 양유진이었다.“뭘 어쩌려고 그러니?”“삼촌, 그건 제가 묻고 싶네요. 이건 저랑 여름이 사이의 일이에요. 비키세요.”‘삼촌이라고…?’여름은 번개라도 맞은 것 같았다.‘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한선우가 양유진 대표를 삼촌이라고 불러?’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한선우는 여름이 다른 남자와 사귀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미쳤어요? 쟤는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순진하지가….”“사업을 한 경력도 사람 보는 안목도 내가 너보다는 낫지. 내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양유진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한선우의 말을 끊었다.“게다가 소꿉친구까지도 헐뜯는 전 여친인데 남자로서 괜찮으시겠어요?원한에 찬 한선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삼촌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요.”“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인지 네 사심을 채우기 위한 마음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거다.”이때 엘리베이터에서 ‘띵~’하는 소리가 났다.분노한 한선우를 그대로 남겨둔 채, 양유진은 여름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폐쇄된 공간에서 여름은 멘붕이 온 듯 멍하니 있었다.양유진이 여름을 보더니 놀란 줄 알고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아까 사람들 많은 데서는 그렇게 용감하시더니?”사실 양유진도 적잖이 놀랐었다.참석했던 수많은 파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파티로 남을 것이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테이블에 올라갔던 모습은 사실 꽤 매력적이었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양유진의 손을 치웠다. 머리가 굳어서 돌아가지 않았다.“대표님이… 선우 오빠의 삼촌이세요?”“그렇습니다.”양유진이 담담하게 인정했다.“저도 얼마 전에야 여름 씨가 그 댁 작은 따님인 걸 알았습니다. 선우와의 관계도 잘 알고 있었어요. 저한테 여름 씨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그 애가 여름 씨를 배신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름 씨에게는 정말 미안합니다. 별장 인테리어 설계도를 보고 얼마나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그렇지만 저번에 왜 먼 친척이라고 하셨어요?”“선우 삼촌이라는 이유로 저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했습니다.”양유진이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진심으로 여름 씨가 좋습니다!”여름은 심호흡을 했다. “죄송한데 하나만 여쭤볼게요. 혹시 선우 오
윤서가 깜짝 놀랐다.“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날 엿 먹였지. 그것도 아주 빅 엿을!”여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최하준은 한선우의 외삼촌이 아니었어! 사람 잘못 봤다고!”윤서가 말을 더듬었다.“그, 그럴 리가?”“오늘 진짜 외삼촌 만났어. 양유진 씨라고. 이제 막 담당한 W팰리스 별장이 그분 거야.”여름은 울고 싶었다.“대체 어쩌자고 나한테 사람을 잘못 소개했어, 이 친구야.”“……”윤서의 몸이 떨렸다. ‘어떻게 사람을 잘못 알아볼 수 있지? 오빠가 그렇다고 했는데….’******30분 뒤, 여름이 윤서의 눈앞에 나타났다.어디서 빌렸는지 몰라도 윤서는 헬멧을 쓰고 있었다.“가능하면 말로 하자. 아니 뭐, 때려도 되는데, 얼굴만은 때리지 말아 주라.”여름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안 때려. 그냥 널 껴안고 강물에 뛰어들까 하는데 괜찮겠냐??”윤서는 천하에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내가 방금 30분 동안, 우리 오빠가 나한테 선우 오빠의 외삼촌이 누군지 가르쳐 줬을 때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그때 남자 둘이 같이 있었는데 분명 거기 최하준도 있었어. 아우라가 엄청났다고. 거의 무슨 황제 폐하급의….”“그래서, 머릿속에 최하준이 한선우의 외삼촌이라고 자동 입력 됐다고?”여름이 윤서의 말을 끊었다.윤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안 그러고 배기냐? 최하준의 아우라가 모두를 압살했다고….”“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이 이 사람이야?”여름은 스마트 폰에서 양유진의 사진을 찾았다. 별장 시공 첫날, 우연히 찍힌 사진이었다.“어, 그때 자세히 안 봐서.”윤서가 눈썹을 찌푸려가며 생각했다.“좀 그런 것 같아. 어, 맞아. 그 사람이네. 그래서, 저 사람이 선우 오빠 외삼촌이라고?”여름은 가슴을 쳤다. 열이 뻗쳐서 가슴이 아팠다.“저기요, 네가 착각하는 바람에 난 혼인신고까지 해버렸다고. 내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최하준 그 독사 같은 남자의 독에 중독돼서 미쳐버릴
변호사 사무소.이지훈이 점심을 먹고 산뜻한 기분으로 들어왔다. 최하준의 사무실을 지날 때 마침 보조사무원 하나가 커피잔을 들고 들어 가려던 참이었다.“최변은 점심에도 안 쉬나 봐요?”이지훈이 보조에게 물었다.“네. 새 의뢰건 파일 보고 계세요.”사무 보조원이 소곤소곤 말했다.“최 변호사님이 요즘 의뢰를 부지런히 받으시더라고요. 경제적으로 힘드신가? 전에는 끽 해야 한 달에 두어 건 받으셨는데 요즘은 막 4건씩 받으세요. 그래서 너무 바빠서 쉬는 시간에도 계속 일하시는 거예요.”이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천하의 최하준이 돈이 없다고?한 나라의 왕이 돈이 없으면 없었지 최하준 돈이 마를 리 없지.집에 몇 대를 써도 못 쓸 돈을 쌓아두고 있는데.집이 텅 비어 있으니 돌아가기가 싫은 거야. 곧 죽어도 그걸 인정을 안 하네.’“그건 저 주시고 가보세요.”이지훈이 커피를 들고 들어갔다.“거기 둬.”최하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이지훈이 한숨을 쉬었다.“아이고, 오늘 TH랑 한주 약혼식 날이잖아. 거기 다녀온 친구가 그러는데 식장 스크린에 여름 씨하고 한선우의 달달한 연인 시절 사진이 다 올라갔다더라. 거기 있던 사람들이 여름 씨가 벌인 짓이라고 한대. 그걸로 또 어지간히 괴롭힘을 당했나 보더라.”‘한선우랑은 달달한 투샷이 있었어?나랑도 그런 걸 찍었던가? 한 장도 없잖아!’최하준이 싸늘한 시선을 들었다.“몇 번을 말해. 나한테 그 사람 얘기하지 말라니까. 죽든 살든 알 바 아니야.”이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듣기 싫으면 말을 끊던지, 다 듣고 나서 아닌 척하긴.’“그러지 뭐, 난 친구가 보내준 영상이나 봐야겠다..”이지훈은 휴대 전화를 열었다. 마침 여름이 테이블에 올라간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최하준이 이지훈의 휴대 전화를 뺏어서 내동댕이 치려다가 그 안에서 들려오는 여름의 고함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바보같이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는데 난리 치고 반박할 줄도 아네.그런데 정말 한선우랑 사귀었다고?사귀
“당연히 안 하겠지. 온갖 못된 수작은 나한테 다 부렸거든.”최하준이 냉소적으로 내뱉었다.이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이건 그냥 대놓고 꽁냥자랑인가?그게 자랑이냐? 막상 여름 씨는 그렇게 너를 신경 쓰지도 않는데?’이지훈은 속으로만 욕을 한 뒤에 말했다.“전에 그 집 사람들이 한 짓을 봤을 때 오늘 그렇게 망신을 당했으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지난번에는 감금해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이번에도 제수씨 위험에 빠지진 않는지 살펴봐.”최하준은 계속 자료만 들여다봤다.“됐어.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기 전까지 꼼짝도 안 할 거야.”그러더니 잠시 후에는 이렇게 말했다.“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랬다고, 그 집에서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이번 영상 싹 풀어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절대 삭제 못 하게 조치하고.”“그, 그래.”이지훈이 무기력하게 뱉었다. ‘무릎 꿇고 빌지 않으면 안 도와주겠다더니 바로 말 바꾸는 거 봐라.’“빨리!.”최하준이 언짢은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이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발신자가 여름이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전화를 보자 답답했던 마음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사정이 이쯤 되면 도와 달라고 전화할 줄 알았지.”최하준이 휴대 전화를 가리키며 비웃음을 흘렸다.이지훈은 지난 번에도 그렇게 말했다가 당하지 않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그러나 최하준이 신이 난 모습을 보고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안 받아.”최하준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휴대 전화를 그냥 테이블에 던졌다. 그러나 눈은 계속 곁눈질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20초쯤 울리고 곧 전화가 끊어지려고 할 즈음 잡아 들었다.“뭐, 이번에는 그 집에서 정말 목숨을 노릴지도 모르지. 살려달라는 전화를 안 받았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잖아?”이지훈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저 꼴을 친구들 단톡방에 올려서 다 보여줘야 하는데 말이야….’“뭘 봐? 빨리 가!”최하준이 언짢다는 듯 눈을
최하준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젠장, 구청 가는 게 이렇게 기쁠 일이냐?아, 드디어 날 보게 돼서 기쁜 건가?그거군.그날 그러고 나갔는데 이제 돌아오려니 면목이 없겠지.그러니 일단 핑곗거리를 찾아낸 거야. 이따가 말투를 좀 부드럽게 해야겠다.’어쨌든 요즘 밥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최하준은 제대로 밥도 먹은 적이 없었다.‘뭐, 가는 길에 케이크나 하나 사가지고 가자.’최하준은 치즈케이크를 사들고 갔다.여름은 지난번에 최하준이 사준 하얀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겉에는 베이지색 모직코트를 입었다. 오후의 찬란한 햇살을 받으니 깨끗한 피부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최하준의 입술이 섹시하게 슬쩍 올라갔다.‘이렇게 예쁘게 차려 입고 구청에 오다니, 정말 이혼을 하려는 건지 내 마음을 돌리려는 건지 너무 뻔한 스토리 아냐?’최하준이 케이크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최하준을 본 여름의 눈이 반짝 빛났다.“가요!”하더니 여름은 앞장서서 구청으로 들어갔다.최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 상상했던 것과 상황이 좀 달랐다.“잠깐.”‘너무 상황 파악 못 하는 거 아닌가? 케이크까지 들고 왔으면 체면은 살려준 거잖아?’“왜요?”여름이 의아하다는 듯 돌아봤다.“왜 그러겠습니까? 강여름 씨, 나는 기회를 줬습니다.”여름은 최하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멍하니 있었다.“이혼하기로 했잖아요? 빨리 들어와요. 오후에는 회사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최하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여름을 가만히 보았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진심인가?진짜 이혼하고 싶은 거야? 대체 왜?’그런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내가 언제 이혼하겠다고 했습니까?”여름은 기가 막혔다.“아까 전화로….”“내가 여기 와서 이혼하겠다는 말을 한 건 아닐 텐데요?”최하준이 얼음처럼 차갑게 웃었다.“강여름 씨, 날 뭘로 보는 겁니까? 결혼이라는 게 당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겁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도 필사
최하준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저 픽 웃을 뿐이었다.“내 말 한마디면 동성에서 내 이혼 수속 밟아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못 믿겠으면 한 번 해보시죠. 그렇지만 그때가 되면 3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안 놔줄 겁니다.”여름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최하준을 돌아봤다. 솔직히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보통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이지훈 같은 유력가와 이상하리만치 친하고,귀족적이라고 하기에는 슈퍼 카를 모는 것도 아니고 초호화 별장에 살지도 않는다. “내가 그런 협박에 넘어갈 것 같아요? 설사 평생 이혼을 못 한다고 해도 당신 같은 사람이랑은 한시도 같이 못 살아요.”여름은 냉랭하게 말하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어쨌든 이제 여름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겁날 게 뭔가!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여름을 보니 최하준은 케이크를 집어던지고 싶었다.‘저 사람이 진짜!나랑 결혼하고 싶은 여자들이 한둘인 줄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이혼이라고? 꿈 깨시지.’******르 파코 호텔.파티가 끝나고 양가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 한선우의 얼굴이 창백했다.겨우 몇 시간이 지났는데 점심에 여름이 연회장에서 소동을 벌인 영상이 벌써 이렇게 퍼져나갔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게다가 이상하게 빨리 퍼지고 있어 몇 시간 만에 1억 뷰를 기록하고 있었다.“네 녀석이 뒤처리도 똑바로 못하는 바람에 내 체면까지 다 구겨져 버렸다.”한준성 회장이 화를 내며 가버렸다.“내가 니 아버지께 잘 말해 보마.”양수영이 입술을 깨물며 급히 따라 나갔다.남겨진 한선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섰다.“자기야….”강여경이 걱정스럽게 한선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선우가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오늘 네가 영상 바꿔치기한 거 아니야?”한선우는 이미 호텔 쪽에 문의해 보았다. 그러나 홀 매니저는 영상실 CCTV 화면이 이미 지워졌다고 말할 뿐이었다.게다가 이미경은 새로 들어온 간병인이었다. 그러
강태환은 인상을 쓰고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20분 뒤.화장실. 이미경이 조심스럽게 강여경의 옆에 나타났다. 불안해 보였다.“오늘 일로 회장님이나 사모님이 저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저는 억울합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잖아요.”강여경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주며 말했다.“됐어요. 이미 의심은 내가 다 해결해 놨어요. 이거 가져다 쓰시고 입만 꾹 다물어요. 오늘 일은 아무도 알아선 안 돼요.”이미경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앞으로 분부하실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강여경의 입꼬리가 표독스럽게 쓱 올라갔다.“하나 있기는 한데…. 할머니 잘 봐주세요. 좋아지지 않아야 해.”이미경이 나이 어린 아가씨의 잔인함에 몸을 떨었다.그러나 받을 돈을 생각하고 주저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문제없습니다. 아 참, 약혼 축하도 못 드렸네요.”“그저 약혼한 거 가지고, 뭘.”강여경의 얼굴은 사뭇 싸늘했다. 강여경은 한선우가 한주그룹 상속자 자리를 놓쳤는데도 결혼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 7시 반.여름은 침대에서 늦잠을 자고 있었다.최하준의 집에서 나와 아침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갑자기 휴대 전화가 울렸다.통화버튼을 누르니 장 반장의 초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큰일입니다. 지금 막 현장에 도착했는데 별장에 수도관을 안 잠가서 밤새 물이 샜어요. 지금 집이 다 잠겼습니다.”여름이 벌떡 일어났다.“기다리세요. 제가 바로 갈게요.”급히 현장으로 가보니 별장 안의 물이 넘쳐서 계단으로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막 수도와 전기 배관을 했는데 물이 잠겨버린 것이다.여름이 온 것을 봤을 때 장 반장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끝장이에요, 망했어요. 방금 배관을 살펴봤는데 죄다 침수돼서 다 망가졌습니다.“어떡합니까. 양 대표님이 책임을 물을 거예요. 저는 보상할 능력도 안 됩니다. 어젯밤에 저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