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환은 인상을 쓰고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20분 뒤.화장실. 이미경이 조심스럽게 강여경의 옆에 나타났다. 불안해 보였다.“오늘 일로 회장님이나 사모님이 저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저는 억울합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잖아요.”강여경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주며 말했다.“됐어요. 이미 의심은 내가 다 해결해 놨어요. 이거 가져다 쓰시고 입만 꾹 다물어요. 오늘 일은 아무도 알아선 안 돼요.”이미경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앞으로 분부하실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강여경의 입꼬리가 표독스럽게 쓱 올라갔다.“하나 있기는 한데…. 할머니 잘 봐주세요. 좋아지지 않아야 해.”이미경이 나이 어린 아가씨의 잔인함에 몸을 떨었다.그러나 받을 돈을 생각하고 주저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문제없습니다. 아 참, 약혼 축하도 못 드렸네요.”“그저 약혼한 거 가지고, 뭘.”강여경의 얼굴은 사뭇 싸늘했다. 강여경은 한선우가 한주그룹 상속자 자리를 놓쳤는데도 결혼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 7시 반.여름은 침대에서 늦잠을 자고 있었다.최하준의 집에서 나와 아침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갑자기 휴대 전화가 울렸다.통화버튼을 누르니 장 반장의 초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큰일입니다. 지금 막 현장에 도착했는데 별장에 수도관을 안 잠가서 밤새 물이 샜어요. 지금 집이 다 잠겼습니다.”여름이 벌떡 일어났다.“기다리세요. 제가 바로 갈게요.”급히 현장으로 가보니 별장 안의 물이 넘쳐서 계단으로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막 수도와 전기 배관을 했는데 물이 잠겨버린 것이다.여름이 온 것을 봤을 때 장 반장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끝장이에요, 망했어요. 방금 배관을 살펴봤는데 죄다 침수돼서 다 망가졌습니다.“어떡합니까. 양 대표님이 책임을 물을 거예요. 저는 보상할 능력도 안 됩니다. 어젯밤에 저는
“나중에 가끔 와서 지내실 수도 있는데 한 번 봐야지.”하더니 양 회장이 갑자기 지팡이로 앞을 가리킨다.“아니, 안에서 물이 새잖아?”양유진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양수영도 ‘어머나’하는 소리를 냈다.“집이 온통 물바다가 된 것 같습니다.”양유진도 보고 심각한 얼굴로 여름을 쳐다보았다.“집에 왜 물이 찼죠?”이때 장 반장이 끼어들어 더듬거렸다.“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젯밤에 분명 제가 수도 밸브를 잠갔는데 밤새 물이 새서….”양수영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소리쳤다.“모르다니 무슨 소리예요? 별장 공사를 그쪽에 일임했는데. 이제서 일이 벌어지니까 책임을 미루는 건가요? 세상에, 집 이거 괜찮을까? 벽에 물들어갔으면 어떡해?”양 회장은 화가 나서 지팡이를 휘둘렀다.“너는 뭔 이따위 너절한 인테리어 회사를 불렀냐? 어서 경찰 불러.”장 반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곧 무릎이라고 꿇을 참이었다. 여름이 그걸 보고 바로 장 반장을 잡아 올렸다.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신고, 좋습니다. 마침 누가 우리 도하건축을 모함하는지 조사해달라고 할 참이었습니다.”양수영이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얘, 지금 책임 전가 하는 거니? 공사 책임자로서 일이 잘못되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별장 열쇠도 너희가 가지고 있고, 비밀번호도 너희밖에 모르잖니?유진아, 얘가 마음에 든다고 별장 공사를 맡긴 것까지는 내가 이해하겠다만, 책임 소재는 확실히 해야지.”“뭐? 유진이가 쟤를 좋아해?!”양 회장은 화가 나서 쓰러질 뻔했다. “쟤는 선우의 전 여자친구가 아니냐? 외삼촌이 되어 가지고 조카 녀석의 전 여자친구랑 어울리다니, 이런 망신이 있나?”양수영이 양 회장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애가 젊고 예쁘니 남자들이 보면 혹하는 것도 정상이죠.”양유진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여름 씨가 저를 어쩌려고 한 적은 없어요. 좋은 여자예요.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아주 홀랑 넘어갔구먼. 쟤가 집 꼬라지를 어떻게 해놨는지 봐라,
양유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젯밤 누나의 행동이 수상쩍었다. 갑자기 집에 오더니 어쩐 일인지 바로 다음 날 아침 별장의 인테리어 상황을 보러 가자고 아버지에게 말했던 것이다.“이번 일은 제 쪽 사람의 문제입니다. 강 감독하고는 무관하니 일단 가서 쉬세요. 별장은 다시 안전 검사를 받고 공사를 지속할 수 있을지 연락드리겠습니다.”양유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대표님 믿고 가보겠습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 속상하시겠어요. 유감입니다.”여름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장 반장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별장에 남은 양 회장은 멍하니 서 있었다. 양유진이 와서 말했다.“일단 집으로 모셔다 드릴게요.”차에 타면서 양유진이 양수영을 돌아보며 말했다.“누나, 선우 더러 우리 회사로 좀 오라고 해주세요.”동생이 이미 다 눈치챈 것을 알고 양수영이 당황했다.******1시간 반 뒤.진영그룹 회장실.한선우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 빈집에 CCTV까지 설치했을 줄은 몰랐네. 미쳤냐고?’“삼촌….”통유리 밖을 바라보고 서 있던 양유진이 돌아서더니 ‘철썩’하고 한선우의 뺨을 내리쳤다.귀가 다 웅웅 울릴 지경이었다.삼촌에게 따귀를 맞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왜 이러세요?”한선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삼촌은 언제나 자신을 제일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든 도와주고 감싸주고 보호해 주던 사람이었다.“왜 그런 것 같니?”양유진이 잔뜩 실망한 눈빛을 보냈다.“여자한테 복수하겠다고 내 별장을 물바다로 만들어? 네가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런 짓을 해?”한선우는 반감이 확 올라왔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쳤다.“강여름 때문이에요? 걔 때문에 절 때린 거예요?”“입 다물어.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좋아. 우리 그룹에서 너희 한주와 내년부터 진행하기로 했던 MOU는 전면 중단하겠다. 일전에 투자했던 자금은 전부 회수할 거야. 이제부터는 알아서 해라.”“그러시면 안 되죠.”한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준성이 노기 띤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이 망할 놈의 자식! 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외삼촌한테도 밉보였냐? 이제 진영그룹에서 자금을 철수한단다! 당장 기어들어 와!”******다음 날 아침, 여름은 양유진의 전화를 받았다.“같이 식사하고 싶은데 시간 있으신가요? 별장 문제로 상의 좀 하고 싶은데요.”“알겠습니다.”“식당 위치를 모를 테니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양유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름은 양유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12시 정각에 양유진의 차가 1층에 나타났다.여름이 앉자 양유진이 밀크티를 건넸다.“미안해요. 어제 그런 일을 당하게 해서.”밀크티는 딱히 비싼 것도 아니었으므로 여름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측근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마음이 안 좋으시겠어요.”“여름 씨 일 처리 정말 현명했습니다. 선우에게 너무 실망했어요. 전에는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눈에는 한선우에 대한 괴로움도 담겨있었지만, 한편으로 여름을 향한 칭찬도 참을 수 없었다.여름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한때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따스한 햇살 같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양유진이 차를 몰았다.“우리 진영과 한주의 업무협업도 모두 취소했습니다.“선우 오빠에게 적잖이 타격이 되겠는데요?”여름은 한숨을 쉬었다. 한선우가 그렇게나 원하던 한주그룹의 후계자 자리도 불안해졌을 터였다.갑자기 서글퍼졌다.돌고 돌았지만 결국 뜻밖에도 여름의 쓰레기 같은 전 남친을 손봐 준 것은 진짜로 외삼촌이 되고 말았다. 최하준이 아니라.한선우가 한주그룹을 계승하지 못하게 되어도 강여경이 그와 함께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강여경이 한선우를 차버리고 다른 상대를 잡아버린다면 얼마나 흥미로울까.“기분이 좋지 않아요?”내내 여름이 한숨을 쉬다가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다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귀여웠다.“좋기는 한데 아마도 어머님께서 또 찾아와서 부탁하시겠죠.
‘우어어, 신이시여. 어떻게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한선우의 외삼촌이 날 사랑한다는데, 저는 이미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다고요!’게다가 지금 여름은 온 마음이 상처투성이라 한동안은 도저히 사랑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저, 죄송해요. 저, 저는 대표님을 그냥 편안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친구로는 곁에 있을 수 있어서.”양유진은 침울해졌지만 그래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괜찮습니다. 받아 달라고 고백한 건 아니니까요.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여름은 마음이 아팠다.“그렇지만 저는 지금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뭐, 왔으니 일단 식사하시죠.”여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레스토랑 밖 교차로에 스포츠카 한 대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보조석에 있던 최하준이 주의 깊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좌회전해, 길가에 있는 저 레스토랑에서 먹자.”“안 돼. 기 팀장이랑 약속 있잖아.”이지훈은 최하준이 뭘 보는지 시선을 따라가 보고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어쩐지 차 안 공기가 싸늘해진다 싶었더니 최하준의 질투심이 발동했던 것이다.“취소해 줘.”최하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지훈은 하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차를 돌렸다.두 사람이 레스토랑 입구에 나타나자 안내하던 직원이 흠칫했다.젊은 남자 둘이 레스토랑에 와서 밥 먹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저 두 사람 혹시, 그런 관계인가?’안타깝다는 표정을 얼른 숨기며 직원이 공손하게 물었다.“커플석으로 안내해 드릴까요?”“됐습니다.”최하준은 아무 표정도 없이 여름이 앉아 있는 곳으로 그대로 걸어갔다.다가가다 보니 여름이 다른 남자와 식사를 하는 게 확실했다.‘나에게는 한 번도 저렇게 환하게 웃어준 적이 없는데, 젠장!’“어라? 저 사람 진영그룹 양유진 대표 아니야? 전에 너한테 회사 일로 의논하고 싶다고 했던
‘미모야 더할나위 없지만, 성질은… 차마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 그러나 최하준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여름은 순간적으로 가방을 들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앗, 두 분….”양유진은 놀라서 일어나 두 사람과 악수했다.최하준에게 손을 뻗었을 때 최하준은 거만하게 눈썹을 위로 한번 쓱 올렸다.그대로 몇 초가 흐르면서 양유진은 민망해졌다. 아마도 자신과는 악수를 하지 않으려나 보다 생각할 즈음 최하준이 손을 뻗어 악수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기분이 별로라서요.”양유진은 최 변호사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특히 지난 번에는 진영그룹이 얽힌 소송을 한 건 맡아줬으면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잘 풀리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 법률사무소 쪽에서 없던 일로 하자고 했었다.그래서 양유진은 최하준에게 그리 호감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최하준은 법조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니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고 혹시나 나중에라도 있을지 모를 협력의 가능성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그래서 양유진은 웃으며 물었다.“누가 이렇게 언짢게 했을까요?”최하준은 힘줄이 선명한 손가락으로 장미를 잡아 돌렸다.“여자들은 이런 유치한 걸 좋아하나 보죠?”여름은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양유진의 점잖은 얼굴이 잠시 굳었다. 이 꽃은 방금 자신이 여름에게 준 꽃이었다. 그런데 ‘유치한 것’이라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누군가에게는 유치할 수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마음에 새길만한 것일 수도 있지요.”“아~ 어쩐지. 내가 이런 걸 잘 몰라서 우리 와이프가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구나.” 최하준의 눈 위로 기다란 눈썹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푸헙!”여름이 마시던 주스를 뿜었다.양유진이 급히 냅킨을 건넸다. 여름은 인사를 하며 받아 들었다.“고맙습니다.”최하준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고 여름을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여름은 올라오는 화를 억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가뜩이나 최하준과 약속 한 번 잡기도 어려운데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여름이 거절할 수 있을까? 하준의 악랄한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다.“별로 반기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두 분을 방해한 건가요?”최하준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닙니다.앉으시지요.”양유진이 메뉴를 갖다 달라고 직원을 불렀다.네 사람이 끼어 앉아서 먹으려는데 꽃까지 놓여 있으니 좁았다.여름이 자기 쪽으로 꽃을 당기려는데 최하준이 선수 쳐서 꽃을 들고 직원에게 건넸다.“이것 좀 저쪽으로 치워줘요. 내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여름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평소 여름이 꽃을 사다 집을 꾸밀 때 한 번도 알레르기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알레르기가 있었군요.”양유진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네. 특히 분홍색 꽃 종류는 더 그렇습니다.”최하준은 태연하게 메뉴를 펼쳐 유유히 주문을 이어갔다.주문이 끝나자 양유진이 화제를 전환했다.“사실 제가 계속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최 변호사, 전에 왜 제 의뢰를 반려하셨는지요?”이지훈은 최하준이 너무 심하게 말을 할까 봐 얼른 나섰다.“그때 스케줄이 겹쳐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케이크를 먹던 여름은 그제야 최하준의 직업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변호사였구나. 실력은 꽤나 좋은가 보지.’자신이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그제서야 알았다.사람들이 말하는 ‘결혼하면 안 되는 상대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게 변호사다.변호사와 이혼할 때는 ‘속옷 한 장도 못 건지고 몸만 빠져나와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이 도리를 따질 때 변호사는 빠져나갈 법적 허점을 파고든다고.어쩐지 그렇게 자신 있게 10년이 지나도 이혼은 꿈도 꾸지 말라고 큰소리치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대체 내가 어떤 인간을 건드린 거야?어머, 잠깐, 이 인간이 무슨 짓이지?’최하준이 테이블 아래서 여름의 다리를 문지르고 있었다.여름은 얼굴이 빨개져서 최하준을 걷어찼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들고 벌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최하준이 담배연기를 후 불었다.담배꽁초를 근처 휴지통에 지긋이 눌러 끄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여름에게 다가왔다.“나 좀 봅시다.”최하준이 여름의 손목을 잡고 레스토랑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갔다. 여름은 최하준에게 이끌려 술 창고 뒤편으로 갔다. 컴컴한 곳이었다. 남자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위험한 기운이 숨도 못 쉴 만큼 둘을 압도했다.“뭐 하는 거예요?”여름이 최하준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내가 묻고 싶은데요.” 최하준이 밀어내는 여름의 손을 낚아챘다. 손이 뜨거웠다.“양유진과 시시덕거리니 즐겁습니까? 당신, 유부녀라는 거 잊었습니까? 이혼 운운하더니 벌써 새 애인이 생겼나 봅니다?”최하준이 모욕적으로 쏘아붙였다.“최하준 씨, 말씀이 지나치시네요.”가녀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유진 대표님과는 밥만 먹으러…”“밥만 먹으러 온 사람이 꽃을 줍니까? 그리고 밥 먹으러 왔으면 밥만 먹을 것이지 저 사람한테 왜 그렇게 활짝 웃는 겁니까?!”최하준은 말을 하면서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름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왜 더 화가 나는 것일까.여름은 머리가 복잡해지고 가슴은 답답해졌다.“능력 있고 예쁘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요? 이런 내가 좋다는데 그게 이상해요? 있는 매력을 없앨 수도 없고.”최하준이 피식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려고 하자 여름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최하준 씨에게 내가 별볼일 없고 뻔뻔한 여자로 보인다고 해서, 내가 먼저 남자를 유혹해서 그 남자들이 마음을 주는거라 착각하지 마세요. 어쨌든 당신과는 이혼할 거예요.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최하준 당신하고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같이 있고 싶지 않으시다?”최하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냉소를 지었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침대에 들어오고 싶어 안달이더니, 이제는 같이 있고 싶지 않다? 이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지금?”그 날의 일을 떠올리자 여름은 속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