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여름이 고개를 들었다.“여러분, 나는 애초에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처음 돌아와 미팅을 했을 때 분명히 말씀드렸죠. 이 회사는 최하준이 것이아니라고요. 하지만 여러분은 어땠나요? 최하준과 백지안을 받들어 모시기 바빴지요.며칠 전 회사 로비에서 최하준과 백지안이 내게 삿대질 할 때 여러분은 두 사람을 핥느라 바쁘시더군요. 저더러 꺼지라고 한 분까지 있었죠? 그렇게 최하준과 백지안이 좋으시다니 그 두 사람에게 가시면 되겠습니다.”“우리도 다 회사를 생각해서 그 두 사람에게 밉보이면 안 되겠다고 판단을 한 거지.”구 이사가 뻘쭘해서 말을 받았다.“진작에 당신이 다른 건설사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리가 그렇게까지 강 대표에게 야박하게 안 굴었지. 다 회사를 위해서 그런 거라니까.”“그렇지. 게다가 요 3년 동안 우리는 물불을 안 가리고 회사를 위해서 뛰어 다녔는데 그 동안 당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 말이야?”“오늘 주식을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걸어서 이 문은 못 나갈 줄 알라고.”“그래요? 한번 볼까요? 무슨 수로 못 나가게 할 지?”여름이 웃었다. 이때 갑자기 입구에 장정 20여 명이 나타나 이사진을 둘러쌌다.이사는 젊어야 40~50대였다. 보디가드들의 기세를 보고는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왕 이사가 눈알을 굴리더니 무릎을 꿇었다.“강 대표, 우리에게도 살길을 좀 열어줘. 이 나이에 배당금이라도 나눠 줘야 우리도 먹고 살 게 아닌가?”“그래, 앞으로 강 대표 말을 잘 들을 테니까.”“서로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자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여름은 미간을 문질렀다.‘세게 나오는 게 안 먹히니 이제는 인정에 호소하시겠다?’“됐어요. 왕 이사님, 어젯밤에도 백지안에게 선물 바치러 다녀오셨죠? 그 연세에 매일 백지안에게 다녀오는 건 안 피곤하세요? 그렇다고 백지안과 업무 관련 내용을 이야기 나누시는 것 같지도 않고. 보통은 만나서 제 뒷담화 하기 바쁘시더군요.그리고 구
하 팀장이 그러고 나가자 엄 실장은 부아가 치밀었다.“저런 인간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됐어요. 내가 이미 처리했거든.”여름이 덤덤하게 말했다.------30분 뒤.하 팀장이 물건을 챙겨서 막 문을 나서는데 경찰이 와서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공금횡령 혐의가 있습니다. 같이 서로 가주시죠.”“아니거든요. 전 아니에요.”하 팀장이 소리를 질렀다. 다들 본체만체 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경찰에 고발을 당했다면 이건 얘기가 달랐다. 이제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특히나 백지안이 뒤를 봐주는 동안 하 팀장은 뒷돈을 적잖이 해먹고 있던 참이었다.“시끄러워요.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죠. 갑시다.”곧 하 팀장이 끌려갔다는 소문이 회사에 쫙 퍼졌다.엄 실장은 그 얘기를 듣고 바삐 움직이고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저녁.스포츠카 한 대가 회사 앞에 섰다.여름이 차에 올라 오랜만에 보는 선배의 얼굴을 보고 다정하게 웃었다.“오랜만이에요, 선배.”예전에 동성에서 강태환 부부에게 막혀서 동성 건축계에서 갈 곳 없이 막막한 상황이 되었을 때 도재하가 일자리를 주었던 은혜는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었다.“어째 점점 더 멋있어지네. 3년 못 본 동안에 완전 몰라보게 근사해졌는걸.”도재하가 호탕하게 웃었다.“가자. 합작을 축하해야지. 내가 한 턱 쏠게.”“제가 대접해야죠. 이번에 전국에서 우리 화신과 협력하게다고 흔쾌히 나서준 건 딱 한 회사밖에 없었거든요.”여름이 진지하게 말했다.“선배는 제 은인이세요.”“됐어. 다른 사람들은 네가 헤이즐 건축 디자인 이사인 걸 모르니까 그렇지.”도재하가 장난스럽게 받았다.“쉿쉿!”강여름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비밀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까르르 터져버렸따.1시간 뒤 차는 어느 한옥으로 들어섰다. 소담한 풍경이 펼쳐졌다.뜰에는 수퍼카가 몇 대 서 있었다.여름은 이런 고급 요리집이라면
도재하가 웃었다.“잊어버렸구나. 동성에 있을 때 회사를 설립하고 요 몇 년 같이 일하면서 친해졌어. 이번에 너 만난단 얘기 듣고 같이 곧 죽어도 따라온다잖아.”“서머, 정말 너무해. 난 진짜 자기가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고. 연락도 안 주고, 정말 내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고. 죽음을 위장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이 오빠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내가 최양하보다 더 깔끔하게 처리해 줬을 텐데.”이지훈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최양하는 또 어떻게 아세요? 이 일을 조사한 거예요?”여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아, 지난 번에 단톡방에서 애들이 얘기하더라고. 난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보기만 했어. 솔직히 자기 없어지고 나서는 걔들하고 어울리기도 싫더라고.”이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감탄한 듯 말했다.“하준이랑 영식이는 백지안만 싸고 돌지. 주혁이는 시아만 끼고 있지. 망할, 시아가 대체 뭐가 좋다고. 옛날에는 그냥 보잘 것 없는 가수였는데 이제는 아주 대스타로 떠받들어지더라고. 다들 보는 눈이 그렇게 없나”“그러게 말이에요.”여름은 저도 모르게 백소영을 떠올렸다.그 차분하면서도 세심하던 친구.‘어딜 봐도 소영이가 그 표리부동한 시아보다 훨씬 낫지.휴우, 이주혁은 정말 보는 눈이 없다니까.’“그래서 서울을 올라와도 걔들하고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만날 때마다 백지안 아니면 시아를 데리고 나오니까. 그 둘을 보고 있으면 난 영 거북해서 말이지.”여름이 푸흡하고 웃었다.“이 대표님, 존경스럽네요. 어쩜 그런 쓰레기들 사이에서 그렇게 안목을 지키고 계신지.”“에헤이! 내눈에는 나쁜 놈 필터가 있어서 다 거른다고.”이지훈이 하하 웃었다.“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앉자. 여기 한정식이 아주 끝내주거든. 송이랑 여러 가지 버섯을 아주 잘 쓰는 집이야. 향기가 얼마나 좋다고.”곧 직원에 상을 차려냈다. 여름은 버섯탕을 맛보고는 정말 맛이 좋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맛있어?”이지훈이 득
돌아보니 여름이 훤칠한 젊은 남자와 걸어나왔다. 남자는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짧은 머리는 살짝 웨이브가 있는 것이 심플한 차림인데도 상당히 패션감각이 돋보였다.남자의 손에는 베이지색 바람막이가 들려있었다. 딱 봐도 여름의 것이었다.‘이 인간이… 아직 이혼서류에 도장도 안 찍고 이 남자 저 남자랑 어울려 다니고 있어?’순식간에 하준의 시선에 한기가 어렸다.이때 여름이 하준 일행을 보게 되었다.여름이 눈을 깜빡이더니 아무말 없이 이지훈을 쳐다봤다.이지훈인 곤란한 듯 코를 쓱 비볐다.갑자기 백지안이 입을 열었다.“지훈 씨, 아까 말하던 친구라는 게… 저 사람들이었어요?”“아, 어.”이지훈이 끄덕였다.“서머가 돌아왔는데 밥은 한 번 먹어야지. 너희들 별로 사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따로 만나려고 했지. 우리 먼저 간다.”이지훈이 손을 흔들며 여름 쪽으로 걸어갔다.시아가 조그맣게 말했다.“다들 아는 사이인데 같이 클럽에 가서 놀면 재미있을 텐데.”다들 시아를 돌아봤다. 이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는데 하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따.“안 될 것도 없지. 마침 내가 강 대표한테 이 험난한 비즈니스 계에서 어떻게 죽음 직전에 살아 돌아왔는지, 대체 무슨 수로 그 큰 회사들과 계약을 맺었는지 궁금해서 한 수 배우고 싶던 참이거든. 이렇게 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한 턱 내야 하는 거 아닌가?”여름이 느른하게 흘겨보더니 입을 열려다 말고 속트림을 했다.“아우, 죄송해요.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아, 방금 뭐라고?”“……”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이지훈이 감탄스럽다는 눈으로 여름을 보고 있긴 했지만 하준의 차가운 얼굴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분노의 기운을 뿜어냈다다들 하준의 힐난이 쏟아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하준이 웃었다.“화신 상장가가 한껏 오르니 자기가 뭐라고 된 줄 아나 보지? 강여름, 아무리 그래 봤자 화신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야.”여름이 귀를 슬쩍 만졌다.“아 무슨 소린지 알겠다. 당신한테는 내가 확실히 고맙긴 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가 해변 별장에 도착했다.“먼저 들어가. 나는 누굴 좀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아까까지 접대 있다고 말 안 했잖아?”백지안이 농담처럼 물었다.“갑자기 생각이 나서.”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백지안은 이를 깨물고는 할 수 없이 들어갔다. 몇 마디 하려고 돌아섰는데 하준의 차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백지안은 발을 굴렀다. 어쩐 일인지 아무래도 하준이 여름을 찾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30분 뒤, 스포츠카가 굴 전문점 앞에 멈췄다.‘지훈이 굴을 먹으러 간다고 했겠다? 서울에서 굴 좋아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집이 제일 유명하지.십중팔구 이 집에 왔을 거야.’하준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른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하준이 고개를 들어 바 가운데를 보았다. 굽실굽실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높은 바 의자에 앉아 노래하고 있었다. 다리 하나는 발걸이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연한 청바지에 흑백 뮬이 가느다란 발목을 더 예쁘게 보이게 해주었다.아스라한 바의 조명이 여름을 비추고 있어서 밤에 핀 장미를 보는 듯했다. 치명적인 매력이 한껏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특히나 가볍게 튕기는 기타가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남자들은 그녀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고여자들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쿨함에 소리지르고 있었다.“자, 다 같이!”여름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손에 든 기타의 선율이 빨라졌다. 당장 무대에 서는 가수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실력이었다.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환한 표정에 눈에서는 별이 반짝이듯 빛나고 있었다.하준의 두 다리가 붙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이 순간 여름은 무대에 선 스타 같았다. 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하준은 여름이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몰랐다. 아이돌이라는 시아보다 실력이 나은 것 같았다.기타를 치는 줄도 몰랐다.특히나 여름이 웃으면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운지
“남친인가 보다. 완전 부럽다. 저렇게 여신 같은 여자랑 사귀다니.”“그러게 말이야. 난 왜 저런 복이 없냐고.”“아우,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춥지. 에어컨 온도 너무 낮은 거 아냐?”“그러고 보니 나도 좀 춥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다가갔다.막 자리에 앉은 여름이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름의 동작을 제지했다.잔에 든 와인이 여름의 하얀 티셔츠에 주르륵 쏟아졌다.하필 젖은 부분이 가슴 부위라 몸의 곡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여름이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 보았다. 하준의 차가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최하준, 왜 이러실까, 진짜!”여름이 하준을 노려보고는 얼른 휴지를 집어 와인의 흔적을 닦아내려고 노력했다.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색은 선명하고 티셔츠를 투명하게 보이게 만들어 더욱 민망해졌다.“이거 입어.”도재하가 얼른 여름의 바람막이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하준이 도재하의 손길을 막으며 묵직한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최 회장, 여자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이건 너무 오지랖 아닙니까?”도재하가 가만히 웃었다.“내가 왜 이러는지는 강여름에게 물어 보시지.”하준이 바람막이를 잡아채서 여름에게 던졌다.“입어, 단추 잠그고!”그렇게 말하는 하준이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안에 입고 있는 속옷이 자신이 사준 것이란 생각을 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무슨 팔자가 진짜 이딴 인간을 만나는 거냐고.”하준의 무례한 말투에 여름은 화가 울컥 올라왔다.“나도 그게 궁금하군 그래.”단추 하나가 안 잠겨 목선이 드러나 보이자 하준은 기분이 안 좋은 듯 손을 뻗어 마지막 단추 하나를 잠가버렸다. 손가락에 닿는 실크 같은 여름의 피부가 주는 감촉에 심장이 떨렸다.‘이 여자는 대체 전생에 뭐였을까? 여우?’“어? 하준아. 여기는 어떻게 왔어?”이때 접시 가득 굴을 들고 돌아오던 이지훈이 이 장면을 보고는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지훈은 바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하
이지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에이, 하준아. 진정해. 농담하는 거잖아.”“전혀 농담이 아닌데.”도재하가 입꼬리를 올렸다.계속되는 도발에 하준의 눈이 가늘어 지더니 냉소를 지었다.“아쉽지만 강여름은 그럴 생각이 없어. 지금 이혼을 안 해주는 건 강여름 쪽이거든.”그러면서 하준은 여름을 자신에게로 확 잡아당겼다. 여름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말해 봐. 나랑 이혼하고 싶은지 아닌지.”여름이 픽 웃었다.“이혼하고 싶은데.”하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름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이런 식이다? 며칠 전까지 죽어도 이혼 안 해주겠다고 난리더니 남자가 생겼다고 이렇게 밀어낸다고?’“이혼을 하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아니야.”여름이 말을 이었다.“당신이랑 백지안이 날 얼마나 괴롭혔어? 3년 만에 돌아와서 보니 백지안은 여전히 끊임없이 사람 환장할 못된 짓에 여념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FTT회장 사모 자리를 내놓을 줄 알아? 웃기지 마셔.”도재하가 바로 술을 한 잔 따르더니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널 응원해. 난 기다릴게.”“고마워요.”여름이 술잔을 들려고 했다.그러나 술잔을 미처 들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을 홱 잡아챘다.“따라와.”“안 됩니다. 이제 막 술도 한잔하고 재미있어 지려는 참인데.”도재하가 여름의 다른 한 손을 잡았다.“놔. 내 성질 건드리면 같은 업계가 아니라서 내가 아주 죽여버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회사에 크게 타격은 미칠 수 있으니까.”하준이 무섭게 경고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을 튀기자 여름은 할 수 없이 도재하에게 부드럽데 말을 건넸다.“선배, 미안해요. 내가 다음에 쏠게.”“다음은 없어.”하준이 덧붙였다.“……”도재하가 피식 웃었다. 하준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했다.“그래, 다음에 먹자.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전화해. 난 영원히 네 편이니까.”“고마….”여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부여잡고 나가버렸다.이지훈이 도
여름이 이렇게 대범하게 덤빌 줄 생각도 못했던 하준은 제대로 한 대 맞고 말았다.차가 크게 휘청했다.“강여름, 사는 게 지루해?”하준은 홧김에 여름의 손에 든 뮬을 빼앗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차를 운전하고 있지만 않았으면 여름을 직접 손이라도 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누가 그 따위 소리 지껄이래?”부아가 난 하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최하준, 당신이 버렸으니까 내 신발 물어내.”하준이 코웃음을 쳤다.“왜? 신발 사주면 또 지안이에게 가서 내가 신발 사줬다고 떠들면서 상처 주려고? 어디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진심으로 백지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날 풀어줘. 밤중에 나랑 얽혀서 이러고 있지 말고.”여름이 앞을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지금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당신 같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어디 들어가서 얌전히 있을 필요가 있어. 어디 유부녀가 바람이나 피고 다니려고 들어?”여름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또 날 가두려고?”“자업자득이야.”하준이 버럭 소리질렀다.3년 전 감금되었을 때의 고통이 다시 하나하나 살아났다.여름은 순간적으로 실성한 듯 핸들을 마구 잡아 돌렸다.“미쳤어? 놓지 못해?”하준은 한 손으로 있는 힘껏 여름을 밀어냈다.그러나 여름은 3년 전처럼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서로 잡아 당기는 바람에 핸들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결국 여름은 하준의 팔을 물었다. 여름은 틈을 노리고 핸들을 화단으로 돌리면서 발로는 엑셀레이터를 확 밟았다.“놔! 이거 놔!”아픔을 꾹 참고 앞을 보니 차는 이미 화단을 지나 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냉철한 하준도 이때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여름은 이번에는 하준의 주요 부위를 꽉 잡아버렸다. 하준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이제 다시는 너한테 안 갇혀! 죽을 거면 같이 죽는 거야!”여름은 미친 듯한 눈으로 하준을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