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여름이 훤칠한 젊은 남자와 걸어나왔다. 남자는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짧은 머리는 살짝 웨이브가 있는 것이 심플한 차림인데도 상당히 패션감각이 돋보였다.남자의 손에는 베이지색 바람막이가 들려있었다. 딱 봐도 여름의 것이었다.‘이 인간이… 아직 이혼서류에 도장도 안 찍고 이 남자 저 남자랑 어울려 다니고 있어?’순식간에 하준의 시선에 한기가 어렸다.이때 여름이 하준 일행을 보게 되었다.여름이 눈을 깜빡이더니 아무말 없이 이지훈을 쳐다봤다.이지훈인 곤란한 듯 코를 쓱 비볐다.갑자기 백지안이 입을 열었다.“지훈 씨, 아까 말하던 친구라는 게… 저 사람들이었어요?”“아, 어.”이지훈이 끄덕였다.“서머가 돌아왔는데 밥은 한 번 먹어야지. 너희들 별로 사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따로 만나려고 했지. 우리 먼저 간다.”이지훈이 손을 흔들며 여름 쪽으로 걸어갔다.시아가 조그맣게 말했다.“다들 아는 사이인데 같이 클럽에 가서 놀면 재미있을 텐데.”다들 시아를 돌아봤다. 이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는데 하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따.“안 될 것도 없지. 마침 내가 강 대표한테 이 험난한 비즈니스 계에서 어떻게 죽음 직전에 살아 돌아왔는지, 대체 무슨 수로 그 큰 회사들과 계약을 맺었는지 궁금해서 한 수 배우고 싶던 참이거든. 이렇게 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한 턱 내야 하는 거 아닌가?”여름이 느른하게 흘겨보더니 입을 열려다 말고 속트림을 했다.“아우, 죄송해요.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아, 방금 뭐라고?”“……”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이지훈이 감탄스럽다는 눈으로 여름을 보고 있긴 했지만 하준의 차가운 얼굴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분노의 기운을 뿜어냈다다들 하준의 힐난이 쏟아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하준이 웃었다.“화신 상장가가 한껏 오르니 자기가 뭐라고 된 줄 아나 보지? 강여름, 아무리 그래 봤자 화신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야.”여름이 귀를 슬쩍 만졌다.“아 무슨 소린지 알겠다. 당신한테는 내가 확실히 고맙긴 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가 해변 별장에 도착했다.“먼저 들어가. 나는 누굴 좀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아까까지 접대 있다고 말 안 했잖아?”백지안이 농담처럼 물었다.“갑자기 생각이 나서.”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백지안은 이를 깨물고는 할 수 없이 들어갔다. 몇 마디 하려고 돌아섰는데 하준의 차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백지안은 발을 굴렀다. 어쩐 일인지 아무래도 하준이 여름을 찾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30분 뒤, 스포츠카가 굴 전문점 앞에 멈췄다.‘지훈이 굴을 먹으러 간다고 했겠다? 서울에서 굴 좋아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집이 제일 유명하지.십중팔구 이 집에 왔을 거야.’하준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른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하준이 고개를 들어 바 가운데를 보았다. 굽실굽실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높은 바 의자에 앉아 노래하고 있었다. 다리 하나는 발걸이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연한 청바지에 흑백 뮬이 가느다란 발목을 더 예쁘게 보이게 해주었다.아스라한 바의 조명이 여름을 비추고 있어서 밤에 핀 장미를 보는 듯했다. 치명적인 매력이 한껏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특히나 가볍게 튕기는 기타가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남자들은 그녀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고여자들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쿨함에 소리지르고 있었다.“자, 다 같이!”여름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손에 든 기타의 선율이 빨라졌다. 당장 무대에 서는 가수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실력이었다.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환한 표정에 눈에서는 별이 반짝이듯 빛나고 있었다.하준의 두 다리가 붙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이 순간 여름은 무대에 선 스타 같았다. 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하준은 여름이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몰랐다. 아이돌이라는 시아보다 실력이 나은 것 같았다.기타를 치는 줄도 몰랐다.특히나 여름이 웃으면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운지
“남친인가 보다. 완전 부럽다. 저렇게 여신 같은 여자랑 사귀다니.”“그러게 말이야. 난 왜 저런 복이 없냐고.”“아우,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춥지. 에어컨 온도 너무 낮은 거 아냐?”“그러고 보니 나도 좀 춥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다가갔다.막 자리에 앉은 여름이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름의 동작을 제지했다.잔에 든 와인이 여름의 하얀 티셔츠에 주르륵 쏟아졌다.하필 젖은 부분이 가슴 부위라 몸의 곡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여름이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 보았다. 하준의 차가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최하준, 왜 이러실까, 진짜!”여름이 하준을 노려보고는 얼른 휴지를 집어 와인의 흔적을 닦아내려고 노력했다.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색은 선명하고 티셔츠를 투명하게 보이게 만들어 더욱 민망해졌다.“이거 입어.”도재하가 얼른 여름의 바람막이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하준이 도재하의 손길을 막으며 묵직한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최 회장, 여자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이건 너무 오지랖 아닙니까?”도재하가 가만히 웃었다.“내가 왜 이러는지는 강여름에게 물어 보시지.”하준이 바람막이를 잡아채서 여름에게 던졌다.“입어, 단추 잠그고!”그렇게 말하는 하준이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안에 입고 있는 속옷이 자신이 사준 것이란 생각을 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무슨 팔자가 진짜 이딴 인간을 만나는 거냐고.”하준의 무례한 말투에 여름은 화가 울컥 올라왔다.“나도 그게 궁금하군 그래.”단추 하나가 안 잠겨 목선이 드러나 보이자 하준은 기분이 안 좋은 듯 손을 뻗어 마지막 단추 하나를 잠가버렸다. 손가락에 닿는 실크 같은 여름의 피부가 주는 감촉에 심장이 떨렸다.‘이 여자는 대체 전생에 뭐였을까? 여우?’“어? 하준아. 여기는 어떻게 왔어?”이때 접시 가득 굴을 들고 돌아오던 이지훈이 이 장면을 보고는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지훈은 바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하
이지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에이, 하준아. 진정해. 농담하는 거잖아.”“전혀 농담이 아닌데.”도재하가 입꼬리를 올렸다.계속되는 도발에 하준의 눈이 가늘어 지더니 냉소를 지었다.“아쉽지만 강여름은 그럴 생각이 없어. 지금 이혼을 안 해주는 건 강여름 쪽이거든.”그러면서 하준은 여름을 자신에게로 확 잡아당겼다. 여름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말해 봐. 나랑 이혼하고 싶은지 아닌지.”여름이 픽 웃었다.“이혼하고 싶은데.”하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름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이런 식이다? 며칠 전까지 죽어도 이혼 안 해주겠다고 난리더니 남자가 생겼다고 이렇게 밀어낸다고?’“이혼을 하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아니야.”여름이 말을 이었다.“당신이랑 백지안이 날 얼마나 괴롭혔어? 3년 만에 돌아와서 보니 백지안은 여전히 끊임없이 사람 환장할 못된 짓에 여념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FTT회장 사모 자리를 내놓을 줄 알아? 웃기지 마셔.”도재하가 바로 술을 한 잔 따르더니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널 응원해. 난 기다릴게.”“고마워요.”여름이 술잔을 들려고 했다.그러나 술잔을 미처 들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을 홱 잡아챘다.“따라와.”“안 됩니다. 이제 막 술도 한잔하고 재미있어 지려는 참인데.”도재하가 여름의 다른 한 손을 잡았다.“놔. 내 성질 건드리면 같은 업계가 아니라서 내가 아주 죽여버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회사에 크게 타격은 미칠 수 있으니까.”하준이 무섭게 경고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을 튀기자 여름은 할 수 없이 도재하에게 부드럽데 말을 건넸다.“선배, 미안해요. 내가 다음에 쏠게.”“다음은 없어.”하준이 덧붙였다.“……”도재하가 피식 웃었다. 하준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했다.“그래, 다음에 먹자.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전화해. 난 영원히 네 편이니까.”“고마….”여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부여잡고 나가버렸다.이지훈이 도
여름이 이렇게 대범하게 덤빌 줄 생각도 못했던 하준은 제대로 한 대 맞고 말았다.차가 크게 휘청했다.“강여름, 사는 게 지루해?”하준은 홧김에 여름의 손에 든 뮬을 빼앗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차를 운전하고 있지만 않았으면 여름을 직접 손이라도 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누가 그 따위 소리 지껄이래?”부아가 난 하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최하준, 당신이 버렸으니까 내 신발 물어내.”하준이 코웃음을 쳤다.“왜? 신발 사주면 또 지안이에게 가서 내가 신발 사줬다고 떠들면서 상처 주려고? 어디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진심으로 백지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날 풀어줘. 밤중에 나랑 얽혀서 이러고 있지 말고.”여름이 앞을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지금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당신 같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어디 들어가서 얌전히 있을 필요가 있어. 어디 유부녀가 바람이나 피고 다니려고 들어?”여름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또 날 가두려고?”“자업자득이야.”하준이 버럭 소리질렀다.3년 전 감금되었을 때의 고통이 다시 하나하나 살아났다.여름은 순간적으로 실성한 듯 핸들을 마구 잡아 돌렸다.“미쳤어? 놓지 못해?”하준은 한 손으로 있는 힘껏 여름을 밀어냈다.그러나 여름은 3년 전처럼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서로 잡아 당기는 바람에 핸들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결국 여름은 하준의 팔을 물었다. 여름은 틈을 노리고 핸들을 화단으로 돌리면서 발로는 엑셀레이터를 확 밟았다.“놔! 이거 놔!”아픔을 꾹 참고 앞을 보니 차는 이미 화단을 지나 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냉철한 하준도 이때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여름은 이번에는 하준의 주요 부위를 꽉 잡아버렸다. 하준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이제 다시는 너한테 안 갇혀! 죽을 거면 같이 죽는 거야!”여름은 미친 듯한 눈으로 하준을 노려봤다
삐…삐…삐…“……”측정기의 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울렸다.우는 소리도 들려왔다.하준이 힘겹게 눈을 떠보니 백지안이 눈물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준, 깼어났어?”백지안이 벌떡 일어났다.송영식과 이주혁이 후다닥 달려왔다.하준은 그들을 보다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무심코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강여름은?”눈물 범벅이던 백지안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송영식이 화를 냈다.“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냐? 지안이에게 접대한다고 거짓말하고 찾아간 게 그래 겨우 강여름이었어?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거야? 경찰에서 CCTV 분석해보더니 너희 둘이 싸우다가 화단을 지나서 벽을 들이 받았다던데. 네가 운전하는데 강여름이 핸들을 꺾어서 널 죽이려고 했대. 경찰에서 강여름을 조사할 거야. 깨어나면 재판 받겠지.”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어쩐지 머릿속에서는 정신을 잃기 전의 장면이 계속해서 맴돌았다.여름의 그 시선이 하준의 뇌리에 깊이 박혀버렸다.“준.”백지안이 잠긴 목소리로 가볍게 하준을 불렀다.하준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지안아, 미안해….”“왜 나에게 거짓말했어?”백지안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준, 우리 십수 년을 함께 했잖아? 네 마음 속에서 강여름을 도저히 놓을 수 없다면 그냥… 강여름 곁으로 돌아가.”“왜 네가 그런 소리를 해?”송영식이 벌컥했다.“내가 봤을 때는 진짜 네가 너무 했다. 너 사고 나고 나서 지안이가 거의 기절할 뻔 한 건 아냐? 여기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널 간호했어. 지안이가 그렇게 너만 바라보는데, 지안이의 마음을 져버리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하준아, 대체 강여름은 왜 찾아간 거야?”이주혁이 하준을 바라보았다.“그런 거 그만 물어. 하준이 좀 쉬게”백지안이 하준의 손을 잡고 마음이 아픈 듯 말했다.하준은 너무 죄책감이 느껴졌다.“미안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너랑 결혼할 거야. 올해 안에 꼭 식 올리자.”“그래. 기다릴게.”백지안은 눈을 내
“안 그럴게.”하준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기사가 백지안을 해변 별장에 내려주자 하준은 그대로 출근했다.며칠 입원하는 바람에 회사에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늘었다.그런데 막 차에 타자마자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최하준 씨, 죄송합니다. 상황이 좀 바뀌었습니다. 경찰서로 좀 와주셔야겠습니다.”------1시간 뒤.하준이 경찰서에 출두했다.여름은 사무실 밖 의자에서 막 게임을 한 판 끝낸 참이었다. 화장기 없이 머리를 올려 여름의 얼굴이 더욱 깨끗하고 반짝였다. 순진무구한 대학생처럼 보였다.그러나 그때 미친 듯이 핸들을 잡아 돌리던 여름의 시선을 하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거길…젠장, 내내 아팠다고.’“어? 안녕? 금방 다시 만났네?”여름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뭐 하는 짓이야?”하준은 성큼성큼 걸어 지나쳐갔다.경찰은 녹음을 틀어 두 사람이 차에서 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하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언제 녹음을 했지?’경찰이 말했다.“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겠는데 블랙박스에서 추출한 이 내용을 들어보면 최하준 씨는 당시 강여름 씨를 납치, 감금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강여름 씨가 핸들을 억지로 틀었던 거죠. 이럴 경우 강여름 씨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오히려 내가 납치 혐의로 당신을 고소할 수 있지.”여름이 활짝 웃었다.“아 참, 운전 중에 투기 행위는 내가 신고했지.”“뭘 투기했다는 거야?”하준이 반문했다.“내 신발.”여름이 자기 발을 가리켰다. 오늘은 하이힐 샌들을 신고 있었다. 가느다란 끈이 뽀얀 발을 감싸고 있었다. 빨간 페디큐어가 매혹적으로 보였다. 뽀얀 발에 빨간 페디큐어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간질간질했다.하준은 잠시 넋을 놓고 여름의 발을 쳐다보았다.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짜증스럽다는 듯 여름을 쳐다봤다.‘그까짓 걸로 신고를 하다니, 저렇게 사람이 쪼잔하다니까.’경찰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신고하셨
여름이 다시 자신을 유혹하는 것인가 싶었다.“아니, 두 분 그런 얘기는 두 분이 따로 나누시죠.”경찰이 헛기침을 하며 난처한 듯 말했다.하준은 여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이게 다 강여름 때문이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여름은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경찰서를 나섰다.하준이 성큼성큼 따라 나오자 여름은 대뜸 번호를 내밀었다.“내 계좌 번호.”“……”하준은 여름과 함께 있을 때마다 혈압이 확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잠깐 금액이 이상한데? 왜 이렇게 많아?”“내 신발 값도 물어주셔야지.”여름이 당연하다는 듯 하준을 쳐다봤다.“그 뮬, 리미티드 버전 명품 신상이었다고.”“그 슬리퍼로 날 때려 놓고 아주 뻔뻔하게도 물어내라네.”하준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러면 가서 다시 찾아오시던지. 누가 그런 걸 창밖으로 던지래?”“……”비록 국내 최고의 변호사 신분이었지만 이때만큼은 할말이 궁해졌다.“아, 빨리. 나 바쁘단 말이야. 약속 잡혀있다고.”“누구랑? 도재하인가?”하준의 시선이 무거워졌다.여름이 눈을 반짝 하더니 갑자기 하준에게 다가섰다.원래도 가까웠던 두 사람은 이제 거의 몸이 붙어있었다. 여름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체취가 올라왔다.아찔해진 하준의 이성은 여름을 뒤로 밀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여름에게서 나는 향기는 하준을 취하게 만들었다.“가, 강여름. 뭐 하는 거야?”“그 말은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당신 아직도 마음속에 내가 있는 거 아냐?”여름이 눈썹을 휙 세웠다.하준은 웃긴다는 듯 여름에게 한 마디 하려는 순간 갑자기 여름이 손가락을 뻗어 하준의 입술을 눌렀다.여름의 손가락에서 퍼진 찌릿한 느낌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하준은 몸이 완전히 굳어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입으로는 나랑 이혼하고 싶다고 하면서 뒤로는 유부녀 신분으로 바람 날까 봐 그런다며 내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여하려는 걸 보니까 당신 마음속에 백지안만 있는 게 아니지? 백지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