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인가 보다. 완전 부럽다. 저렇게 여신 같은 여자랑 사귀다니.”“그러게 말이야. 난 왜 저런 복이 없냐고.”“아우,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춥지. 에어컨 온도 너무 낮은 거 아냐?”“그러고 보니 나도 좀 춥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다가갔다.막 자리에 앉은 여름이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름의 동작을 제지했다.잔에 든 와인이 여름의 하얀 티셔츠에 주르륵 쏟아졌다.하필 젖은 부분이 가슴 부위라 몸의 곡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여름이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 보았다. 하준의 차가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최하준, 왜 이러실까, 진짜!”여름이 하준을 노려보고는 얼른 휴지를 집어 와인의 흔적을 닦아내려고 노력했다.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색은 선명하고 티셔츠를 투명하게 보이게 만들어 더욱 민망해졌다.“이거 입어.”도재하가 얼른 여름의 바람막이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하준이 도재하의 손길을 막으며 묵직한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최 회장, 여자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이건 너무 오지랖 아닙니까?”도재하가 가만히 웃었다.“내가 왜 이러는지는 강여름에게 물어 보시지.”하준이 바람막이를 잡아채서 여름에게 던졌다.“입어, 단추 잠그고!”그렇게 말하는 하준이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안에 입고 있는 속옷이 자신이 사준 것이란 생각을 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무슨 팔자가 진짜 이딴 인간을 만나는 거냐고.”하준의 무례한 말투에 여름은 화가 울컥 올라왔다.“나도 그게 궁금하군 그래.”단추 하나가 안 잠겨 목선이 드러나 보이자 하준은 기분이 안 좋은 듯 손을 뻗어 마지막 단추 하나를 잠가버렸다. 손가락에 닿는 실크 같은 여름의 피부가 주는 감촉에 심장이 떨렸다.‘이 여자는 대체 전생에 뭐였을까? 여우?’“어? 하준아. 여기는 어떻게 왔어?”이때 접시 가득 굴을 들고 돌아오던 이지훈이 이 장면을 보고는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지훈은 바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하
이지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에이, 하준아. 진정해. 농담하는 거잖아.”“전혀 농담이 아닌데.”도재하가 입꼬리를 올렸다.계속되는 도발에 하준의 눈이 가늘어 지더니 냉소를 지었다.“아쉽지만 강여름은 그럴 생각이 없어. 지금 이혼을 안 해주는 건 강여름 쪽이거든.”그러면서 하준은 여름을 자신에게로 확 잡아당겼다. 여름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말해 봐. 나랑 이혼하고 싶은지 아닌지.”여름이 픽 웃었다.“이혼하고 싶은데.”하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름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이런 식이다? 며칠 전까지 죽어도 이혼 안 해주겠다고 난리더니 남자가 생겼다고 이렇게 밀어낸다고?’“이혼을 하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아니야.”여름이 말을 이었다.“당신이랑 백지안이 날 얼마나 괴롭혔어? 3년 만에 돌아와서 보니 백지안은 여전히 끊임없이 사람 환장할 못된 짓에 여념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FTT회장 사모 자리를 내놓을 줄 알아? 웃기지 마셔.”도재하가 바로 술을 한 잔 따르더니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널 응원해. 난 기다릴게.”“고마워요.”여름이 술잔을 들려고 했다.그러나 술잔을 미처 들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을 홱 잡아챘다.“따라와.”“안 됩니다. 이제 막 술도 한잔하고 재미있어 지려는 참인데.”도재하가 여름의 다른 한 손을 잡았다.“놔. 내 성질 건드리면 같은 업계가 아니라서 내가 아주 죽여버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회사에 크게 타격은 미칠 수 있으니까.”하준이 무섭게 경고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을 튀기자 여름은 할 수 없이 도재하에게 부드럽데 말을 건넸다.“선배, 미안해요. 내가 다음에 쏠게.”“다음은 없어.”하준이 덧붙였다.“……”도재하가 피식 웃었다. 하준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했다.“그래, 다음에 먹자.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전화해. 난 영원히 네 편이니까.”“고마….”여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부여잡고 나가버렸다.이지훈이 도
여름이 이렇게 대범하게 덤빌 줄 생각도 못했던 하준은 제대로 한 대 맞고 말았다.차가 크게 휘청했다.“강여름, 사는 게 지루해?”하준은 홧김에 여름의 손에 든 뮬을 빼앗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차를 운전하고 있지만 않았으면 여름을 직접 손이라도 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누가 그 따위 소리 지껄이래?”부아가 난 하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최하준, 당신이 버렸으니까 내 신발 물어내.”하준이 코웃음을 쳤다.“왜? 신발 사주면 또 지안이에게 가서 내가 신발 사줬다고 떠들면서 상처 주려고? 어디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진심으로 백지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날 풀어줘. 밤중에 나랑 얽혀서 이러고 있지 말고.”여름이 앞을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지금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당신 같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어디 들어가서 얌전히 있을 필요가 있어. 어디 유부녀가 바람이나 피고 다니려고 들어?”여름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또 날 가두려고?”“자업자득이야.”하준이 버럭 소리질렀다.3년 전 감금되었을 때의 고통이 다시 하나하나 살아났다.여름은 순간적으로 실성한 듯 핸들을 마구 잡아 돌렸다.“미쳤어? 놓지 못해?”하준은 한 손으로 있는 힘껏 여름을 밀어냈다.그러나 여름은 3년 전처럼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서로 잡아 당기는 바람에 핸들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결국 여름은 하준의 팔을 물었다. 여름은 틈을 노리고 핸들을 화단으로 돌리면서 발로는 엑셀레이터를 확 밟았다.“놔! 이거 놔!”아픔을 꾹 참고 앞을 보니 차는 이미 화단을 지나 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냉철한 하준도 이때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여름은 이번에는 하준의 주요 부위를 꽉 잡아버렸다. 하준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이제 다시는 너한테 안 갇혀! 죽을 거면 같이 죽는 거야!”여름은 미친 듯한 눈으로 하준을 노려봤다
삐…삐…삐…“……”측정기의 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울렸다.우는 소리도 들려왔다.하준이 힘겹게 눈을 떠보니 백지안이 눈물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준, 깼어났어?”백지안이 벌떡 일어났다.송영식과 이주혁이 후다닥 달려왔다.하준은 그들을 보다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무심코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강여름은?”눈물 범벅이던 백지안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송영식이 화를 냈다.“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냐? 지안이에게 접대한다고 거짓말하고 찾아간 게 그래 겨우 강여름이었어?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거야? 경찰에서 CCTV 분석해보더니 너희 둘이 싸우다가 화단을 지나서 벽을 들이 받았다던데. 네가 운전하는데 강여름이 핸들을 꺾어서 널 죽이려고 했대. 경찰에서 강여름을 조사할 거야. 깨어나면 재판 받겠지.”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어쩐지 머릿속에서는 정신을 잃기 전의 장면이 계속해서 맴돌았다.여름의 그 시선이 하준의 뇌리에 깊이 박혀버렸다.“준.”백지안이 잠긴 목소리로 가볍게 하준을 불렀다.하준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지안아, 미안해….”“왜 나에게 거짓말했어?”백지안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준, 우리 십수 년을 함께 했잖아? 네 마음 속에서 강여름을 도저히 놓을 수 없다면 그냥… 강여름 곁으로 돌아가.”“왜 네가 그런 소리를 해?”송영식이 벌컥했다.“내가 봤을 때는 진짜 네가 너무 했다. 너 사고 나고 나서 지안이가 거의 기절할 뻔 한 건 아냐? 여기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널 간호했어. 지안이가 그렇게 너만 바라보는데, 지안이의 마음을 져버리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하준아, 대체 강여름은 왜 찾아간 거야?”이주혁이 하준을 바라보았다.“그런 거 그만 물어. 하준이 좀 쉬게”백지안이 하준의 손을 잡고 마음이 아픈 듯 말했다.하준은 너무 죄책감이 느껴졌다.“미안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너랑 결혼할 거야. 올해 안에 꼭 식 올리자.”“그래. 기다릴게.”백지안은 눈을 내
“안 그럴게.”하준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기사가 백지안을 해변 별장에 내려주자 하준은 그대로 출근했다.며칠 입원하는 바람에 회사에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늘었다.그런데 막 차에 타자마자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최하준 씨, 죄송합니다. 상황이 좀 바뀌었습니다. 경찰서로 좀 와주셔야겠습니다.”------1시간 뒤.하준이 경찰서에 출두했다.여름은 사무실 밖 의자에서 막 게임을 한 판 끝낸 참이었다. 화장기 없이 머리를 올려 여름의 얼굴이 더욱 깨끗하고 반짝였다. 순진무구한 대학생처럼 보였다.그러나 그때 미친 듯이 핸들을 잡아 돌리던 여름의 시선을 하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거길…젠장, 내내 아팠다고.’“어? 안녕? 금방 다시 만났네?”여름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뭐 하는 짓이야?”하준은 성큼성큼 걸어 지나쳐갔다.경찰은 녹음을 틀어 두 사람이 차에서 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하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언제 녹음을 했지?’경찰이 말했다.“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겠는데 블랙박스에서 추출한 이 내용을 들어보면 최하준 씨는 당시 강여름 씨를 납치, 감금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강여름 씨가 핸들을 억지로 틀었던 거죠. 이럴 경우 강여름 씨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오히려 내가 납치 혐의로 당신을 고소할 수 있지.”여름이 활짝 웃었다.“아 참, 운전 중에 투기 행위는 내가 신고했지.”“뭘 투기했다는 거야?”하준이 반문했다.“내 신발.”여름이 자기 발을 가리켰다. 오늘은 하이힐 샌들을 신고 있었다. 가느다란 끈이 뽀얀 발을 감싸고 있었다. 빨간 페디큐어가 매혹적으로 보였다. 뽀얀 발에 빨간 페디큐어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간질간질했다.하준은 잠시 넋을 놓고 여름의 발을 쳐다보았다.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짜증스럽다는 듯 여름을 쳐다봤다.‘그까짓 걸로 신고를 하다니, 저렇게 사람이 쪼잔하다니까.’경찰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신고하셨
여름이 다시 자신을 유혹하는 것인가 싶었다.“아니, 두 분 그런 얘기는 두 분이 따로 나누시죠.”경찰이 헛기침을 하며 난처한 듯 말했다.하준은 여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이게 다 강여름 때문이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여름은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경찰서를 나섰다.하준이 성큼성큼 따라 나오자 여름은 대뜸 번호를 내밀었다.“내 계좌 번호.”“……”하준은 여름과 함께 있을 때마다 혈압이 확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잠깐 금액이 이상한데? 왜 이렇게 많아?”“내 신발 값도 물어주셔야지.”여름이 당연하다는 듯 하준을 쳐다봤다.“그 뮬, 리미티드 버전 명품 신상이었다고.”“그 슬리퍼로 날 때려 놓고 아주 뻔뻔하게도 물어내라네.”하준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러면 가서 다시 찾아오시던지. 누가 그런 걸 창밖으로 던지래?”“……”비록 국내 최고의 변호사 신분이었지만 이때만큼은 할말이 궁해졌다.“아, 빨리. 나 바쁘단 말이야. 약속 잡혀있다고.”“누구랑? 도재하인가?”하준의 시선이 무거워졌다.여름이 눈을 반짝 하더니 갑자기 하준에게 다가섰다.원래도 가까웠던 두 사람은 이제 거의 몸이 붙어있었다. 여름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체취가 올라왔다.아찔해진 하준의 이성은 여름을 뒤로 밀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여름에게서 나는 향기는 하준을 취하게 만들었다.“가, 강여름. 뭐 하는 거야?”“그 말은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당신 아직도 마음속에 내가 있는 거 아냐?”여름이 눈썹을 휙 세웠다.하준은 웃긴다는 듯 여름에게 한 마디 하려는 순간 갑자기 여름이 손가락을 뻗어 하준의 입술을 눌렀다.여름의 손가락에서 퍼진 찌릿한 느낌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하준은 몸이 완전히 굳어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입으로는 나랑 이혼하고 싶다고 하면서 뒤로는 유부녀 신분으로 바람 날까 봐 그런다며 내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여하려는 걸 보니까 당신 마음속에 백지안만 있는 게 아니지? 백지안을
곧 검은 스포츠카가 다가왔다. 도재하가 창문을 내리더니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그러더니 여름을 태우고 경찰서를 빙 돌아 나갔다.하준은 화가 나서 쫓아갈 뻔했다. 그러나 강여름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문득 멈춰섰다.‘당신…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는 거 아냐?’여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그럴 리가 있나. 내 마음속에는 지안이 뿐이라고.’밤 10시.고요한 서재.하준은 신분기 보고서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백지안이 야한 슬립백을 입고 뒤에서 슬몃 하준을 안았다.“준, 약은 먹고 있어? 우리 한번 해볼까?”하준의 몸이 확 굳어지더니 돌아봤다. 백지안의 간절한 시선을 보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그럴까?”지난번에 강여름에게 그렇게 강렬하게 반응이 일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백지안의 손길이 닿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렬한 거부감이 불쑥 치솟았다.“미안, 아직 안 되는 것 같아.”하준이 난처한 듯 지안을 밀어냈다.“조금만 더 기다려 줘.”“괘… 괜찮아. 내가 너무 서둘렀나 봐.”백지안은 입술이 빨개지도록 깨물었다.“요즘 내가 너무 불안해서 그냥 너랑 마지막 관문을 통과 해야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하준의 얼굴에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평생….”“아니야. 네가 평생 그렇더라도 난 너랑 함께 할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니까.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지안의 눈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어. 하준이를 온전히 다 얻을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해.’“정말 미안해.”하준의 눈에 죄책감이 가득했다.‘강여름에게는 분명 반응이 있었느데. 왜 지안이에게만 안 되는 거야? 다른 여자는 다 되는데 지안이만 안 되는 건가?’다음날 출근길에 하준이 상혁에게 말했다.“저녁에 호텔로 여자 애들 몇 명 불러.”상혁은 다리가 떨려서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회장님, 저기….”“묻지마.”하준이 단칼에
여름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하준이 어두운 얼굴로 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대체 누구랑 그렇게 통화를 해? 도재하?”‘말끝마다 사랑한다느니 뽀뽀라느니 거슬리네.’다른 남자와 그렇게 친밀한 꼴을 보자니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름은 흠칫했다. 막 여울이, 하늘이와 통화 중이었는데 절대로 하준에게 둥이의 존재를 들킬 수는 없었다.“남이사!”여름이 얼른 이어폰을 빼면서 전화를 끄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서두르는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쩍게 보였다. 하준은 화가 나서 휴대 전화를 확 낚아채서 스피커 폰으로 돌렸다.“도재하?”“최하준!”여름은 놀란 나머지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부디 둥이들이 현명하게 대처해 주기만 바랄 뿐이었다.“아저찌, 도재하가 누군데요?”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하준은 흠칫했다. 전화기 저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여자아이 목소리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목소리는 사뭇 밀키한 것이 사람의 심장을 녹이는 것만 같았다.‘강여름이 왜 이런 아기랑 이렇게 친밀한 거야?’“아저씨가 잘못 알았구나. 넌 누구니? 강여름이랑 무슨 사이야?”하준은 여자아이를 놀래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목소리를 눌렀다.“왜 경찰 아저씨가 도둑한테 말하는 것처럼 물어봐요?”여울이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물었다.“……”하준은 골치가 아팠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어린애랑 이야기를 나누어볼 일이 없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최하준, 전화기 돌려주지.”여름이 손을 뻗어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하준은 바로 손을 바꾸며 휴대 전화를 높이 쳐들었다.“아, 왜 여름 이모 전화 뺏어요?”여울이가 화를 냈다.“이모라고?”하준은 멈칫했다. 갑자기 무겁던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다른 남자의 애를 낳은 게 아니었다니 다행이네.’“그럼 우리 엄마겠어요? 뭐, 이모가 우리 엄마면 좋겠지만.”그러더니 갑자기 여울이 울기 시작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