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팀장이 그러고 나가자 엄 실장은 부아가 치밀었다.“저런 인간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됐어요. 내가 이미 처리했거든.”여름이 덤덤하게 말했다.------30분 뒤.하 팀장이 물건을 챙겨서 막 문을 나서는데 경찰이 와서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공금횡령 혐의가 있습니다. 같이 서로 가주시죠.”“아니거든요. 전 아니에요.”하 팀장이 소리를 질렀다. 다들 본체만체 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경찰에 고발을 당했다면 이건 얘기가 달랐다. 이제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특히나 백지안이 뒤를 봐주는 동안 하 팀장은 뒷돈을 적잖이 해먹고 있던 참이었다.“시끄러워요.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죠. 갑시다.”곧 하 팀장이 끌려갔다는 소문이 회사에 쫙 퍼졌다.엄 실장은 그 얘기를 듣고 바삐 움직이고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저녁.스포츠카 한 대가 회사 앞에 섰다.여름이 차에 올라 오랜만에 보는 선배의 얼굴을 보고 다정하게 웃었다.“오랜만이에요, 선배.”예전에 동성에서 강태환 부부에게 막혀서 동성 건축계에서 갈 곳 없이 막막한 상황이 되었을 때 도재하가 일자리를 주었던 은혜는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었다.“어째 점점 더 멋있어지네. 3년 못 본 동안에 완전 몰라보게 근사해졌는걸.”도재하가 호탕하게 웃었다.“가자. 합작을 축하해야지. 내가 한 턱 쏠게.”“제가 대접해야죠. 이번에 전국에서 우리 화신과 협력하게다고 흔쾌히 나서준 건 딱 한 회사밖에 없었거든요.”여름이 진지하게 말했다.“선배는 제 은인이세요.”“됐어. 다른 사람들은 네가 헤이즐 건축 디자인 이사인 걸 모르니까 그렇지.”도재하가 장난스럽게 받았다.“쉿쉿!”강여름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비밀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까르르 터져버렸따.1시간 뒤 차는 어느 한옥으로 들어섰다. 소담한 풍경이 펼쳐졌다.뜰에는 수퍼카가 몇 대 서 있었다.여름은 이런 고급 요리집이라면
도재하가 웃었다.“잊어버렸구나. 동성에 있을 때 회사를 설립하고 요 몇 년 같이 일하면서 친해졌어. 이번에 너 만난단 얘기 듣고 같이 곧 죽어도 따라온다잖아.”“서머, 정말 너무해. 난 진짜 자기가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고. 연락도 안 주고, 정말 내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고. 죽음을 위장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이 오빠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내가 최양하보다 더 깔끔하게 처리해 줬을 텐데.”이지훈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최양하는 또 어떻게 아세요? 이 일을 조사한 거예요?”여름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아, 지난 번에 단톡방에서 애들이 얘기하더라고. 난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보기만 했어. 솔직히 자기 없어지고 나서는 걔들하고 어울리기도 싫더라고.”이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감탄한 듯 말했다.“하준이랑 영식이는 백지안만 싸고 돌지. 주혁이는 시아만 끼고 있지. 망할, 시아가 대체 뭐가 좋다고. 옛날에는 그냥 보잘 것 없는 가수였는데 이제는 아주 대스타로 떠받들어지더라고. 다들 보는 눈이 그렇게 없나”“그러게 말이에요.”여름은 저도 모르게 백소영을 떠올렸다.그 차분하면서도 세심하던 친구.‘어딜 봐도 소영이가 그 표리부동한 시아보다 훨씬 낫지.휴우, 이주혁은 정말 보는 눈이 없다니까.’“그래서 서울을 올라와도 걔들하고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만날 때마다 백지안 아니면 시아를 데리고 나오니까. 그 둘을 보고 있으면 난 영 거북해서 말이지.”여름이 푸흡하고 웃었다.“이 대표님, 존경스럽네요. 어쩜 그런 쓰레기들 사이에서 그렇게 안목을 지키고 계신지.”“에헤이! 내눈에는 나쁜 놈 필터가 있어서 다 거른다고.”이지훈이 하하 웃었다.“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앉자. 여기 한정식이 아주 끝내주거든. 송이랑 여러 가지 버섯을 아주 잘 쓰는 집이야. 향기가 얼마나 좋다고.”곧 직원에 상을 차려냈다. 여름은 버섯탕을 맛보고는 정말 맛이 좋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맛있어?”이지훈이 득
돌아보니 여름이 훤칠한 젊은 남자와 걸어나왔다. 남자는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짧은 머리는 살짝 웨이브가 있는 것이 심플한 차림인데도 상당히 패션감각이 돋보였다.남자의 손에는 베이지색 바람막이가 들려있었다. 딱 봐도 여름의 것이었다.‘이 인간이… 아직 이혼서류에 도장도 안 찍고 이 남자 저 남자랑 어울려 다니고 있어?’순식간에 하준의 시선에 한기가 어렸다.이때 여름이 하준 일행을 보게 되었다.여름이 눈을 깜빡이더니 아무말 없이 이지훈을 쳐다봤다.이지훈인 곤란한 듯 코를 쓱 비볐다.갑자기 백지안이 입을 열었다.“지훈 씨, 아까 말하던 친구라는 게… 저 사람들이었어요?”“아, 어.”이지훈이 끄덕였다.“서머가 돌아왔는데 밥은 한 번 먹어야지. 너희들 별로 사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따로 만나려고 했지. 우리 먼저 간다.”이지훈이 손을 흔들며 여름 쪽으로 걸어갔다.시아가 조그맣게 말했다.“다들 아는 사이인데 같이 클럽에 가서 놀면 재미있을 텐데.”다들 시아를 돌아봤다. 이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는데 하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따.“안 될 것도 없지. 마침 내가 강 대표한테 이 험난한 비즈니스 계에서 어떻게 죽음 직전에 살아 돌아왔는지, 대체 무슨 수로 그 큰 회사들과 계약을 맺었는지 궁금해서 한 수 배우고 싶던 참이거든. 이렇게 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한 턱 내야 하는 거 아닌가?”여름이 느른하게 흘겨보더니 입을 열려다 말고 속트림을 했다.“아우, 죄송해요.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아, 방금 뭐라고?”“……”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이지훈이 감탄스럽다는 눈으로 여름을 보고 있긴 했지만 하준의 차가운 얼굴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분노의 기운을 뿜어냈다다들 하준의 힐난이 쏟아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하준이 웃었다.“화신 상장가가 한껏 오르니 자기가 뭐라고 된 줄 아나 보지? 강여름, 아무리 그래 봤자 화신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야.”여름이 귀를 슬쩍 만졌다.“아 무슨 소린지 알겠다. 당신한테는 내가 확실히 고맙긴 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가 해변 별장에 도착했다.“먼저 들어가. 나는 누굴 좀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아까까지 접대 있다고 말 안 했잖아?”백지안이 농담처럼 물었다.“갑자기 생각이 나서.”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백지안은 이를 깨물고는 할 수 없이 들어갔다. 몇 마디 하려고 돌아섰는데 하준의 차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백지안은 발을 굴렀다. 어쩐 일인지 아무래도 하준이 여름을 찾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30분 뒤, 스포츠카가 굴 전문점 앞에 멈췄다.‘지훈이 굴을 먹으러 간다고 했겠다? 서울에서 굴 좋아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집이 제일 유명하지.십중팔구 이 집에 왔을 거야.’하준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른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하준이 고개를 들어 바 가운데를 보았다. 굽실굽실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높은 바 의자에 앉아 노래하고 있었다. 다리 하나는 발걸이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연한 청바지에 흑백 뮬이 가느다란 발목을 더 예쁘게 보이게 해주었다.아스라한 바의 조명이 여름을 비추고 있어서 밤에 핀 장미를 보는 듯했다. 치명적인 매력이 한껏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특히나 가볍게 튕기는 기타가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남자들은 그녀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고여자들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쿨함에 소리지르고 있었다.“자, 다 같이!”여름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손에 든 기타의 선율이 빨라졌다. 당장 무대에 서는 가수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실력이었다.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환한 표정에 눈에서는 별이 반짝이듯 빛나고 있었다.하준의 두 다리가 붙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이 순간 여름은 무대에 선 스타 같았다. 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하준은 여름이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몰랐다. 아이돌이라는 시아보다 실력이 나은 것 같았다.기타를 치는 줄도 몰랐다.특히나 여름이 웃으면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운지
“남친인가 보다. 완전 부럽다. 저렇게 여신 같은 여자랑 사귀다니.”“그러게 말이야. 난 왜 저런 복이 없냐고.”“아우,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춥지. 에어컨 온도 너무 낮은 거 아냐?”“그러고 보니 나도 좀 춥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다가갔다.막 자리에 앉은 여름이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름의 동작을 제지했다.잔에 든 와인이 여름의 하얀 티셔츠에 주르륵 쏟아졌다.하필 젖은 부분이 가슴 부위라 몸의 곡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여름이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 보았다. 하준의 차가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최하준, 왜 이러실까, 진짜!”여름이 하준을 노려보고는 얼른 휴지를 집어 와인의 흔적을 닦아내려고 노력했다.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색은 선명하고 티셔츠를 투명하게 보이게 만들어 더욱 민망해졌다.“이거 입어.”도재하가 얼른 여름의 바람막이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하준이 도재하의 손길을 막으며 묵직한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최 회장, 여자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이건 너무 오지랖 아닙니까?”도재하가 가만히 웃었다.“내가 왜 이러는지는 강여름에게 물어 보시지.”하준이 바람막이를 잡아채서 여름에게 던졌다.“입어, 단추 잠그고!”그렇게 말하는 하준이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안에 입고 있는 속옷이 자신이 사준 것이란 생각을 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무슨 팔자가 진짜 이딴 인간을 만나는 거냐고.”하준의 무례한 말투에 여름은 화가 울컥 올라왔다.“나도 그게 궁금하군 그래.”단추 하나가 안 잠겨 목선이 드러나 보이자 하준은 기분이 안 좋은 듯 손을 뻗어 마지막 단추 하나를 잠가버렸다. 손가락에 닿는 실크 같은 여름의 피부가 주는 감촉에 심장이 떨렸다.‘이 여자는 대체 전생에 뭐였을까? 여우?’“어? 하준아. 여기는 어떻게 왔어?”이때 접시 가득 굴을 들고 돌아오던 이지훈이 이 장면을 보고는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지훈은 바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하
이지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에이, 하준아. 진정해. 농담하는 거잖아.”“전혀 농담이 아닌데.”도재하가 입꼬리를 올렸다.계속되는 도발에 하준의 눈이 가늘어 지더니 냉소를 지었다.“아쉽지만 강여름은 그럴 생각이 없어. 지금 이혼을 안 해주는 건 강여름 쪽이거든.”그러면서 하준은 여름을 자신에게로 확 잡아당겼다. 여름을 날카롭게 노려봤다.“말해 봐. 나랑 이혼하고 싶은지 아닌지.”여름이 픽 웃었다.“이혼하고 싶은데.”하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름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이런 식이다? 며칠 전까지 죽어도 이혼 안 해주겠다고 난리더니 남자가 생겼다고 이렇게 밀어낸다고?’“이혼을 하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아니야.”여름이 말을 이었다.“당신이랑 백지안이 날 얼마나 괴롭혔어? 3년 만에 돌아와서 보니 백지안은 여전히 끊임없이 사람 환장할 못된 짓에 여념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FTT회장 사모 자리를 내놓을 줄 알아? 웃기지 마셔.”도재하가 바로 술을 한 잔 따르더니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널 응원해. 난 기다릴게.”“고마워요.”여름이 술잔을 들려고 했다.그러나 술잔을 미처 들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을 홱 잡아챘다.“따라와.”“안 됩니다. 이제 막 술도 한잔하고 재미있어 지려는 참인데.”도재하가 여름의 다른 한 손을 잡았다.“놔. 내 성질 건드리면 같은 업계가 아니라서 내가 아주 죽여버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회사에 크게 타격은 미칠 수 있으니까.”하준이 무섭게 경고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불꽃을 튀기자 여름은 할 수 없이 도재하에게 부드럽데 말을 건넸다.“선배, 미안해요. 내가 다음에 쏠게.”“다음은 없어.”하준이 덧붙였다.“……”도재하가 피식 웃었다. 하준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했다.“그래, 다음에 먹자.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전화해. 난 영원히 네 편이니까.”“고마….”여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부여잡고 나가버렸다.이지훈이 도
여름이 이렇게 대범하게 덤빌 줄 생각도 못했던 하준은 제대로 한 대 맞고 말았다.차가 크게 휘청했다.“강여름, 사는 게 지루해?”하준은 홧김에 여름의 손에 든 뮬을 빼앗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차를 운전하고 있지만 않았으면 여름을 직접 손이라도 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누가 그 따위 소리 지껄이래?”부아가 난 하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최하준, 당신이 버렸으니까 내 신발 물어내.”하준이 코웃음을 쳤다.“왜? 신발 사주면 또 지안이에게 가서 내가 신발 사줬다고 떠들면서 상처 주려고? 어디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진심으로 백지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날 풀어줘. 밤중에 나랑 얽혀서 이러고 있지 말고.”여름이 앞을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지금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당신 같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어디 들어가서 얌전히 있을 필요가 있어. 어디 유부녀가 바람이나 피고 다니려고 들어?”여름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또 날 가두려고?”“자업자득이야.”하준이 버럭 소리질렀다.3년 전 감금되었을 때의 고통이 다시 하나하나 살아났다.여름은 순간적으로 실성한 듯 핸들을 마구 잡아 돌렸다.“미쳤어? 놓지 못해?”하준은 한 손으로 있는 힘껏 여름을 밀어냈다.그러나 여름은 3년 전처럼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서로 잡아 당기는 바람에 핸들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결국 여름은 하준의 팔을 물었다. 여름은 틈을 노리고 핸들을 화단으로 돌리면서 발로는 엑셀레이터를 확 밟았다.“놔! 이거 놔!”아픔을 꾹 참고 앞을 보니 차는 이미 화단을 지나 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냉철한 하준도 이때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여름은 이번에는 하준의 주요 부위를 꽉 잡아버렸다. 하준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이제 다시는 너한테 안 갇혀! 죽을 거면 같이 죽는 거야!”여름은 미친 듯한 눈으로 하준을 노려봤다
삐…삐…삐…“……”측정기의 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울렸다.우는 소리도 들려왔다.하준이 힘겹게 눈을 떠보니 백지안이 눈물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준, 깼어났어?”백지안이 벌떡 일어났다.송영식과 이주혁이 후다닥 달려왔다.하준은 그들을 보다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무심코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강여름은?”눈물 범벅이던 백지안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송영식이 화를 냈다.“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냐? 지안이에게 접대한다고 거짓말하고 찾아간 게 그래 겨우 강여름이었어?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거야? 경찰에서 CCTV 분석해보더니 너희 둘이 싸우다가 화단을 지나서 벽을 들이 받았다던데. 네가 운전하는데 강여름이 핸들을 꺾어서 널 죽이려고 했대. 경찰에서 강여름을 조사할 거야. 깨어나면 재판 받겠지.”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어쩐지 머릿속에서는 정신을 잃기 전의 장면이 계속해서 맴돌았다.여름의 그 시선이 하준의 뇌리에 깊이 박혀버렸다.“준.”백지안이 잠긴 목소리로 가볍게 하준을 불렀다.하준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지안아, 미안해….”“왜 나에게 거짓말했어?”백지안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준, 우리 십수 년을 함께 했잖아? 네 마음 속에서 강여름을 도저히 놓을 수 없다면 그냥… 강여름 곁으로 돌아가.”“왜 네가 그런 소리를 해?”송영식이 벌컥했다.“내가 봤을 때는 진짜 네가 너무 했다. 너 사고 나고 나서 지안이가 거의 기절할 뻔 한 건 아냐? 여기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널 간호했어. 지안이가 그렇게 너만 바라보는데, 지안이의 마음을 져버리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하준아, 대체 강여름은 왜 찾아간 거야?”이주혁이 하준을 바라보았다.“그런 거 그만 물어. 하준이 좀 쉬게”백지안이 하준의 손을 잡고 마음이 아픈 듯 말했다.하준은 너무 죄책감이 느껴졌다.“미안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너랑 결혼할 거야. 올해 안에 꼭 식 올리자.”“그래. 기다릴게.”백지안은 눈을 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