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보는 하준의 시선이 사뭇 불편했다. 하준은 주머니에 한 손을 꽂더니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들었어? 애초에 내가 당신이랑 결혼한 이유는 집에서 하도 결혼을 재촉해서라도 당신도 날 한선우의 삼촌으로 착각해서 내게 접근했던 거잖아?”여름은 이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래, 처음에는 우리 서로 계약으로 시작한 결혼이었지. 하지만 나중에는 우리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잖아요? 난 당신에게 억지로 같이 살자고 한 적 없어.”“시끄러워.”하준은 듣고 싶지 않았다.“당신이 계속 날 유혹한 거잖아? 아니면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이랑 결혼했을 것 같아?”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이었지만 여름은 역시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최하준, 당신 정말 너무 하네. 백지안이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 않게 해주겠다고 우리가 이혼했다는 거짓말을 내게 시키다니. 난 무슨 소리를 듣겠냐고? 다들 내가 FTT에 돈을 노리고 들어왔다고 말할 거 아냐? 그래, 백지안의 명예는 지켜주겠지만, 나는? 나는 엄청나게 욕을 먹을 텐데. 내 기분이 어떨지는 생각해 봤냐고?”“내가 왜 당신 기분을 생각해야 하지?하준은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다. 하는 말마다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왔다.여름은 결국 웃고 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백지안의 최면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어쨌거나 애초에 하준은 백지안을 잊은 적이 없는 것이다.여름이 웃자 하준은 마음이 되레 불편해졌다.“내가 하는 말을 들은 건가?”“혼인 중에 불륜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서 당신들 명예를 지키자고 날 억울하게 만들 셈이라니, 꿈 깨시지. 사람들 하는 말 틀린 거 하나 없지 뭐야. 백지안은 불륜녀일 뿐이라고.”여름은 결국 크게 소리 지르고 말았다.“그런 소리 하지 마!”매정하게도 하준은 되려 이런 여름에게 윽박질렀다.여름은 움찔해서 배를 감싼 채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강여름,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지안이를 모욕하는 소리했다가는 그냥 두지 않겠어.”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또박또박
-뭔 사업이야? 다 때려치우고 연기해라! 최하준은 연기가 전공인가 봄.“……”이어서 백지안이 온라인에 하준과 자신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커프샷을 올리기 시작하자 네티즌 여론은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 바로 반응하기 시작했다.뒤에서 여름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여름은 SNS를 탈퇴하고 뉴스도 아예 보지 않았다.곧 임윤서가 미친 듯이 화가 나 전화를 걸어왔다.“야, 미쳤냐? 무슨 너랑 최하준이 지난 달에 이혼을 해? 너희 아직 이혼하지도 않았잖아? 유부남이면서 최하준이 그 더러운 백지안이랑 붙은 거잖아? 사람이 어쩜 그래? 넌 근데 왜 그런 오명을 쓰겠다고 나서? 지금 사람들이 너더러 뭐라고 하는지 모르니? 안 되겠어. 이 언니가 열불이 뻗쳐서 죽겠다. 그것들을 아작을 내야지 도저히 안 되겠어!”“어쩔 수 없었어. 최하준이 우리 아버지를 두고 위협했거든. 내가 성명을 발표하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 치료를 중단시킨다잖아.”여름이 무기력하게 말했다.“그러고도 사람이라니? 정말 어떻게 그렇게 못됐냐? 당장 그 인간이랑 이혼해 버려.”윤서가 길길이 날뛰었다.“아마 내가 출산하고 나면 이혼해 줄 것 같아.”“애까지 뺏어간다니?”윤서는 이제 피를 토할 지경이 되었다.“아니, 백지안 있잖아? 자기 애는 걔더러 낳아달라고 하면 되지.”여름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너무 화가 난다. 절대 백지안이 네 아이들 못 키우게 해.”“당연하지.”전화를 끊고 여름은 수심에 잠겼다.----한편 백지안은 즉시 해변 별장으로 이사했다.백윤택은 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신이 났다.“지안아, 여기 정말 고급스럽다. 어쩐지 이상하게 여기 그렇게 들어오고 싶어한다 했더니…. 이 부근이 서울에서 제일 부동산 가격이 높은 곳이라며?”“비싸서 여기 들어오고 싶었던 게 아니야.”백지안이 소파에 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여기가 바로 강여름이랑 최하준이 신혼을 보냈던 곳이거든. 흥! 강여름이 알면 피를 뿜을걸?
백윤택이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며칠 임윤서에게 사람을 좀 붙여놨거든. 내가 그걸 해치우지 못하면 성을 간다!”백지안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임윤서라면 백지안의 눈에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아무리 그래도 살살해.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걱정하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밤 9시.여름은 샤워를 하고 나와서 임윤서의 톡을 받았다. 1시간 뒤에 게임을 하자는 내용이었다.혼자 내버려 두면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느껴져서 여름은 흔쾌히 동의했다.두 사람은 음성채팅을 하면서 몇 판을 놀았다. 임윤서가 건너편에서 외쳤다.“아악! 빨리 나 좀 지원해 줘! 완전히 둘러싸여서 못 나가고 있어.”“기다려 봐….”임윤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맵을 켜는데 건너편에서 임윤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오밤중에 누가 이렇게 문을 마구 두들겨? 뭐예요? 경찰에 신고….”“콰광!”갑자기 건너편에서 굉음과 함께 고성이 들려왔다.그리고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여름은 급히 임윤서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불길한 예감이 덮쳐왔다. 하준의 본가에서 임윤서의 집까지는 차로 최소한 1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지금 간대도 도저히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게다가 여름은 서울에 마땅히 도와줄 만한 사람을 알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여름은 급히 양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대표님, 윤서네 집에 아무래도 누가 침입한 것 같아요. 지금 바로 좀 가서 봐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윤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불안한데 저희 집에서 너무 멀어서요. 윤서네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저도 지금 바로 출발해요.”“그래요. 제가 당장 가볼게요.”통화를 끝내고 여름은 차를 끌고 나갔다. 입구의 수위는 여름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여름은 급한 마음에 그대로 차로 문을 들이 받아버렸다. 그러나 문이 어찌나 견고한지 한번 들이받은 것으로는 열리지 않았다.
‘이 사람은 벌써 두 번째 나 때문에 칼에 찔리는구나.그리고 이 사람에게는 죄책감 말고는 줄 수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없어.’“어허, 이거 대체 임윤서의 서방인가, 아니면 강여름의 내연남인가?”백윤택이 실실거렸다.“이거 이거, 강여름이 내 매제를 속이고 밖에서 남자나 만나고 있잖아?”“백윤택, 이 짐승만도 못한…. 내가 오는 길에 가택 침입으로 신고했어! 이렇게 여럿이서 사람을 폭행까지 했으니 이제 법망을 빠져나가지는 못할 거야.”여름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혐오한 적이 없었다.“하하하, 경찰? 경찰 좋지. 얼마든지 신고해 보라고. 어쨌든 이제 내 매제가 최하준이란 말이야. 최하준이 분명 날 꺼내줄 거라고.”백윤택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어쨌든 이 정도 일은 내가 밥 먹듯 했어도 매번 내 매부가 다 무마하고 날 꺼내 줬거든.”여름은 백윤택이 말끝마다 ‘매부’. ‘매부’거리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최하준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투가 아닌가.그 유들유들한 표정에 여름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다행히 이때 경찰이 들이닥쳤다. 곧 백윤택 일당은 잡혀갔다.양유진과 임윤서는 바로 병원으로 호송되었다.구급차로 병원에 가는 길, 여름의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모두 하준의 집에서 걸려 오는 전화였다. 그중에는 하준이 걸어온 것도 있었다.여름이 전화를 받자 바로 고함이 들려왔다.“강여름, 이 밤중에 어딜 간 거야? 차로 대문을 들이받다니 무슨 짓이야? 내 아이들에게 무슨 이상이라도 생겼다가는 가만 안 둘 거야.”“당신 애가 내 배 속에 있는 건 아나 보네요.”여름도 참지 못하고 맞받아쳤다.“오밤중에 어딜 갔냐고? 백윤택이 오밤중에 내 친구네 집에 들이닥쳐서 사람을 때리고 찔렀어.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오냐오냐해서 이런 인간이 끝 간 데를 모르고 날뛰는 거잖아? 최하준, 당신이 미워! 당신이 밉다고! 알아?”소리를 지르고 나니 여름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뚝
왜 그 말이 그렇게 계속 맴도는지, 왜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는 하준도 알 수 없었다.“따라와.”하준은 여름을 보며 명령하듯 말했다.여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준은 신경도 쓰기 싫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목구멍으로 피가 솟을 듯 분노가 치밀었다.“내 말 안 들려? 임신한 몸으로 이렇게 불편하게 있으면 안 된다고.”하준이 여름을 잡아 일으켰다.여름이 하준을 와락 밀치더니 슬프게 웃었다.“나라고 불편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겠냐고? 내 친구가 둘이나 저러고 정신도 못 차리고 누워있는데 내가 잘 생각이 들겠어요? 뭐, 백지안 말고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당신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하준은 여름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입고 있던 재켓을 벗어 여름의 어깨를 감싸주었다.놀라서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여름의 귀에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아이들 춥게 하지 말라고.”반짝하고 눈에 들었던 빛은 곧 사라졌다.여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지금 상황이 이 지경인데 나는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야?’그러나 곧 하준의 전화가 울렸다.하준이 휴대 전화를 꺼낼 때 흘끗 보니 액정에 ‘지안’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하준은 일어나더니 저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복도는 워낙 조용했던 터라 심야가 아니었어도 여름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백지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이때 수술실 불이 꺼졌다.의사가 양유진의 침대를 밀고 나왔다. 양유진은 깨어 있었다. 여름의 초췌한 모습을 보더니 양유진이 미소를 지었다.“피곤하죠? 가서 좀 쉬어요. 난 괜찮아요….”‘괜찮다고?그게 이제 막 수술을 하고 나온 사람이 할 소린가?’여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던 하준의 눈에 여름과 양유진이 서로 마주 보는 장면이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여태껏 양유진의 수술을 지키고 있었던 거야?”“양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윤서를 구하지 못했을걸.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됐어요.”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따라가서 뭐 해? 십중팔구 경찰서 아니면 백지안에게 갔을 텐데.’여름의 예상이 맞았다.20분 뒤 하준은 경찰서에 나타났다. 백지안은 이미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어서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준….”보자마자 백지안은 하준의 품으로 뛰어들어 울먹였다.“미안해. 우리 오빠가 또 사고를 쳤네. 이렇게 못난 짓을 하고 다닐지는 나도 몰랐어.”“전에 다 내가 뒤를 봐주는 바람에 점점 더 안하무인이 된 거잖아.”하준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사람까지 데리고 가택 침입이라니. 게다가 칼까지 들고 난동을 부려? 아주 이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있나? 왜? 아주 총을 들고 들어가서 은행이라도 터시지?”백지안이 급히 해명했다.“오빠가 임윤서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겠지. 그런데 임윤서는 안 좋아하면 그만이지 툭하면 사람을 모욕하니까, 오빠도 화가 나서 그만….”“그래서? 그러면 백윤택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말인가?”하준이 열 받아서 물었다.“아니, 그런 게 아니고….”백지안은 하준이 이렇게 진심으로 화낼 줄은 몰랐다. 놀라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껏 가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물론 오빠가 잘못했지. 나도 너무 실망했어. 이게 다 내 잘못이야….”“됐어. 네가 그런 것도 아닌데. 다 백윤택의 자업자득이지.”하준이 백지안의 어깨를 두드렸다.“준, 경찰에 물어봤는데 벌써 입건됐대. 상대가 합의해 주지 않으면 감옥 간다던데?”백지안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애원했다.“난 이제 이 세상에 우리 오빠 하나 남았어. 엄마 아빠도 다 돌아가시고, 이제 오빠까지 감옥에 가고 나면 난 식구를 다 잃는 것이나 다름없어.”“너한테는 내가 있잖아?”하준이 부드럽게 달래긴 했지만 영 백윤택을 구해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다르지. 오빠는 유일한 내 피붙이잖아.”백지안은 하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엉엉 울었다.하준은 가만가만 백지안의 등을 쓸어 주었다. 눈에는 막연한 빛이 감돌았다.
임윤서가 중얼거렸다.“거짓말 아니지? 나 정말 이제 무사한 거지?”“그럼. 거짓말이면 내가 성을 갈지.”여름이 맹세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임윤서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끊길 듯 말 듯 뭔가가 기억나는 듯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여름아, 무서워. 정말 너무 놀라서 죽을 뻔했어. 백윤택 그 미친놈이 쳐들어오고, 난 반항했는데 그놈들이 와서 나 막 때리고…. 그런데 양유진이 들어와서….”“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임윤서의 말을 듣다 보니 여름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백윤택이 이렇게까지 무식하고 악랄한 짓을 벌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여름이 양유진에게 알리지 않았더라면 윤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 무서워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괜찮아.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여름은 분노를 꾹 참으며 임윤서를 위로했다.임윤서는 내내 여름의 품에서 울었다. 그러나 진정제의 효과 때문인지 임윤서는 다시 곧 잠들었다.여름이 막 윤서에게 이불을 여며주는 데 백지안이 병실로 들어왔다.털썩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지안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울먹였다.“강여름 씨, 임윤서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우리 오빠를 대신해서 사과 드립니다.”그러더니 백지안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지안아, 그만 일어나.”하준이 따라 들어오다가 그 장면을 보고 바로 백지안을 잡아 일으켰다.그러나 백지안은 한사코 바닥에 붙어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다.“준, 잡아당기지 마. 원래 우리 오빠가 잘못한 거잖아.”“됐어. 지금 너 이마도 다쳤는데 이러고 있다가 큰일 나려고 어서 일어나.”“임윤서 씨는 목숨까지도 위태로웠는데 이까짓 이마가 문제겠어?”하준의 손을 떼어내려고 잡고 있던 백지안이 갑자기 엉엉 울며 하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준, 난 정말 임윤서 씨에게 너무 미안해.”“울지마.”하준이 고개를 숙이며 백지안을 안았다.여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면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자신의 남편이 자신이 가장
이렇게 심하게 토해본 적이 없었다. 눈물에 콧물에 담즙까지 올라왔다.자기 꼴이 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여름도 어쩔 수가 없었다.“괜찮나?”하준이 놀란 듯 미간에 주름을 잡고 여름을 쳐다봤다.백지안도 얼른 휴지를 뽑아 여름에게 건넸다.여름은 백지안의 손을 밀어내고 허리를 구부린 채 낮게 웃었다.“괜찮지. 당연히 괜찮아. 그냥 더러운 연극에 오심이 올라와서 그만….”하준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강여름, 말조심해서 하지.”“내 말이 틀려?”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 핏발이 섰다.“당신들은 대체 사과를 하러 온 거야 아니면 애정극을 벌이러 온 거야? 최하준,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라. 하지만 난 법적으로 당신 아내라고. 눈곱만큼이라도 그 사실을 존중해 주지 않겠어?”그리고 백지안을 쳐다봤다.“그리고, 당신, 들어오자마자 울고불고 용서해 달라니? 내가 당신더러 무릎 꿇으라고 했어? 당신이 무릎 한 번 꿇으면 윤서가 당한 폭행과 느꼈을 공포가 단번에 그냥 다 없는 일이 되는 건가? 백윤택이 벌인 짓은 엄연히 불법이야. 가택 침입, 폭행, 살인 미수, 강간 미수 등등이지. 당신은 머리 몇 번 조아리면 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나? 그러면 나도 백윤택을 죽이고 무릎 한 번 꿇을 테니까 용서해 주겠어?”백지안이 입을 뻐끔거렸다.“난 그런 뜻이 아니라….”“나가.”여름이 문밖을 가리켰다.“이런 일은 사적으로 처리할 수 없어. 법대로 저지른 짓에 대해 처벌 받아야지.”백지안이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말하려는데 여름이 먼저 다음 말을 이었다.“더는 무릎 꿇고 나에게 사과할 생각 하지 마. 무릎이 다 터져 나간대도 소용없어. 난 최하준이 아니야. 그래 봐야 난 마음 아프지도 않아.”“강여름!”하준이 결국 경고를 날렸다.“내 말이 틀렸나? 피해자는 우리 쪽이라고. 그런데 이게 뭐야? 왜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우리가 무슨 죽을죄를 지은 사람 취급을 받는 건데?”여름이 싸늘하게 웃었다.“나가. 다시는 둘 다 보고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