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아버지가 미워도 그렇지.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저게 다 무슨 소리야?’하준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지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백지안을 쳐다봤다.‘백윤택이야 워낙 인간 쓰레기니까 그렇다고 치고, 지안이가 자기 오빠 편에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다니…. 하마터면 오해할 뻔 했잖아.’“준, 내가 오빠 대신 강여름 씨에게 사과할게, 응?”백지안은 당황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쓴웃음을 지었다.“우리 오빠야 워낙 성질이 저렇다고 그냥 넘어가 줘. 벌써 오빠한테 여러 번 난 하준이랑 안 되는 사이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영 말을 안 들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네. 게다가 잘 들어보면 난 처음부터 끝까지 말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어. 날 너무 몰아세우니까 나도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네가 왜 사과를 해? 넌 나쁜 말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이게 다 형님이 잘못해서 그런 거잖아.”송영식이 얼른 나서서 위로했다.“게다가 임윤서도 지안이한테 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니지.”임윤서가 깔깔 웃었다.“마치 우리 여름이가 트러블메이커인 것처럼 들리도록 아주 애매하게 말하더니, 백지안 씨 사과 잘하네? 여름이 녹음 파일 아니었으면 백윤택은 깔끔하게 빠져나가고 여름이랑 최하준은 또 오해해서 싸웠겠지.”하준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백지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주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미안해 아까는 내가 깊이 생각을 못했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네가 뭘 주의해? 임윤서, 적당히 안 해?”송영식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됐어.”하준이 경고하듯 내뱉더니 백윤택을 쳐다봤다.“내가 몇 번 도와줬더니 여러 가지로 오해한 것 같군요. 어제 우리 쪽에서 누가 영하랑 협업도 제안했나 보군요. 아마도 당신과 내가 사이가 좋은 줄 알고 내게 잘 보이려는 생각이었나 본데, 그 프로젝트는 진행될 일 없을 겁니다.”백윤택이 완전히 깜짝 놀라서 허둥거렸다.“최 회장, 미안해. 내 이 주둥이가 문제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 프로젝트는 취
뒤에서 백지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두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백지안은 사실 연화정을 편안히 보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준이다 영식이에게 특별히 부탁까지 하다니 내가 못 미더운 건가?’백지안은 강여름이 녹은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 자신의 행실이 제 발등을 찍은 격이었다.‘망할 강여름, 백소영만큼이나 짜증나.’----주차장.임윤서가 소곤소곤 여름에게 불만을 토로했다.“지금 보니까 송영식이 백지안을 좋아하나 봐. 저런 남자랑 연애하는 사람은 무슨 죄냐. 머리는 나빠가지고 청순 가련한 척하는 백여시한테 넘어가서 정신도 못 차리고… 와씨! 설마 백지안이랑 키스하고 막 그런 사이는 아니겠지? 갑자기 토하고 싶네? 아오, 내가 전에 송영식이랑 강제로 키스한 적이 있거든. 그러면 나 백지안이랑 간접 키스한 거 아니냐?”“……”여름은 놀란 얼굴을 했다.“언제 송영식한테 강제로 키스를 했대?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그런 인간한테…. 길가다 아무나 잡고 해도 그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왜…?”“아오, 그게 다 윤상원이 찾아왔을 때 하필 송영식이 옆에서 지나가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윤상원한테 보여주려고 송영식한테 키스를 해버렸지. 나도 아주 후회막심이다. 우웩~”여름이 확 인상을 썼다.“아, 토하는 시늉도 하지 마. 나도 토하고 싶잖아. 백지안 전남친이 내 남편인데 키스를 얼마나 했는 줄 아냐?”“어머, 그럼 너랑 백지안은 간접키스를 얼마나 한 거야? 야, 집에 가서 입 씻어!”내내 앞에서 걷던 하준은 어이가 없었다.‘저 둘은 여기 주차장이 얼마나 소리가 울리는 지 모르나? 당신들 하는 얘기 나한테도 다 들린다고.당신들 눈에 나랑 영식이가 아주 쓰레기로 보이나?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하준이 걸음을 멈췄다.임윤서는 알겠다는 듯 하준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바로 말했다. “내 차는 저쪽에 세워놨거든. 간다. 나중에 봐.”“나도 차 가져왔어.”여름이 차가 있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이때 하준이 여름을
“미안하지만 난 쇼핑할 생각 없어요. 그냥 백지안은 그만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 이전에 당신의 기억 속에 백지안이 얼마나 순수한 여자애였는지는 몰라도, 실종되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아직도 예전의 그 순수한 백지안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여름은 하준의 손을 뿌리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하준이 어두운 얼굴로 마른 세수를 했다.솔직히 오늘의 백지안은 하준에게도 너무나 실망스럽고 낯선 모습이었다.여름의 녹음 파일이 아니었다면 하준은 영원히 오해 속에 살았을 것이다.지금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어 보니 백지안과 여름이 부딪혔을 때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백지안에게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았다.‘왜 그런 거지?내 아내는 여름이잖아?아내를 믿어주는 게 맞는 거지.앞으로는 정말 지안이를 멀리 쳐내는 게 맞겠다.’----다음날 새벽.아침을 먹고 나서 여름은 옷방에서 검은 원피스를 꺼내 입고 나왔다.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문 앞에 서 있는 하준을 보니 한참을 서 있었던 모양이다.“백현수 어르신 장례식 갈 거지? 내가 데려다 줄게.”여름이 싸늘하게 째려봤다. 하준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쥐어짰다.“백지안 보러 가는 거 아니야. 누가 우리 와이프 괴롭힐까 봐 그래.”“… 오랜만에 듣기 좋은 소리를 다하네요.”여름이 묘하게 비꼬듯 말했다.“……”‘언제는 내가 안 그랬나?뭐, 아무렴 어때? 여름이 기분만 좋아진다면 한소리 들어도 내가 좀 참으면 되지.’“가요. 어쨌든 당신도 아버님 영정 앞에서 사과는 드려야 할 거 같으니까.”여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준과 말다툼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준의 어리석음을 탓할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하준과 백지안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첫사랑이었다. 하준과 함께 한 지 1년도 안된 자신이 백지안의 교활한 진면목을 까발리려면 천천히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내가? 사과를?”하준이 흠칫했다.“안 해요, 그럼? 당신만 아니었으면 백윤택은 애진작에 감옥에 들어갔을
여름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뭐, 그래도 어머님이랑 아버님을 합장한다니 최소한 두 분이 함께 계실 수 있잖아.’여름이 가서 절을 하자 백지안이 바로 맞절을 했다.두 사람이 함께 고개를 숙여 가까워졌을 때 백지안이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저 안에 든 게 진짜 연화정일 것 같니? 훗, 연화정의 뼛가루는 내가 애진작에 변기에 쏟아버렸어. 저기든 건 웬 개 뼛가루야.”여름은 충격에 휩싸였다.번쩍 고개를 들었다. 백지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비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가증스럽고 악독할 수가 있지?무슨 일인가는 당할 줄 알았지만…’여름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백지안을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백지안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면서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픈지 눈물이 핑 돌았다.“사모님, 제가 뭘 또 잘못했다고 이러세요?”“이제 지금 뭐 하는 짓이야?”송영식이 후다닥 달려와서 백지안을 부축했다.“진짜 너무 하시는구먼.”이주혁도 다가와 백지안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하준은 완전히 머리가 아팠지만 여름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 믿었다.“자기 왜 그래?”“뭐가 왜 그래? 정신 나갔나 보지. 하준아, 당장 데리고 나가라. 나 진짜 뭔 일 내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송영식이 씩씩거리며 버럭버럭 소리질렀다.“백지안, 난 살면서 너처럼 악독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죗값 다 치르게 될 거다.”여름이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돌아서서 나갔다.백지안을 편드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여름도 당장 어쩔 수는 없다는 판단이 섰다.‘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저 악랄한 짓거리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저게 진짜 제 정신이냐고? 최하준, 앞으로 저 인간 내 눈앞에 안 보이게 해라. 다시는 꼴도 보기 싫으니까.”송영식이 여름에 대해 엄청난 혐오를 드러내며 내뱉었다.“영식아 이러지 마. 저 분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나도 백지안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지난 번에 왔을 때 그 일은 크게 떠벌리지 않더라고. 백지안은 아닌 것 같아.”백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사뭇 복잡한 얼굴이었다.“하지만 최하준을 뺏어가겠다는 말은 하더라. 최하준의 아내 자리를 차지하겠다면서, 너 조심해라.”여름은 자신의 직감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놀라서 움찔했다.“그렇구나. 그런데 최하준이나 송영식 앞에서는 전혀 그런 티를 안 내더라고.”“그 인간 원래부터 가식적이었어.”백소영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최하준이랑 친구들은 늘 그 인간을 공주님처럼 떠받들었지.”여름이 비참한 듯 피식 웃었다.“그건 나도 알아. 아 참, 백지안이 안 죽었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이 전에도 알았을까? 지금은 유명한 정신과 의사 나드쟈로 알려져 있더라고. 지금 최하준의 병을 치료하고 있어.”백소영이 깜짝 놀랐다.“난 정말 죽은 줄 알았어. 몇 년 전에 외국에서 유학할 때 친구랑 공원에 가서 놀다가 납치되어서 친구는 죽었는데 그 놈이 여자는 데려다가 다 강… 뭐 그건 다 지나간 일이고. 어쨌든 살아남았는데도 왜 식구나 최하준에게 연락을 안 했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공부를 해서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됐다니 대단하네.”여름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백지안이 그렇게 실종된 거였구나.’백소영이 갑자기 말했다.“여름아, 영 지치면 그냥 포기하자. 넌 지금 고립무원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백소영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여름은 좀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포기라니, 생각해 보지 못했다.하준을 남의 손에 넘긴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아니 하준과 백지안이 친밀하게 지냈을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여름은 심장을 칼로 도려낸 것처럼 아팠다.‘왜냐고? 최하준은 내 남편이니까!내 아이의 아빠니까!’백소영은 여름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지었다.“아무래도 백지안에게 최하준 씨 치료를 맡기는 건 그만 두는 게 좋겠어. 심리 치료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최하준을 계속
“그래. 나 여기 있어.”하준이 여름의 등을 도닥도닥거렸다.정말 너무 오랜만에 여름이 ‘쭌’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하준은 심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내가 너무 오랫동안 여름이에게 제대로 마음을 써주지 못해서 우울증에 걸렸는지도 몰라.’“그런데 오늘 나 좀 화난 것도 있어. 어떻게 그렇게 차를 몰고 가버릴 수가 있어? 그렇게 빨리 차를 몰다가 당신이랑 우리 아기 어떻게 되면 난 어떡해?”“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여름이 고개를 젓더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실은 아까 괜히 그런 게 아니었어요. 백지안이 그 유골함에 든 것이 어머님 유골이 아니라 개의 뼛가루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어머님 유골은 변기에 버렸대. 그 말을 들으니까 울컥해서….”“……”하준은 완전히 경악했다.여름은 하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당신이 안 믿을 줄 알았어요. 내가 못 돼서 백지안을 밀쳤다고 생각해도 상관 없어요.”“그거 정말 믿기는 힘든 말이네.”하준이 여름의 등을 쓰다듬으며 사실대로 자기 마음을 이야기했다.‘지안이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면 좀 무서운 걸.연화정이 아버지의 내연녀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어떻게 유골에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나도 믿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내게 거짓말한 거였으면 좋겠어.”여름이 힘없이 말했다.“아이, 괜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이모님에게 케이크 가져다 달라고 했으니까 같이 달달한 거 먹자. 그러면 기분도 좀 나아질 거야.”하준은 여름을 안고 정원으로 나갔다.정원에는 아직 햇살이 남아 있었다. 여름은 하준의 가슴에 기대어 하준이 먹여주는 대로 케이트를 받아 먹었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 여름은 잠시 후 어쩐 일인지 하준의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여름을 안아서 방에 데려다 놓고 하준은 침실에서 나와 상혁을 불렀다.“가서 연화정의 유골이 사람 유골인지 확인 좀 해봐.”상혁은 깜짝 놀랐다.“사람 유골이 아니면 뭐, 귀신 유골이겠습니까?”‘요즘은 어째 점점 더 엽기적
“치료하러 가지.”하준은 그렇게 말하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여름은 입술을 깨물고 두 사람의 뒷모습이 나선 계단을 따라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얼마나 교활해? 말을 저렇게 묘하게 해서 졸지에 나를 질투심에 눈 멀어서 하준 씨 병세는 나 몰라라 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잖아?’치료가 끝날 때까지 여름은 1층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40여 분이 지나자 위층에서 물건 깨지는 소리와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급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방문이 안에서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모님, 열쇠 가져다 주세요.”여름이 바로 결정을 내렸다.이진숙은 허둥지둥 내려가서 열쇠를 가지고 왔다. 막 문을 열려는데 문이 안에서 벌컥 열리더니 하준이 백지안을 안고 안에서 튀어나왔다. 백지안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상흔이 보였다.여름이 깜짝 놀랐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러나 하준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품에 있던 백지안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괜찮아. 내가 당장 병원으로 데려다 줄게.”하준이 백지안을 위로하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여름은 돌아보지도 않고 급히 백지안을 안고 자리를 떴다.휑뎅그런 집 안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여름은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치료실로 들어가 보니 난장판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몽땅 다 뒤집어져 있었다. 여름은 하준이 발작하는 모습을 못 본 것이 아니었다. 백지안이 부상을 입었으니 하준은 정신이 들고 나면 분명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었다.“사모님….”이진숙이 걱정스럽게 여름을 쳐다봤다.“괜찮아요. 백지안을 어느 병원으로 데려갔는지나 좀 알아봐 주세요. 제가 가봐야겠어요.”여름이 부탁했다.20분 뒤 여름은 백지안을 이주혁의 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들었다.차윤이 운전해서 여름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막 입구에 들어서는데 안에서 하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움직이지 마.”“괜찮아. 그냥 작은 상처인데, 뭘.”“뭐가 작은 상처야? 내가 얼마나
여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웃었다.“그러면 백지안은 죽지도 않았으면서 그동안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뒤늦게 돌아와 놓고 최하준이 나랑 결혼한 게 내 잘못이라는 말인가요?”“돌아오지 않으려던 게 아니야. 자기가 이제는 하준이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송영식이 고통스러운 듯 눈시울을 붉혔다.“당신은 지안이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몰라요. 관심도 없고.”여름이 비웃듯 입을 비죽 내밀었다.송영식은 여름을 노려봤다.“강여름,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피도 눈물도 없을 수가 있지?”“……”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송영식 씨. 당신이 백지안을 사랑하거나 말거나 상관 없지만 남에게 상처주면서 그 사랑을 키우진 마시죠. 나에게 백지안을 동정하길 강요하는 건가요? 그러면 내 결혼생활은요? 우리 아이는 어쩌는데요? 나는 대체 누가 불쌍히 여겨주나요?”“하준이랑 지안이가 어떻게 만났는지 아나?”송영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정신병원에 하준이가 강제 입원되었을 때 지안이를 알게 되었어. 그래. 지안이는 멀쩡한데 그 집안에서 애를 병원에 처넣었던 거야. 거기서 지안이는 특유의 발랄함과 선량함으로 하준이의 병세가 좋아지게 한 거야. 지안이는 하준이의 태양이었어. 나중에 나도 하준이 덕에 지안이를 알게 되었지. 지안이는 정말 착한 애였어. 같은 학교가 아닌데도 지안이는 매일 하준이에게 편지를 써 주었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어른이 되어서 사업을 하기까지 지안이는 20년 동안 하준이와 함께 했다고.”“그래, 당신이 하준이랑 결혼했지. 하지만 그건 하준이가 지안이가 죽은 줄 알았을 때였잖아. 이제는 당신이 애를 가졌으니 하준이가 책임을 지려고 그러나 본데, 하준이랑 지안이 사이에 껴서, 당신은 좋나?”송영식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여름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하준 씨와 백지안이 정신병원에서부터 알게 된 사이였구나.’“지안이는 하준이를 위해서 의대까지 진학했다고. 걔는 평생을 하준이를 위해서 바쳤어.”송영식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