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가 얼굴을 찌푸렸다.“윤상원하고 오래 사귀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어. 진짜 괜찮은 남자는 다른 여자가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도 넘어가지 않더라. 혼자서 결혼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면 일시적으로는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을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핵심을 찔린 여름은 깜짝 놀랐다.임윤서가 여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이 세상에 내연녀는 많고도 많아. 최하준은 금수저인데 덤벼드는 사람이 한 둘이겠냐? 그런 문제는 최하준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돼. 그냥 순리에 따르자. 어쨌든 빼앗아 갈 수 있는 남자라면 그렇게 아끼고 귀하게 생각할 가치도 없지.”“어, 그런 것 같네.”“원래 그런 거야. 저녁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그래.”저녁을 먹고 나서 여름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하준은 돌아오지 않았다.텅 빈 건물을 여름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밤에 혼자서 그 큰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머릿속에 오늘 하준이 백지안을 안고 나가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그리고 병실에서 둘이 나누던 대화도 기억났다.백지안이 하준과 여름의 삶 속에서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임신을 한 몸으로 24시간 어디서든 백지안과 결전을 벌일 생각을 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준만 쳐다보고 있다니.정말 너무 지친다.윤서 말이 맞는지도 몰라. 남이 빼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죽자사자 아끼며 지킬 필요가 있을까?됐다. 이제 그만 하자. 이젠 나도 모르겠다.’여름은 배 속의 아가를 가만히 만져봤다.‘앞으로는 아기를 사랑하는데 시간을 보내서 아가들이 건강하게 태어나기만 바라자.’다음 날 깨어나서 보니 침대 한 쪽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세수를 하고 내려가 보니 이진숙이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하준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정말 너무 미안해. 어제… 너무 늦게 돌아왔어.”“괜찮아요.”여름은 미역국을 받아 고개를 숙이고 맛을 보았다.하준은 여름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움찔
반면 여름에게서 전화도 톡도 받지 못하는 하준은 견디기 힘들었다.전에는 백지안 때문에 여름이 시시각각으로 하준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뭘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하준이 전화를 걸지 않으면 여름이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하준이 톡을 보내면 여름은 간단하게 한두 자로 간결하게 답하곤 했다.심지어 백지안이 세션을 하러 와도 들여다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밤에 송영식, 이주혁과 놀아도 따라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다.이제 하준은 여름이 했던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말이 무슨 소린지 철저하게 이해됐다.지금 느끼는 기분은 너무 불편했다.일하다가도 종종 넋을 놓고 상혁을 쳐다보고는 했다.하준의 시선을 받은 상혁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무슨 일 있으십니까?”하준은 커피를 마시며 툭 던지듯 물었다.“어제 내가 접대하느라고 늦게까지 집에 못 들어갔잖아? 사모님이 자네한테 전화 하던가?”전에는 조금만 늦으면 상혁의 전화에 불이 나고는 했다.어젯밤에는 일부러 여름에게 말을 안 했다. 지금쯤이면 혼자서 온갖 망상을 펼치고 있을 시간이었다.상혁이 움찔했다.“아니요.”“……”하준이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훅훅 당겨 풀었다.“할머니는? 차 실장은? 이모님은?”‘자기는 직접 전화를 안 했어도 주변 사람을 시켜서 탐문을 했을 수도 있지.’“받은 전화 없습니다만.”상혁이 눈을 꿈뻑거렸다.“혹시 사모님 전화를 기다리고 계십니까?”“그럴 리가 있나?”하준이 상혁을 확 노려봤다.“강여름이 혼자서 끙끙 앓느라고 아기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봐 그러지.”상혁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거 참,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실 것이지.’“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은 오늘 아침에 노마님을 모시고 노 회장 댁에 마실 가셨습니다.”“마실을 가?”하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몸도 무거운데 뭘 노인네를 모시고 마실을 다녀?”“왜 안 됩니까?”상혁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노마님께서는 사모
“맞아. 걔 말이야.”조하정이 카드를 하나 내놓으며 말했다.“남편이라는 건 딱 잡아서 단속을 해야지,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을 따라 가버린다니까.”“일리 있는 말씀이네요.”여름이 카드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풀 하우스.”“……”앞에 있는 칩 무더기를 싹 쓸어가는 여름을 보며 조하정 입가의 마리오네트 주름이 깊어졌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 듣나 보네?”“알아 들었습니다.”여름은 태연자약하게 답했다.“하지만 제가 들으니 추대호 회장님도 전에 비서랑….”그말을 들은 조하정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그건 다 헛소문이야. 난 지금 자네 얘길 하고 있잖나?”“요즘 세상에 도덕군자가 어디 그렇게 많으려고요? 하준 씨가 우리나라 최고의 거부인데 최하준 침대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이야 많고도 많겠죠. 제가 그 많은 케이스를 어떻게 일일이 단속하겠어요? 그래서 전 자기관리나 잘 하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나중에 우리 쌍둥이들 태어나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할 거잖아요.”여름은 가볍게 말하면서 카드 패를 섞었다.다 섞고 나서 보니 테이블에 앉은 부인들이 얼굴이 굳은 채로 자신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돌아보니 새파랗게 질린 하준이 뒤에 서 있었다. 얼마나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조하정이 ‘푸흣’하고 웃었다.“최 회장, 들었나? 자네 와이프는 자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네?”“조 여사님은 본인 가정부터 챙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추신이 잘 나가면서 여사님은 간통 현장 잡으러 꽤 다니셨죠?”하준의 냉랭한 시선이 조하정에게 꽂혔다. 빙긋 웃던 조하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카드 그만 놀고 나랑 집에 가지.”하준이 여름을 의자에서 잡아 일으켰다.“아니 준아, 무슨 짓이냐?”다른 테이블에 있던 장춘자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일어섰다.“이제 겨우 1시간 놀았는데.”“할머니 1시간이면 실컷 놀았겠네요. 우리 아기한테 태교로 포커를 시킬 셈입니까?”하준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투로 말하더니 여름을 데리고 가 차에 태웠다.두 사람이 뒷좌
“어쩌라고?”여름이 빙긋 웃었다.“육체적인 탈선은 탈선도 아니라던데.”“……”‘무슨 뜻이야? 내가 백지안이랑 자도 신경 안 쓴다는 말이야?아니지. 그건 아닐 거야. 전에 내가 실수로 지안이를 안았을 때도 엄청나게 질투했는데.’“여보, 오늘 지훈이가 서울에 왔다고 해서 다들 환영식해 주러 가는 거야.”하준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자기도 같이 가자.”여름은 흠칫했다.이주혁이라면 나름 고향친구였다. 게다가 여름과 지훈은 내내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좋아요. 지훈 씨 본 지도 오래됐네.”하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어렵사리 밖으로 한번 불러내는데 성공했다 싶었더니 그 이유가 지훈이를 보고 싶어서라고?지훈이 자식, 나 몰래 여름이랑 연락하고 지냈던 거 아니야?’한편 바다 건너에 있던 지훈은 재채기를 했다.“에잇치! 아, 누가 내 생각을 이렇게 하나? 설마 서머는 아니겠지.”이지훈은 휴대 전화를 꺼내 여름에게 톡을 보냈다.-서머, 오랜만! 오늘 저녁에 얼굴이나 보죠.마침 여름의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던 하준은 화면 알림에 뜨는 톡을 보고 울컥했다.‘역시나 이 자식이 나 몰래 내 와이프랑 연락을 하고 있었잖아!’----저녁 8시.어느 호숫가 프라이베이트 바.하준이 여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들어왔다.이지훈과 송영식, 백지안은 가죽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두 사람이 들어오자 이지훈이 제일 먼저 일어나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와, 서머! 오랜만이네. 나 보고 싶었어요?”하준의 싸늘한 시선이 지훈을 한 번 쏘아보았다. 지훈은 갑자기 남극의 싸늘함이 온몸을 파고드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여름이 빙그레 웃었다.“어쩐 일로 서울을 다 왔어요?”“일이 좀 있어서요.”이지훈은 자기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우리 서머는 여기 앉아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 그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여름을 지훈 반대쪽에 앉혔다.졸지에 중간에 덩치 큰 남자가 끼어들자 이지훈은 입을 삐죽거렸다.“뭐? 내가 네 옆에
백지안은 은연 중에 컵을 든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침을 쿨럭쿨럭했다.“괜찮아? 아직 목이 불편한 거 아니야?”손영식이 얼른 다정하게 물었다.여름도 얼름 물었다.“어머나, 아직 상처가 다 안 나은 거 아닌가요? 아직 불편하면 집에서 쉬시는 게 좋았을 걸.”“말 다 했습니까?”송영식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위협했다.“하준이 치료하다가 다친 건데 하준이 와이프로서 지안이에게 고맙지도 않습니까? 뭐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이 속이 꼬였어요?”여름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비죽 내밀었다.“송 대표, 말을 왜 그렇게 하죠? 그날 저에게 하준 씨랑 백지안 씨는 아직 감정이 남아 있다면서 저더러 아내 자리 내놓으라느니 그랬잖아요? 그런데 내가 뭘 고마워 하죠? 다 자기가 스스로 너무 원해서 하는 일인데.”여름의 말이 떨어지자 송영식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여름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이지훈과 최하준은 동시에 안색이 확 바뀌었다. 특히나 하준은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송영식, 언제 우리 여름이에게 그 따위 소릴 했어?”“영식아, 왜 그런 소릴 했어?”백지안은 바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진작에 얘기했잖아. 나랑 하준이는 이미 지나간 관계라고.”“됐다, 됐어. 다 내 잘못이다. 난 화장실 좀 다녀올게.”송영식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 나가버렸다.“내가 가서 얘기 좀 해볼게.”백지안이 급히 따라나갔다.하준은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굳이 여름에게 같이 가자고 끌고 나온 것이 후회스러웠다.“여보, 영식이가 그 따위 소릴 했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가 알았으면 진작에 가만 안 뒀을 텐데.”“그러게. 서머, 영식이가 뭘 잘 몰라서 그러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이지훈이 화제를 바꿔보려고 했다.“우리 당구나 한 판 할래요?”여름이 끄덕였다.“좋아요.”여름과 이지훈이 당구대로 걸어가자 하준이 걱정했다.“임신했는데 당구 같은 거 쳐도 될까? 그냥 내가 대신 칠 테니까 당
이지훈의 눈에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여보, 내가 과일 가져왔어.”하준이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이때 룸 문이 열리더니 이주혁이 웬 늘씬한 여자 허리에 팔을 얹고 들어왔다. 기다란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어깨가 드러난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하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그러나 여름이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머릿속에 욕설이 수억 개 스쳐 지나갔다.‘와….뭐 이런 거지 같은 날이 있지?’오래도록 얼굴도 못보고 지냈던 시아였다.TH가 망하고 나서 시아는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가끔 연예계 뉴스에 등장하는 시아를 보기는 했는데 최근 인기가 점점 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여름은 시아와 따로 연락도 주고 받지 않고 별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시아가 이주혁과 함께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최하준 친구들은 죄다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고르는 짝마다 저 모양이야?소영이 같은 괜찮은 사람은 두고 어디 가서 하필 시아 같은 애를 데려왔담?’하준은 요즘 기억력이 형편없어져 시아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지훈의 반응을 보고 대충 눈치 챘다.“여름아,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시아가 여름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바로 다정한 척 반갑게 다가왔다.“미안,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던가?”여름이 손바닥을 들어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이주혁의 얼굴이 구겨졌다.“아는 사이야?”“알다 뿐이게 나랑 여름이는 중학교,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어. 내내 얼마나 친했다고. 그런데 서울 가더니 연락이 끊기더라고.”시아가 난감한 듯 웃었다.이주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강여름은 서경주가 알아보고 나서야 서울로 데려왔지?지금 시아의 말투를 보니 강여름은 여기 와서 팔자가 피면서 시아와는 연락을 끊은 모양이군.’여름은 이주혁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이 대놓고 입을 열었다.“내가 왜 연락 끊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거야.”“흥! 그러게 말입니다.”이지훈이 맞장구 쳤다.“기억나네. 전에 동성에 있을 때 항상 진가은 같은 격 떨
백지안이 분위기가 싸한 여름을 한번 훑어보더니 눈이 반짝 빛났다. 곧 다정한 언니 모드에 돌입했다.“우리 노래 부를까요?”여름은 어이가 없어 두 사람을 흘끗 봤다.‘불여시랑 백여시인가?아주 쿵짝이 잘 맞겠네.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룸에서 곧 음악소리가 울렸다. 여름은 곧 흥얼거릴 수 있었다.예전에 여름과 임윤서, 시아가 어울릴 때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이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아가 마이크를 들고 와 여름에게 건넸다.“여름아, 우리 같이 부르자. 이거 우리 둘이 제일 잘 부르는 노래잖아. 내가 너한테 정말 잘못한 일이 있다는 거 알아. 백만 번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는 거 말고는 너한테 어떻게 빌어야 좋을 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널아 친하게 지냈던 그 시절이 그리워. 애초에 네가 날 그렇게 응원해 주지 않았다면 내가 연예계에 발을 들여 오늘 같은 날이 오지도 않았을 거야. 난 네가 보고 싶었어, 정말.”마지막 말을 하면서 시아는 목이 메인 듯했다.여름도 살짝 아련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이 상황 자체가 너무 가소롭게 느껴졌다.‘과연 시아가 정말 후회할까?형편이 어려워졌던 내게 그렇게 돌을 던졌던 애가?’“쇼를 하고 싶은가 본데, 난 네가 벌이는 쇼에 참가할 생각이 없어.”여름이 사뭇 단호하게 말했다.이주혁이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눈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송영식은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사람이 저렇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최하준 와이프가 되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백지안이 한숨을 쉬었다.“친구에게 오해 받는 기분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의 우정이고,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학창시절 우정이라니 난 너무 부러워요. 그 순수한 시절의 우정, 잃어버린 다음에 후회하지 말아요.”여름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다들 천하의 속좁은 나쁜 인간 보듯 자신을 혐오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잠시 후 여름이 웃었다.“누군가에게 심하게 상처 받고도 피해자는 가해자를
여름은 배를 쓰다듬었다.“미안하다, 아가들아. 화 안 낸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엄마가 컨트롤을 하지 못했네.”“자기야, 내 차로 가자.”하준이 여름의 손을 잡았다.“차 가져오라고 내가 전화할게. 조금만 기다려.”여름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에도 여름은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하준은 여름의 눈치를 몇 번 살피더니 좀 피곤한 기색이 들었다.“미안해. 오늘 괜히 같이 가자고 졸라서. 영식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어.”“송 대표 말이 맞지, 뭐. 다음부터는 같이 가자고 하지 말아요.”여름이 덤덤하게 답했다.사실 여름은 내심 크게 실망했다. 그 따위 인간들을 맞아서 늘 혼사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하준은 한 번도 적극적으로 자기 편에 서준 적이 없었다.‘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네.’집에 도착하더니 여름은 그대로 내려버렸다.“여보, 우리 아기….”하준이 뒤에서 불렀지만 여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준도 이제는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야? 언제까지 내게 이렇게 짜증을 부리려고 그래?”여름이 우뚝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렸다.“당신이 앞으로 송영식 같은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않으면 좀 나아질 지도 모르지.”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오늘 송영식과 친구들이 한 언행에 불만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들 자신의 20년 지기였다. 그 두 사람은 하준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생사고락을 함께 해준 친구였다. 쉽게 포기하기는 힘들었다.“그렇게 못할 줄 알았지.”여름이 자조적으로 웃더니 돌아서서 갔다.‘유유상종이라고 송영식이나 이주혁처럼 저런 불여시 같은 것들에게 목메는 녀석들과 어울리니 최하준도 조만간 그런 인간이 되겠지.’여름은 어쨌거나 자신은 백지안이나 시아 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 이후로 한동안 여름은 다시는 하준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 집이 얼마나 넓은지 두 사람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는 일도 흔했다.하준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있었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