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으로 내려가 물을 따르던 여름은 불현듯 어렸을 때 하준의 보모가 툭하면 하준을 옷장에 가두었던 일이 생각났다.손에 든 컵이 털썩하고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여름은 급히 2층으로 올라가 옷장을 열었다.하준은 그 큰 몸을 달팽이처럼 잔뜩 웅크려 무릎에 머리를 묻은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나와요.”여름이 잡아당겨 봤지만 하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추워…. 때리지 마세요….”하준은 있는 힘껏 귀를 꽉 막고 있었다.마음이 약해지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보니 결국 마음에 쌓았던 단단한 성벽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안 때려요. 이 안에서 자지 말고 우리 침대로 가요. 괜찮아.”여름은 하준을 한껏 그러안고 계속 머리를 쓸어주었다. 떨림이 멈추자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침대로 가서 이불을 덮어주었다.그러는 동안에도 하준은 내내 여름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몇 번이나 빼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여름은 그냥 그대로 옆에 누웠다.하준이 잠들면 옆 방으로 갈 생각을 하던 여름은 피곤해서인지 어느새 함께 누운 채로 잠이 들어버렸다.얼마를 잤을까….여름은 몽롱한 채로 누군가가 자신의 입술에 다급히 키스하는 것을 느꼈다.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눈을 뜨고 상대가 누군지 확실히 보이자 여름은 화가 나서 확 밀쳐버렸다.“누가 맘대로 나한테 뽀뽀하라고 했어요!”“자기 내 걱정하잖아, 어제도 마음 아파서 내내 나랑 같이 있어주고.”하준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름을 바라보았다.“우리 사이 참 좋다, 그렇지?”“좋기는, 개뿔….”하준의 입술을 보고 있자니 여름은 다시 침실에서 지다빈이 하준을 올라타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대로 화장실로 뛰어갔다.하준이 걱정스럽게 따라오자 다 토한 여름은 얼굴을 들더니 하준을 노려봤다.“다시는 입 맙추지 말아요. 구역질 나니까.”“……”하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내가 그렇게나 싫다는 뜻인가?그래, 내 마
여름은 하준이 차려준 아침 식사에 좀 자극을 받았다.그래서 그대로 차를 몰고 모 호텔로 조식을 먹으러 갔다. 전에 윤서에게 그 호텔 조식이 괜찮다는 말을 들었었다.그러나 막 식사하려는데 서유인과 추성호가 팔짱을 끼고 계단으로 올라옸다.조찬 식당 매니저가 공손하게 두 사람을 따르고 있었다.“일찍 오셔서 자리는 충분이 많습니다. 어디에 앉으시겠습니까?”서유인은 한 번 둘러보더니 시선이 여름에게로 떨어졌다. 눈을 번쩍이더니 곧 추성호를 끌고 다가갔다.“아니, 이게 누구야? FTT 사모님 아니야? 어째 혼자서 여기서 아침을 먹지? 그 사랑하는 최 회장은 어디로 가시고?”서유인이 사방을 돌아보았다.여름은 인상을 썼다.이제 겨우 조용히 아침을 먹나 싶었는데 갑자기 서유인이 나타나서 난리를 떠니 짜증이 났다.매니저는 당황했다.“저, 죄송합니다. 제가….”“전 괜찮습니다.”추성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곧 일어나실 것 같으니 강여름 씨 앉은 자리를 기다리죠. 강여름 씨는 이미 최 회장에게 쫓겨나서 며칠 전에 집을 사서 급히 이사 나갔다고 하던데.”매니저가 흠칫하더니 여름을 보는 시선이 갑자기 불손해졌다.“어디서인지 정보를 아주 빨리 제공 받으시네요.”여름은 입을 닦더니 추성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기자들보다 정보를 빨리 얻으시는 것 같은데 우리 집 밖에 CCTV라도 달아 놓으셨나요?”추성호가 콧방귀를 뀌었다.“최하준이 전 여친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간병인으로 데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웃기네, 정말.”서유인이 한껏 조롱하는 말투로 덧붙였다.“지안그룹이면 백지안 이름을 그대로 딴 거잖아? 그 얼굴을 하고도 최하준 와이프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뭐 어쨌든 내가 고마운 마음은 들어. 네가 최하준을 안 채갔으면 내가 우리 사랑스러운 성호 씨를 못 만날 뻔했잖아.”추성호가 아주 득의양양하게 서유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예전에는 그렇게 서유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 서경주의 부재로 서유인은 벨
“뭘 또 그렇게 꼬치꼬치 묻습니까?”추성훈이 서유인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아직도 최하준에게 관심 있어요?”“무슨 말씀을, 제 마음속에는 이제 성호 씨밖에 없어요.서유인이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웃었다.“그냥 궁금해서 그러죠.”추성호가 작게 ‘그렇군요.’하고 말했다.‘뿐만 아니라 지금 최하준은 병세가 점점 더 악화돼서 며칠 전에는 구급차에 실려 갔지.정말 대단한 사람이야.’여름이 떠나자 길가에 서 있던 검은 세단에서 누군가가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께서 추성호와 서유인에게 자리를 뺏기셨습니다.”전면 유리 앞에서 하준은 창문 너머의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그 둘은 벌을 좀 받아야겠군. 둘에게 선물 하나 안기고, 식당은 이제 문 닫게 만들어.”******식당.추성호와 서유인이 아직 한창 식사 중이었다.갑자기 시 위생점검 전담팀에서 들이닥치더니 봉인 테이프를 붙였다.“이 식당에서 식사한 손님으로부터 식중독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이 시간부로 봉쇄하고 위생 점검을 실시합니다. 관계자가 아닌 분은 즉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그러더니 식사하던 사람을 내보내기 시작했다.“빨리 나가주세요.”서유인은 부루퉁해졌다.“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래요?”“누구신지는 제가 관심 없습니다. 현장 소개에 협조하지 않으시면 공무집행 방해에 해당합니다.”그러더니 집행요원들이 와서 둘을 끌어내려고 했다.서유인은 ‘악악’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신고할 거야!”추성호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괜찮아. 내가 윗선을 아니까 전화 한 통화면 이것들 다 모가지야.”“대표님, 큰일입니다. FTT 법무팀에서 들이닥쳐서 최근 20년 동안 FTT의 투자금으로 진행한 각종 프로젝트에 대해 추신이 과잉 이윤을 착취했다며 부당이득에 대해 환수를 추진한다고 합니다.”“뭐라고?”추성호의 안색이 확 변했다.“아니, 돌았어?”“지금 그쪽에서 들고 온 장부에 기록이 너무 또렷이 잘 되어 있습니다.”비서가 쓴웃음을 지었다.“저희
오봉규가 무척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화신에서 줄만 잘 타면 이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군.’오전 내내 그룹 내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12시가 되자 회사 로비로 늘씬한 형체가 들어섰다. 압도될 만큼 큰 키에 수려한 모습을 보고 직원들이 수군거렸다.TV에서 봤던 그 얼굴이었다.“회, 회장님….”“어머, 어머, 어쩜 좋아. 최하준 회장 헤어 컷 봐봐. 너무 잘 어울려.”“최하준 회장이 여긴 무슨 일이지? 우리 대표님하고 이혼하겠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어우, 안 되지.”“회장님, 무슨 일로….”인포메이션 데스크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이거 안 보이나?”하준이 손에 든 도시락을 흔들어 보였다.“와이프에게 도시락 배달 왔는데.”“……”직원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이혼한다고 하지 않았나?어째서 회장님이 직접 도시락을 배달까지 왔담?’“우리 와이프는 어디 있나?”하준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안내 담당은 눈부신 하준이 매력에 정신이 다 아찔했다.“저기…구내식당에서 식사하고 계시지 않을까요?”하준은 거침없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하준은 처음으로 화신에 와 보았다.식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하준은 여름을 발견했다. 너무나 눈에 쏙 들어왔다. 카키색 정장에 한쪽으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름은 그야말로 사람이라기보다 여신처럼 보였다.몇몇 임원과 함께 있었는데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뭔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였다.하준의 눈썹이 축 내려갔다.성큼성큼 걸어갔다.여름은 마침 집을 살 때 기가 막힌 할인을 받은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져서 보니 다들 여름 등 뒤를 보고 있었다.멍한 여름 뒤로 하준의 위엄 있는 모습이 한껏 대비되었다.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선망과 존경 어린 시선이 두 사람에게 떨어졌다.여름은 심장이 철렁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허니, 내가 당신 도시락 싸 왔어.”하준의 말투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막 얼굴을 찌푸리고 한마디 하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던 여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어느 셰프 솜씨인가요?”“아니야. 내가 오전 내내 집에서 만든 거야.”하준이 조그맣게 말했다.동성에서는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당신을 따라다닐게.”여름이 비웃었다.“정말 여자 마음을 흔들 줄 아시네요. 백지안 사귈 때 하던 솜씨인가 봐요?”“믿거나 말거나 당신 말고는 누구에게도 밥 해줘 본 적 없어.”하준이 여름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먹어 봐.”“안 먹어요.”여름이 성질을 부렸다.‘먹고 싶으면 자기나 먹던지 왜 남한테 먹어라 마라야?’“허니, 정말 너무 하네. 자기도 전 남친은 있었으면서.”“그런 식이라면 나도 한선우 닮은 남자 하나 구해서 내 비서로 쓰게요. 그래도 되나요?”여름이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역시나 하준의 눈에 불만이 어린 것을 보고 여름은 웃었다.“거 봐. 내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니까.”“미안해.”하준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지다빈 문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안 해”“최하준 씨, 우리에게 이제 ‘앞으로’는 없어요.”강여름이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하준이 얌전히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당신이 이거 안 먹으면 나 절대로 안 나가.”여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준을 쳐다봤다. 하준이 이 정도로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다.“자, 자, 빨리 와 봐.”하준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갑자기 물었다.“당신 혹시 근시야?”“아니거든요.”“그런데도 내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는 게 당신 눈에는 안 보여?”하준이 그 섹시한 입술로 시옷을 만들며 물었다.“……”여름은 기함했다.‘뭐야? 이거 완전히 내가 처음에 최하준 유혹할 때 하던 말 같잖아?’여름이 입술을 씰룩거리자 갑자기 하준이 검지 손가락을 여름의 입에 댔다.“아무 말도 하지 마.”“……”그러더니 한숨을 지었다.“당신이 아무 말도 안 하는데도 내 머릿속에는 당신 목소리만 들려, 어떡하지?”“……”‘뭘 어떡해? 당신
‘여하간 love라고?’여름은 놀라서 딸국질을 했다.“왔어? 내가 새로 넣어 놓은 닉이야.”하준이 찡긋해 보였다.“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다 당신한테 배운 짓이지.”“……”여름은 예전에 자신이 하준을 꼬드기려고 엄청 노력하던 시절 ‘하여간 love’가 생각났다.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하염없이 부끄러웠다.‘내가 그땐 완전히 정신이 나갔었지.’“잘 보고 서명해.”정신이 들도록 하준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여름이 흠칫해서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나 최하준이 잘못을 저질러 무기징역에 처해진다면 강여름의 마음속에 영원히 갇히겠습니다.’하준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헛기침을 했다.“마음에 들어?”변호사로서 아마도 최하준은 가장 로맨틱한 말을 쥐어짜낸 것이리라.여름이 하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뭐 해?”“열 있나 보게요.”하준이 정색했다.“나 참, 이 문구를 생각하느라고 내가 밤새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 회사 일도 안 하고….”여름은 속으로 풋 하고 웃었다.‘그러니까 시가 총액이 그 어마어마한 그룹을 경영하시는 분이 몇 시간 동안 이딴 걸 생각하고 있었다고?’“아 몰라, 이게 다 당신이 내 와이프라서 그런 거잖아.”하준이 도시락을 정리했다.“밤에 일찍 퇴근해. 내가 밥해놓고 기다릴게.”“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소영이랑 밥 먹고 마사지 받으러 갈 거거든요.”하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돌아보며 한마디 하려는데 여름이 먼저 말을 막았다.“나랑 소영이가 가까이 지내지 못하게 만들고, 소영이 욕을 하고 싶겠지만 내가 보기에 걘 의리 있고, 대범하고, 착하고, 가식이 없어요. 장점투성이야.”하준은 정말이지 여름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열어서 꺼내 보고 싶었다.“완전 백소영에게 세뇌당했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가 완전히 세뇌당하고 싶다면 어떨 건데요?”여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뭐, 또 당신 친구들 불러서 날 해코지라도 할 셈인가요?”“그게 무슨 소리야?”
“야, 최하준. 너 강여름 때문에 나한테 지적질하는 거 이걸로 벌써 두 번째야.”송영식이 짜증을 냈다.“다빈이는 지안이 동생이잖아. 이제 지안이도 없는데 이제는 내가 어떻게든 그 집 식구들 도와주고 싶다고.”“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지다빈이 자꾸 선 넘는 것도 슬쩍슬쩍 봐주고 그랬던 거야.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백윤택 하는 짓 봐라.몇 년 전 백윤택은 사람을 해쳤어. 모든 증거가 백윤택을 가리키는 상황인데도 나는 국민적으로 욕 들어 먹을 각오를 하고 변호를 맡았어. 그 일을 겪고 나서 난 내 직업에 강한 회의감이 들어서 법조계에서 물러나려고 했지. 그동안 윤정후가 날 죽이려고 하는 것도 내버려 둔 거 너도 다 알잖아?”“……”송영식은 아무 말이 없었다.하준은 여름의 손을 꼭 쥐었다.“백윤택을 4년이나 돌봐주었어. 심지어 지다빈네 가족 기업인 이서가 영하에 압박받는 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직접 영하에 압박을 가하기도 했지. 그런데 이제 그것 때문에 내 결혼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었어. 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지. 난 이제 더는 백지안에게 목매고 평생을 끌 다니고 싶지 않다. 그건 내 와이프에게 너무 불공평해.”송영식은 불만스러운 듯 이를 물었다.“지안이는 죽었어. 혹시… 나보다 네가 더 지안이를 좋아했던 거 아니냐?”송영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들켰군.’“네가 아직도 내 친구라면 앞으로는 내 아내를 좀 더 존중해 주기 바란다.”그러더니 하준은 전화를 끊었다. 여름은 너무나 똑바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하준의 시선에 조금 당황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예전에 하준이 국내 최고의 변호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법조계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그게 백윤택 때문인지는 몰랐다.‘게다가 송영식이 백지안을 좋아했다니?이게 무슨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같은 상황이야?’“자기야, 나는 이제 당신을 위해서 과거는 잊고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고 싶어.”하준이 진지하게 말했다.
최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네 할아버지는 이미 현역에서 물러나셨잖니? 경고하는데 이렇게 일을 극단적으로 처리하지 마라. 그러다가 내가 너무 한다고 원망하지도 말고.”“저한테 뭘 어떻게 너무 하실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하준이 갑자기 리모컨을 누르니 벽에 큰 스크린이 나타났다. 화면 속에는 FTT 이사들의 얼굴이 보였다.“죄송합니다. 방금 제가 화상 이사회의 중이었거든요. 방금 하신 말씀을 다른 이사들이 다 들어버렸네요.”그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주 이사가 입을 열었다.“추신에서 그 프로젝트로 그렇게 많이 벌었으면 투자한 우리 몫도 적지 않은 것 아니오? 최란 부회장이야 뭐 돈이 많으니 그까짓 푼돈… 싶은지 몰라도 우리는 안 그렇습니다. 회수할 이윤은 회수해야지요.”권무영 이사가 묘한 말투로 끼어들었다.“추신이 시댁인 건 우리도 이해하니 그 동안 뭐 어느 정도 보고도 못 본 척 해왔는데 이윤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났는데도 수익을 투자자에게 분배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죠.”모 이사도 콧방귀를 끼며 거들었다.“우리 아들 보니까 그렇게 죽도록 프로젝트팀에서 수십 년을 일해서 쥐어짜도 몇 푼 안 남던데 추신은 그 많은 FTT 자본을 가져다가 손도 안 대고 코를 풀어서 그 어마어마한 금액을 벌어들였으니, 이거 뭐 FTT에서 죽 쒀서 개 주자는 것도 아니고….”주 이사가 다시 말했다.“얼마 전에 최양하가 추신에다가 또 새로 프로젝트 만들어 주면서 거액의 이윤을 넘겨주려던 걸 최 회장이 중지시켰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FTT 손해가 아주 천문학적일 뻔했어.”모 이사가 불만스럽게 말했다.“우리는 그렇게 추신에게만 충성하는 부회장은 원치 않습니다.”최란은 점점 얼굴이 창백해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FTT를 경영한 지 수십 년인데 이사들이 최란에게 이렇게 따박따박 찔러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여러분, 제가 예전에 추신을 지원해 주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최하준 회장이 추신에 청구한 금액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