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름은 듣고 싶지 않았다. 스크린에 적힌 “FTT재단 자선의 밤”이라는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FTT재단에서 주관하는 자선의 밤? 그럼 최하준도 여기 있으려나?’한 바퀴 둘러보던 여름은 그야말로 기절할 뻔했다. 최하준 뿐 아니라 서유인, 장춘자, 최대범, 최란, 최민 등 FTT가 사람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심지어 위자영과 서경주까지 와 있었다.모두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여름의 눈에는 최하준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 맞춤 정장을 입고 검고 깊은 두 눈으로 여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 싸늘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아는 사람 없을 거라면서요?”여름이 양하에게 화를 냈다.“그렇게 말 안 했으면 안 왔을 거 아녜요?”최양하가 눈웃음을 치며 여름을 향해 눈을 껌뻑거렸다.“서유인 모녀도 왔잖아요? 일부러 그 사람들 한 방 먹여주려고 한 건데.”“최양하 씨….”울고 싶었다. ‘당신은 좋은 뜻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쪽은 일만 커졌다고.’“여름 씨랑 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걸 저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이제 누가 당신한테 함부로 하겠어요?”최양하는 여름의 손을 더욱 세게 잡고 성큼성큼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여길 어떻게 왔어?”서유인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나랑 하준 씨가 사귀는 게 샘 나서 그래? 하준 씨 동생이라도 꼬셔서 보복하게?”“그냥 친구야.”여름이 심호흡했다. 하준이 들으라고 해명하는 셈이기도 했다.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고 있는 하준의 얼굴은 변함없이 어두웠다. 최대범이 오히려 핀잔했다.“양하야, 저 아가씨랑은 언제부터 가까워졌니? 이제 너도 나이가 있는데 아무나 데리고 오고 그러면 안 되지!”서경주가 바로 여름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여름이는 제 딸입니다. 아무나가 아닙니다.”위자영이 비웃었다.“무슨 뜻인지 몰라요? 쟤가 그래 봐야 혼외자식이죠. 오늘 모인 분들 다 명문가에 각계 저명하
딸의 마음을 간파한 위자영이 서유인의 귀에 대고 말했다.“남자를 철저하게 네 걸로 만들려면 주변 사람부터 포섭을 해야 하는 법이야.”“하지만 하준 씨가 근처에도 못 오게….”“내가 큰 사모님을 구워 삶아 놨지. 오늘 밤 술에 취했을 때가 기회다. 최 회장 방으로 들어가.”위자영이 딸을 향해 눈짓을 했다.서유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하준의 여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쑥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한편으로 기대가 됐다.“그런데 최양하가 정말 강여름에게 넘어간 걸까?”“지 에미랑 하는 짓이 아주 똑같다. 오늘 넌 엄마 하는 것만 잘 보고 있어.”하준이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서 정상급 가수들이 돌아가며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쳤다.프로그램이 막 끝나려 할 때 최양하가 허리를 숙여 여름의 귀에 대고 말했다.“난 무대 뒤로 가서 기부 금액 누르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이 하준의 눈에 들어왔고 가슴 속에 누르고 있던 분노를 자극했다.‘어떻게 된 게 잠깐만 한눈을 팔면 바로 다른 남자랑 엮여?그것도 이번엔 최양하라고?’하준의 손에 들린 와인잔이 하마터면 깨질 뻔했다.정신을 가다듬고 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408호 방에서 기다려요.여름은 메시지를 받고 하준을 흘깃 보았다. 진지하게 공연을 보고 있었다.속으로 욕이 나왔다.‘저 위선자!.’하지만 이런 곳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너무 위험했다. 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답을 보냈다.여름: 집에 가서 기다릴게요.하준: 안 그래도 꾹 참고 있는데 더 건드리지 마시죠.“…….”여름은 묵묵히 일어나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막 연회장을 나서려는데 잔뜩 취한 아저씨가 여름을 붙들었다.“어이, 잠깐 얘기할 시간 있나?”“없어요.”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름은 그냥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뗐다.이번에는 여름의 손목을 잡더니 실실거리며 말했다.“내가 누군지 알아? 하룻밤에 1억, 어떠냐?”“1억은 내가 줄 테니 꺼져.”여름은 벗어나려고
“양하 녀석은 사람을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사람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하는 거야?”하준이 비꼬며 웃었다. 한 발만 늦었어도 그 돼지 같은 녀석의 입술이 저 예쁜 얼굴에 닿았을 걸 생각하니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여름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당신 집안 행사잖아요. 그 사람이 이유 없이 그랬을 리 없어요. 누군가 시킨 거지.”“그렇습니까? 누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하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미 알고 있으나 말하지 않는 듯했다.여름이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모른 척하기는?자기 약혼녀라고 감싸는 거야?’“모르겠네요.”곧 여름은 얼굴을 돌렸다.하준이 여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시니컬하게 웃으며 여름의 손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의 그림자가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방에 들어간 후 하준은 문을 쾅 닫더니 재킷과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거 있습니까? 어째서 계속 사람을 화나게 만들지?”하준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온통 분노로 가득한 눈이었다.“양유진을 치워놨더니 이제 최양하입니까? 얌전히 좀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아니에요. 봉사활동을 간대서 왔지 이런 파티인 줄 몰랐어요. 지난번에 화신을 도와줘서 보답하려던 것뿐이에요.”여름은 악에 받친 얼굴에 놀라 몸을 떨고 있었다. 순간 그날 겪은 악몽이 떠올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두 무릎을 땅에 꿇더니 하준의 손을 잡고 애걸했다.“하지 말아요, 제발…. 저 무서워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여름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두 눈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했다.순간 하준은 얼어붙었다.여름을 보며 고통스럽게 주먹을 꽉 쥐었다.여름이 무릎을 꿇었다.그렇게 쾌활하고 발랄하던 여름이 지금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대체 날 얼마나 무서워하는 거야?’하준이 얼른 여름을 일으켜 세웠다.“다시 내 앞에서 무릎 꿇지 말아요.
“호텔 직원이 그러는데 누가가 여기로 강여름을 끌고 왔다고….”서유인이 말을 하다 말고 침대 위의 커다란 남자를 발견했다. 머리털이 쭈뼛서고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아니, 어째서 당신이!”시뻘겋게 핏발이 선 하준의 눈이 번뜩했다. 하준은 곧 이불에 둘둘 말린 여름을 꽉 붙들었다. 여름도 완전히 깜짝 놀라서 방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았다. 세상에 종말이 온 것 같았다‘끝났어! 완전히 끝장이야!’20년 넘게 살면서 이렇게 수치스러운 적이 없었다.최양하, 장춘자, 최란, 서경주 부부가 모두 왔다. 다들 놀라서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하준은 이미 옷을 다 벗고 있었고 여름은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누구라도 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화가 나서 지팡이를 찾으려는 장춘자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이게 뭐야!”서유인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달려들었다.“남의 약혼자를 꼬드기다니 부끄럽지도 않아!”그러나 미처 손이 닿기도 전에 하준이 서유인의 손목을 잡아 채더니 확 밀쳐버렸다.서유인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위자영이 급히 서유인을 부축했다.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아니, 저런 애 때문에 우리 유인이를 밀치다니, 어르신, 해명을 좀 해보세요. 어떻게 사람을 이따위로 대접합니까!”장춘자의 몸이 휘청했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 자랑스럽던 장손이 그렇게 패륜적인 일을 벌였다는데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최양하가 얼른 할머니를 부축하고 마음 아픈 듯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회사도 이제 형이 가져갔잖아? 내가 겨우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았더니 이제 그 여자까지 빼앗아 가는 거야?”여름은 깜짝 놀랐다.‘최양하가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데?’“빼앗아?”갑자기 귓가에서 싸늘한 하준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왔다. 하준이 화가 나서 말을 이었다.“강여름 씨는 원래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다들 놀랐다. 최양하가 화나서 물었
모녀가 달라붙어 이불을 잡아뜯고 주먹질을 하고 손톱으로 할퀴었다. 여름은 이불을 있는 힘껏 꽉 잡고 있느라 무방비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대를 맞고 나니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최민이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는 걸 보더니 장춘자를 다른 사람 손에 맡겨 두고 이쪽으로 와서 다급히 불렀다.“병원에나 갑시다. 정말 이대로 어르신 돌아가시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래요?”“어디서 내 딸의 남자를 유혹하려고 들어? 그 반반한 낯짝, 가만두나 봐라!”위자영은 뭔가 집어 들 것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서경주가 놀라서 달려들어 모녀를 떼어 놓았다.“왜들 이래? 정말 미쳤어?”“미친 건 당신이죠. 당신이 데려온 딸 하는 짓 보라고요. 쟤가 우리 유인이의 행복을 다 망쳤어요!”위자영은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눈앞에 벌어지는 꼴을 보자니 20여 년 전 강신희와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서경주는 이제 대체 누가 잘못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누구도 여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아니,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이때 갑자기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비록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는 했지만, 장 여사는 쓰러져 있지, 최 회장과 여름은 옷을 제대로 못 갖춰 입었지, 서유인 모녀는 여름을 마구 두드려 패고 있으니 그 장면만 보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충 알만했다.“다들 비켜요!”하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할머니를 안고 문밖으로 나갔다. 기자들에게 눈을 부라렸다.“오늘 일이 기사로 나갔다가는 어느 언론사든 거액의 손해 배상할 각오 하십시오.”경고를 듣고 기자들은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하준이 할머니를 안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어쨌든 기사는 못 쓰더라도 이 좋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하준의 가족은 모두 병원으로 몰려가고 서경주의 가족만 남아서 싸우고 있었다. 다행히 상혁이 사람을 불러와 곧 여름을 빼내 호텔로 가버렸다.여름의 얼굴은 온통 찰과상에 멍투성
여름의 얼굴에 덕지덕지 거즈가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양유진은 마음이 아팠다.“최하준은 당신을 이따위로 취급합니까? 누가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 동안 대체 뭘 했답니까? 그냥 나랑….”“양 대표님, 경고를 잊으셨습니까?”상혁이 앞으로 나서며 양유진을 막았다.“난 최하준 씨가 여름 씨를 잘 돌봐 주리라고 생각했었단 말입니다.”양유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사람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도 못하면서 대체 뭐 하러 끌고 갔습니까?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까?"여름은 흠칫 놀랐다.‘저거였구나!’지금까지 여름은 최하준의 마음속에 자신을 담아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누군가를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짓밟고 상처를 줄 수는 없지.’“그건 강여름 씨와 회장님 사이의 일입니다. 제삼자는 빠지십시오.”상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했다.“비키십시오. 계속 이러시면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그만 돌아가세요.”여름이 부드럽게 말했다.“저와의 약속을 잊지 마세요.”양유진이 흠칫했다. 더 강해져서 여름을 구하러 오겠노라며 보냈던 문자가 생각났다.“알겠습니다.”양유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붉어진 눈을 하고 아픔을 꾹 참았다.“부디 건강하세요.”“네, 그럴게요.”여름이 끄덕였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서울에서 오직 양유진만이 시종일관 진심으로 여름을 아껴주었다.자신에게 정말 잘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나니왜 그렇게 그를 밀어냈었는지 후회됐다.“가시죠.”상혁이 끼어들어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을 방해했다.여름은 상혁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양유진은 여름이 떠나가는 것을 다 보고 나서 침통한 듯 그 미스터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대체 최하준은 언제쯤 해치울 수 있소? 이제는 아주 그냥 죽여버리고 싶소!”“천천히 갑시다. 당신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았지만, 최하준의 위치는 굳건하단 말이오. 아직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소.”전화기 저쪽 사람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준비는 착착 진행하고 있으니 당신은 내가
서유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채 울부짖었다.“대체 걔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겨우 사생아 하나 때문에….”“말 조심하시지.”최하준이 싸늘한 얼굴로 경고했다.위자영은 폭발하기 직전이었지만, 최대한 논리적으로 따졌다.“그날 파티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인이랑 춤을 췄잖아요? FTT에서도 유인이가 최 회장 여자 친구라고 인정했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다니 우리 집안을 뭘로 보고 이래요? 우리 유인이는 어쩌냐고!”최대범도 동의했다.“우리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좋아요.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이번 일 확실하게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면 FTT가 얼마나 신용이 없는지 다 알리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아무도 FTT와 혼사를 논하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들 이 일을 알게 되면 최 회장도 크게 오명을 남기게 될 겁니다.”말을 마치더니 위자영은 딸을 데리고 가버렸다.“벨레스 안주인 하는 소리 들었지?”얼굴이 시퍼레져서 최대범이 소리 질렀다.“계속 이렇게 고집을 부리겠다면 FTT그룹은 당장 양하에게 넘기겠다. 우리 집안에 너만 있는 게 아니니까.”“어쨌든 헤어지지 않습니다.”하준이 미간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죄송합니다, 할아버지.”“나가!”최대범은 화가 나서 이제 하준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라 예감하며 식구들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밤 11시.하준은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치고 병원을 나섰다.하룻밤 사이에 그 기품 넘치던 최하준은 이제 사뭇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오던 최양하가 그 모습을 보더니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병원에서 할머니 시중드시는 거 아니었어요?”“두 노인네 시중들 기회는 네게 넘기마. 그런 거 하고 싶었잖아?”하준이 싸늘하게 시선을 툭 날렸다.“어젯밤은 네가 계획했던 대로 잘 돌아갔더냐?”“무슨 말씀이세요. 남의 여친을 뺏어가면서 그런 말 하는 거 반칙 아닌가?”최양하가 어
“나 때문에 깼습니까?” 하준이 급히 이불을 여며주었다.“자요. 늦었습니다.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죠.”“할머니는 좀 어떠세요?”여름은 그냥 일어나 앉았다. 실크 잠옷이 드러났다.“괜찮습니다. 그냥 혈압이 오른 겁니다. 며칠 쉬시면 괜찮아질 겁니다.”하준이 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여름이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 깔고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쭌, 날 이제 좀 놔줘요.”‘쭌….’정말 한참 동안 여름은 하준을 쭌이라고 부르지 않았었다.두 사람이 한참 좋았을 때 여름은 항상 그 달콤한 이름으로 하준을 부르곤 했었다.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여름은 이미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날 놓아주고, 당신도 놓아줘요. 봤잖아요. 당신 네 식구들은 내가 당신과 있도록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이제 이런 삶을 더는 참을 수 없어요. 그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듣고… 나도 사람이에요. 이젠 너무 지쳤어!”그렇게 말하면서 여름은 엉엉 울었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여름의 삶은 하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름을 더할 나위 없이 귀하게, 자랑스럽게 키웠다. 누군가의 내연녀로, 멸시를 받으며 살라고 키우지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서울로 와서 친엄마를 위해 복수를 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려 강신희의 명예까지 더럽혀 버렸다.복수고 뭐고 이제는 그냥 동성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너무 지쳤다. 오늘 벌어진 일이 결국 강여름 최후의 마지노선까지 무너트려 버린 것이다.하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로 여름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비굴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심장이 가시에 할퀴어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만 같았다.“일어나십시오.”여름을 일으켰다.“풀어주겠다고 할 때까지 안 일어나요.”여름이 하준을 쳐다봤다. 눈이 사뭇 어두웠다.“언제부터 이렇게 됐습니까!”이제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