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름은 듣고 싶지 않았다. 스크린에 적힌 “FTT재단 자선의 밤”이라는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FTT재단에서 주관하는 자선의 밤? 그럼 최하준도 여기 있으려나?’한 바퀴 둘러보던 여름은 그야말로 기절할 뻔했다. 최하준 뿐 아니라 서유인, 장춘자, 최대범, 최란, 최민 등 FTT가 사람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심지어 위자영과 서경주까지 와 있었다.모두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여름의 눈에는 최하준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 맞춤 정장을 입고 검고 깊은 두 눈으로 여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 싸늘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아는 사람 없을 거라면서요?”여름이 양하에게 화를 냈다.“그렇게 말 안 했으면 안 왔을 거 아녜요?”최양하가 눈웃음을 치며 여름을 향해 눈을 껌뻑거렸다.“서유인 모녀도 왔잖아요? 일부러 그 사람들 한 방 먹여주려고 한 건데.”“최양하 씨….”울고 싶었다. ‘당신은 좋은 뜻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쪽은 일만 커졌다고.’“여름 씨랑 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걸 저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이제 누가 당신한테 함부로 하겠어요?”최양하는 여름의 손을 더욱 세게 잡고 성큼성큼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여길 어떻게 왔어?”서유인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나랑 하준 씨가 사귀는 게 샘 나서 그래? 하준 씨 동생이라도 꼬셔서 보복하게?”“그냥 친구야.”여름이 심호흡했다. 하준이 들으라고 해명하는 셈이기도 했다.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고 있는 하준의 얼굴은 변함없이 어두웠다. 최대범이 오히려 핀잔했다.“양하야, 저 아가씨랑은 언제부터 가까워졌니? 이제 너도 나이가 있는데 아무나 데리고 오고 그러면 안 되지!”서경주가 바로 여름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여름이는 제 딸입니다. 아무나가 아닙니다.”위자영이 비웃었다.“무슨 뜻인지 몰라요? 쟤가 그래 봐야 혼외자식이죠. 오늘 모인 분들 다 명문가에 각계 저명하
딸의 마음을 간파한 위자영이 서유인의 귀에 대고 말했다.“남자를 철저하게 네 걸로 만들려면 주변 사람부터 포섭을 해야 하는 법이야.”“하지만 하준 씨가 근처에도 못 오게….”“내가 큰 사모님을 구워 삶아 놨지. 오늘 밤 술에 취했을 때가 기회다. 최 회장 방으로 들어가.”위자영이 딸을 향해 눈짓을 했다.서유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하준의 여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쑥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한편으로 기대가 됐다.“그런데 최양하가 정말 강여름에게 넘어간 걸까?”“지 에미랑 하는 짓이 아주 똑같다. 오늘 넌 엄마 하는 것만 잘 보고 있어.”하준이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서 정상급 가수들이 돌아가며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쳤다.프로그램이 막 끝나려 할 때 최양하가 허리를 숙여 여름의 귀에 대고 말했다.“난 무대 뒤로 가서 기부 금액 누르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이 하준의 눈에 들어왔고 가슴 속에 누르고 있던 분노를 자극했다.‘어떻게 된 게 잠깐만 한눈을 팔면 바로 다른 남자랑 엮여?그것도 이번엔 최양하라고?’하준의 손에 들린 와인잔이 하마터면 깨질 뻔했다.정신을 가다듬고 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408호 방에서 기다려요.여름은 메시지를 받고 하준을 흘깃 보았다. 진지하게 공연을 보고 있었다.속으로 욕이 나왔다.‘저 위선자!.’하지만 이런 곳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너무 위험했다. 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답을 보냈다.여름: 집에 가서 기다릴게요.하준: 안 그래도 꾹 참고 있는데 더 건드리지 마시죠.“…….”여름은 묵묵히 일어나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막 연회장을 나서려는데 잔뜩 취한 아저씨가 여름을 붙들었다.“어이, 잠깐 얘기할 시간 있나?”“없어요.”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름은 그냥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뗐다.이번에는 여름의 손목을 잡더니 실실거리며 말했다.“내가 누군지 알아? 하룻밤에 1억, 어떠냐?”“1억은 내가 줄 테니 꺼져.”여름은 벗어나려고
“양하 녀석은 사람을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사람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하는 거야?”하준이 비꼬며 웃었다. 한 발만 늦었어도 그 돼지 같은 녀석의 입술이 저 예쁜 얼굴에 닿았을 걸 생각하니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여름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당신 집안 행사잖아요. 그 사람이 이유 없이 그랬을 리 없어요. 누군가 시킨 거지.”“그렇습니까? 누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하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미 알고 있으나 말하지 않는 듯했다.여름이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모른 척하기는?자기 약혼녀라고 감싸는 거야?’“모르겠네요.”곧 여름은 얼굴을 돌렸다.하준이 여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시니컬하게 웃으며 여름의 손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의 그림자가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방에 들어간 후 하준은 문을 쾅 닫더니 재킷과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거 있습니까? 어째서 계속 사람을 화나게 만들지?”하준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온통 분노로 가득한 눈이었다.“양유진을 치워놨더니 이제 최양하입니까? 얌전히 좀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아니에요. 봉사활동을 간대서 왔지 이런 파티인 줄 몰랐어요. 지난번에 화신을 도와줘서 보답하려던 것뿐이에요.”여름은 악에 받친 얼굴에 놀라 몸을 떨고 있었다. 순간 그날 겪은 악몽이 떠올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두 무릎을 땅에 꿇더니 하준의 손을 잡고 애걸했다.“하지 말아요, 제발…. 저 무서워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여름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두 눈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했다.순간 하준은 얼어붙었다.여름을 보며 고통스럽게 주먹을 꽉 쥐었다.여름이 무릎을 꿇었다.그렇게 쾌활하고 발랄하던 여름이 지금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대체 날 얼마나 무서워하는 거야?’하준이 얼른 여름을 일으켜 세웠다.“다시 내 앞에서 무릎 꿇지 말아요.
“호텔 직원이 그러는데 누가가 여기로 강여름을 끌고 왔다고….”서유인이 말을 하다 말고 침대 위의 커다란 남자를 발견했다. 머리털이 쭈뼛서고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아니, 어째서 당신이!”시뻘겋게 핏발이 선 하준의 눈이 번뜩했다. 하준은 곧 이불에 둘둘 말린 여름을 꽉 붙들었다. 여름도 완전히 깜짝 놀라서 방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았다. 세상에 종말이 온 것 같았다‘끝났어! 완전히 끝장이야!’20년 넘게 살면서 이렇게 수치스러운 적이 없었다.최양하, 장춘자, 최란, 서경주 부부가 모두 왔다. 다들 놀라서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하준은 이미 옷을 다 벗고 있었고 여름은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누구라도 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화가 나서 지팡이를 찾으려는 장춘자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이게 뭐야!”서유인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달려들었다.“남의 약혼자를 꼬드기다니 부끄럽지도 않아!”그러나 미처 손이 닿기도 전에 하준이 서유인의 손목을 잡아 채더니 확 밀쳐버렸다.서유인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위자영이 급히 서유인을 부축했다.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아니, 저런 애 때문에 우리 유인이를 밀치다니, 어르신, 해명을 좀 해보세요. 어떻게 사람을 이따위로 대접합니까!”장춘자의 몸이 휘청했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 자랑스럽던 장손이 그렇게 패륜적인 일을 벌였다는데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최양하가 얼른 할머니를 부축하고 마음 아픈 듯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회사도 이제 형이 가져갔잖아? 내가 겨우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았더니 이제 그 여자까지 빼앗아 가는 거야?”여름은 깜짝 놀랐다.‘최양하가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데?’“빼앗아?”갑자기 귓가에서 싸늘한 하준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왔다. 하준이 화가 나서 말을 이었다.“강여름 씨는 원래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다들 놀랐다. 최양하가 화나서 물었
모녀가 달라붙어 이불을 잡아뜯고 주먹질을 하고 손톱으로 할퀴었다. 여름은 이불을 있는 힘껏 꽉 잡고 있느라 무방비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대를 맞고 나니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최민이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는 걸 보더니 장춘자를 다른 사람 손에 맡겨 두고 이쪽으로 와서 다급히 불렀다.“병원에나 갑시다. 정말 이대로 어르신 돌아가시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이래요?”“어디서 내 딸의 남자를 유혹하려고 들어? 그 반반한 낯짝, 가만두나 봐라!”위자영은 뭔가 집어 들 것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서경주가 놀라서 달려들어 모녀를 떼어 놓았다.“왜들 이래? 정말 미쳤어?”“미친 건 당신이죠. 당신이 데려온 딸 하는 짓 보라고요. 쟤가 우리 유인이의 행복을 다 망쳤어요!”위자영은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눈앞에 벌어지는 꼴을 보자니 20여 년 전 강신희와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서경주는 이제 대체 누가 잘못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누구도 여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아니,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이때 갑자기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비록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는 했지만, 장 여사는 쓰러져 있지, 최 회장과 여름은 옷을 제대로 못 갖춰 입었지, 서유인 모녀는 여름을 마구 두드려 패고 있으니 그 장면만 보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충 알만했다.“다들 비켜요!”하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할머니를 안고 문밖으로 나갔다. 기자들에게 눈을 부라렸다.“오늘 일이 기사로 나갔다가는 어느 언론사든 거액의 손해 배상할 각오 하십시오.”경고를 듣고 기자들은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하준이 할머니를 안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어쨌든 기사는 못 쓰더라도 이 좋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하준의 가족은 모두 병원으로 몰려가고 서경주의 가족만 남아서 싸우고 있었다. 다행히 상혁이 사람을 불러와 곧 여름을 빼내 호텔로 가버렸다.여름의 얼굴은 온통 찰과상에 멍투성
여름의 얼굴에 덕지덕지 거즈가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양유진은 마음이 아팠다.“최하준은 당신을 이따위로 취급합니까? 누가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 동안 대체 뭘 했답니까? 그냥 나랑….”“양 대표님, 경고를 잊으셨습니까?”상혁이 앞으로 나서며 양유진을 막았다.“난 최하준 씨가 여름 씨를 잘 돌봐 주리라고 생각했었단 말입니다.”양유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사람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도 못하면서 대체 뭐 하러 끌고 갔습니까?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까?"여름은 흠칫 놀랐다.‘저거였구나!’지금까지 여름은 최하준의 마음속에 자신을 담아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누군가를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짓밟고 상처를 줄 수는 없지.’“그건 강여름 씨와 회장님 사이의 일입니다. 제삼자는 빠지십시오.”상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했다.“비키십시오. 계속 이러시면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그만 돌아가세요.”여름이 부드럽게 말했다.“저와의 약속을 잊지 마세요.”양유진이 흠칫했다. 더 강해져서 여름을 구하러 오겠노라며 보냈던 문자가 생각났다.“알겠습니다.”양유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붉어진 눈을 하고 아픔을 꾹 참았다.“부디 건강하세요.”“네, 그럴게요.”여름이 끄덕였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서울에서 오직 양유진만이 시종일관 진심으로 여름을 아껴주었다.자신에게 정말 잘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나니왜 그렇게 그를 밀어냈었는지 후회됐다.“가시죠.”상혁이 끼어들어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을 방해했다.여름은 상혁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양유진은 여름이 떠나가는 것을 다 보고 나서 침통한 듯 그 미스터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대체 최하준은 언제쯤 해치울 수 있소? 이제는 아주 그냥 죽여버리고 싶소!”“천천히 갑시다. 당신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았지만, 최하준의 위치는 굳건하단 말이오. 아직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소.”전화기 저쪽 사람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준비는 착착 진행하고 있으니 당신은 내가
서유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채 울부짖었다.“대체 걔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겨우 사생아 하나 때문에….”“말 조심하시지.”최하준이 싸늘한 얼굴로 경고했다.위자영은 폭발하기 직전이었지만, 최대한 논리적으로 따졌다.“그날 파티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인이랑 춤을 췄잖아요? FTT에서도 유인이가 최 회장 여자 친구라고 인정했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다니 우리 집안을 뭘로 보고 이래요? 우리 유인이는 어쩌냐고!”최대범도 동의했다.“우리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좋아요.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이번 일 확실하게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면 FTT가 얼마나 신용이 없는지 다 알리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아무도 FTT와 혼사를 논하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들 이 일을 알게 되면 최 회장도 크게 오명을 남기게 될 겁니다.”말을 마치더니 위자영은 딸을 데리고 가버렸다.“벨레스 안주인 하는 소리 들었지?”얼굴이 시퍼레져서 최대범이 소리 질렀다.“계속 이렇게 고집을 부리겠다면 FTT그룹은 당장 양하에게 넘기겠다. 우리 집안에 너만 있는 게 아니니까.”“어쨌든 헤어지지 않습니다.”하준이 미간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죄송합니다, 할아버지.”“나가!”최대범은 화가 나서 이제 하준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라 예감하며 식구들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밤 11시.하준은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치고 병원을 나섰다.하룻밤 사이에 그 기품 넘치던 최하준은 이제 사뭇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오던 최양하가 그 모습을 보더니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병원에서 할머니 시중드시는 거 아니었어요?”“두 노인네 시중들 기회는 네게 넘기마. 그런 거 하고 싶었잖아?”하준이 싸늘하게 시선을 툭 날렸다.“어젯밤은 네가 계획했던 대로 잘 돌아갔더냐?”“무슨 말씀이세요. 남의 여친을 뺏어가면서 그런 말 하는 거 반칙 아닌가?”최양하가 어
“나 때문에 깼습니까?” 하준이 급히 이불을 여며주었다.“자요. 늦었습니다.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죠.”“할머니는 좀 어떠세요?”여름은 그냥 일어나 앉았다. 실크 잠옷이 드러났다.“괜찮습니다. 그냥 혈압이 오른 겁니다. 며칠 쉬시면 괜찮아질 겁니다.”하준이 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여름이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 깔고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쭌, 날 이제 좀 놔줘요.”‘쭌….’정말 한참 동안 여름은 하준을 쭌이라고 부르지 않았었다.두 사람이 한참 좋았을 때 여름은 항상 그 달콤한 이름으로 하준을 부르곤 했었다.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여름은 이미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날 놓아주고, 당신도 놓아줘요. 봤잖아요. 당신 네 식구들은 내가 당신과 있도록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이제 이런 삶을 더는 참을 수 없어요. 그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듣고… 나도 사람이에요. 이젠 너무 지쳤어!”그렇게 말하면서 여름은 엉엉 울었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여름의 삶은 하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름을 더할 나위 없이 귀하게, 자랑스럽게 키웠다. 누군가의 내연녀로, 멸시를 받으며 살라고 키우지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서울로 와서 친엄마를 위해 복수를 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려 강신희의 명예까지 더럽혀 버렸다.복수고 뭐고 이제는 그냥 동성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너무 지쳤다. 오늘 벌어진 일이 결국 강여름 최후의 마지노선까지 무너트려 버린 것이다.하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로 여름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비굴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심장이 가시에 할퀴어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만 같았다.“일어나십시오.”여름을 일으켰다.“풀어주겠다고 할 때까지 안 일어나요.”여름이 하준을 쳐다봤다. 눈이 사뭇 어두웠다.“언제부터 이렇게 됐습니까!”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