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하준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숨을 죽이고 양유진에게 대답했다.“샤워하느라고 못 들었어요.”“오늘은 종일 전화도 안 하고, 보고 싶었어요.”양유진이 다정하게 말했다.“보고 싶었어요?”욕실 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여름의 눈이 확 커졌다. 하준이 갑자기 귀를 살짝 깨물었던 것이다.하준의 망할 얼굴을 홱 돌아봤다. 사악하게 입꼬리 한 쪽을 올리며 웃더니 두 손으로 여름을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거리낌없이 얼굴을 여름의 목에 파묻고 입을 맞췄다.양유진은 저쪽에서 계속 물었다.“왜 대답이 없어요? 안 보고 싶었어요?”“저, 저기 제가 며칠 너무 바빴어요.”여름이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그 개발지는 손에 못 넣었나요?”“안 됐어요.”여름이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놈의 하준이 이번에는 앞으로 돌아와서는 여름의 입술에 키스했다.여름은 피하려고 하고 하준은 집요하게 쫓았다.양유진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내가 거기 없어서 도움이 될 수 없어 아쉽군요.”여름은 하준 때문에 입이 막혀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양유진이 계속 말했다.“곧 서울로 갈 테니까 함께 해요.여름 씨? 왜 아무 말이 없어요?”여름은 키스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응’하고 작게 소리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급히 하준을 밀어내고 핸드폰을 뺏어들었다.“제가 일이 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얼른 전화를 끊고는 힘껏 하준을 밀쳤다. 수치스러워서 분노가 치밀었다.“너무 하시네요.”“너무해?”하준이 싸늘하게 웃었다.“전에 내가 전화했을 때고 양유진과 이러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무슨 소리예요? 정말 상대 못하겠네. 물 받아놨으니 이제 씻으시죠.”여름은 하준을 밀치고 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갈아입을 옷 가져다 주십시오.”하준이 뒤에서 싸늘하게 명령했다.“안 갖다 줘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은 이미 셔츠를 벗고 탄탄한 몸을 드러냈다.고개를 돌려 매혹적인 눈으로 여름을 흘끗 보았다.“안 가져다 주
“이 거짓말쟁이. 당신이 먼저 뛰어들었잖아!”이렇게 말하면서 하준이 여름에게 거칠게 키스했다.여름은 최하준을 밀쳐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래서는 양유진을 볼 면목이 없었다.하준을 세게 깨물어버렸다.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피가 흘렀다. 하준은 신음을 흘렸다.여름은 그 틈에 그를 밀치고 무기력한 얼굴로 말했다.“최하준 씨, 계속 이러면 욕조에 머리 박고 죽어버리겠어요!”“해보시지!”하준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말했다.“내일 서경주 회장님께 전화해야겠군요. 당신 딸이 날 유혹했는데 거절했더니 수치심에 자살했다고.”“……”여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정말이지 이 인간하고 엮이고 싶지 않아. 왜 날 이렇게 꽉 잡고 놔주질 않아!’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울컥 솟아 올랐다.“짜증 나! 너무 싫어!”소리를 지르면서 미친듯 하준의 어깨를 밀쳤다.하준은 눈을 내리깔고 품 안의 여자가 화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지금 남자친구에게 짜증부리는 여자 같다는 생각은 못 하겠지.’“됐습니다, 그만!”******10분 쯤 뒤 여름은 욕실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하준은 여름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잠시 후에 가운 끈을 조이며 나오다가 여름이 건조기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젖은 옷을 건조기에 넣고 말리는 중이었다. 여름은 하의는 너무 커서 못 입고 하준의 셔츠만 걸치고 있었다.하준의 목젖이 꿈틀했다.“내 옷도 가져가 빠십시오.”하준이 뒤에서 명령하듯 말했다.다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름의 얼굴이 빨개졌다. 최대한 진정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하준을 대하기는 힘들었다.“그게 얼굴 빨개질 일입니까?”하준이 여름의 새빨개진 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양유진하고는 더한 것도 했을 거 아닙니까?”“……”여름의 빨갰던 얼굴이 정상을 회복했다. ‘항상 저렇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핸드폰을 들고 상혁에게 톡을 보냈다. - 강변 개발건은 웅산에 힘써줄 필요 없어. 화신에 넘겨.자고 있던 상혁은 어리둥절했다.‘우리 회장님 또 마음 바뀌셨네. 피곤하다….’******옷을 빨고 나오다가 여름은 소파에서 금테 안경을 쓰고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들여다 보는 하준을 보았다. 원래도 이렇게 일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옷을 입고 반쯤 말린 머리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더 빠져들 것 같았다.‘1시가 다 되었는데도 저렇게 일을 하다니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닌가. 괜히 FTT를 장악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하준이 일을 하고 있으니 여름도 게으름을 부리고 있을 수 없었다.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았다.허리가 아파질 때쯤 차가운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서 침대 좀 데워 놓으십시오.”‘뭐라고?’여름이 멍하니 하준을 쳐다봤다. “아직 날이 추워서 이불에 들어가면 차갑더군요. 얼른 가요.”하준이 대놓고 명령을 했다.“난 그런 일은 안 해요.”여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그리고 내가 더럽다고 싫어하지 않았어요?”하준이 아무 표정 없이 일어나더니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내 여름에게 칙칙 뿌렸다.“……”섬유 살균 탈취제 냄새였다. 여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소독했으니 가보십시오. 거부는 허락하지 않겠습니다.”그러더니 하준은 다시 일을 하러 가버렸다.여름은 결국 의미 없는 반항 따위는 포기하고 그냥 침실로 갔다.하준의 매트리스와 이불은 너무나 포근하고 여름은 피곤했다. 눕자마자 1분도 안 돼서 잠이 들어버렸다.하준이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보니 새벽 3시였다.안경을 벗고 2층으로 올라가니 침대에는 자그마한 여자가 한창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침대로 들어가니 이불 속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익숙한 남자의 냄새에 여름은 익숙한 듯 돌아 누으며 하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여름을 보는 하준의 시선이 복잡하면서도 따뜻했다.
오전 8시여름은 하품을 하며 집으로 들어섰다.아침을 먹으려던 서유인이 서경주에게 말했다.“아빠, 저거 봐요. 어젯밤에 나갔다고 했죠? 지난번에도 밤새 안 들어오더니. 어디 제대로 된 명문가 딸이 저러고 나가서 자요. 나가서 뭔 짓을 하는지 알 게 뭐야?”“......”여름의 시선이 냉랭하게 그녀를 흘겨보았다.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네가 남친 관리 똑바로 못해서 내가 툭하면 오밤중에 불려가서 네 남친 시중들고 있잖아?’“뭘 봐? 내가 틀린 말 했어?”유인이 기세등등하게 대들었다.“그럼, 틀린 말 했지. 내가 어딜 봐서 명문가 딸이야? 말끝마다 밖에서 낳은 자식이라며?”여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신경도 쓰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우아하게 아침을 먹었다.“쟤 말하는 거 보라니까요.”“시끄럽다. 여름이는 약혼자도 있는데 난 여름이를 믿는다.”서경주가 차가운 얼굴로 말을 끊었다.“게다가 너도 전에 툭하면 밤새 안 들어오곤 했으면서, 남 얘기 할 처지냐?”유인은 할 말을 잃고 귀까지 빨개졌다.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아빠는 쟤만 좋아해!”이때 갑자기 위자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자영이 받아 들더니 벌떡 일어나며 화를 냈다.“뭐라고? 그 땅을 다시 화신에 넘긴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얘, 너 최 회장하고 얘기 다 끝냈다며?”여름이 흠칫했다. 얼른 샌드위치를 꿀꺽 삼켰다. 위자영이 전화를 끊더니 화가 나서 여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넌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강변 개발 건이 다시 너희 화신으로 넘어간 거니?”“그럴 리가?”서유인이 깜짝 놀랐다.“최 회장하고 맞설 사람이 있단 말이야?”“방금 지웅이 전화였어. 그쪽에서 마음을 바꿨다는데?”위자영이 여름을 노려봤다.“강여름, 너는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는 네 아빠 말고는 인맥도 없으면서 이런 짓을 해? 어젯밤에 집에 안 들어온 게 어디 가서 뒷구멍으로 차마 사람이 못 할 짓 하고 온 거 아니니? 그까짓 개발 건이야 그렇다 치고, 우리 집안에 먹칠할 짓은 하고 다니지 마라.
FTT그룹아침, 회의실.하준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냉랭하던 눈가에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나더러 변태라고?귀엽군.’임원진은 회의 시간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하준을 보고 놀랐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회장이 심지어 미소까지 띠고 있으니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오른쪽 1열에 앉아 있던 최양하의 눈이 살짝 어두워졌다. 최양하의 기억 속 하준은 냉혹하고 잔인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하준의 모습은 뭔가 좀 이상했다.‘여자인가?’최양하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서유인 씨랑 톡합니까? 곧 결혼한다면서요?”자리에 있던 임원진이 모두 당황했다. ‘그런 거였군. 서유인 씨가 저렇게 회장님에게 사랑을 받다니 앞으로 잘 보여야겠는 걸.’“회의합시다.”하준이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무표정하게 계속 미팅을 진행했다.1시간 뒤 하준은 다시 회장실로 돌아갔다.상혁이 들어왔다.“회장님, 서유인 씨가 로비에 오셨습니다. 뵙고 싶다는데 아마도 강변 개발 건 때문에 그러신 것 같습니다.”“시간 없어. 꺼지라고 해.”하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상혁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대로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내려가서 완곡하게 오늘은 회장님이 너무 바쁘시니, 돌아가시라고 좋게 전달했다.하준의 얼굴도 못 본 유인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람 민망하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담?뭔가 불만이 있어서 외삼촌을 안 도와주나? 나에게 FTT 사모님 자리를 못 주겠다는 거야?아니, 지금 사람들이 다들 그날 최 회장이 나한테 춤추자고 한 걸 다 알고 있는데 결혼을 못 하면 웃음거리만 된다고!’뭘 어째야 좋을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최하준의 할머니인 장춘자가 전화를 걸어왔다.“하준이가 사람을 시켜서 참치를 공수해 왔더라. 푸아그라도 있고. 이따 너희 식구들이랑 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꾸나. 양가 부모님들도 정식으로 인사를 한 번 해야 하지 않겠니?”행운이 너무 빨리 굴러들어오지 싶었다. 유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네, 꼭
서유인이 짜증을 냈다.“아니, 엄마. 그런 애는 왜…….”“얘가 뭘 몰라. 이게 강여름을 철저히 무너트릴 기회라고.”위자영이 담담하게 딸을 쳐다봤다.“최 회장 가족 앞에서 망신을 주면 이제 강여름의 미래는 작살나는 거야. 서유인의 눈이 반짝였다.“엄마 말이 맞아. 걔가 계속 서울에서 버티지 못하게 만들어야지.”******화신.여름이 막 오봉규에게 서둘러 강변 개발 건을 처리하라고 지시하자마자, 서경주가 전화를 걸어왔다.밤에 하준의 집에서 자기네 식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나한테 떡 하나 주더니, 뒤늦게 미안하니까 서유인에게도 떡 하나 주려는 건가?아닌데, 오늘 아침에 벌어진 일 생각해 보면 서유인을 그렇게 아끼는 것 같지도 않은데.’그러나 곧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두 집안 식구들이 모이다니, 결혼 얘기하려는 거잖아?나 어젯밤에 남의 남자랑 자고 온 거야?’“얘, 내가 하는 말 듣고 있니?”여름이 대답을 않자 서경주가 다시 물었다.“저는 안 갈래요.”여름이 작은 소리로 거절했다.“제가 거기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그쪽 집안에서 곱게 볼 리도 없고요.”“그렇지만 유인이가 그러는데 그 댁 어르신이 이미 널 알고 계신다더라. 그러니 안 가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서경주가 한숨을 쉬었다.“같이 가자꾸나. 마침 기회도 좋으니 그 집안 식구들과 인사나 하자. 앞으로 서울에 살려면 슬슬 인맥을 넓혀 놔야지. 그리고 그 댁 어르신은 최 회장하고는 다르게 온화한 분들이다.”“그럴게요.”여름을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든 속으로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자영과 서유인은 여름이 같이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 하준의 본가에 가면 뭔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오후 4시 반.집에 들어서자마자 위자영이 다정하게 다가왔다.“오늘은 최 회장네 파티에 가야 하는데 넌 평소에 패션이 좀 너무 심플하더라. 그래서 내가 유인이랑 가서 두어 벌 골라
방대한 별장에는 승마장, 골프장, 농구장에 활주로까지 있었다.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본 느낌이었다.차가 서자 집사가 와서 네 사람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화려한 거실에 장춘자와 딸인 최민이 앉아 있고, 최대범과 최진 등 몇몇 남자들은 티 룸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네 사람이 들어서자 다들 쳐다봤다.검은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었던 여름이 가장 눈에 띄었다. 입술에는 세련된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긴 머리는 살짝 웨이브를 줘서 어깨에 늘어뜨렸다.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피부는 투명했다.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그러나 옆에 있는 서유인은 너무 소박하고 청순하고 깔끔했다. 다들 서유인이 오늘밤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인공이라기에는 너무 소박했다.장춘자는 서유인에게서 여름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애초부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늘 보니 더욱 눈꼴이 시었다.“우리 아빠랑 오빠는 저쪽에 계세요. 남자들은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 나누세요. 그쪽이 편하실 거예요.”최민이 웃으며 이야기했다.“그럼 그쪽으로 가보죠.”서경주는 확실히 좀 불편해 보였다. 웃으며 인사를 하고 가면서도 다시 여름을 돌아보며 티 룸으로 건너갔다.서경주가 가자 최정이 비웃음을 띠고 물었다.“유인아, 이쪽이 그…… 네가 말하던 그 언니니? 정말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 흐응, 그런데 저 펄이랑 진주 장식 보니까 며칠 전에 본 파리 패션 위크 생각난다. 저런 거 한 세트에 수 천만 원 하던데. 난 차마 못 사겠네.” 위자영이 점잔을 빼며 웃었다.“쟤는 애가 어려서 고생을 하고 자랐잖아요. 어렵사리 본가에 왔는데 옷이라도 말쑥하게 차려 입히려고요.” “뭘 그렇게 신경을 쓰세요. 친자식도 아닌데.”최민이 느른하게 말했다.“오늘 두 사람 결혼 얘기를 정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저렇게 예쁘게 꾸며가지고 오면 시선이 저쪽으로 가잖아요.”서유인이 웃었다.“괜찮아요. 예쁜 옷이야 저는 어렸을 때 실컷 입은 걸요. 심플하게 입으면 제가 나이도 어려
“그럼 서로 뜻이 잘 맞는 것 같네.”최민이 웃었다.“다들 모였으니까 오늘 그냥 발표를 해버리죠?”“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장춘자가 집사에게 말했다.“가서 그 팔찌 가져와.”며느리인 고연경은 눈이 벌게져서 물었다.“집안에 내려온다는 그 팔찌 말씀이세요?”“그래, 하준이가 우리 집 상속자니까 팔찌는 그 애의 예비 신부한테 가는 게 맞지.”장춘자가 웃었다.옆에 있던 서유인 모녀는 이미 흥분해서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곧 집사가 팔찌를 받쳐들고 왔다. 장춘자가 손짓으로 서유인을 불렀다. 손을 잡고 막 채워주려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하준이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회색 정장에 실크 넥타이, 손목에는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차분한 시계를 차고 있었다. 독보적인 품위와 우아함이 넘쳤다.“여기서 다들 뭐 하십니까?”하준이 둘러보니 거실에 서 회장의 식구들까지 다 모여있는 것이었다. 하준의 시선이 여름에게서 멈춰 꼼짝 않더니 마지막에 장춘자의 손에 들린 팔찌로 향했다. 최민이 웃으며 설명했다.“할머니가 가보 옥 팔찌를 예비 신부한테 주신대.”하준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할머니에게서 그 팔찌를 가져다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떨어트리지 말고 조심해라.”장춘자가 한마디 했다.최정이 웃었다. “할머니, 오빠가 직접 채워주고 싶은가 봐요.”“그러네. 저런 건 남자친구가 채워줘야지.”최민이 놀리듯 말했다.서유인은 갑자기 한층 더 긴장됐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여름은 고개를 돌리고 시계를 보는 척했다.하준이 서유인을 흘끗 보더니 갑자기 팔찌를 상자에 쑥 넣어버렸다.“가보로 내려오는 팔찌니까 잘 보관해 두세요. 결혼하는 날 꺼내면 되죠. 어쨌든 내가 언제 결혼할지도 모르고, 누가 신부가 될지도 모르는데.”첼로처럼 깔리는 하준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거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웃음을 머금고 있던 위자영 모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