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쪽 사람들의 잔인함을 얕보지 마세요. 지금 놈들은 따르는 사람은 키워주지만 거슬리는 사람은 모두 망하게 만들고 있다고요”하준이 일깨웠다.“추동현을 찾아가지 마세요. 그런 자는 인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까요.”“그게… 무슨 뜻이니?”최란이 멍하니 물었다. 아무래도 하준이 뭔가를 아는 것 같았다.“이번 건이 추신 쪽에서 벌인 일이라면 추성호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정혜를 희생양으로 내놓을 겁니다. 하정혜는 하정현의 동생이에요. 하정현은 추동현의 아이까지 낳아주었지만 추동성이라면 자기 여자의 친정을 희생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을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곧 아시게 될 거예요.”최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동현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오후에는 가디언 그룹 이사장을 만나기로 했습니다.”하준이 한마디 했다.“그래.”최란은 멍하니 입구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보더니 복잡한 듯 당부했다.“얘, 조심하렴. 난 이제…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뿐이다.”하준은 쓸쓸한 최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도 모르게 휴대 전화에서 가족사진을 열어보았다.몇 년 전 최대범의 생일에 찍은 사진이었다. 온 가족이 모여서 찍은 사진이자 최양하와 자신이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이었다.조금 전에 하준은 차마 최란에게 최양하의 실종에 추동현이 관련 되어 있는 듯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전성이 나갈 때 하준은 지룡 안에 스파이가 있다는 의심을 져버릴 수가 없었다.FTT의 신제품 자료를 내부 스파이가 가져간 거라면 양하는 진짜 무고를 당한 셈이었다. 양하가 FTT를 배신하지 않자 추동현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예전 같았으면 최양하는 추동현의 친아들이니 아무리 그래도 아들에게 손을 댔으리라고는 생각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하준은 추 씨 집안사람들의 악랄함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양하가 살아있으면 했다.“회장님, 맹지연 님 오셨습니다.”상혁이 갑자기 들어와 전했다.하준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잠시
하준이 말을 뚝 끊었다.“맹지연 씨, 저는 맹 의원께서 나중에 추궁할 일이 없도록 하려고 당신을 데리고 탈출한 겁니다.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맹지연은 이상하다는 듯 하준을 쳐다보았다. 호수처럼 깊고 평온한 하준의 너무 깊어서 그 속을 다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그러나 하준이 진지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이 남자, 점점 더 마음에 들어.’“하지만… 제가 감사하고 보답하고 싶다면요?”맹지연이 책상으로 걸어오더니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상체를 슬쩍 기울였다.하준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정면으로 맹지연이 가슴팍의 경치를 훤히 볼 수 있었다.그러나 하준의 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구멍으로 반감이 올라왔다.“저와 관련된 내용은 좀 찾아보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성적으로 불구입니다.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시죠.”“안 믿어요. 당신처럼 매력적인 남자가 그럴 리가 없지.”맹지연은 테이블을 돌아 다가서더니 그대로 하준의 아랫도리로 손을 뻗었다.하준의 표정이 확 변하더니 맹지연의 손목을 잡다 저지했다. 맹 의원의 딸만 아니었으면 애진작에 이 뻔뻔한 인간을 사무실에서 내쫓았을 것이다.“그냥 사실인지 알아보려는 것뿐이에요.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맹지연은 전혀 민망한 기색 없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흐응,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가서 기사만 찾아봐도 아실 겁니다. 구치소에서 칼을 맞아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하준이 일어서더니 맹지연을 그대로 밀어냈다. “매주 병원에 가서 진찰받은 의료 기록이 있습니다.”맹지연은 진지한 하준의 모습을 보더니 멍해졌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안 된다고?’“괜찮아요. 내가 최고의 의료진을 붙여서 치료해 드릴게요.”맹지연이 하준에게 윙크를 했다.“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내게 즐거움은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하준은 이제 얼굴이 완전히 흙빛이 되었다.이렇게 노골적인 꼬맹이는 본 적이 없었다.맹지연은 큭큭 웃더니 우아하게 사무실에서
하준은 한참을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돈을 갚는 것만으로는 내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가 없지. 내가 괜찮은 레스토랑을 하나 알아뒀는데 점심때 시간이 괜찮은지…”“고맙지만 시간 없어.”여름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면 언제 시간이 되는데? 당신이 시간을 정해. 그러면 내가 맞출게.”하준이 즉시 물었다.여름이 짜증을 냈다.“당신한테는 영원히 내줄 시간 없어.”“공교롭게도 난 영원히 당신에게 시간 낼 수 있…”하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하준은 휴대 전화를 보며 웃었다. 30초도 지나지 않아서 상혁의 휴대 전화로 계좌번호가 날아왔다.하준은 자기 휴대 전화로 은행 어플을 열더니 17,317,071원을 보냈다.******화신 사무실.여름은 입금 알림을 보았지만 전혀 돈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많이 보내면, 뭐?’그렇게 상처를 받고 이혼할 때 한 푼도 못 받은 것을 생각하면 천만 원이 아니라 1억을 보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오전 11시, 임윤서가 전화를 걸어왔다.“오늘 아침에 본가에 갔었는데 어제 엘리베이터 사고는 인위적인 손상으로 발생했대. 맹 의원님 쪽에서 잡은 증거로는 하정혜를 가리키고 있다더라.”“하정혜라고?”여름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하정혜가 추신의 충동질에 넘어가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덜떨어진 애가 그런 짓을 했다고?”“그러게. 양아버지 말씀으로는 아무래도 추신 쪽이란 관련 있는 것 같대. 그런데 아무래도 하정혜를 가리키도록 증거를 조작해 놓은 것 같대. 어제 하정혜랑 최하준이 말싸움한 것을 다들 보았던 지라 경찰에서도 이미 하정혜를 잡아다가 심문을 하고 있다네.”여름은 혀를 찼다.“쯧! 보아하니 추신에서 하정혜를 속죄양으로 삼은 모양이네. 그런데 맹 의원 쪽에서는 그냥 이렇게 넘어갈 거래?”“양아버지 말씀으로는 맹 의원 쪽에서는 더는 파지 않기로 했대.”여름은 깜짝 놀랐다.“추신에서 뭘 많이 먹인 모양이네.”“아마도 그런
하준은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손을 뻗어도 자기 손가락도 안 보일 컴컴한 어둠 속에서…”옆에서 보고만 있던 엄 실장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하준이 뭔가 묘한 소리라도 할까 싶어서 얼른 끼어들어 하준을 끌고 구석으로 갔다.“회장님, 저희 대표님하고 이혼하셨잖습니까? 그러면 각자 잘 살아야지요. 여기까지 와서 이러시면 이상한 소문이 나서 우리 대표님 결혼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그러면 좋은 거 아닙니까?”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부부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혼외자 역할이라면 이미 배울 만큼 배웠다.엄 실장은 입가에 경련을 일으켰다.“아니, 사람이 그러면 안 되죠.”“그러면 난 사람이길 포기하지.”엄 실장이 말을 더듬었다.“아,아니. 사람이 아니면… 뭡니까?”“충성스러운 댕댕이?”하준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엄 실장이 입을 떡 벌리고 그 오만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최 회장님이 이렇게 된 걸까?체면은? 이젠 그런 건 필요 없어진 거야?’“여름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하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이 물어보면 난 어쩔 수 없이 어젯밤에 우리 강여름 대표가 내가 죽은 줄 알고 막 울었다고말해줄 수밖에 없지.”“……”엄 실장은 머리가 쭈뼜 섰다. 할 수 없이 돌아서서 가만히 여름에게 상황을 보고 했다.여름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그 인간이 하는 헛소리에 넘어가지 말아요. 난 운 적 없거든.”“대표님, 지금 제가 듣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지나가는 직원들을 붙잡고 아무 말이나 마구 하고 있어요. 대표님의 명예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엄 실장이 더욱 소곤소곤 말했다.“그리고 제 생각인데 최 회장이 완전히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러면 충성스러운 개가 되겠대요.”“……”여름은 이마를 문지르다가 결국 무력하게 말했다.“알겠어요. 그러면 사
“응, 아주 고급진 버전으로. 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신경 쓰는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부터 배워보려고.”하준은 갑자기 여름의 앞에서는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나니 다시는 집어쓰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여름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하준이 올라오기 전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좋아. 그렇게 개가 되고 싶다면 이거 먹어.”여름은 서랍에서 생고기를 꺼내더니 던졌다. 식당에 부탁해서 가져온 것이었다.하준은 날고기를 보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여름의 눈에 날고기를 들고 베어 무는 하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름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하준을 놀려서 모욕을 주면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정말로….벌떡 일어섰다.“최하준, 그… 그걸 진짜로 먹으면 어떡해? 난.. 그냥 장난으로….”날고기의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들어와 토할 뻔했지만 하준은 어찌 어찌 꿀꺽 삼켜버렸다.“날 내보내려고 그러는 거 알아. 하지만 난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냥 고기인데, 뭘. 이전에 애먹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그러더니 다시 고기를 씹었다. 하준이 웃었다.“아마도 전에 내가 미워서 날 씹어 먹고, 갈아 먹고 싶었을 거야.”“그만 먹어!”하준이 계속 날고기를 씹는 모습을 여름은 차마 더는 볼 수 없었다. 후다닥 다가가 입에 있던 고기를 빼앗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그 많은 일을 겪고 이제 많이 냉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다시 최하준에게 자꾸 당하다 보니 울컥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그래. 먹지 말라면 안 먹을게.”하준은 한껏 다정한 얼굴을 하고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없이 달콤한 얼굴이었다.이런 인간 앞에서 여름은 완전 무방비였다. 머리가 아팠다.“최하준, 대체 몇 번을 말해야…”“내가 도시락 만들어 왔어.”하준은 자신이 만들어온 도시락을 꺼냈다.“어제 도와줘서 고마워.”여름은 저기압이 되었다.“당신을 상대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
다음 순간 양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 테이블에 차려진 도시락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나마 꽃다발은 하준이 들고 간 상황이었다.“식사 중이었군요.”도시락을 보더니 양유진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최하준이 들고 왔던가요?”여름은 그렇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렇다면 왜 하준이 보낸 도시락을 받아먹었는지 해명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아뇨. 식당에서 올려보낸 거예요.”숨 막히는 2초가 흐르고 여름은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최하준이 왔던 건 어떻게 알았어요?”“최하준이 회사에 와서 또 질척거릴까 봐 1층에서 직원들에게 혹시 최하준이 오면 내게 말해달라고 부탁해 놓았었거든요.”웃으며 말하던 양유진이 물었다.“갔나 보죠?”“네. 못 올라오게 했거든요.”그렇게 말하고 여름은 완전히 찔려서 어쩔 줄 몰랐다.“잘됐네요.”양유진의 눈이 반짝하더니 갑자기 웃었다.“사무실 향기가 좋네요.”“방금 향수를 뿌려서 그런가 봐요.”여름은 하준이 들고 왔던 꽃에서 나는 향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으니 계속 꼬리를 물고 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식사했어요? 식당으로 내려갈까요?”안에 숨어 있는 시한폭탄 최하준을 생각하니 더는 사무실에 있을 수 없었다.“…그러죠.”양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도시락 가지고 내려갈까요?”“됐어요. 유진 씨가 올 줄 알았으면 올려보내라고 하지 말 걸 그랬어요.”여름은 어색하게 웃고는 얼른 일어서 같이 내려가려고 했다.“잠깐만요.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양유진이 갑자기 휴게실로 걸어갔다.여름은 너무 놀라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양유진이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적당한 말을 둘러 대 막기도 전에 문이 열려버렸다.그런데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준과 꽃도 보이지 않았다.안에 사람이 숨을 만한 공간은 옷장밖에 없었다.‘최하준이 옷장 안으로 숨었나?’여름은 튀어나올 듯 뛰던 심장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오버한 것인지 모르지만 최하준이 여
“그건… 좀 생각해 볼게요.”여름은 혼란스러웠다. 사실 양유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하늘이를 대외적으로 자기 아들이라고 공개하면 양유진도 명실상부한 아버지의 역할을 줄 수 있다. 그냥 두었다가 최하준이 하늘이가 자기 아들인 것을 알게 되면 그 질척거리는 인간을 평생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생각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양유진은 실망스러운 듯했다.“하늘이도 생각이 빤한 아이에요. 말로 안 해도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랑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게 괴로울 거예요. 하지만 여름 씨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으니 차마 말을 못 하는 거예요.”여름은 숟가락을 꽉 쥐었다.하늘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늘이는 너무 철이 들어서 마음이 아플 정도다.“혹시…나랑 계속 함께할 생각이 없는 거라면 모를까….”양유진이 돌연 그런 소리를 했다.“……”여름은 심장이 철렁했다.‘아직 결심을 굳히지 못한 건가? 이미 유진 씨 집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데도?’양유진과 관계를 가질 준비까지 되어 있는데도 유진은 각방을 고집하고 있고, 그동안 하준은 툭하면 나타나서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저도 하늘이가 얼마나 성숙한 아이인지 알아요. 그건 일단 하늘이 의견을 물어볼게요.”여름이 적당히 핑계를 댔다.“그래요.”유진은 더 할 말이 없었다.“오후에는 같이 쇼핑이나 할까요? 뭐 사고 싶은 거 없어요? 결혼한 지 한참 됐는데도 여름 씨에게 뭘 사준 적이 없네요.”“아녜요. 오후에는 중요한 미팅이 있어요.”마침내 거짓말이 아닌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그래요. 나도 회사에 가서 밀린 일이나 해야겠군요. 아내가 이렇게 워커홀릭이라니 어쩔 수 없군요.”양유진이 던진 농담에 여름은 더욱 죄책감이 느껴졌다.사무실로 돌아와 자기 휴게실에서 잠든 하준을 보다 죄책감은 극에 달했다.“최하준, 누가 여기서 자래? 나가.”여름은 화가 나서 하준을 잡아당겼지만 그 큰 몸은 무슨 말뚝이라도 박아 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하준이 멍하니 눈을 뜨더
第1130章하준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바지도 벗기 시작했다.“샤워하려고.”여름은 턱을 떨어트리고 서 있었다. 하준의 바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속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가 여름의 얼굴은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하준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찡긋했다.“아니, 안 서는 남자는 처음 봐서 그렇지.”여름이 억지로 한 마디 뱉었다.가장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약점이었지만 이미 있는 대로 충격을 받아서 하준은 오히려 무덤덤했다.“안 서면 뭐 어때? 그것 말고도 난 당신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수만 가지는 알고 있어.”“…변태!”여름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하준을 노려보고 소리 질렀다.“옷 입고 꺼져! 누가 여기서 샤워해도 된대!”“어제 못 씻었더니 너무 찌뿌둥하다.”마지막 옷을 벗으려고 하준이 허리를 숙이자 여름은 더는 볼 수 없어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의자에 앉아서 여름은 한참 동안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오 사장과 홍보 팀의 류 팀장이 와서 서울의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일을 논의했다.휴게실에 있는 인간에게 신경을 쓰느라 여름은 미팅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고 둘을 쫓아 보내려고 했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 사장과 류 팀장은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으면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10분 뒤 갑자기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자기야, 나 옷 좀 입혀줘.”하준이 허리에 분홍색 목욕 수건을 걸치고 맨발로 걸어나왔다. 머리는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서 물방울이 대흉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하게 풍기는 하준의 시원한 민트향에 자리에 있던 남자 둘까지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여름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욕이 천만 개 뒤섞였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되었다.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오해하지 마세요. 지금….”“이해합니다. 이해해요.”오 사장이 얼른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일은 절대로 한 마디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