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다. 송영식은 백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안아, 나 이제 임윤서랑 결혼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집에서 쫓겨났어. 넌… 그래도 상관없지?”“다…당연하지. 네가 이렇게까지 해 줘서… 가, 감동했어.”백지안은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참았다.“너희 식구들이 그 정도로 날 싫어한다는 건 다 알고 있던 일이잖아. 난…”“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이미 결심했어. 이제 임윤서가 아이를 낳아도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어.”송영식이 얼른 백지안의 말을 끊었다.임윤서를 생각하니 백지안은 울컥했다.“아, 그런데 너희 삼촌은 어쩌자고 걔를 양녀로 삼으셨대?”‘장차 대통령이 될 사람의 딸이라니. 친딸이 아니더라도 굉장하잖아?앞으로 굉장히 좋은 집안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거 아냐?’“아마도 식구들이 죄책감에 내놓은 대책인 것 같아.”송영식도 마음이 답답했다.“뭐, 됐어. 실컷 그러라지. 걔가 얼마나 음흉한 인간인데. 어쨌거나 걔 소원대로 이루어져 버렸네.”‘뭘 실컷 그러라고 해?’백지안은 임윤서가 얄미워서 마구 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이제 임윤서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임윤서가 뭐라고 거지 같은 게 대통령의 딸이 된단 말이야? 나라도 송영식을 버리고 대통령의 딸이 될 수 있다면 당장 그러겠다!송영식을 독차지하면 뭐 해?이제 쿠베라의 지원이 없으면 오슬란 경영을 아무리 잘해 봤자, 그냥 일개 화장품 회사 사장이잖아? 게다가 쿠베라와의 인연도 끊어졌으니 앞으로 사업적으로도 크게 곤란해질 텐데. 다들 송영식 따위 무시할 텐데.이제는 나보다 더 가난한 녀석이 되어 버리겠는걸.’“영식아, 마음이 너무 아프겠다. 일단 좀 쉬어. 아니면 집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그러더니 백지안은 전화를 끊었다.송영식은 얼떨떨한 채로 멍하니 있었다. 사실은 백지안과 이야기를 하며 답답함을 풀고 싶었는데…송영식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지금 기분 너무 안
임윤서는 갑자기 속마음을 풀어놓았다.“요즘 거지 같은 남자들도 많은데 애를 낳고 평생 그냥 결혼을 안 하는 것도 괜찮겠어.”“인생 아직 모르는 거야. 더구나 앞으로 든든한 정재계 배경을 두게 되면 더 괜찮은 남자들이 널 따라다니게 될걸.”임윤서가 웃었다.“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파티에서 내가 화려하게 등장해서 지나가다가 송영식이랑 윤상원 두 나쁜 자식은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거야. 그러면 내가 ‘저 쓰레기는 당장 끌어내세요. 저런 인간들을 보다가 내 눈 버릴라.’ 하는 거야.”마침내 여름도 미간을 펴고 웃을 수 있었다. 농담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밥을 다 먹고 났을 때 여름은 양유진의 전화를 받았다.“미안해요. 오늘은 집으로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윤서에게 이런 일이 생겨서….”“괜찮아요. 친구니까 이럴 때 함께 있어 줘야죠.”양유진이 다정하게 말했다.“몇 호실에 있어요? 내가 잠깐 보러 갈 게요.”“아니, 그러지 말아요. 오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윤서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그래요. 그럼 내일 갈게요.”양유진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물었다.“정말 송태구가 윤서 씨를 양녀로 삼는다나요?”“물론이죠. 직접 성명도 발표했어요. 윤서 몸이 회복되는 대로 그쪽 집안에서 성대하게 파티를 연대요.”양유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윤서 씨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군요. 미래 대통령의 딸이라니, 대단해요.”“뭐, 딱히 윤서가 노린 건 아니지만요.”양유진의 말을 듣고 여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지금 윤서의 상황이 전화위복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던 것이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양유진은 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조금 이상했다.“내가 말 실수를 했군요. 그만 쉬어요.”병실로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돌아보니 하준이 옅은 불빛을 지고 들어왔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하준은 날렵해 보였다.“어쩐 일이야?”여름은 저도 모
‘어떡해? 최하준 급발진하는 거 아니겠지?’윤서는 쇼핑백을 잡은 하준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그러나 하준은 화를 내지 않고 쇼핑백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조심스럽게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하준은 새우를 펼쳤다.장갑을 끼더니 하나하나 까기 시작했다.큼직한 새우구이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에 여름과 윤서의 위장이 꿈틀거렸다.“먹을 거면 나가서 드시지?여름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당신 먹으라고 까는 거야. 다 까면 갈게.”하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안 먹어도 상관없어. 어쨌든 다 까서 여기 놓고 갈게.”“……”이때 입구에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 보니까 추성호였다. 손에는 분홍 장미와 선물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느끼한 웃음을 띠고 반갑게 인사했다.“어, 강 대표. 이런 데서 다 만나고 말입니다.”“당신이 여기 무슨 일이야?”여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니 하나같이 꼴 보기 싫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네.’ “윤서야, 아는 분이셔?”“알기는 개뿔!”윤서가 눈을 굴렸다.추성호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 웃었다. “임윤서 씨 병문안 왔습니다. 이제 송태구 의원의 양녀가 되신다던데, 우리 삼촌과 송 의원이 좀 아는 사이라고 인사 다녀오라고 하시더라고.”추성호가 말하는 삼촌이란 추동현이었다.여름은 바로 추신에서 송태구와 줄을 대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서가 바로 그 돌파구가 된 것이다.추신 쪽 인간들의 철면피 같은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추성호는 곧 정중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이제 보니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시네. 아픈데도 사람 홀릴 정도로 아름다우시고….”“큭큭!”옆에서 새우를 까던 하준이 비웃었다.추성호가 하준을 노려보았다.“당신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임윤서 씨를 해친 백윤택을 변호했었다면서? 여기는 당신 같은 인간이 올 곳이 아니야.”“임윤서 본인도 날 내쫓지 않는데 네가 뭐라고 날 나가라 마라야? 당신이 무슨 미래 임윤서 남편이라도
결국…“둘 다 나가 주실래요? 환자가 좀 쉬어야 하니까. 병문안 온 뜻은 다 감사히 받았으니 둘 다 나가 주시지.”강여름이 가차 없이 둘을 내쫓았다.둘 다 한 방씩 먹은 셈이었다.하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여름이가 추성호더러 날 내쫓으라고 하지 않는군. 좋았어!’그러나 추성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추신의 대표라는 사람이 겨우 최하준하고 같은 취급을 받다니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그러나 이제 임윤서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여름은 그런 임윤서의 친구였다.할 수 없이 울분을 참으며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나가면서 추성호는 하준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하준은 일어섰다. 사람이 빠져들 것 같은 눈으로 여름을 들여다보았다.“새우 다 까놨어. 이제 갈게.”그러더니 하준은 병실에서 나갔다.여름은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었다.대체 하준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뭐야? 최하준은 뭐 귀신에 홀리기라도 했냐?”윤서가 한탄했다.“전혀 내가 알던 그 최하준이 아닌데? 예전에는 그렇게 기고만장하더니. 특히 결혼식장에서 널 데려갔을 때는 죽어도 널 놓지 않을 것 같은 기세더니만.”“……”‘저도 사람이라면 날 안 풀어줄 수는 없었겠지.’“잠자리를 못 해서 충격이 너무 컸나?”윤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추측을 내놓았다.“쓸데없는 소리!”여름은 테이블로 가서 아직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 새우를 보고는 쓰레기통에 쏟아 버릴까 하다가 맛이라도 보기로 했다. 너무나 맛있었다.결국 여름은 앉아서 새우를 다 먹고 말았다.다 먹고 나니 현타가 왔다.‘난… 자존심도 없나 봐.’******주차장.하준이 막 차 문을 열려는데 뒤에서 추성호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아주 순식간에 사람 꼴 우습게 만들더군.”“애초에 인간이긴 했나? 사람 꼴이라니”하준이 싸늘하게 반격했다.“아직 내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는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추성호가 비열한 웃음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하준이
“이번 주에 몇 명째지?”하준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전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참 만에야 용기를 그러모아 간신히 답했다.“회장님, 실은… 저도 사직서를 드리려고 합니다.”가늘게 뜬 하준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왜? 사실대로 말해주게. 누군가에게 스카우트돼서 가는 건가?”“아닙니다.”전성이 머뭇거렸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정화가 임신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생활을 접고 은퇴해서 정화랑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그랬군….”조금 뜻밖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FTT에도 지룡을 유지할만한 자금이 없기는 했다. ‘갈 사람이 다 가고 나면 진짜 충성스러운 친구들만 남겠지.’“그래. 가 봐.”하준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자네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봐야겠군.”“고맙습니다.”전성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아 참….”갑자기 하준이 입을 열었다.“양하가 실종되었을 때 정말 아무도 못 본 게 확실한가?”전성은 흠칫했지만 결국 단호하게 말했다.“못 봤습니다.”“그래.”전성이 나가자 상혁이 물었다.“마지막에 그건 왜 또 물으신 겁니까?”“정화가 전성의 애를 가졌을 줄은 몰랐거든.”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눈을 빛냈다.“내내 전성이 충성스럽고 냉철한 당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내 생각이 틀렸어. 자기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고 지룡을 그만두겠다니, 전성의 마음속에는 민정화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한 거야.”“그러니까….”“민정화가 백지안을 보좌했었다는 사실을 잊었어?”하준이 상혁을 일깨웠다.“백지안이 어떤 인간이야? 민정화는 완전히 백지안의 편에 서서 말하곤 했었다고. 민정화는 은근히 이간질의 고수야. 고것이 만만찮은 녀석인 걸 알고 내가 전에 의심을 한 적이 있지만 전성은 믿었었는데.”상혁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그러니까 자기 아이를 가졌으니 민정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전성이 회장님께 숨기는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군요. 전성에게 미행을 붙일까요?”“누구에게 미행을 시키나?”하
양유진은 움찔했다. ‘킬러 일은 추동현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이 자는….’“무슨 소린지…. 난 처음부터 여름 씨를 사랑해 왔소. 내가 당신 협박에 넘어갈 것 같아?”상대가 갑자기 저음으로 웃었다.“다른 사람이라면 초지일관 그런 변함없는 사랑을 했을지 몰라도 소위 당신의 사랑이란 건 실은 계산이었소.”양유진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이놈은 대체 누구야?어째서 나의 비밀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거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인데.’“강여름을 건드리지 말라면 건드리지 마시오. 했다가는 다음에는 시체로 발견될 테니까. 못 믿겠다면 도전해 보시던지.”보조석의 가면 쓴 남자가 문을 열었다.곧 번호판이 없는 검은 차가 다가왔다.양유진의 옆에 있던 남자고 그와 함께 떠났다.두 사람은 차에 타더니 먼지를 휘날리며 가 버렸다.가죽 시트 위에서 양유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온화했던 얼굴에 살기와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대체 어디서 온 놈인데니아 만의 킬러 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거지?’“회…회장님.”기사가 덜덜 떨며 돌아보았다.“대체 어디서 온 놈인지 찾아내.”양유진이 매섭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갈까요?”기사가 물었다.“됐어. 그냥 클럽으로 가자.”양유진은 짜증이 났다. 원래는 집에 가려고 했으니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그 사람이 한 말을 대충 넘길 수가 없었다.상대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함부로 도박을 할 수는 없다. 다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무 안 좋았다.강여름을 가지고 싶었다. 이미 그 욕망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다. 클럽에 도착하자 양유진은 술을 벌컥벌컥 원샷으로 넘겨 버렸다.룸의 문이 열렸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잠시 후 손가락 하나가 등 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치우지 못…”확 눈을 들어보니 백지안의 교태로운 얼굴이 보였다. 메이크업을 정성스럽게 한 얼굴에 하얀 롱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더없이 청순해 보
“나에게는… 미래 쿠베라의 손자가 있지.”백지안이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자기 배를 쓸었다.“그래요. 송영식은 집에서 쫓겨났지만 애는 어쨌든 그 집안 핏줄이잖아요? 시간이 지나서 그 집 식구들 화가 식으면 애는 어쨌든 그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라고요.”양유진의 동공이 흔들렸다.“백지안, 정말 악마로군.”“당신과 잘 어울리지 않나요? 그리고, 한때 최하준의 여자가 어떤지 알고 싶지 않아요?”백지안이 몸을 밀착하더니 양유진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양유진의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타냈다. 와락 백지안을 눕히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최하준이 버린 여자 중 하나일 뿐이지. 너한테는 손도 안 댔잖아?”백지안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그건 아니죠. 최하준이 어려서부터 난 걔의 최애였는데 강여름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게다가… 난 당신에게 비밀을 말해줄 수도 있다고요.”“무슨 비밀?”양유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3년 전에 왜 최하준이 강여름을 버렸는지 알아요? 내 최면에 걸렸기 때문이지. 양 대표, 사실 난 꽤 쓸만하다고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방면에서는 말이죠.”백지안이 생긋 웃으며 양유진의 목을 껴안았다.“오랜 세월을 참아낼 수 있는 남자는 보통이 아니라는 거 내가 첫눈에 알아봤다니까? 아마도 지금의 추동현이 미래의 당신 모습이겠죠?”양유진의 어두운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어쩐지 3년 전 최하준이 그렇게 갑자기 강여름을 버린다 싶었더니.그렇다면 백지안은 확실히 이용 가치가 있겠군.게다가 한때 최하준의 여자가 어떤지 궁금하긴 해.’“좋아. 도와주지.”양유진이 백지안의 턱을 꽉 잡고 폭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임윤서는 사흘 만에 퇴원했다.그러나 원래 살던 리버사이드 파크로 간 게 아니라 송영식의 집에서 사람을 보내와 송영식 본가로 들어갔다.그 집 식구들의 돌봄을 받게 되자 여름도 양유진의 집으로 이사 들어갈 준비를
밤 9시. 여름은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솨아아하는 물소리에 괜히 긴장이 됐다. 곧 양유진과 관계를 가질 생각을 하니 거부감이 들었다.‘아니야. 일단 한 번 해보고 나면 이런 거부감은 사라질 지도 몰라.평생 이렇게 최하준 하나만 받아들일 수는 없잖아.’여름은 이를 악물고 나왔다.그런데 여름이 마주한 것은 이불과 베개를 들고 나갈 준비를 하는 양유진이었다.“아무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것 같아서 한동안 혼자 있을 수 있게 해줄게요.”양유진이 부드럽게 웃었다.“그리고 요즘 나도 일이 좀 바빠서 밤에 일을 좀 해야 하거든요. 한동안은 옆 방을 쓸게요.”“……”감동한 여름은 입술을 깨물었다.“사실 난 준비가….”“너무 스스로를 몰아치지 말아요. 난 억지로 몰아붙일 생각 전혀 없어요.”양유진이 여름의 말을 끊었다.여름은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양유진을 의심한 적까지 있다는 사실에 크게 죄책감을 느꼈다.양유진이 옆 방으로 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울이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냅다 여울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이모, 너무 아파요. 보고 싶어.”“여울아, 무슨 일이야?”여름은 깜짝 놀라서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여울이 훌쩍거렸다.“머리 아프고 열나요. 보고 싶어요….”여름은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듣자 머리가 띵했다. 이런저런 것을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어디니? 내가 당장 갈게.”“병원이오.”병원이라는 소리를 듣자 더욱 다급해졌다. 급히 옆 방에 있는 양유진을 찾아가 회사에 일이 있어 다녀오겠다고 말했다.하준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꺼려할까 봐 여울이를 보러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병원.여울은 전화를 끊더니 울음을 뚝 그치고 바로 돌아서서 이주혁의 팔을 애교스럽게 껴안았다.“삼촌이 다 하면 사탕 준다고 했죠?”이주혁은 어이가 없어 하며 서랍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건네주고는 하준을 돌아보았다.“네 조카 연기 끝내준다.”하준이 눈을 찡그했다.“의사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