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여름은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솨아아하는 물소리에 괜히 긴장이 됐다. 곧 양유진과 관계를 가질 생각을 하니 거부감이 들었다.‘아니야. 일단 한 번 해보고 나면 이런 거부감은 사라질 지도 몰라.평생 이렇게 최하준 하나만 받아들일 수는 없잖아.’여름은 이를 악물고 나왔다.그런데 여름이 마주한 것은 이불과 베개를 들고 나갈 준비를 하는 양유진이었다.“아무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것 같아서 한동안 혼자 있을 수 있게 해줄게요.”양유진이 부드럽게 웃었다.“그리고 요즘 나도 일이 좀 바빠서 밤에 일을 좀 해야 하거든요. 한동안은 옆 방을 쓸게요.”“……”감동한 여름은 입술을 깨물었다.“사실 난 준비가….”“너무 스스로를 몰아치지 말아요. 난 억지로 몰아붙일 생각 전혀 없어요.”양유진이 여름의 말을 끊었다.여름은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양유진을 의심한 적까지 있다는 사실에 크게 죄책감을 느꼈다.양유진이 옆 방으로 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울이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냅다 여울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이모, 너무 아파요. 보고 싶어.”“여울아, 무슨 일이야?”여름은 깜짝 놀라서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여울이 훌쩍거렸다.“머리 아프고 열나요. 보고 싶어요….”여름은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듣자 머리가 띵했다. 이런저런 것을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어디니? 내가 당장 갈게.”“병원이오.”병원이라는 소리를 듣자 더욱 다급해졌다. 급히 옆 방에 있는 양유진을 찾아가 회사에 일이 있어 다녀오겠다고 말했다.하준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꺼려할까 봐 여울이를 보러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병원.여울은 전화를 끊더니 울음을 뚝 그치고 바로 돌아서서 이주혁의 팔을 애교스럽게 껴안았다.“삼촌이 다 하면 사탕 준다고 했죠?”이주혁은 어이가 없어 하며 서랍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건네주고는 하준을 돌아보았다.“네 조카 연기 끝내준다.”하준이 눈을 찡그했다.“의사들
“내가 같이 자는데, 내가 한 번 잠들면 깨질 않아서….”하준은 곤란해졌다.‘아, 처음에 이불을 차낸다고 대충 말을 하고 났더니 이거 자꾸 말이 꼬이네.’“뭐라고?”여름은 화가 나서 하준을 노려보았다.“이래 가지고는 당신은 자격이 없어, 아…”‘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이 눌러서 참았다. 지금 여기서 ‘아빠’라는 말이 나와서는 곤란하다.“그래, 난 삼촌 자격이 없어.”하준은 별생각 없이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나도 여름이를 위해서 좋은 새아빠가 되어 주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새아빠라니?”여름은 심장이 바르르 떨렸다.“양하도 없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여울이 아빠가 되어야지. 이제 유치원 등하교도 다 내가 시켜. 밤에도 내가 데리고 자고, 책도 읽어 주고, 놀아주고….”한참 말하다 보니 하준은 자기가 너무 주절주절 혼자서 떠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그렇네. 애한테 잘해줘.”여름도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남들은 다 하는 아빠 노릇 아닌가? 게다가 여울은 하늘이와는 달라서 아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여름이 다시 부탁했다.“하지만 기왕 아빠 역할을 하기로 결심을 했으면 책임지고 제대로 돌봐 주라고. 잠에 그렇게 마음 푹 놓고 자는 부모가 어디 있어? 어린애는 원래 밤새 이불을 차내니까 계속 덮어 줘야 한다고.”하준은 깜짝 놀랐다.“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애도 안 키워봤으면서….”여름은 움찔했지만 얼른 얼버무렸다.“나도 애를 가진 적은 있거든.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말실수 한 것을 깨닫고 하준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미안해….”“나랑 여울이는 자주 만나서 자주 데리고 잤었다고. 그러니까 알지.”여름은 이제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돈 몇 푼 들인다고 애 키울 수 있는 게 아니야. 책임을 져야지.”“그래. 알겠어.”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귀 기울이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니 여름은 심정이 복잡했다.하준이 이렇
“……”여름은 하준을 잠시 노려보다가 결국은 따라 올라가고 말았다.하준은 여울을 안방 침대에 뉘였다.“당신은 옆 방에서 자. 난 안 자고 여울이 살펴보고 있을게.”“됐어. 내가 여기 있을게. 애 또 열나면 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잖아.”여름이 하준을 흘겨보았다.“체온계 주고, 당신이 옆 방에 가서 자.”“…그래.”하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갔다.하준의 침실이라 여름은 그 침대에 눕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워서 양유진에게 톡을 보냈다.-회사에서 새벽까지 일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집에 못 가겠네요. 미안해요.톡을 보내고 여름은 죄책감에 볼이 확확 달아올랐다.남편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었다.그러나 평온하게 잠든 여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짠해지는 것이었다.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점점 피로가 몰려와 소파에 기댄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막 잠이 들려는 참에 살그머니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은 깼지만 눈은 바로 뜨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지금 깨어버리면 하준과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하준이 뭘 하러 들어왔는지도 몰라서였다.걸음소리는 여름의 앞에서 멈추었다. 하준은 팔로 여름을 안아 올렸다. 여름은 눈을 번쩍 뜨고 경계의 눈을 치켜 뜨고 하준을 노려보았다.“무슨 짓이야? 내려놓지 못해?”“침대로 옮겨주려고. 늦었는데 편히 자.”하준의 깊은 눈이 여름의 하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됐거든. 그리고… 당신 침대에 누울 수는 없어.”여름은 단호하게 말했다.“내 침대서 얼마나 자 놓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여름 앞에서는 자꾸 야릇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여름은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언짢은 듯 바로 뱉었다.“그건 옛날얘기고, 지금은 유부녀거든.”“그래서? 결혼하고 첫날 밤부터 내 침대에서 보냈잖아?”희미한 달빛을 통해서도 여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심장이 찌릿한 나머지 하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한참 만에 여름은 중얼거렸다.“너무 비관적으로 그러지 마. 이제 의학이 많이 발달했으니까….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당신을 안고 있으니 너무 하고 싶긴 한데 거기에 반응이 없네.”하준은 매우 괴로운 얼굴로 솔직하게 말했다.여름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최하준….”“그냥 팩트를 말한 거야.”하준은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FTT가 망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되찾아 오려고 했을 거야. 더구나 우리가 그렇게 사랑했던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매 순간마다 당신 생각뿐이야. 예전의 기억이라도 되찾아 오고 싶어.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되살아나면 최소한 내 추억 속에서 우리 사랑은 영원할 테니까.”“돌았나 봐.”여름은 본능적으로 나무랐다.“최면을 되돌려서 기억을 찾을 가능성은 희박해. 잘못하면 뇌 손상으로 완전히 백치가 될 거라고.”하준은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아직도 나에게 마음 써주는구나.”“미쳤네.”여름은 화가 났다.“난 그냥…”여울이를 돌보아야 할 아빠가 백치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뿐이었다.“여울이가 커서 백치 아빠를 돌봐야 할까 봐 그런 거지.”여름이 짜증스럽게 뱉었다.“거짓말.”하준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더니 여름을 침대에 눕혔다. 자기 몸을 여름의 몸 위로 겹치더니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고통스러운 눈으로 여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너무나 당신을 따라다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당신에게 만족을 줄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줘. 제발 양유진하고는 이혼해. 서인천이든 도재하든 상관없으니 다른 사람과 재혼해. 그러면 앞으로 절대로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게.”그런 말을 듣자 여름은 하준의 가장 약한 부위를 걷어차고 싶어졌다.그러나 어쨌든 서지도 않는데 거기에 폭력까지 가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금니를 물고 말했다.“돌았어, 진짜?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어쨌거나 양유진이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라는 하준의 생각에는 변함없었다.지금 지룡은 일손이 부족하고 양유진은 꼬리를 깊숙이 말고 있어서 단서를 잡지 못할 뿐이었다.여름이 하준을 쳐다보았다.“까놓고 말하자면 당신 이기적인 거 알아? 그냥 나랑 유진 씨가 함께 사는 게 꼴 보기 싫은 거잖아? 그래서 온갖 이유를 대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거고. 너무 치사하지 않아?”하준은 여름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였다.“그래, 치사해. 당신이 같이 살려는 사람은 다 내가 검증을 해야겠어. 문제없는 놈이라야 같이 살게 해줄 거야.”“아니, 뭐라는 거야?”여름은 참을 수가 없어 그대로 하준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하준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두 다리로 여름의 다리를 꽉 얽었다.“차 봐. 그래 봐야 다 소용없어.”“놔!”여름은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완전히 빨개졌다.‘너한테는 아무 느낌 없는지 몰라도 난 정상적인 반응이 온다고.’여름은 점점 더 난처해졌다.“못 놔.”부끄러워하는 여름을 보는 하준의 흑요석 같은 눈에 웃음이 어렸다. “자자.”“이 상대로… 어떻게 잠이 오냐?”여름은 미칠 지경이었다. 하준을 마구 두드려 패고 싶었지만 옆에 자고 있는 여울이 깰까 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어떻게 이렇게 얄미운 짓을 골라서 할까, 그래?”“당신이 언제는 뭐 날 안 미워했나?”하준이 피식 웃었다.“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정말 어쩔 수가 없어….”“당신 같은 변태는 역시 안 서는 쪽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옳은 일인 것 같아.”여름은 상처에 소금 뿌리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그럴까?”하준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아직 잘 모르나 본데 안 서더라도 난 얼마든지 당장 당신을 흥분시켜줄 수 있어.”“……”‘아니, 이 변태가 진짜!’여름은 결코 하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다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결국 입을 꽉 다물고 하준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노려봤더니
“그래. 열이 떨어졌어도 조금 있다가 약은 먹자. 어디, 이리 와 봐. 머리 묶어줄게.”아이를 잘 차려 입히고는 여름은 여울을 데리고 나왔다.하준은 집에 없었다. 여름은 울컥했다.‘애가 병이 났는데 꼭두새벽부터 어딜 나가고 집에 없어?’냉장고를 열어 여울이에게 아침을 차려주는데 하준이 하얀 운동복에 운동화를 신고 밖에서 돌아왔다. 조각 같은 얼굴은 운동 후 특유의 발그레한 혈색을 띠고 있었다. 이마에는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 있었다. 땀에 살짝 젖은 얇은 티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어 안쪽의 섹시하고 탄탄한 근육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그 모습을 보니 헉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냥 아무렇게나 찍어도 스포츠 브랜드 광고의 한 장면이 될 법한 모습이었다.그러나 이 와중에 운동이나 나갔다 올 정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화가 났다.“아침 사러 다녀오면서 좀 뛰었거든.”하준이 테이블에 먹을 것을 내려 놓으며 변명하듯 말했다.“애는 아픈데 지금 운동하러 갈 정신이 있어? 아주 여유롭네.”여름이 비꼬았다.“그게 아니고… 당신이 있었잖아. 그리고… 담당의가 거기를 잘 회복하려면 운동 열심히 해야 한다고 그랬단 말이야.”하준이 마지못해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여름의 귀에 대고 변명했다. 막 운동을 하고 와서 숨을 몰아 쉬는 와중에 귀에 대고 속삭이다니 너무나 관능적이라 숨이 막혔다.여름은 얼굴이 빨개졌는데 여울이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거기가 어딘데?”“……”여름은 난처했다.“…어, 신장.”하준이 급히 둘러댔다.“큰아빠가 신장이 안 좋아서. 여울이 아침 먹자.”“좋아요! 잘 먹겠습니다!”여울이 막 입에 넣으려는데 여름이 와락 빼앗으며 화난 얼굴로 하준을 보았다.“이게 뭐야? 애가 열이 났으면 염증이 있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딱딱한 빵 같은 걸 먹이다니?”하준은 움찔해서는 얼른 사과했다.“아, 내가 잘못했네….”“대체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 거야? 아침부터 저런 쿠키도 안 돼. 연약한 아기 위장에다가 아침부터 저런 걸 들
머리가 아픈 가운데 상혁에게서 소식이 왔다.“백지안이 Y국 쪽에서 최고의 변호사인 스티븐을 초빙해서 소송에 대비한다고 합니다.”“스티븐”스티븐이라면 Y국에서 거의 하준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변호사였다. 그 정도 위치면 돈으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백지안이 그런 사람을 불러올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역시 백지안을 다시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았다.“스티븐은 굉장한 인물입니다. 아주 비열하고 악랄하더군요. 아무래도 이번 소송이 그렇게 만만할 것 같지 않습니다.”상혁이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송 대표님이 연결시켜 주신 거 아닐까요?”“지금 식구들이 모두 영식이와 손을 끊었는데 스티븐이 영식이의 편에 섰을 리가 없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걱정하지 마. 여긴 우리나라야, Y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판사들은 나에게 유리할 거라고.”“하지만…”“주혁이에게 좀 물어볼게.”******송영식은 결국 이주혁에게 백지안이 이미 스티븐을 변호사로 초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송영식은 망연자실했다.자신도 전에 지안이를 위해서 스티븐과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의 비서는 시간이 안 된다며 완곡하게 거절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지안이가 혼자서 스티븐을 초빙했다고? 지안이 인맥이 나보다 낫다는 말이야?’송영식은 믿을 수가 없었다.얼른 백지안에게 전화를 했다.“지안아, 어떻게 스티븐을 설득했어?”“전에 내가 치료했던 환자가 고맙다면서 스티븐이 자기랑 친하다면서 소개해 주더라고.”그런데 통화를 하는 백지안의 목소리에 어쩐지 교태가 흐르고 헉헉거리는 것 같았다.송영식은 살짝 당황했다. 잠자리에서나 나오는 신음이 연상되었던 것이다.‘아니, 아니야. 지안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지금 뭐 하고 있어?”“운동 좀 하고 있었어. 다른 얘기 없으면 끊을게.”“어. 그래.”전화를 끊자 백지안은 양유진의 손길에 침대로 던져졌다.백지안은 기분이 좋았다. 양유진의 목에 팔을 감았다.“자기는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쿠베리어는 자기 명령을 받던 자들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임윤서를 지켜주고 있다.송영식과 임윤서의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벌써 출근해도 되나?”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말도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윤서가 송영식을 흘끗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안 되지.”윤서가 사표를 내밀었다.송영식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사직을 하겠다고?”“응”윤서가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송영식은 울컥했다. “애초에 오슬란 주식 10%를 배당해 주고 제대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입사해 놓고 그렇게 그만두고 싶다고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줄 알아?”“오슬란 주식은 다 돌려줄게.”임윤서가 가볍게 말했다.윤서가 이렇게 순순히 나오는 것을 보고 잠시 흠칫했다가 냉소를 지었다.“왜? 이제 우리 삼촌의 양녀가 되니까 오슬란 주식 따위 우스워졌나?”그렇게 말하면서 속이 쓰렸다.쿠베리어 보디 가드 둘이 앞으로 나서면서 경고했다.“송 의원께서는 이미 송영식 님과 친족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하셨으니 남남입니다. 앞으로는 삼촌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송영식의 당황한 얼굴을 본 윤서가 푸흣하고 웃었다.“아유, 들었어요? 우리 양아버지가 당신하고는 남남이라고 앞으로 삼촌으로 부르지 말래.”“임윤서,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어디 그게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송영식은 화가 치밀어 터질 것 같았다.“이런 뻔뻔한 인간을 봤나? 벌써 양아버지란 말이 아주 입에 붙었구먼. 뱃속의 그 아기만 아니었으면 삼촌이 널 거들떠나 봤을 것 같아?”“그래, 정자 기부 고맙게 생각해.”임윤서가 생글생글 웃었다.“아마도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 쿠베라 주식의 10%는 내가 상속받아. 그리고 나 지금 본가로 들어갔거든. 큰어머니가 나더러 방을 고르라고 하셨는데 난 당신이 쓰던 방이 제일 마음에 들더라. 그런데 인테리어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내가 좋아하는 핑크색으로 싹 갈기로 했어.”“남의 방을 차지하고 들어갔다고!”송영식이 잡아먹을 듯 윤서를 노려보았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