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나?아니지, 쿠베라의 백업에 임윤서의 저 조제술이면 정말 오슬란의 적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송영식은 머리가 쭈뼛 섰다.‘대체 내가 전생에 임윤서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내 가족을 다 뺏어가더니 이제는 회사를 차려서 일까지 빼앗아 가려고 이러지?’******“코스메틱 회사를 설립하겠다고?”여름은 윤서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응.”윤서가 싱긋 웃었다.“어제 양어머니랑 얘기하다 보니 내가 개발한 제품이 마음에 든다면서 남 밑에서 일하기 아깝다고 하시는 거야. 자기 회사를 차려도 충분할 거라면서. 행정적인 문제는 쿠베라 쪽에서 해결해 주시겠대.”윤서가 말하는 양어머니란 송태구의 부인이었다.여름은 미래의 영부인감답게 멀리 보는 안목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머님 말씀도 일리는 있다. 나도 응원할게.”여름이 웃었다.“자금 부족하면 말해. 내가 투자 좀 할게.”“하핫, 고마워. 투자야 언제든 환영이지. 나중에 너더러 회사 경영 좀 맡아달라고 해야겠다.”윤서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 참, 내일 저녁에 이쪽 집에서 환영 파티를 열어주신다네. 내가 초대장 하나 보냈어. 꼭 와야 해!”“영광입니다요.”통화 후 얼마 되지 않아 윤서의 초대장이 도착했다.별장으로 돌아와 양유진과 저녁을 먹었다. 갑자기 양유진이 말했다.“내일 밤에 윤서 씨를 환영하는 연회가 열린다던데요.”“그래요? 유진 씨도 들었군요?”여름은 놀란 눈치였다.양유진이 부드럽게 웃었다.“네. 지금 그 연회 이야기로 난리더군요. 송 의원 집안에서 윤서 씨에게 제대로 체면을 세워주려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정재계 인사들이 초대장을 받았어요. 여름 씨도 받았나요?”여름이 웃었다.“윤서를 친구로 둔 덕에 하나 받았죠.”“내일 저녁에 같이 가요.”양유진이 여름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가볍게 말했다.“이렇게 예쁜 와이프에게 눈독 들이는 늑대가 있을까 봐 내가 불안하거든요.”여름이 시옷 입술을 했다.“오버예요. 내가 유부녀
양유진도 오늘은 블랙 슈트를 입었다.근사하긴 하지만 최하준과 비교해보면 아무래도 2% 부족했다.슈트 입은 모습은 역시 최하준이 보기 좋았다.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여름 쪽으로 돌아보았다.여름은 얼른 고개를 돌려 찔리는 얼굴로 양유진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이런 모습에 양유진이 기분 나빴겠다고 걱정했는데 양유진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양유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유력인사가 모여있는 곳이었다.여름은 흠칫했다. 이때 양유진이 여름을 돌아보았다.“윤서 씨가 저쪽에 있네요. 가서 인사 좀 해볼까요?”“그래요.”여름도 마침 그럴 생각이었다.오늘 밤 윤서가 가장 주목을 받는 사람이었다. 몸의 라인을 따라 흘러내리는 드레스는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었다.유력인사의 부인들이 윤서를 둘러싸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그러나 윤서는 여름을 보더니 바로 모두를 뒤로하고 여름을 맞으러 왔다.“왔어? 어머니, 제 제일 친한 친구인 강여름이에요. 이쪽은 남편이고요. 이분이 우리 어머니셔. 인사해.”“안녕하십니까?”양유진이 얼른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진영그룹 대표인 양유진입니다.”“안녕하세요?”송태구의 아내인 임미정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시선이 여름에게로 향했다.“윤서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앞으로 우리 집으로 자주 놀러 와요.”“네, 감사합니다.”여름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임미정은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평소에 알랑거리고 비위 맞추는 인간을 하도 많이 보아서 여름의 눈 속에 담긴 순수한 감사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하지만 옆에 있는 남편이라는 사람은…”“둘이 할 얘기가 많을 테니 이야기 나누어요. 난 저쪽에 친구들이 있어서.”임미정은 웃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말이며 행동이 더할 나위 없이 품위 있고 시원스러웠다.“양어머니께서 정말 잘해주시는구나.”양유진은 의미심장하게 임미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예비 영부인과 관계를 잘 만들어 놓으면 앞으로 크게 도움이 되겠어.’“그래, 우리 어머
모두의 시선이 최하준과 여자에게로 향했다.그 여자는 하진 그룹의 딸인 하정혜였다. 하진 그룹의 장녀인 하정현이 추동현과 함께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머리가 잘 돌아가는 일부는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다가가서 물었다.“무슨 일입니까?”하정혜가 최하준을 가리키며 울먹였다.“최하준 씨가 혼자서 서 있길래 인사라도 해줄까 하고 다가가는데 말을 막 시작하자마자 날 희롱하잖아요. 그래서 자리를 뜨려고 했더니 내 손을 잡고 안 놓잖아요. 그래서 당겨지는 바람에 술이 드레스에 다 쏟아졌어요. 아니, 이래가지고 창피해서 어떡해?”그러더니 가슴을 가리며 훌쩍거렸다.“거참 뻔뻔하네.”한 젊은이가 하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했다.“망한 주제에 감히 하진 그룹의 금지옥엽을 건드려? 거울 좀 보고 추접스러운 모습 반성 좀 하시지!”“의원님 댁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녀석을 초대하신 거지? 당장 사과하지 못해?”“……”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하준은 조소를 띤 얼굴로 듣고 있었다.하준이 그냥 거기 서서 쉬고 있는데 하정혜가 와서 지분거렸다. 귀찮아서 피하려고 했더니 하정혜가 혼자서 술을 쏟고는 모함을 하려고 든 것이다.“희롱당했다는 주장을 하기 전에 본인이 과연 그럴만한 사람인지 거울이나 한 번 보시죠. 내 안목이 그렇게 낮지는 않습니다.”하준은 씩 웃었다.“사과를 하라고요? 좋습니다. CCTV 한 번 돌려 보죠. 제가 잘못한 게 확실하면 사과하겠습니다.”“무슨 CCTV야? 분명 당신이 잘못해놓고.”어느 재벌 2세가 나섰다.“이제 FTT가 망하게 생겼으니 하진 그룹의 힘을 빌려서 어떻게 해보고 싶었나 보네.”“그러게나 말이야. 정현 씨에게 사과하기 전에는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다들 하준을 둘러싸고 지적질을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다들 강 건너 불구경하는 태도였다.하준은 곧 완전히 고립되었다.“무슨 일이야?”추성호와 추동현이 다가왔다. 추성호의 얼굴에 ‘고거 참 쌤통이다’ 표정이 가득했다.
윤서가 피식거리며 흘끗 쳐다보았다.“왜? 차마 못 보겠어?”“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여름이 흘겨보았다.“힘 있는 놈들이 갑질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러지.”“어머,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의 사도였어? 최하준이 전에 날 괴롭힌 백윤택을 변호했던 인간이라는 걸 난 아직 안 잊었다고.”윤서가 일부러 한마디 했다.“……”“아, 농담이야.”윤서가 갑자기 푸흣하고 웃었다.“나도 있는 놈들이 갑질하는 거 딱 질색이야.”여름은 황당했다.‘사람 들었다 놨다 하기는.’“기다려 봐.”윤서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최하준이 어느 재벌 2세의 팔을 꺾는 중이었다.“아야야!”재벌 2세가 허리를 꺾으며 비명을 질렀다.“아아, 사람 살려. 최하준이 사람 잡는다.”“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끽소리도 못할 텐데 거 시끄럽네.”최하준이 그의 손목을 확 꺾으며 서슬 퍼런 기운을 발산했다. 이 연회장에서 가장 괄시 받는 입장이라고 해도 화가 났을 때의 매서운 기운은 주변 사람을 충분히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 있었다.아무도 최하준에게 손대려는 사람이 없자 추성호가 급히 사뭇 정의로운 척하며 외쳤다.“최하준,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남을 괴롭히면서 뭐 이렇게 당당해?”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송윤구가 달려왔다.추성호가 다급히 소리쳤다.“송 회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최하준이 하진그룹의 따님을 희롱하다가 저희가 뭐라고 한마디 했더니 저러고 사람을 괴롭힙니다.”“회장님, 저 좀 살려주세요. 손이 부러질 것 같아요.”손목이 꺾인 재벌 2세가 고통에 외쳤다.“빨리 최하준을 내쫓아 주십시오. 너무 안하무인이에요.”“맞아요. 조금 아까는 나도 밀쳤다니까.”“나도, 난 거의 넘어질 뻔했다고.”“……”다들 최하준이 무슨 천하의 몹쓸 짓이라도 했다는 듯 분노에 차서 손가락질을 했다.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최하준이잖아? 송 의원 댁에서 어쩌자고 저런 사람을 불렀대?”“원래 양가의 사이가 좋았던
이때 임윤서가 나타났다. 송윤구의 팔을 살짝 잡으며 생긋 웃었다.“이렇게 내보내면 최하준 씨가 인정하지 못할걸요.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먼저 CCTV를 한 번 돌려 봐요. 그러면 시시비비가 정확하게 가려지지 않겠어요?”임윤서가 그렇게 말을 하자 다들 표정이 싹 변했다.최하준은 이상하다는 듯 임윤서를 쳐다보았다. 내내 임윤서는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날 못 믿겠다는 건가요?”하정혜가 펄쩍 뛰며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그러게 말입니다. 분명히 최하준이 먼저 손댄 거라니까요. 아우, 손목이 아직도 아프네.”손목이 잡혔던 녀석이 지껄였다.“내가 언제 여러분을 못 믿겠다고 했나요?”임윤서가 사뭇 억울하다는 듯 비죽거렸다.“최하준 씨가 인정을 안 하잖아요? 최하준 씨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야 별 상관없겠지만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면 저를 위한 파티에서 최하준 씨가 쫓겨났으니 자칫 하면 제가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할 거예요.”그 말을 들은 송윤구의 안색이 무거워졌다.“그렇구나. 우리 집은 내내 늘 공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늘 우리 윤서가 딸로 들어온 것을 알리는 길일에 그런 불명예스러운 누명을 쓰면 안 되지.”하정혜가 다급히 말했다.“임윤서 씨, 뭔가 오해하신 것 같네요. 이건 굉장히 단순한 일이에요. 여기 증인이 잔뜩 있잖아요.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니까요. 여기 아무나 잡고 물어봐요. 굳이 CCTV를 뒤져볼 필요 없다니까요.”“맞아요. 최하준이 하정혜 씨에게 술을 뿌렸다니까.”다들 부화뇌동했다.임윤서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CCTV 돌려 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1분이면 되는걸요.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최하준 씨도 반박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면 하정혜 씨에게 사과를 할 거예요. 그러면 내쫓기만 해도 감사해야 할 지경일걸요.”“CCTV 열어보는 것에 찬성입니다.”하준이 냉랭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하정혜는 완전히 당황했다. 다급한 시선을 추동현에게
“해결하고 왔어!”윤서가 그쪽으로 간 뒤로 여름은 흘끗흘끗 훔쳐보고 있었다.여름은 막 무슨 말을 하려다가 최하준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멀어서 최하준의 눈빛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괜히 가서 무슨 소리 한 거 아니지?”“난 아무 말도 안 했어.”윤서가 고개를 저었다.“아마 네가 자기 걱정하는 건 모를 거야.”“누가 최하준을 걱정한다고.”여름은 정곡을 찔린 듯 펄쩍 뛰었다.“아이고, 그래 봐야 난 다 알아!”윤서가 여름의 어깨를 와락 감싸 안았다.“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인데 쪼그라든 모습 보는 게 다른 사람하고 똑같은 심정이겠냐? 어쨌든 복잡하겠지. 꼴 보기 싫은 마음도 있겠지만 안쓰럽기도 하고… 그 이루 말할 수 없는….”“시끄러워. 유진 씨한테나 가 봐야겠다. 네가 헛소리나 자꾸 하니까.”여름은 당황한 듯 윤서를 밀어내고 걸어갔다.양유진을 찾으러 간다고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내내 임윤서의 말이 떠돌았다.확실히 예전에는 하준을 미워해서 최하준이 모든 것을 잃게 해달라며 저주했었다.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어 다들 최하준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시원한 기분이 아니었다.그래도 자신이 최하준을 걱정한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무슨 최하준을 걱정한다고? 다 여울이 때문에 그런 거지.”한참을 돌아보다가 마지막으로 2층 다실로 양유진을 찾으러 갔다. 양유진은 풍채가 좋은 중년 남자 몇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사업하는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한눈에 정계 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양유진은 그들과 어우러져 웃고 떠들며 공손하게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모습에 여름은 흠칫하고 걸음을 멈추었다.뭔가 불편했다.양유진의 그런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양유진이 언제나 우아하긴 했다. 지금 그 모습은 분명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모습이었다.그런 양유진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사업하는 사람이 그렇게 누구 비위 맞추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여름의 몸 위를 덮었다. 코끝에 온통 하준의 냄새가 가득했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목소리를 낮추고 위협하듯 말했다.“최하준, 사람을 이런 데로 끌고 오다니, 무슨 수작이지?”“맹 의원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최하준은 여름의 말은 안 들린다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여름은 움찔했다. 하준이 말을 이었다.“맹 의원은 나중에 아마도 국무총리가 될 거야. 양유진이 오늘 연회에 참석한 주요 목적이 맹 의원에게 꼬리치는 일이었을 거야.”여름은 완전히 깜짝 놀랐다.양유진이 그저 일개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는데 국무총리라니….“그리고 당신은 모르는 모양인데 맹 의원은 송 의원과 한배를 탄 사람이야. 양유진이 맹 의원과 관계를 잘 맺어 두면 송태구라는 큰 배에 올라탈 수 있게 되는 거지.”최하준이 고개를 숙이더니 부드럽게 여름을 바라보았다.“그거 알아? 맹 의원이 왜 양유진을 상대해 주고 있는지?”여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뱉었다.“유진 씨가 원래부터 아는 분인지도 모르잖아? 그게 뭐 어쨌다고?”“아니. 양유진은 맹 의원과 전혀 친분이 없었어. 그런 거물과 직접 닿을 정도 깜냥이 아니었다고.”최하준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오늘 송 의원 집안사람들이 당신 친구 윤서 씨의 체면을 바짝 세워주려고 했단 말이야. 그래서 정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불렀지. 외부인들에게 자기네 가족이 얼마나 임윤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려주려고. 그리고 그게 앞으로 임윤서의 지위가 되는 거야.”“그래서…”여름은 대체 최하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양유진은 당신이랑 같이 들어왔는데 바로 임윤서에게 환영을 받았지. 게다가 양어머니인 임미정 님에게 당신들 둘을 소개했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 사람들인데. 바로 양유진과 예비 영부인이 아는 사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오늘 밤의 주인공인 임윤서와도 안다는 거.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이 다
“최하준, 대체 왜 이래, 진짜?”여름은 이제 힘이 다 빠졌다.“지금 당신이 얼마나 악명을 휘날리는지나 알아? 누가 당신하고 나하고 단둘이 따로 밀폐된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오해 산다고.”하준은 눈을 내리깔았다.밝은 달빛이 창으로 비쳐 들어왔다. 하준의 또렷한 콧날과 진한 속눈썹을 드러내며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분명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무 말 없이 입을 비죽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겨우 스물 남짓한 애로 보였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윤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한때는 죽도록 미워했지만 초라한 꼴이 되어 남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쨌건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느낌이 남달랐다.지금은 여름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던 것이다.지금은 하준이…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안 돼! 자꾸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내가 미쳤나 봐.’여름은 허리를 숙여 하준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했다.그러나 하준의 팔이 와락 껴안으며 도리어 여름은 하준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아까는 그나마 하준이 팔로 만든 공간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딱 붙어 있게 되었다.“최하준, 적당히 하시지!”여름은 완전히 화가 났다. 그러나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어서 아무리 화가 났어도 목소리는 낮았다.“서지도 않는다면서 툭하면 이렇게 나하고 얽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사람들이 쫓아내게 내버려 두는 건데!”하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그러니까… 정말 당신이 임윤서를 보내서 날 구해줬다는 말이군?”여름은 짜증이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워낙 선량한 시민인데, 하필이면 하정혜가 모함하려고 수작 부리는 것을 봐 버렸단 말이야. 당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런 저열한 수작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라고.”“그러니까, 계속 날 훔쳐보고 있었다는 말이잖아.”여름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