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준, 대체 왜 이래, 진짜?”여름은 이제 힘이 다 빠졌다.“지금 당신이 얼마나 악명을 휘날리는지나 알아? 누가 당신하고 나하고 단둘이 따로 밀폐된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오해 산다고.”하준은 눈을 내리깔았다.밝은 달빛이 창으로 비쳐 들어왔다. 하준의 또렷한 콧날과 진한 속눈썹을 드러내며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분명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무 말 없이 입을 비죽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겨우 스물 남짓한 애로 보였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윤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한때는 죽도록 미워했지만 초라한 꼴이 되어 남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쨌건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느낌이 남달랐다.지금은 여름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던 것이다.지금은 하준이…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안 돼! 자꾸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내가 미쳤나 봐.’여름은 허리를 숙여 하준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했다.그러나 하준의 팔이 와락 껴안으며 도리어 여름은 하준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아까는 그나마 하준이 팔로 만든 공간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딱 붙어 있게 되었다.“최하준, 적당히 하시지!”여름은 완전히 화가 났다. 그러나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어서 아무리 화가 났어도 목소리는 낮았다.“서지도 않는다면서 툭하면 이렇게 나하고 얽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사람들이 쫓아내게 내버려 두는 건데!”하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그러니까… 정말 당신이 임윤서를 보내서 날 구해줬다는 말이군?”여름은 짜증이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워낙 선량한 시민인데, 하필이면 하정혜가 모함하려고 수작 부리는 것을 봐 버렸단 말이야. 당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런 저열한 수작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라고.”“그러니까, 계속 날 훔쳐보고 있었다는 말이잖아.”여름은
“내가 언제….”여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하준의 머리가 갑자기 위에서 눌러 내려왔다. 곧 여름의 입술은 하준의 입술에 완전히 덮여버렸다.여전히 젤리처럼 촉촉하고 탄력 있는 입술이었다. 오늘은 무슨 립스틱을 발랐는지 향기도 너무나 좋았다.처음에는 그냥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었지만 입을 맞추고 나니 사탕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여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신을 차리고 힘껏 하준의 가슴을 밀어냈다.그러나 남자의 혀는 교활한 뱀처럼 얽혀서 떨어지지 않았다.점점 더 키스에 빠져들었다.여름은 화가 나서 하준을 꼬집었다.하준은 움찔했지만 지금 이 순간 여름은 완전히 매운맛이었다. 매워서 머리가 얼얼할 지경이지만 그런데도 맛보기를 멈출 수 없는 매운맛.이때 문 너머로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양 대표, 차를 아주 잘 우리는구먼.”“맹 의원님께 차를 우려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양유진의 목소리가 입구 쪽에서 울렸다.여름은 깜짝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지경이었다.이때 하준은 더욱 거칠게 입을 맞추어 왔다.하준이 손이 여름이 허리를 받치더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양유진에게 들키고 싶으면 소리쳐 봐.”‘소리쳐?뭐라고?지금 소리를 지를 수 있겠냐고?’양유진이 들어와 하준이 자신에게 입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하준도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저열하고 지나친 짓을 하는지 다 알았다.그러나 매혹적인 여름을 맛보고 나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끊을 수가 없었다.어둠 속에서 남자의 낮은 숨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울렸다. 여름은 긴장한 나머지 숨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그저 양유진이 저쪽으로 멀어져서 하준을 밀쳐낼 수 있기만 바랐다.그러나 서서히 하준의 숨소리에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문 뒤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한창 정신이 아찔한 가운데 갑자기 여름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여름은 깜짝 놀라서 얼른 하준을 밀어냈다.한참 취해서 정신을 놓고 있던 하준은 무방비한
여름은 멍하니 서 있었다.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왜 이래 정말… 죽도록 때리기라도 해야 정신을 차리려나?’여름은 이제 평온하게 살 생각은 그만둬야 하나 싶었다.“저기… 운명이라는 걸 좀 받아들이도록 해. 어떤 상처는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고.”여름은 하준의 그런 생각을 이성적으로 지워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었다.“왜? 치료가 안 되면 어쩔 거야? 당신은 아무래도 이제 운명이랑 싸우지 말아야 될 것 같아. 정말….”반짝반짝거리는 여름의 눈이 순진하게 빛나고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름이 웬 불량 청소년을 계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하준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 딱 몇 마디를 덧붙였다.“당신을 맛보고 나면 ‘운명 따위 다 엿이나 먹어라’ 하는 기분이 된다고.”여름은 화가 났다.“내 의견은? 물어본 적은 있어? 당신은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용서할 생각도 없고. 예전에 당신이 내게 했던 비인간적인 짓을 생각해 봐.”“그래, 너무 비인간적이었지. 그래서 내가 남은 평생을 두고 갚으려고 해.”하준이 자신이 얼마나 치사한지는 인정하지만 그 동안 여름을 놓아주고, 여름이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 해 보았지만 매일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불현듯 투지가 사라지기도 했다.“먹어. 이것만 먹으면 보내줄게.”하준은 다시 새 피임약을 꺼내 여름의 손에 놓아주었다.여름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양유진과 관계를 가지지도 않는데 굳이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그러나 양유진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하준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결국 여름은 약을 받아먹더니 웃었다.“먹으면 먹는 거지. 어쨌든 매일 하고 있으니 오늘 안 되면 다음에는 임신하게 될 테니까.”순식간에 하준의 얼굴에 살기가 돌았다.진작부터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피임약을 먹인 것이지만 직접 여름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
“화장실에 갔었어요. 맹 의원이랑 이야기 중이길래 방해하지 않으려고요.”여름은 되는 대로 변명했다.“그랬구나….”양유진은 마음이 훅 무거워졌다. 다른 여자 손님에게 혹시 화장실에 여름이 있는지도 물어봤었는데 여름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여름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방금 하준의 모습을 본 듯도 했다.주머니에 넣은 손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아, 오늘 맹 의원을 사귀었어요. 당신과 함께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여름은 사실 그런 정계 인사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그쪽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만만한 사람이 없다.그러나 양유진이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가 없이 같이 인사를 갔다.접대를 하느라 적잖이 술을 마셨다.양유진이 많이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름이 마신 양이 적지 않았다.중간에 양유진이 여름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 잠깐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미안해요. 너무 많이 마셨죠? 이제부터는 다 나에게 넘겨요. 여름 씨는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요.”“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더 못 마실 상태는 아니었지만 정치인들과 술 마시는 것이 피곤했다.여름은 이제 돈은 쓸 만큼 충분히 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며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양유진이 부드럽게 여름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양유진이 돌아서 가려고 할 때 여름이 갑자기 등에 대고 물었다.“오늘 정계 사람들하고 안면을 트려고 온 건가요?”일순 양유진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리더니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우리 의약품 쪽은 내부 정보를 얻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지금까지는 그런 정보가 좀 부족해서 수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에 튼 인맥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걱정돼서 온 게 주된 이유였어요.”“응, 알았어요.”여름이 양유진에게 웃어 보였다.“다음부터는 그런 이야기도 솔직하게 해주세요.
여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졌다.“나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목소리 들었으니 됐다. 깜짝 놀랐네.”윤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너 나가자마자 연회장 엘리베이터가 사고 났어.”여름은 그 말을 듣자 심장이 철렁했다.“무슨 사고?”“엘리베이터가 추락했어. 여기 직원이 남자 하나랑 여자 하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는데 엘리베이터가 20층에서 1층으로 떨어졌거든. 얼마나 소리가 컸는지 몰라.”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분명 우리 연회에 참석했던 손님일 거야. 난 왜 이렇게 운이 없니? 날 위한 파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지금 경찰이랑 구급대원들이 오는 중이야. 안에 탄 사람들은 죽었을 거야. 그래서 네가 무사한지 확인해 보려고 전화 걸었어. 너랑 유진 씨가 안에 있었다면 난 완전 미쳐버렸을 거야.”여름은 얼이 빠졌다.어쩐 일인지 아까 하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 때문에 연회장에 왔다고 했었는데.그러면 내가 가고 나면?남아 있었을 리가 없어.설마… 그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을까?’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여름아, 여기 너무 시끄럽다. 일단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 됐어.”그러더니 윤서가 전화를 끊었다.여름은 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 양유진이 여름의 손을 꼭 잡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 있나요?”“윤서가 그러는데 아까 우리가 있던 호텔에서 엘리베이터가 떨어졌대요. 우리가 그 안에 있었을까 봐 걱정돼서 전화했대요.”여름은 정신은 다른 데 팔린 채로 대답했다.여름이 말을 들은 양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안에 있었답니까?”“네. 오늘 연회에 참석했던 손님인 것 같대요.”여름이 간신히 대답했다.“아직 누군지는 모르나 봐요. 아직 경찰이 도착하지 않아서 아무도 문을 못 열고 있겠죠.”“어떻게 그런 일이….”양유진이 중얼거렸다.“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네요.”“윤서 말로는 남자 하나랑 여자 하나래요.여름이 말했다.양유진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그러나
‘그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신이 되었다고?’여름은 누군가 심장을 확 움켜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머릿속은 하얗게 백지가 되었다.휴대 전화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섬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너무나 미워서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그러나 최하준이 진짜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막상 왜 이렇게도 황망한지….윤서의 톡이 계속 날아왔다.-너, 괜찮아?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톡을 보냈다.-확실해?윤서에게서 답이 왔다.-확실해. 내가 직접 CCTV 확인했어. 최하준이랑 맹 의원 딸이랑 같이 내려갔어. 엘리베이터가 2층쯤 내려가다가 잠깐 멈춰있더니 갑자기 확 떨어지더라고.그 톡이 마치 너무나 낯선 문자로 보였다. 이때 야유진도 톡을 하나 받았다. 확인한 양유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맹 의원의 딸이 같이 있었다고?이런 젠장!’그러나 양유진은 직접 손을 댄 게 아니라 아이디어만 제공한 것이라 아무리 해도 자기에게까지 의혹이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맹 의원의 딸이 죽은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최하준이 죽기만 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흘끗 옆에서 완전이 멘붕이 된 여름을 흘끗 보았다. 어둠 속에서 양유진의 한쪽 입꼬리가 음험하게 올라갔다.‘최하준이 죽었다는 임윤서의 톡이겠지.늘 말로는 최하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최하준의 사망 소식을 받은 표정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군.’******차는 다시 호텔 입구로 돌아갔다.여름은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호텔 안으로 미친 듯이 뛰어 들어가는데 구급대원들도 막 도착했다.다들 1층에 몰려있었다. 윤서는 여름을 보더니 다가왔다.“어떻게 왔어?”“시신은… 수습했어?”여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제 꺼내려고.”임윤서가 한숨을 쉬더니 여름이 손을 잡았다. 여름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좋게 생각해.”“좋게 생각하고 있어. 그냥 전남편인걸. 뭐. 나한테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다
여름의 동공이 확 커졌다.하준의 얼굴은 다 타서 재가 된대도 알아볼 수 있었다.‘최하준이야?안 죽었어?’머리가 윙윙 울렸다. 하준이 이쪽을 바라보는데 시선을 피할 정신도 없을 정도였다.그렇게 딱 시선을 걸려서 사이에 그 수많은 사람을 두고도 두 사람은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하준은 여름의 눈이 부은 것이 보였다.하준의 섹시한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지금 막 생사를 헤치고 나온 사람인데 어쩐지 기분은 썩 좋아 보였다.“지연아….”이때 맹 의원의 부인이 외마디를 외쳤다. 마구 달려가 딸을 부둥켜안았다.“세상에, 살아 있었구나. 엄마가 너무 놀라서 죽는 줄 알았다. 난 네가 저 안에 있는 줄 알았어.”“어떻게 된 일이냐? CCTV에는 네가 엘리베이터를 탄 것으로 보이던데?”맹 의원이 눈시울을 붉히며 달려왔다. 하나뿐인 외동딸이 어떻게 된 줄 알고 방금 전에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죽을뻔하기는 했어요.”맹지연이 엄마, 아빠를 부둥켜안고 울먹였다.“다행히도 최하준 씨가 구해주었어요.”그러더니 부끄러운 듯 하준을 흘끗 바라보았다.“있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엘리베이터가 몇 층 내려가다가 갑자기 뚝 서버렸거든요. 외부랑 통화도 안 되고 스피커고 망가졌고, 버튼도 하나도 안 먹히는 거예요. 다행히도 하준 씨가 엘리베이터 지붕을 열고 나랑 같이 밖으로 나가서 벽에 매달렸어요. 그러고 나서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우리는 가까운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겨우 나왔어요.”이야기를 하면서 맹지연이 하준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정말 딱 몇 초 사이로 죽을 뻔했어요. 다행히도 하준 씨가 너무나 침착하더라고요. 혼자서 탈출했을 수도 있을 텐데, 나 때문에 탈출이 지체되는데도 끝까지 날 데리고 같이 나왔어요. 날 잡아주느라고 로프에 팔이 걸려서 팔도 다쳤어요.”그러면서 하준의 팔을 잡았지만 하준은 바로 손을 빼냈다.하준은 담담한 눈으로 맹 의원을 바라보았다.“저만 살아서 나오고 따님은 사고를 당했다면 저야말로 의
“의원님, 이번 일은 너무 이상합니다.”하준이 입을 열었다.“호텔에서는 보통 정기적으로 엘리베이터 안전 점검을 합니다. 게다가 여기는 7성급 호텔입니다. 사고가 벌어지더라도 다중 안전장치가 있어서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수십 층을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그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를 지시할 걸세.”송태구의 얼굴이 굳어졌다.“물론 저는 누군가가 저를 노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최하준이 문득 말했다.“저 때문에 맹 의원님 따님이 말려든 건지도 모릅니다.”다들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하준을 노리고 이번 일을 벌였다면 십중팔구 추신 쪽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연회장에서 추신과 하진이 하준을 모함하려고 했던 것을 다들 보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다들 하준을 우습게 보고 추신을 두려워하여 차마 그에 관해 아무 말도 못 했을 뿐이다.맹 의원과 송태구는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한참 만에야 송태구가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반드시 끝까지 조사하겠네. 지연이가 자네 팔을 다쳤다던데,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먼저….”“아뇨, 전 괜찮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최하준은 냉랭하게 말하더니 자리를 떴다.여름은 내내 사라져가는 하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때 임미정이 와서 말을 건넸다.“윤서야, 이제 일이 해결된 것 같으니 너랑 여름 씨는 가서 좀 쉬지 그러니?”“네, 그러네요. 누가 엘리베이터에 손을 쓸 걸까요?”임윤서의 입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임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최 회장 말이 맞아.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쉽게 사고가 나지 않거든. 이 일은 신경 쓰지 말렴. 그나마 최하준 회장을 노린 거라면 일이 간간한데, 누구 다른 사람을 노린 것이라면… 그때는 정말 큰 일이긴 하지.”감히 정재계 요원에게 손을 쓸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윤서는 그런 세상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아 얼른 여름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가는 길에 윤서가 결국 물었다.“맹지연이 최하준에게 빠져버린 건 아니겠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