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자 신은지는 택시를 타고 신당동으로 갔다. 원래는 전화로 박태준과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벨 소리가 들리지 않은지 아니면 고의적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박태준은 몇 년 동안 거의 돌아오지 않아서 지금 이곳에 돌아올지 확실하지 않았다. 결혼 3년 동안 그녀는 지금까지 박태준의 생활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를 찾으려면 이곳에 와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차에서 내린 후 신은지는 칠흑 속에 있는 별장을 보고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그녀는 지문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을 뻗어 스위치를 만졌다. 밝은 불빛은 거실의 구석구석을 밝게 비추었고 소파에서 고개를 들어 쉬는 박태준도 포함되었다.남자는 눈썹을 찌푸리고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매우 좋지 않은 말투로 얘기를 했다. "불 꺼!" 신은지는 그가 이 자리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전예은은 오늘 그렇게 큰 억울함을 당했기에 그녀가 있는 곳에 남아 위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밤새도록 기다릴 준비까지 했다.근데 집에 있는데 왜 불을 안 켜고 있어? 어이없다!그녀는 거실의 불을 끄고 현관에 있는 조명만 남겨 놓고 박태준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박태준 사건을 취소해.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상관없는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고." 그녀는 일을 빨리 해결하고 진유라를 빼내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은 박태준도 마음속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박태준은 손을 내렸다. 위통으로 말을 할 기력도 없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성질이 더 거칠어졌다. "지금 태도는 사정이야, 아니면 도발이야?"신은지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사정도 도발도 아니고 그와 진지하게 협상하고 싶은 것이다.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가 또 말했다. "지난번에는 상관없는 남자와 커플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이번에는 상관없는 사람을 위해 주동적으로 나를 찾아왔어. 신은지, 너를 성모님 이리고 해야 할지 위선적이라고 말해야 할지.
박태준은 신은지의 냉담한 얼굴을 보고 화가 나서 미간이 떨렸다. 대담하게도 감히 그를 위협하였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셀프 계산대에서 신은지는 허리를 굽혀 바구니 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주워 계산대에 놓았다. 박태준은 귀공자의 모습으로 옆에 서서 조금도 도와주려는 기색이 없었다. 신은지는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 QR코드 스캔하는 것은 별로 힘든 일도 아니였기에 결산할 때 박태준을 한번 훑어보았다. 마침 그의 눈길이 선반 위의 콘돔에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두 글자를 뱉었다. "변태" 박태준은 그런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스쳐 지나갈 뿐이다."변태?"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웃는 듯 마는 듯 얘기했다. "이 물건에 관심이 있어서 변태라고 하면 우리 둘 중 누가 변태야? 나는 한 번 봤을 뿐인데 어떤 사람은 여러 갑 사서 놓고 있더라."한 마디에 돈 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의 고개를 돌리기에 충분했다. 신은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을 넘어 더 많은 것은 화난 것이다. 그것은 신은지가 차마 돌이킬 수 없는 흑역사였다. 시시각각 그녀가 그때 침대까지 갔는데도 자중하라고 할 때 얼마나 싸구려였는지 일깨워 주었다. 이 일로 신은지는 돌아갈 때 뒷자리에 앉았고 차가 멈추자 물건들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기분만 나쁠 뿐 요리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맛은 보장할 수 없었다.박태준은 테이블에 그릇과 한 쌍의 젓가락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눈썹을 세우고 물었다. "같이 안 먹어?"신은지는 괴이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봐도 배가 부른데 뭘 먹어." 예상했던 화가 나지 않은 박태준은 앉으며 명령했다. "수저 하나 더 챙겨오라."신은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배 안 고파. 빨리 먹고 얘기를 해자.""네가 먹지 않으면 독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너…"독을 넣는 일은 너무 번거로워서 지금 당장 맨손으로 머리를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 너무 많이 했어. 재경 그룹 요즘 큰 프로젝트가 있어. 상대방 회사의 책임자는 가정 화목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이때 이혼하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합작을 따내야 해. 너무 번거롭거든."일부러 자극하려는 말이긴 하지만 현실적인 대답에 신은지는 마음이 아팠다. "우리 둘이는 비밀결혼이야. 관계를 아는 사람 거의 없어." "모르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너무나 무의미 해져."말하는 사이에 박태준은 이미 그녀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각도에서는 남자의 턱 선만 볼 수 있었다. 그날 밤의 호텔 침대에 있을 때와 같이 비인간적이고 거만하고 저항할 수 없었다.방 안에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익숙한 물건이다. 이곳은 타인에게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호화로운 별장이지만 신은지에게는 거의 3년의 청춘을 소모한 감옥이었다. 모든 곳에는 그녀가 홀로 있었던 모습이 있었다.그녀는 생각할수록 억울했고 결국 모두 불쾌과 분노로 변했다. 신은지는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이 방을 쳐다보기 싫어서 무의식중에 얼굴을 남자의 품에 묻었다.갑작스러운 친근함은 그동안 박태준의 마음속에 맴돌던 조급함을 많이 해소시켰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분명히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 같다.덥고 습한 호흡은 옷을 통해 그의 피부를 닿았다. 박태준의 몸은 긴장되고 목소리에는 약간 허스키함이 배어 있었다. "장난치지 마. 내일 바로 이사해…"그러나 그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박태준은 한바탕 소리를 냈다. 목구멍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신은지 너 개띠야? 사람을 물어!"신은지는 이를 벌리고 그의 목에 물린 자국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박태준을 쳐다보면서 눈은 억울함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쳐 나왔다. 이번에 남자는 그녀를 막지 않고 땅에 내려놓았다. 다만 그는 얼굴이 차갑고 못마땅했다. 그녀를 보는 눈은 마치 좋고 나쁨을 모르
신은지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책상 위에 아직도 대부분 복원되지 않은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일 없으면 전화 끊어." 박태준은 '잘못 쳤다' 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더니 여자의 짜증 나는 말투에 화가 나서 마음을 바꿔서 말했다. "엔조이 클럽 데리러 와."신은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정신이야? 데리러 가라고?"그녀가 그를 데려가지 않았던것이 아니다. 처음 그의 생활 보조를 맡았을 때 한 번은 그도 술에 취했다. 마침 그때 그녀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다.진영웅이 전화를 대신 받았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박 대표님이 술에 취해서 데리러 오라고 얘기했다.그때 박태준은 그녀에게 매우 싫증이 났다. 술에 취한 눈을 뜨더니 온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보고 바로 화를 냈다. 진영웅도 같이 호되게 훈계를 받았고 그해 연말 보너스까지 잃었다.그 후 박태준이 아무리 취해도 진영웅은 그녀에게 맡겨주지 않았다. 박태준은 이미 이 일을 잊어버린 듯 그녀가 내키지 않는 것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우리 아직 이혼하지 않았어.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은 부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야."신은지는 오히려 화가 나서 웃었다. "의무? 그럼 당신은 남편의 의무를 다한 적이 있어?"둘 사이에 소리 없는 침묵이 흘렀다…그녀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나지막하고 자석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스피커로 얘기하고 있어. 옆에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부인 이렇게 굶주리지 마."한마디로 신은지는 순간 이를 갈았다. "차라리 취해서 죽어.""데리러 오면 650억의 이자는 계산하지 않을 게."신은지는 잠깐의 몸부림 끝에 결국 응했다.어쩔 수 없이 그녀도 기를 세우고 싶지만 그가 준 것은 너무 많았다. 650억이면 1년에 이자만 해도 천만이 넘는다. 돈이 많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이런 유혹적인 조건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박태준은 끊어진 전화를 보며 자
박형주의 날카로운 눈매와 턱 선을 따라 술이 주룩주룩 내려갔다. 언제나 고상하고 우아하던 부잣집 도련님이 언제 이런 낭패 한 모습이 있었던가?그 예쁜 입술은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더니 온몸에 화를 내지 않아도 스스로 위엄이 있었다.신은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턱을 쳐들고 경멸하듯이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 고연우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하였다. 박형주에게 술을 뿌릴 수 있는 사람은 신은지가 유일무이하다."나는 은지가 빨리 뛰기를 기도해…"박태준이 그를 흘겨보더니 고연우는 온몸이 상쾌하여 조금도 화를 당하지 않았다.그는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네가 벙어리가 되길 기도해.""…"박태준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신은지가 떠난 곳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지만 걸음은 그리 서두르지 않아 사람들에게 한가로이 정원을 걷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지나는 사람마다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당할까 봐 두려워했다.신은지는 엘레베터 입구에 서서 엘레베터를 기다렸다. 그녀가 정말 재수가 없는지 심리 작용인지 엘레베터는 꾸물거리며 올라오지 않았다. 그녀는 옆의 안전통로로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뒤에서 멀리서 가깝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그 사람이 어떻게 그녀 앞에 왔는지 아직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온 사람이 어깨에 짊어졌다. 실제로 메고 상반신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위가 남자의 어깨에 받쳐져 있어서 그녀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토할 뻔했다.‘띵’ 하고 마침 엘레베터가 왔다. 신은지는 금속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소리를 듣고 몸을 비틀면서 불편함을 참았다. "박태준 내려줘!"이 자세는 정말 괴로워서 뇌가 충혈되고 어지럽고 위도 한바탕 뒤집혔다.박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메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신은지는 1초만 더 지나면 뇌에 가해지는 압력으로 바로 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박태준의 등을 힘껏 두드렸다. "내려줘. 토하고 싶어!""참는 게
신은지는 고개를 번쩍 들자 동작이 크지 않지만 박태준의 손은 아직도 그녀의 허리를 차고 있다. 그녀의 경직성도 느낄 수 있었다.나유성은 차 밖 멀지 않게 서 있었다. 절반 열어있는 차창을 넘어 눈빛은 그녀의 몸에 닿았다.그는 캐주얼한 셔츠에 양복바지를 입고 어두운 그림자에서도 존재감이 넘치는 사람이다.신은지는 머리가 하얘져 무의식적으로 예전처럼 그를 불렀다. "유성아…"남자는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주자 그녀는 아파서 소리를 낼뻔했다. 하지만 곁에 다른 사람도 있어 겨우 참아냈다.나유성이 차 안에 있는 박태준을 봤는지 모르지만 주차장 어두운 광선에서 이 정도 거리와 각도로는 못 본 것 같다나유성은 미소를 띠면서 그녀의 방향으로 다가가는데,"조금 전엔 눈치 못 챘지만 뒷모습이 참 익숙하다고 했는데 정말 정말 너구나. "그가 점점 다가오니 신은지의 몸은 더욱 뻣뻣했다. 그녀는 박태준의 가슴에 댄 손을 주먹을 쥐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너 오지 마!"왜냐면,박태준이 그녀한테 키스하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입술은 팔목에 닿아 힘을 주니 하얀 피부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나유성은 멍해서 이해가 안 되지만 여전히 신사답게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았다.거리가 짧을수록 그는 신은지의 붉은 눈빛이 선명해지는데 억울함이 가득 찬 걸 볼 수 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저번 레스토랑에서 그녀가 농담으로 3억을 빌렸던 장면이 떠올랐다. 혹시 이것 때문에 골치 아파한 건가?나유성은 입술을 오므리면서 부드럽게 말한다."저번에 돈 빌린 것 때문에 골치 아픈 거야? 3억은 좀 많긴 많지. 하지만 너 급하다면 나도 빌릴 수…"신은지는 놀랬다. 그가 말을 끝내기 도전에 그녀는 무엇을 얘기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심 따뜻함이 느껴졌다.그의 따뜻함을 느낀 지 얼마 안 되어 어디선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성아, 넌 언제부터 돈 퍼주기 취미가 생겼냐??"남자의 비꼬는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유성은 확실치 않다는 듯이 한 글자씩
"야, 저리 비켜. "신은지는 떨고 있는 목소리로 기력이 없이 말한다."자꾸 귀찮게 하면 우리 결혼증 인터넷에 공개한다? 전 세계에 알릴 거야, 너 전예은이 남의 가정을 파토 낸 장본인이라고."박태준은 그녀의 협박에 차가운 웃음을 짓는다."먼저 이혼 얘기 꺼낸 건 너 아니야?""그래도 그 여자가 먼저 끼어든 거잖아. "남자는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한다.그럼 이혼증은 가질 생각 마. "협박을 하려 했는데 반대로 억압당했다. 신은지는 이 남자가 너무 싫다. 천성에 원수인지 이 남자랑 같이 있고 난 뒤부터 나쁜 일만 생긴다.박태준은 여자의 섬세한 손가락 관절을 눌러주며 한참 만지다가 결론을 말해준다."안 부러졌네. ""내가 부러지길 바래? ""그건 아니고, 다만 나유성이 준 3억을 받기만 해봐. 부러질 정도는 부족하지, 내가 직접 끊어준다."신은지, "미친!"그녀는 남자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그녀가 차에 내려 성큼 떠나기 전까지 박태준은 말리지 않았다.이날 밤 안 좋게 헤어진 후 신은지는 단 한 번도 박태준을 연락한 적 없다.현실에서 그 사람을 못 만났지만 오히려 뉴스에서 그 남자의 기사를 보았다.Z 성에 간걸 그녀는 알고 있다. 보름이나 넘었다.10월 초, 전예은은 그림 복구 작업을 끝냈다. 그녀는 상대방에게 알려주려고 전화를 한다."예은아, 그림 복구 작업이 끝났는데, 어떻게 시간을 정해서 만날까?""나 지금 Z 성에 있는데, 언제 돌아갈지 몰라. 돌아가면 답 줄게. "전화에서의 전예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티가 안 나지만 멸시가 들어있다. 고의로 신은지를 이렇게 상대하는것은 아니라 전예은은 현재 신분이 예전과 달라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기 때문에 자연스레 오만한 성격이 나온 것이다.신은지, "그래.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사색에 잠겼다. 박태준도 Z 성에 있는 데 전예은도 Z 성에 있는걸 보면 이건 우연일까?다른 도시에서 만나 알콩달콩 데이트? 그럴 필요 없이 빨리 이혼해서 떳떳하게 혼인을 치를 것이지!
생일 파티 그날이 마침 주말이다. 신은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전예은의 주문을 끝내고 난 뒤 이틀 쉬다가 주문을 또 받았다.어쩔 수 없다. 죽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평생 그 3억을 갚을 기회가 없다! 박씨네 집안은 늘 소박하게 생일 파티를 치르는 편이어서 강씨 집안과 박씨 집안 친척들만 초대한다. 매년 신은지는 항상 아침 일찍이 박씨 댁으로 가서 앞뒤가 바쁘도록 손님을 접대한다.하지만 올해는... 늘 하던 것처럼 일찍이 가고 싶지 않아진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박태준이랑 이혼할 건데 지금부터 점차 예전의 생활 패턴을 떨치고 변화를 불러와야 한다. 시어머님께 이해할 시간도 드려야 하니까.평생 박태준이랑 부부 연기 할 수 없지 않은가? 어차피 시어머님은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신은지는 시간을 보면서 부랴부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번에 받은 주문은 명나라의 그릇인여데 손상 정도는 그다지 엄중하지 않다.일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을 가리지 않은 편이라 전화벨이 울릴 때야 비로소 오후 2 시라는 걸 깨달았다. 오랫동안 허기가 져서 그런지 위산이 오를 것 같았다.박태준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신은지는 뻣뻣한 목을 움직이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반응하기 도전에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려와."두 사람이 연락을 안 한 지가 한 달이나 넘었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신은지를 데리러 온 것이다.마침 시간도 그럭저럭 다 된 것 같아서 신은지는,"잠시 기다려 줘, 나 화장 좀 하고. "가족 모임이라 드레스 입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추해 보이면 안 돼서 다행히 신당동에서 나올 때 몇 벌 고급 드래스는 챙겨 나왔다.전화 건너편에서 불쾌한 듯 말을 잇는다. "안 해도 돼. 그냥 내려와, 5 분만 준다! "박태준은 기분이 썩 안 좋아 보인다.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드러나 있다.하긴, 평소에 늘 변덕이 심하고 사람을 부려 먹었던 박 사장이 언제 남을 기다려 봤던가?신은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더니 대충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고 쌩얼인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