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안은 조용하지 않았고, 의사 두 명이 유선우와 이야기하고 있었다.“출혈 과다에요!”“수혈을 800ml 했으니 이젠 큰 문제가 없는데, 사모님이 언제 깨어날지는...솔직히 사모님께서 깨어나려는 의지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늦어도 내일 아침까지요! 만약 아침에도 안 깨어나면 사모님께 전신 검사를 건의드립니다.”......의사는 잠시 머무르다가 떠났다.유선우는 그들을 배웅해서 문을 닫은 후, 돌아보니 조은서는 이미 깨어있었다.새하얀 베갯머리에 조그마한 얼굴을 붙이고, 검은 머리가 베개 위에 흐트러져있었다.그리고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그녀한테서는 허약한 기색 외에도 잔잔한 병약미가 감돌았다.유선우는 몇 초 동안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그제야 정신이 들어 걸어오며 침대에 앉아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5시간동안 혼수상태였어. 배 안고파? 내가 사람을 불러 먹을 것 좀 가져오라 할게.”조은서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며, 그를 보고 싶지도 않고 그와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유선우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님은 이미 나와서 지금 한림병원에 있어. 조은서, 네가 아무 말 안 하는 건 괜찮은데, 너도 아버님과 어머님이 네가 오늘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하고 싶진 않겠지?”조은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풀려났어요?”유선우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어머니가 안 풀려나면 난 아마 사별을 당했을 거야.”조은서는 생각하기 싫어서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유선우는 그녀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내선전화로 사람한테 식사를 가져오라고 하고, 이어서 그녀한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일어나서 좀 마셔!”하지만 조은서는 너무 허약한 나머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유선우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추겨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얇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 조은서는 그한테서 나는 남성적인 체취 외에 옅고 이상야릇한 냄새를 맡았는데, 그건 그녀
유선우는 죽을 가져와서 작은 원탁에 올려놓고, 그녀를 안고 와서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조은서가 그때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거랑 달라요!”유선우는 약간 멍해졌다가, 한참 후에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조은서는 그를 바라보며 더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선우 씨, 그때랑 달라요! 예전엔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참았어요. 당신을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으니까.”“그럼 지금은?”부드러운 불빛 아래에서 유선우는 그녀의 윤기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그럼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 거야? 은서야, 난 네가 언제부터 날 사랑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그딴 건 난 신경 안 써!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랑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유선우는 사업하는 사람이다.사랑 같은 건 믿지 않는다!장사판에서는 감정을 논하는 사람이 없다. 남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고, 아내와 아이, 심지어 애인까지, 모두 권세의 부속품일 뿐이다.그는 말을 마치고 다가가 그녀를 안아 소파로 향했다.조은서는 몸을 떨었다. 하얀 거즈를 두른 팔도 무의식적으로 움츠렸다… 이런 무의식적인 행동이, 그녀가 그를 꺼리고 두려워한다는 걸 알려주었다.유선우는 좀 화가 났다.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미라를 폭행하는 흥미는 없어!”말을 마치고 그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조은서가 너무 여지없이 벤 바람에 상처가 매우 깊었다. 앞으로 잘 챙기지 않으면 흉터가 생겨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이런 생각 하니 그의 표정은 좀 누그러들었고, 조은서를 내려놓는 동작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밥 먹어!”“밥을 먹어야 도망칠 힘이 생기지. 여 대표 사모님!”……그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마지막에 그 호칭을 덧붙였으나, 조은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조용히 밥만 먹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런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마치 옆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그녀의 얌전한 모습을 보니, 호텔에서 단호하고 견결했던 그녀의
그 모습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유선우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 있던 타올을 넘겨받고 화가 난 듯한 소리로 말했다.“죽을래? 의사가 적어도 이틀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어.”조은서는 등을 돌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좀 씻고 싶어요!”유선우는 잠깐 생각했다가 그녀가 왜 목욕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호텔에 있을 때 비록 채 끝내진 못했지만, 약 10분 동안은 그녀를 괴롭히며 다뤘었다. 그녀가 아무리 거부한다 해도 신체에 반응이 생겼을 것이다.유선우는 자신이 아마 너무 오랫동안 섹스를 하지 않아, 불붙듯 격렬하게 달아올라 그녀와 끝까지 치달을 뻔하였다.그걸 생각하니 그는 또다시 마음이 들떴다. 그의 몸도 그러했다.그는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그녀의 얇은 어깨에 턱을 얹고, 목소리는 마치 뜨거운 모래를 한 모금 머금은 것처럼 쉬어서 말했다.“몸에 내 냄새가 나서 그래?”조은서는 몸을 떨었다.유선우는 그녀의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여 등불 아래에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조은서는 매우 설렜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저 슬플 뿐이었다. 유선우는 그녀에게 성적인 상대로만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오랫동안 그한테 시달리니 그녀는 정말 지쳐버렸다.때로는 지쳐서 반항할 힘도 없었다.그녀는 그가 자신을 세면대 위에 앉히고, 조명을 가장 밝게 조절하고, 자신이 몸을 마음대로 감상하는 걸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알몸이 남김없이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유선우는 그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그는 목욕 타올로 그녀의 온몸을 닦아주었는데, 가끔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민감한 부위에 닿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조은서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아름다운 꽃송이처럼 떨고 있었다.유선우는 수건을 내던지고 환자복을 입히는 대신 하얀 목욕 가운을 그녀한테 입혔다.그리고 그녀를 안고 침대로 돌아가며, 참지 못하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방금 어
유선우는 밤을 새우고 아침 7시가 다 되어서야 회사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고,간단히 정리하고 퇴근할 채비를 했다.진 비서는 이른 아침에도 자체발광하는 유선우의 유우빛 피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같이 밤을 새우고 나니 몇 번이고 화장을 고쳐도 누렇게 뜬 자기의 얼굴과는 달리 유선우는 여전히 멋졌다.마침 회의실에 고위 임원 몇 명이 남아 있었다. 진 비서는 유선우와 친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서, 아주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대표님, 아침 간단히 드시고 퇴근하시겠어요? 대표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소보로빵을 주문했습니다.”소보로빵...유선우는 디저트 같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지난번에 맛있게 먹었던 소보로빵이었는데, 그 소보로빵은 조은서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진 비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매번 멋대로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소보로빵을 주문했다. 유선우는 진 비서가 준비한 소보로빵에 입도 대지 않았고 항상 기사에게 처리를 맡겼다.그런데 진 비서가 또다시 소보로빵을 언급하자, 유선우는 갑자기 조은서가 꽤 오랫동안 디저트를 만들어 주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으면, 조은서가 매번 새로운 디저트를 만들어 서재로 가져와 맛보라고 했었다. 조은서는 작은 얼굴을 내밀며 항상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었다.조은서는 디저트를 맛보고 나서 유선우가 맛있다고 칭찬하고 맛 표현을 해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선우는 항상 차가운 얼굴로 무심하게 한 입 베어 물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의 없는 유선우의 반응에 조은서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다시 서재를 나갔다....유선우가 정신이 가출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진 비서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대표님?”유선우는 진 비서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기대에 찬 진 비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이제 다들 퇴근하세요!”이런 거절은 진 비서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선우는 진 비서의 감정을 헤아릴
유선우는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 조은서가 입맛을 잃고 종일 우울감에 빠져 아무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는 이유가 모두 자기가 이혼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유선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알았어요.”간호사는 감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요 며칠 동안, 병원 의료진들 사이에서 계속 가십거리가 떠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유선우 대표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알게 된 조은서가 실망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 시도를 했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유선우 대표가 조은서를 너무 사랑해서 숨 막힐 정도로 집착해 우울증에 걸리게 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아무도 조은서가 스스로 손목을 베었다는 말은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유선우는 물고 있던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야 병실로 돌아갔다.사흘간의 병실 생활 끝에 손목의 흉터를 제외하고 조은서는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는데, 이젠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유선우가 들어올 때, 조은서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얇은 어깨에 드리워져 있었고 연한 파란색 환자복은 넉넉하다 못해 헐렁해 보였다. 많이 회복됐지만 여전히 기운 없는 환자였다.유선우는 가져왔을 때 그대로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아침밥을 힐끗 보고 나서 가볍게 문을 닫았다.미세한 움직임은 조은서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눈을 들자, 유선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유선우는 바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한참 동안 문가에 기대어 조은서를 바라보았다.“간호사가 아침 안 먹었다고 찾아왔어! 왜 안 먹었어? 입맛에 안 맞는 거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시켜서 보내줄게!”조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배 안 고파요!”유선우의 검은 눈동자는 한없이 그윽했다. 그 때문에 유선우의 눈을 보고 그의 감정을 읽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조은서는 가슴이 조여왔다. 바로 그때, 유선우가 조은서를 향해 천천히 걸어와 침대 곁으로 갔고 손을 뻗어 조은서의 손에 있는 책을
유선우는 차를 몰고 별장으로 돌아갔다.도우미들은 유선우가 돌아온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도우미들은 조은서가 입원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선우가 단기 출장을 간 줄로만 알고 있었다.도우미가 차 문을 열어주며 인사했다.“대표님, 식사하셨습니까? 대표님 스케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식사 준비를 시작하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유선우는 약간 피곤한 기색을 띠었다.“담백한 음식으로 몇 가지만 준비하세요.”도우미가 급히 주방으로 가서 전달했다.유선우는 차에서 내려 별장 로비로 들어갔다. 의외로 도우미들이 신경을 많이 썼는지, 며칠 동안 집을 비워도 여전히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하룻밤을 바쁘게 보낸 유선우는 샤워하려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안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 커다란 웨딩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사진 속 조은서는 달콤하게 웃고 있다. 그 당시에는 시간이 촉박한 데다 조은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에, 유선우는 그녀와 함께 사진 찍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조은서가 1억 6천만 원을 주고 합성한 것이었다.유선우는 조은서에게 부질없는 짓 한다고 비웃었지만, 조은서는 오히려 감쪽같고 예쁘다고 했었다. 사진을 받고 신나 하던 모습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그랬던 조은서가 지금은 울면서 이혼해달라고 애원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증오하고 서로를 괴롭게 할 뿐이라고 하면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더 이상 유선우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유선우는 조은서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인정했고, 지금까지도 조은서를 용서하지 않았다.그리고 이젠 더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유선우의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먼저 그만하자고 얘기하다니...침대 끝에 서서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드레스룸에 들렀다가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드레스룸에서 물건을 찾을 때도 유선우는 찾으려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 몰라 한참을 허둥댔다... 사실 유선우도 조은서가 없는 생활이 익숙하지
그가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자 조은서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그러나 유선우는 손을 내밀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그녀는 몇 번 더 애원했지만 유선우는 끝내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타고 떠났다.그 후 그는 H시에 약 일주일간 머물렀고, 바로 그 일주일 동안 백아현은 첫 번째 다리 수술을 마쳤고, 백아현과 그의 관계를 언론에서 파헤쳐 처음으로 그에 대한 불륜설이 터져 떠돌기 시작했다.출장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친정 얘기를 더는 꺼내지 않았고, 여느 때와 같이 그의 짐을 정리하고 목욕물을 준비하였다...유선우는 씻고 나서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로 향해 그녀와 두 번이나 관계를 가졌지만 그건 그들이 결혼한 후로 가장 침묵이 흘렀던 잠자리였다. 잠자리하는 내내 그는 아무 소리 내지 않았고, 그녀도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쾌락과 전율을 신음으로 터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는 죄책감을 줄이고 싶었다.한바탕 뒹굴고 나서 그는 침대 머리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조은서가 작은 소리로 그한테 돈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잠시 그녀를 보다가 이천만짜리 수표를 건넸다.일 년이 지났는데도 유선우는 그 일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았다.수표를 받으면서 심하게 떨고 있던 그녀의 손... 아마 그 시각부터였을까,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 그때부터 그녀는 유선우의 어린 아내가 아닌 유 대표 사모님으로 변신하였다.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와 그의 회상을 멈췄다.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인님, 식사가 다 준비되었는데 내려가서 식사하시겠어요?”“좀 이따 내려갈게요!”유선우는 일기장의 맨 마지막에 쓴 글귀를 지그시 쳐다보며 하인한테 대답했다.그건 조은서가 제일 마지막으로 남긴 여자애의 속마음이었다.몇 글자 안 되는 구절이었지만, 유선우의 뇌리에서 끊임없이 맴돌며 크게 울려
거실에서 온 오후 앉아있은 유선우는 해 질 녘이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진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장 변호사한테 별장에 들르라고 해. 이혼 합의서 한 장 작성해 오라 하고.”전화기 너머에서 진 비서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정신 차려 물었다.“대표님, 이혼 말씀이세요?”유선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고, 저쪽의 진 비서는 눈을 살짝 깜빡이며 상사의 뜻을 마침내 알아차렸다.순간, 그녀는 기쁜 마음이 들면서 생각했다.대표님이 이혼하면 자신한테도 기회가 돌아오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자신이 백아현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며.......30분 후, 진 비서가 장 변호사를 데리고 별장으로 왔다.서재 안의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저조했다.하인도 대충 낌새를 차려 커피를 가져다준 후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도 장 변호사를 알아보고, 속으로 주인님이 부인과 이혼하려는 것이라 추측했다.향긋한 커피 향이 서재에 퍼졌지만, 그 누구도 마시지 않았다.유선우는 통창 앞에 서 있었다. 석양이 그의 그림자를 쓸쓸할 정도로 길게 호선으로 끌어당겼다.그는 가볍게 그의 뜻을 밝히고 장 변호사에게 합의서를 작성하게 했다.그의 합의서 내용은 결코 조은서한테 후한 편은 아니었다.3년 동안 부부 생활을 하였지만, 그녀에게 주는 위자료가 30 몇 평의 아파트 한 채와 현금 4억이 겨우였다. B 씨에서 손꼽는 부잣집으로 이혼하는 위자료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소문나면 사람들이 실컷 비웃고도 남을 일이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에게 이만큼밖에 주고 싶지 않았다!조은서가 원하는 대로 자유를 얻었으니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가혹한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들이 결혼할 때 합의했던 부분도 있고, 이 정도면 그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되었다.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스스로 자신이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그 이유가 조은서가 베개에 엎드려 우는 모습을 본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눈시울
조은희는 진석을 빤히 바라보았다.진석은 낮게 웃으며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블랙 카드를 한 장 꺼내 조은희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내 카드야. 한도가 없으니까 마음껏 써.”조은희는 놀란 듯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진석 씨, 정말 통 크시네요! 진 선생님, 감사합니다.”진석이 장난스럽게 그녀를 가볍게 툭 치자 조은희는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웃었다.“스폰서 오빠, 감사합니다.”진석은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강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예전에는 학문적이고 온화했던 그의 이미지가 지금은 사업가다운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입맞춤 후 그녀의 귀에 낮고 거친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조은희는 그 말을 듣고 묘하게 떨리는 감정을 느꼈다...진석은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살짝 물었다.“넌 은근히 독특한 취향이네.”조은희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운전하라고 했다. 진석은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차를 출발시켰다...둘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석의 어머니는 고향 요리로 한 상을 가득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진석이 조은희가 좋아한다고 말해준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진석의 아버지는 붉고 싱싱한 과일을 깨끗이 씻어 가지런히 접시에 놓고 있었다.진석의 차가 멈추자 그는 조은희를 데리고 내렸다. 진석의 부모는 반갑게 나와서 두 사람을 맞았다.아버지는 조은희가 가져온 선물을 받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요.”어머니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감기 조심하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조은희의 피부는 밝고 투명하게 하얀 편이라 마치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진석의 부모 눈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속으로 진석과 조은희가 아이를 낳는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정말 예쁘고 훌륭한 아이가 태어날 거로 생각했다.
진석은 조은희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눈치챘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조은희의 얼굴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너와는 결혼 첫날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지! 게다가 방금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은 아마 어려울 거야. 너에게 더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해.”조은희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진석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참 묘했다!예전에는 그저 감정에서 비롯된 관계였고 항상 예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로 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조은희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나도 처음이야! 결혼 첫날 밤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배워둘게.”조은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책을 보거나 동영상을 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진석의 품에 몸을 맡겼다.햇살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쯤, 진석은 조용히 일어나 집을 떠났다. 조은희의 집이었기에 그 잠깐의 온기는 이미 지나쳐버린 상태였다...그들은 예전에는 갑자기 헤어졌지만, 지금 다시 함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 조은희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확실히 진석과 다시 함께하게 되었고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있었다.그들은 연애를 건너뛰고 바로 결혼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조은희는 조금 망설였다...조진범은 레드 와인을 손에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적어도 아이도 일찍 낳고 그 후엔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테니.’진안영은 말했다.“아이를 낳으면 둘만의 시간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요?”조우현이 답했다.“다시 만난 연인들은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한다고요. 그게 아니면 후회할 거예요. 많은 시간을 허비할 테니까요. 사실 처음에 부소연과 결혼해야 했어요.”오빠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은희는 그 말
진석은 예의 있게 조은혁을 호칭했다.“아버님.”조은혁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볍게 기침하며 조은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먼저 올라가라. 네 엄마가 네가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마 할 얘기가 있을 거다.”조은희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고 진석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밀면서 말했다.“먼저 올라가.”조은희는 그제야 움직였고 조은혁 옆에 다가갔다. 집에서 막내딸인 조은희는 가장 애교가 많았고 조은혁을 안고 인사한 후 아쉬운 듯 올라갔다.조은혁은 작은 딸을 안자 화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진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앉아서 얘기해.”진석은 즉시 자리에 앉아 조은혁에게 차를 따랐고 조은혁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눈치가 빠르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버님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합니다.”조은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여전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은희와 만나고 싶다면 지금은 조건은 없어. 하지만 요구 사항은 몇 가지 있네.”진석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은혁은 진석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했지만, 하는 말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첫째, 결혼을 하게 되면 은희는 너의 집에 가지 않고 결혼식과 생활은 모두 B시에 있어야 해. 둘째, 조씨 가문은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결혼 때 충분한 축의금을 줘서 편하게 생활하게 할거야. 하지만 네가 결혼 후 벌어들인 모든 돈은 은희와 공동 재산으로 해야 하며 은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어. 또한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 은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이 조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그렇지만 진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조은혁은 더 이상 그를 어렵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석을 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사실 그도 같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진석이 처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