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우는 생각에서만 그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했다.그는 협소한 주방으로 들어가 뒤에서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는 턱을 가녀린 조은서의 쇄골에 올려놓고 살짝 고개를 비틀어 그녀의 귀 뒤에 부드럽게 키스했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무방비 상태인 조은서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손에 들고 있는 아직 깨끗이 다 씻지 못한 그릇을 보며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선우 씨, 올라와서 라면만 먹겠다면서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유선우는 팔을 꽉 조이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조은서, 나랑 같이 돌아가자!”조은서의 몸은 살짝 굳어졌다.유선우가 명령조가 아닌 말투로 그녀에게 같이 돌아가자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이번엔 부탁하는 듯한 말투였는데 이 작은 변화는 그녀의 마음을 시큰하게 했다.조은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유선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키스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같이 가자… 응?”그때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유선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조은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전화나 받아요!”유선우가 휴대폰을 확인해 보자 백아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전화를 끊고 조은서에게 설명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설거지를 하면서 말했다.“이제 갈 시간이 됐어요. 나한테 2천만 보내는 거 잊지 말고요!”그녀는 무관심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마음속에 오직 2천만 원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조금 전의 설레는 감정은 깨끗이 사라진 듯했다.유선우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있다가 그는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은서야, 내가 어떻게 해도 나랑 같이 돌아가지 않을 거지?”조은서의 등에는 거절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유선우 같이 오만한 사람이 어떻게 여자에게 부탁하겠는가? 그는 당장 휴대폰을 꺼내어 그녀의 계좌로 2천만 원을 송금했다. 그리고는 주방에서 나와 소파에 위에 있는 외투를 들고 떠났다…조은서
백아현의 부모는 예전에 조씨 가문에서 일했던 사람이다.이때 종업원이 커다란 한 접시의 생선 요리를 올렸지만, 심정희는 어디 입맛이 있겠는가?그녀는 여전히 분통이 터졌다.“백씨 집안에는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조은서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녀는 심정희의 손등을 지그시 누르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그녀는 심정희의 마음이 이해됐다.심정희의 친정은 조건이 아주 좋았고 그녀는 26살이 되던 해에 40살에 아들하나 딸하나 딸린 조승철의 후처가 되겠다고 난리 치다가 결국 친정과 일절 연락을 끊어버렸다.정희 아줌마는 자존심이 아주 강해 절대 남에게 지려고 하지 않는다.그녀는 잘살거라 맹세했고 친정에 그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과거의 고용인의 발밑에 있는데 그녀가 어떻게 이 분을 억누를 수 있을까?조은서는 한참 동안이나 위로하며 4억 원에 대해서도 말했다.“이 돈만 있으면 많이 편해질 거예요, 아줌마. 우리 앞으로 점점 좋아질 거예요.”심정희는 그녀가 달래자 웃음을 터트렸다.하지만 웃다가 웃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은서야, 아줌마는 나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네가 안타까워서 그래. 운전기사에 주방일이나 하던 집안 사람들의 딸이 어떻게... 거기다 생긴 것도 별로인데.”그녀는 멈칫하다가 계속 말했다.“유선우는 눈이 삔 게 틀림없어!”조은서는 그녀를 달래며 몇 마디 응했다.심정희는 분풀이를 하고 나서야 마음이 한결 나아졌고 남편이 걱정되어 음식을 조금 입에 대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조은서는 커다란 접시의 생선요리를 마주하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유 사모님!”갑자기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조은서가 눈을 치켜뜨자 백아현이 보였다.환자복 차림으로 휠체어에 앉아있는 백아현은 비리비리한 모습과는 반대로 동그랗고 부드러워 보이는 두 눈에는 교활함이 묻어났다.백아현도 어쩔 수 없이 조은서를 찾아왔다.요 며칠 유선우가 그녀의 전화도 받지 않고 병문안도 오지 않아
조은서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고 오빠를 안에서 구출해 내면 온 가족이 다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유선우도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그날밤 그녀는 로열 호텔의 공연을 보다가 임지혜의 전화를 받았고 린샤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은서 씨, 큰일 났어요! 빨리 병원으로 와요!”조은서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아 황급히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임지혜는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심정희 아줌마와 백아현이 싸우며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경찰까지 출동했어요. 은서 씨 마음 단단히 먹어요... 심정희 아줌마 잡혀갈 수도 있어요.”조은서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트렸다.차준호가 차를 몰고 조은서를 병원까지 데려다줬다. 다행히 너무 멀지 않아 반 시간이 안 돼서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하지만 조은서는 결국 한발 늦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심정희는 이미 잡혀가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백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백아현의 어머니는 딸의 데인 팔꿈치를 붙들고 딸의 꽃 같은 외모를 망쳐버렸다고 울고불고 소리 지르며 심정희를 감옥에 처넣겠다고 했다.백아현의 아버지는 묵묵히 옆에 있었다.뜻밖에도 유선우도 진비서를 데리고 달려왔다.그가 도착하자마자 백아현은 유약한 척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백아현의 어머니도 순식간에 처량한 척 눈물을 흘리며 말해다.“원래 다리도 편치 않은데 이제 팔꿈치까지 망가졌으니 우리 아현이의 나머지 인생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한 간호사가 주의를 줬다.“환자분 빨리 가서 상처를 처치해요. 아니면 흉터가 남을 거예요.”백아현의 휠체어가 고장 나서 힘껏 밀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유선우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것에 내리려 했다. 그가 두 눈을 치켜뜨자 마침 조은서와 눈이 마주쳤다.조은서는 살며시 눈을 깜빡였다.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아내와 정부사이에서 정부를 선택했음을 알았다
백아현은 한창 득의양양해하다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잡쳤다.“아빠!”유선우도 담담하게 대답했다.“네!”그리고 손을 놨는데 백정수가 잘 받지 못한 탓인지 백아현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 금방 수술을 마친 다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며 다시 또 부러졌고, 데인 팔은 바닥에 떨어지며 긁혀 살점이 크게 떨어져 나가 보기도 끔찍할 만큼 피투성이가 되었다.백아현은 너무 아파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백정수는 허둥지둥 딸을 안았다.유선우는 눈을 내리깔고 냉담한 말투로 그들에게 말했다.“회사가 일이 있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는 지체 없이 문을 나섰고, 진유라도 얼른 뒤를 따랐다.백아현은 뾰로통해하며 유선우를 불러세우려고 애썼다.“선우 씨! 선우 씨…”백정수는 딸을 안고 한숨을 내리 쉬며 말했다.“아현아, 우리 좀 너무한 거 아니니? 네가 조씨 가문 사모님을 모함한 것도 모자라, 네 엄마가 아가씨를 때리기까지…만약 나중에 윤선우 씨가 너와 결혼 안 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냐?”백아현은 악이 올라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내가 선우씨 마음을 못 잡나 어디 두고봐.”……임지혜는 경찰서에서 돌아오자마자 조은서가 맞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조은서가 말한 딜이고 뭐고 없이 그냥 김춘희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는 때리면서 쌍욕을 퍼부었다.“미친 여편네가 감히 은서를 때려? 네까짓 게 무슨 물건짝인데! 네 딸년은 그저 다리 벌려 유선우 환심이나 사는 싸구려 잡년이야! 네 전 집안은 은서 발닦개로 쓰려해도 더러워서 안 써!”김춘희도 그저 얌전한 사람한테만 센 척이지, 임지혜 같은 성질이 사나운 사람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만큼 상대가 되지 않았다.얼마 되지 않아, 김춘희의 얼굴은 임지혜한테 너무 얻어맞은 나머지 시뻘겋게 퉁퉁 부었고, 임지혜를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쳤다.임지혜는 또 김춘희의 갈비뼈를 걷어차며 말했다.“고소해! 내가 여기 서서 기다릴 테니까. 고소 안 하기
그는 모질게 그녀를 다뤘다.임지혜는 그한테 시달려 울고, 소리 지르면서도 여전히 불같은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차준호의 등과 팔을 할퀴어 군데군데 상처를 내고 아무 거리낌 없이 큰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그래!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 난 다른 남자 찾을 거야, 나 같은 여자가 같이 잠잘 남자 하나 못 찾겠어? 너 차준호 따위가 뭔데! 네가 다른 남자보다 두 쪽 더 달리기라도 했어?”그녀가 소리칠수록 차준호는 그녀를 더 괴롭혔다.“그만 못해? 그냥 확 죽여버리고 싶다 너!”그녀는 온밤 내내 소리를 질렀고 별장 내 도우미들은 감히 자세히 듣지도 못했다.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어서 말이다.매번 저 아가씨를 데리고 별장에 올 때마다 인명 사고 나는 것처럼 소란스럽다.……차준호는 욕구를 다 풀고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나오니 임지혜가 아직도 있었다.그녀는 차준호의 셔츠를 걸쳐 입고 단추를 한두 개쯤 꿰맞추고는 길고 하얀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침대에 누워 요염한 자태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차준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울면서 음탕한 척하기는.”그는 그녀의 손가락사이의 담배를 뺏어 한 모금 빨았다.“여자가 무슨 담배를 피워! 끊어!”임지혜가 웬일로 대꾸하지 않았다.차준호는 침대 머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그녀는 그의 아랫배를 얌전하게 베고 누워서는 섬세한 손가락으로 그의 복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여리여리하게 말했다.“차 회장님, 기분 풀렸나 모르겠네?”차준호는 머리 숙여 그녀를 보고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욕구는 풀렸는데 기분은 안 풀렸어!”임지혜는 그에게 키스하려고 다가갔다.그녀의 얕은 수작을 차준호는 빤히 알고 있다. 결국 조은서 때문에…아니면 진작에 가버렸지, 이렇게 고분고분 누워있을 리가.차준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담배를 끄며 말했다.“조은서랑 유선우 사이가 어떻든, 그녀는 아직 유선우 와이프야. 백씨네가 조은서를 때린 건 유선우 뺨 때린 거랑 마찬가지야! 유선우가 그 자리에
조은서는 심정희의 일을 일단 숨겼다.조승철은 심정희가 며칠 일이 있어 외출해 간호사가 잠시 돌보기로 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는 조은서가 멍을 때리는 걸 보고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거라. 여긴 간호사가 있잖아.”조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는 지금 여기를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고요한 밤이 찾아왔다.환자인 조승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해 곯아떨어지고, 조은서는 혼자 간이의자에 앉아 넋을 잃고 있었다.그녀의 뺨에는 아직도 백아현의 어머니가 때려서 남긴 희미한 붉은 자국이 있었다.병실 밖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둔 거기에 유선우가 조용히 서 있다.그는 조은서 얼굴의 상처와 그녀가 넋을 잃고 있는 모습을 눈도 깜짝 않고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생기라고는 없는 멍한 눈동자도 보았다…유선우는 그날 조은서가 서미연 부인의 집에서 나올 때, 피곤하지만 의기양양하게 말을 하던 그 표정을 떠올렸다.[사실은 과거에 나도 똑같았어요! 그저 선우씨가 날 신경 안 썼을 뿐이야.][선우 씨, 그 4억에는 나랑 당신이 자는 것까지 포함된 건 아니에요. 선우 씨가 공사는 구분하는 줄로 알고 있는데요.]……그때의 조은서는 살아있는 생기발랄한 사람이었다.물론 그도 잘 알고 있다. 자기만 손을 놓으면 그녀는 또 옛날의 생기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와이프가 아니고, 하경진의 와이프거나, 또는 이지훈의 와이프가 될 테지…남과 자신, 둘 중에 누구한테 자비를 베풀 건가 하는 선택에서, 유선우는 자신을 택했다!그는 조용히 떠났다. 조은서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 믿으니까!왜냐면 그녀는 항상, 매우 똑똑한 사람이니.……병원 옥상의 바람은 매우 크게 불었고, 하늘 끝에서는 한 줄기 빛이 보였다.조은서는 묵묵히 그 한 줄기 빛을 바라보며 날이 곧 밝을 걸 알았지만, 그 빛이 그녀의 마음속까지 비추진 못했다.오빠는 예전에, 인생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녀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오직
조은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난 어머니에 관한 일을 좀 얘기하고 싶어요.”유선우의 말투는 더 담담해졌다.“그래? 그럼 내 사무실로 와!”말을 마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더 상의할 여지도 없이.늦가을의 거리에서 조은서는 온몸이 오한이 났다.그래, 이게 바로 유선우지!지난날, 그가 가끔 보여줬던 부드러움은 오직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일단 그것이 소용없단 걸 알게 되면, 그는 바로 본색을 드러낸다.차갑고, 인정사정없다!조은서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주저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두 번이나 갈아타 YS본사 빌딩에 도착했다.YS그룹의 직원들은 모두 그녀를 알고 있고, 그녀가 대표님 부인이라는 것도 알 뿐만 아니라, 이 대표님 부인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똑똑히 알고 있다!진 비서가 그녀를 데리러 내려왔다.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자, 진 비서는 대표이사 사무실 문을 열고 그녀를 안으로 모셨다. 그녀는 그저 사무적인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은 지금 외출하셨습니다. 사모님, 잠시만요, 제가 커피를 타오겠습니다.”조은서는 사무실에 혼자 서 있었다.그녀는 그 바이올린이 마치 보물처럼 유선우의 의자 뒤에 있는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넋을 잃어, 뒤에서 진 비서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진 비서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사모님, 백아현이 왜 사모님을 그렇게 미워하는지 아세요? 잘 모르시겠지만, 4년 전에 대표님이 한때는 백아현과 결혼할 생각을 했었어요. 대표님은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누구랑 결혼하든 상관없었는데, 마침 그때 백아현을 만난 겁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죠.”진 비서는 커피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몸을 일으키며 얼굴에 웃음이 깊어졌다.“그런데 큰 사모님이…그러니까 대표님 어머님이 백아현을 싫어했어요. 출신도 낮아 체면이 깎인다고요. 그러기 때문에 사모님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백아현은 절대 대표님과 결혼을 못했을 겁니다!”그녀는
조은서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선우는 그녀의 몸을 돌려 통창을 마주하게 하고, 뒤에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그리고 통창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보라고 강요했고, 말로 그녀한테 수모를 줬다.“내가 짐작하는 게 맞다면 넌 이 몸뚱어리로 네 어머니의 자유와 바꿀 셈이지? 그런데 어떡하나…이 몸은 난 이제 질리게 잤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면, 이런 곳에서 남자랑 섹스할지언정 돌아가서 보기 좋게 유선우 와이프 노릇을 하는 게 싫은 건가?”그의 두세 마디로 그녀의 자존심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조은서는 전혀 유선우의 상대가 아니다.게다가, 그녀의 몸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는 유선우는 한쪽으로 독한 말로 그녀를 모욕하며, 또 한쪽으로는 그녀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참아, 내 바지를 더럽히지 말고!”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땀에 젖힌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모양새가 난처해진 그녀는 끝내 견딜 수 없어 울음을 터뜨렸다.“선우 씨, 이러지 마!”“뭘 이러지 마? 나랑 자려고 온 거 아니야?”유선우는 분명 화가 나 있었다.그는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대고 또렷하게 말을 뱉었다.“조은서, 넌 좀 억울하고 분했을 거야. 왜 내가 이혼을 안 해주는지, 널 놓아주지 않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을거야. 맞아?”조은서는 그 말에 잠시 넋이 나갔다.유선우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잡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내가 그 답을 알려줄게!”그는 정장 외투를 벗어 그녀를 감쌌다.조은서는 몸부림을 쳤다.“선우 씨, 뭐 하는 거예요?”그러나 그는 이내 그녀를 가로 끌어안아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향하며,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자러 왔다며? 어떤 곳이 있는데, 너랑 꼭 거기서 다시 한번 자고 싶었어.”조은서는 그곳이 어딘지 짐작했다.거기는 그녀와 유선우가 처음으로 관계가 발생한 곳이다.힐튼 호텔 6201호실.거긴 절대 가기 싫어!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고, 그래도 풀려 못나자, 소리 내 울기까지 했다.만약 인생
진석은 조은희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눈치챘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조은희의 얼굴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너와는 결혼 첫날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지! 게다가 방금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은 아마 어려울 거야. 너에게 더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해.”조은희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진석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참 묘했다!예전에는 그저 감정에서 비롯된 관계였고 항상 예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로 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조은희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나도 처음이야! 결혼 첫날 밤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배워둘게.”조은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책을 보거나 동영상을 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진석의 품에 몸을 맡겼다.햇살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쯤, 진석은 조용히 일어나 집을 떠났다. 조은희의 집이었기에 그 잠깐의 온기는 이미 지나쳐버린 상태였다...그들은 예전에는 갑자기 헤어졌지만, 지금 다시 함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 조은희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확실히 진석과 다시 함께하게 되었고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있었다.그들은 연애를 건너뛰고 바로 결혼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조은희는 조금 망설였다...조진범은 레드 와인을 손에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적어도 아이도 일찍 낳고 그 후엔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테니.’진안영은 말했다.“아이를 낳으면 둘만의 시간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요?”조우현이 답했다.“다시 만난 연인들은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한다고요. 그게 아니면 후회할 거예요. 많은 시간을 허비할 테니까요. 사실 처음에 부소연과 결혼해야 했어요.”오빠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은희는 그 말
진석은 예의 있게 조은혁을 호칭했다.“아버님.”조은혁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볍게 기침하며 조은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먼저 올라가라. 네 엄마가 네가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마 할 얘기가 있을 거다.”조은희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고 진석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밀면서 말했다.“먼저 올라가.”조은희는 그제야 움직였고 조은혁 옆에 다가갔다. 집에서 막내딸인 조은희는 가장 애교가 많았고 조은혁을 안고 인사한 후 아쉬운 듯 올라갔다.조은혁은 작은 딸을 안자 화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진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앉아서 얘기해.”진석은 즉시 자리에 앉아 조은혁에게 차를 따랐고 조은혁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눈치가 빠르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버님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합니다.”조은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여전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은희와 만나고 싶다면 지금은 조건은 없어. 하지만 요구 사항은 몇 가지 있네.”진석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은혁은 진석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했지만, 하는 말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첫째, 결혼을 하게 되면 은희는 너의 집에 가지 않고 결혼식과 생활은 모두 B시에 있어야 해. 둘째, 조씨 가문은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결혼 때 충분한 축의금을 줘서 편하게 생활하게 할거야. 하지만 네가 결혼 후 벌어들인 모든 돈은 은희와 공동 재산으로 해야 하며 은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어. 또한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 은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이 조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그렇지만 진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조은혁은 더 이상 그를 어렵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석을 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사실 그도 같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진석이 처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몇 달 후 가을 10월쯤.방유설이 주연한 《청홍》이 대히트를 치며 영화 글러브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시상식 당일 날 조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모여 방유설을 응원하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다음에 받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계속 전했다. 방유설은 매우 감동했다. 진안영이 갓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마친 후 이렇게 와서 자신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방유설은 진안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난 이미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을 받았어요.” 진안영은 원래 차분한 성격인데 방유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우현이랑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 활발해져! 우현이가 사람을 잘 챙긴다고 네 아주버님이 자주 칭찬하셔.” 방유설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진안영과 얘기했다. 조은희는 사탕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평소에 연기하면서 다이어트해도 이럴 때는 사탕 하나 드세요. 나중에 여우주연상 받고 저혈당으로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방유설은 사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우유사탕이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았다. 조은희는 살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언니예요! 다른 여배우들보다 언니가 훨씬 이뻐요.” 조우현은 여동생을 흘깃 보며 말했다. “이건 외모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외모만 보고 결정되면 긴장감이 없잖아.” 조은희는 달콤한 사랑을 떠먹은 기분에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때 최우수 남자주연상이 발표되었고 다른 영화의 남자 주연이 받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박도원이었다. 그는 국내에 없어서 촬영 감독이 대신 상을 받으며 발언 중 여러 번 방유설을 언급했다. 갑자기 설원 커플 팬들이 들썩이며 이 장면을 모든 플랫폼에 퍼뜨렸다. 설원 커플 팬클럽에서 활동 중인 팬들은 102만 명에 달한다. 그렇게 인기 있는 커플이었다. 조우현은 아내의 직업을 존중하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저 코를 머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