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동이 트기 시작할 때 유선우는 잠에서 깼다. 정확히는 무언가에 의해 깰 수밖에 없었다. 품에 안고 있던 무언가가 열을 내며 그의 가운을 다 적셔버렸으니까.유선우가 눈을 떠보니 거기에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조은서의 얼굴이 있었고 손을 내밀어 만져보니 이마를 포함한 얼굴 전체가 불덩이처럼 타고 있었다.유선우는 얼른 몸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가 고용인을 불렀다."지금 당장 의사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그러자 고용인이 다급하게 물었다."주인님, 혹시 어디 편찮으신가요?"막 계단을 다시 올라가던 유선우가 그 질문에 잠깐 멈춰서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지금 내 아내 몸이 불덩이니까 빨리 의사한테 오라고 하세요."...30분 후, 임 의사가 저택에 도착했고 그가 침실에 도착했을 때는 고용인들에 의해 어젯밤 흔적이 깔끔하게 사라진 뒤였다.임 의사는 조은서의 상태를 체크한 후 진단을 내렸다."열이 심하니 일단 링거를 맞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사모님께서 기력이 많이 쇠해지셨습니다. 이럴 때는 영양보충을 잘해주는 게 중요합니다."유선우는 조은서가 요즘 과로 때문에 끼니를 놓치는 일이 많아 이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예전에 그녀라면 이런 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을 텐데...의사는 조은서에게 링거를 꽂아준 후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당부했다."오늘 하루는 누워서 푹 쉬는 게 좋을 겁니다."유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용인에게 의사를 현관까지 데려다줄 것을 요구했다.그렇게 고용인과 의사가 방에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곧 침실 앞에 멈춰 섰다. 유선우는 당연히 고용인이라고 생각해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죽 좀 끓여서 가져다주세요."하지만 방에 들어온 사람은 진 비서였고, 그녀의 양손에는 저번 주에 유선우가 드라이를 맡겨뒀던 정장들이 가득 들려있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조은서를 보며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왜 다시 돌아온 거지...?’고용인이 방을 깨끗하게 치우긴 했지만, 눈썰미가 좋은 진 비서
진 비서는 그를 향한 사랑의 눈길을 숨길 수 없었다. 대학교 시절,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녀보다 잘난 여자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유선우가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하자 진 비서는 금방 프로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왔으니 오늘 같은 일은 다시 사모님께 넘기는 거로 하겠습니다. 대표님, 사모님의 생활비와 주얼리들은 계속 저한테 먼저 신청하라고 할까요?"그 말에 유선우는 마음속 깊이 짜증이 솟구쳤다. 조은서가 이혼 얘기를 꺼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거였기 때문에.유선우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진 비서는 활짝 웃으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앞으로도 잘 관리할게요."유선우는 그런 진 비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감정에 둔한 남자가 아니었고 여자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건 그의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진 비서는 명백히 선을 넘고 있었다.유선우는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통보했다."다음 달부터 진 비서는 캐나다 지사로 발령 날 거야. 직위와 연봉은 그대로 유지하고."그 말에 잠깐 굳어버린 진 비서는 빠르게 정신을 차린 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저 남자친구 있어요."유선우가 아무 말이 없자 진 비서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다음 달이면 대표님께서 제 결혼식 청첩장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그러자 유선우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좋은 소식 기대하지."진 비서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유선우는 그녀가 품고 있는 감정을 정확히 알아보고 그녀에게 함부로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진 비서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고는 끝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혹시 조은서 씨 때문입니까?"그러자 유선우가 발을 멈추고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진 비서가 선을 넘었으니까."유선우에게
조은서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전복죽 한 그릇을 금세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따뜻한 죽이 위를 감싸는 느낌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유선우는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달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자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이 더욱더 잘생겨졌고 깔끔하게 세팅된 머리로 인해 금욕적인 분위기도 풍겼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밖으로 손을 뻗어 연기가 바람에 날리도록 가만히 놔두었다. 그러자 침실 안은 어느새 니코틴 향으로 가득 찼고 그 향기는 유선우와 절묘하게 어울렸다.조은서가 식사를 끝마친 것을 확인한 유선우는 담배를 끈 후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할머니한테서 연락이 왔어. 얼굴 보고 싶으니 집에 좀 들르라고."유선우의 할머니인 최숙자는 조은서를 마음에 들어 했고 많이 예뻐해 주었다. 그녀는 이혼 얘기로 최숙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조은서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할머니께는 선우 씨가 대신 얘기해 줘요.""뭘 얘기하는데?"유선우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네가 나와 이혼 해야 하니까 못 갈 것 같다고 얘기해? 뭐가 그렇게 급한데, 이혼을 서둘려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보지?"조은서는 그와 얘기하기 싫다는 듯 방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녀린 팔은 금세 유선우의 손에 잡혔고 그는 약간의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나한테 봉사 한 번에 400만 원, 어때?"그러고는 조윤서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가져와 그녀의 지문으로 잠금을 해제하고는 자신을 차단 명단에서 꺼낸 후 바로 400만 원을 그녀에게 입금했다."차준호 호텔에서 밤새도록 연주해도 고작 40만 원밖에 안 되잖아."그러자 조은서가 실소를 터트렸다."백아현을 위해 쏘아 올린 불꽃은 못 해도 2억은 되지 않나요?""그게 무슨 뜻이야?"유선우는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다시 한번 물었다."조은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그러자 조은서도 화가 나는 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그 말에 조은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손을 들어 유선우를 밀어내며 필사적으로 그의 입술을 피했다. 그러고는 잠긴 듯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하려고 했다."선우 씨, 우리 더 이상 이러면 안 돼요."하지만 잔뜩 흥분한 유선우에게 그 말이 먹힐 리가 만무했고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당당하게 말했다."왜 안 되는데? 우리 아직 법적으로는 부부야."유선우는 어젯밤 그녀를 안지 못한 것을 지금 다 터트리려는 사람처럼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짓 하나하나에 녹아내리는 그녀의 모습을 뇌리에 각인시키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조은서는 힘을 쓰지 못하면서도 싫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 유선우 역시 자신의 행동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때 유선우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눈을 마주치며 음담패설을 했다."입은 싫다고 하면서 몸은 솔직하네. 네가 지금 얼마나 음란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정도야."조은서는 그 말에 화를 내며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선우 씨도 똑같거든요!"유선우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재력도 있고 얼굴도 잘생긴 유선우와 어떻게든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는 여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어떤 여자도 그의 침대까지는 오지 못했고 그들은 유선우가 잠자리에서 얼마나 독재자 같은 스타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반강제로 시작되는 정사는 언제나 유쾌할 리가 없었고 조은서는 지금 최대한 잠자리로 이어지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다.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주인님, 할머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사모님이 여기 있는지 물으십니다...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침실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고 조은서는 이때다 싶어 유선우를 밀어버린 후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문 뒤에 서 있는 고용인을 향해 말했다."제가 곧 찾아뵙는다고 전해주세요."고용인은 알겠다고 한 후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조은서는 옷을 정리하며 유선우에게 물었다."내가 입고 온 옷은 어디 있어요?""찢어 던져버렸어."유선우는
유선우의 목소리에 잡념에서 깨어난 조은서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차량은 교차로에 진입했고 빨간불이라 멈춰있었다.그녀는 유선우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을 홱 돌리고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유선우는 조은서의 옆얼굴을 보며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잠시 그녀와의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조은서는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선우와 결혼했고 막 결혼했을 당시 그녀는 그를 아주 많이 사랑했었다. 매일 밤 유선우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위층에서 달려 내려와 그의 가방을 들어주며 오늘 저녁은 뭔지 옆에서 조잘거렸고 항상 그를 위해 목욕물을 직접 받아주었다.그러고 저녁이 되면 유선우가 일부러 그녀를 아프게 해도 꾹 참고 싫다는 말도 못 한 채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해달라고 애원만 했었다.신혼 때의 조은서는 항상 에너지가 넘쳤고 밝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녀는 점점 웃지 않게 되었고 그에게 애교도 부리지 않게 되었다.드디어 유선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듯 보였다. 또한, 그녀가 아무리 노력한들 그의 마음은 열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조은서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이 다정함은 부부의 의무 같은 거였고 거기에 사랑은 없었다. 그녀가 취중 진담으로 뱉어낸 말처럼 사실 그녀는 꽤 오래전부터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유선우는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다 마침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고 그는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조은서는 창밖 풍경을 구경하다 길거리 옆에 있는 레스토랑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곳은 얼마 전 그녀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곳이었고 고작 며칠 사이에 폐업해버렸다. 의문을 품고 있던 조은서는 이내 거기에서 허민우와 마주친 사실과 그 뒤로 집 복도에서 유선우와의 일을 떠올리고 천천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그제야 왜 유선우가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는지 알 것 같았다."선우 씨,
위층으로 올라가 봤지만 심정희는 집에 없었다.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심정희는 유선우의 별장으로 전화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조은서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별장의 고용인이 심정희를 도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모처럼 출근할 필요가 없게 된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또 유선우와 신혼 때의 생활을 꿈꿨다. 꿈속에서 유선우는 그녀에게 여전히 차가웠고 그의 말투에는 늘 짜증이 섞여 있었다. 갑자기 울린 핸드폰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확인해 보니 유선우한테서 온 짧은 문자였다.「내일 할머니 뵈러 가는 거 잊지 마. 퇴근하고 로열 호텔로 데리러 갈게.」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유선오가 백아현을 위해 준비한 불꽃놀이가 생각난 조은서는 그가 보내온 돈을 덥석 받아 유기 동물 단체에 기부해 버렸다. 새벽 1시, 유선우의 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에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마침 조은서가 돈을 받은 알람이 화면에 떴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답장을 보낼 줄 알았다.예전의 그녀는 툭하면 그에게 문자를 보내길 좋아했다. 특별히 중요한 일이 없어도 문자를 자주 하곤 했었다. 그녀의 쓸데없는 문자에 그는 단 한 번도 답장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씨 가문이 망한 뒤로 조은서는 두 번 다시 그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없었고 더 이상 침대에서 강아지처럼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도 없었다. 다만 그녀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그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유선우는 혼자 차에 앉아 조은서를 생각하며 그들의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조은서는 병원에 다녀왔다. 과일을 잔뜩 사 들고 나타난 그녀를 보고 심정희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뻤지만 겉으로는 왜 쓸데없이 돈을 썼냐고 그녀를 꾸짖는 척했다. “며칠 전에 사 온 것도 아직 다 먹지 못했는데 왜 또 사 왔어?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지우 때문에 이지훈은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그저께 밤에는 그녀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근데 지금 그가 자신을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조은서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좋은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지훈 씨, 더 이상 날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이지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말을 내뱉었다.“그랬었죠.”말을 마친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그녀는 이지훈과의 일은 한 단락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녀는 로열 호텔 56층에서 그를 또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차준호 등 몇몇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어린 모델과 연예인들도 몇몇 있었다.조은서가 무대에 오르자 이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한 그의 작은 동작을 옆에 있던 차준호가 눈치를 챘다. 차준호는 무대 위에 있는 조은서를 쳐다보고는 무심하게 카드를 냈다. “이지훈, 너 평소에는 여기 잘 안 왔잖아. 오늘은 웬일이야? 네가 여기까지 다 오고?”“왜? 반갑지 않은 거야?”담담하게 말하는 이지훈을 보고 차준호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리가. 네가 맨날 와서 우리 매상이나 올려주면 좋겠어.”그 말에 이지훈은 아무 말도 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 그때 유선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남색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있는 그는 늘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사로잡았다. 차준호는 이지훈를 쳐다보았고 이지훈은 자세를 바꾸고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유선우, 너도 왔어? 왜... 은서 씨 데리러 온 거야?”그의 농담에 유선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유선우는 차준호의 맞은편에 앉아 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은서 데리고 본가로 가서 하룻밤 자고 올 거야. 할머니가 은서 많이 보고 싶어 하시거든.”그의 말에 차준호는 피식 웃었다.“재밌네
“너 여기 병 났다고. 잊지 마, 저 여자가 누구 와이프인지.”한편, 여자 탈의실에는 조은서밖에 없었다. 드레스를 벗고 검은 속옷만 입고 있는 그녀의 하얀 몸은 전등 아래에서 더 빛이 났다. 갑자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렸다.문 앞에 유선우가 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탈의실의 문을 잠궜다...그의 행동에 조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유선우 씨, 여기 여자 탈의실이에요.”유선우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있던 셔츠를 낚아챘다... 그러고나서 한 손으로 그녀를 옷장 앞으로 밀어내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런 것에 익숙지가 않았던 그녀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만 같았고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유선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를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부부 사이가 아닌 척... 처음 그녀의 몸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눈빛에는 욕망조차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손을 풀자 그녀는 말없이 등을 돌리고는 손가락을 떨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개의치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유선우 씨, 뭐 하자는 거예요?”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조은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이혼을 요구할 때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조은서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많은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걸 예전에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뒤에 서 있던 그가 그녀의 몸에 바싹 달라붙었다. 은은한 담배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수정같이 반짝이는 그녀의 피부는 연한 핑크빛으로 물들어져 더욱 매력적이었다. 유선우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허스키한 목소리를 입을 열었다.“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예쁜 여자는 화의 근원이라고 해야 하나...
진석은 예의 있게 조은혁을 호칭했다.“아버님.”조은혁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볍게 기침하며 조은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먼저 올라가라. 네 엄마가 네가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마 할 얘기가 있을 거다.”조은희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고 진석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밀면서 말했다.“먼저 올라가.”조은희는 그제야 움직였고 조은혁 옆에 다가갔다. 집에서 막내딸인 조은희는 가장 애교가 많았고 조은혁을 안고 인사한 후 아쉬운 듯 올라갔다.조은혁은 작은 딸을 안자 화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진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앉아서 얘기해.”진석은 즉시 자리에 앉아 조은혁에게 차를 따랐고 조은혁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눈치가 빠르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버님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합니다.”조은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여전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은희와 만나고 싶다면 지금은 조건은 없어. 하지만 요구 사항은 몇 가지 있네.”진석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은혁은 진석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했지만, 하는 말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첫째, 결혼을 하게 되면 은희는 너의 집에 가지 않고 결혼식과 생활은 모두 B시에 있어야 해. 둘째, 조씨 가문은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결혼 때 충분한 축의금을 줘서 편하게 생활하게 할거야. 하지만 네가 결혼 후 벌어들인 모든 돈은 은희와 공동 재산으로 해야 하며 은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어. 또한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 은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이 조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그렇지만 진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조은혁은 더 이상 그를 어렵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석을 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사실 그도 같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진석이 처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몇 달 후 가을 10월쯤.방유설이 주연한 《청홍》이 대히트를 치며 영화 글러브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시상식 당일 날 조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모여 방유설을 응원하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다음에 받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계속 전했다. 방유설은 매우 감동했다. 진안영이 갓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마친 후 이렇게 와서 자신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방유설은 진안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난 이미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을 받았어요.” 진안영은 원래 차분한 성격인데 방유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우현이랑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 활발해져! 우현이가 사람을 잘 챙긴다고 네 아주버님이 자주 칭찬하셔.” 방유설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진안영과 얘기했다. 조은희는 사탕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평소에 연기하면서 다이어트해도 이럴 때는 사탕 하나 드세요. 나중에 여우주연상 받고 저혈당으로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방유설은 사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우유사탕이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았다. 조은희는 살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언니예요! 다른 여배우들보다 언니가 훨씬 이뻐요.” 조우현은 여동생을 흘깃 보며 말했다. “이건 외모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외모만 보고 결정되면 긴장감이 없잖아.” 조은희는 달콤한 사랑을 떠먹은 기분에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때 최우수 남자주연상이 발표되었고 다른 영화의 남자 주연이 받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박도원이었다. 그는 국내에 없어서 촬영 감독이 대신 상을 받으며 발언 중 여러 번 방유설을 언급했다. 갑자기 설원 커플 팬들이 들썩이며 이 장면을 모든 플랫폼에 퍼뜨렸다. 설원 커플 팬클럽에서 활동 중인 팬들은 102만 명에 달한다. 그렇게 인기 있는 커플이었다. 조우현은 아내의 직업을 존중하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저 코를 머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방유설은 가장 떠들썩한 설날을 보냈다. 3월쯤 그녀는 조우현과 결혼했다. 그녀의 웨딩드레스와 베일은 무려 3미터 길이였고 어르신들은 베일이 길수록 결혼이 오래 지속된다고 했기에 조우현은 3미터 길이의 베일을 디자인하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방유설은 조진범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조우현에게 다가갔다. 이제부터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그의 가족도 그녀의 가족이 되어 함께 기쁨과 고난을 나누게 되었다. 10여 미터의 거리. 그 길은 마치 그들이 걸어온 4년과 닮아 있었다. 순백의 제단 앞에서 조진범은 방유설을 동생에게 넘기며 가볍게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대해라.” 조우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베일 너머로 방유설을 바라보았다. 오늘에 그녀는 순백의 모란꽃 같았다. 조우현은 부드럽게 방유설의 베일을 올리며 그녀에게 그의 눈을 바라보게 하며 결혼식을 마치려 했다. 그들은 이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 목격할 것이고 잠시 후 서약을 마치면 그들은 진정한 부부가 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약속한 평생의 로맨스였다.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그들의 감정은 깊었고 후회는 없었다! 방유설은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생중계가 이루어졌고 그녀는 생중계 수익은 모두 산간 지역의 아이들에게 기부했다. 네티즌들은 광고비를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고 한 번의 생중계에서만 160억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 네티즌들은 생중계를 보며 신나서 토론했다. [와! 조우현의 큰형도 잘생겼네.] [너무 아쉬워. 결혼을 너무 일찍 했어.] [여동생도 엄청 이쁘네! 이 가족은 다들 왜 이렇게 훈훈하지?] [저런 부모님이라니. 부러워!] 조씨 가문에 대한 댓글이 잠잠해지고 이번에는 유씨 가문으로 넘어갔다. [YS 그룹 대표도 너무 잘생겼잖아!] [영국에 모델 같아. 혼혈인가?] [100% 순수 본토! 얼굴이 완벽할 뿐!]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