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날, 시어머니는 자신의 SNS에 내 전남편, 아니 이제 남이 된 그 사람의 내연녀 초음파 사진을 올리셨다. [정말 기쁜 소식이에요!] 그 한 줄의 글 아래, 친척들과 친구들의 축하 댓글이 쏟아지고 있었다. [축복합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길 기다릴게요!] 나는 잠시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이내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천천히 내 SNS를 열고, 오래전 결혼 준비를 하던 시절, 병원에서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찾아 올렸다. [이름: 왕권 / 성별: 남/ 진단결과: 선천성 무정자증] 그리고 글을 덧붙였다. [아이를 못 낳는 남자... 그런 남자는 정말 싫어요.]
View More왕권의 어머니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불행하게 뇌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왕권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치료비를 마련했지만 병원은 그에게 추가로 160만 원을 지불하라고 했다. 그러나 왕권의 손에는 이제 단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도와주고 싶은 충동이 순간적으로 스쳤다.160만 원은 지금의 나에게는 정말 큰돈이 아니다.나는 이를 꽉 물었다. ‘저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할 생각 따윈 없어. 왕권과 전시어머니는 나를 혐오하고, 괴롭히고, 내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어. 지금 겪는 불행? 그건 전부 자기들이 뿌린 씨를 거두는 것뿐이야.’내 마음속으로 다시금 결론이 내려졌다. ‘이건 내 일이 아니야.’나는 단호히 돌아섰다. 발걸음을 떼는 순간, 왕권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는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현아야, 제발.”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내가 널 배신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잘못했어. 날 용서하고 우리 엄마를 살려줘!”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왕권은 언제나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과거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초라한 남자였다.“미안하다고? 사과한다고 이 모든 게 없어질 것 같아?”나는 차갑게 내뱉으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두 걸음도 채 가지 못해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2만 원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택시비야. 이걸로 집에 가. 고마워할 필요도 없어. 이번에야말로 잘 만나고, 잘 헤어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야, 어쩔 건데?”나는 생리대를 들고 계산하러 가려고 했는데, 이예진은 미쳐버린 사람처럼 나를 향해 달려왔고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이 뻔뻔한 여자,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도 뻔뻔하게 물건 사러 다녀? 널 죽여버릴 거야.”나는 이예진의 손을 잡아 끌어내리며 반격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는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예진의 뺨을 힘껏 때렸다. “남의 가정을 파괴한 건 너야. 죽어야 할 사람도 너고! 임신했다고 내가 널 못 때릴 줄 알아?”나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네 머리 위에 카메라가 있어. 정당방위라는 걸 증명할 증거도 충분해.”이예진은 눈이 붉게 충혈되더니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달려들었다.“이 천한 년, 오늘 널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그녀가 손에 무언가를 집어 들고 던지는 순간, 나는 뒤로 물러섰고 어떤 행인이 내 머리 위로 옷을 던져 공격을 막아주었다. 옷을 벗어보니 다행히 유해한 액체 아닌 단순히 물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곧 경비원들이 달려와 이예진을 제압했다. 이예진은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 “놔, 놔!”나는 도움을 준 행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조사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왕권과 마주쳤다. 오랜만에 본 왕권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과 후회가 묻어났다. 이예진은 미쳐버렸고, 왕권은 몰락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사랑의 증거라면,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왕권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아야, 미안해!”나는 그를 차갑게 응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미안? 사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세상에 경찰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나는 더 이상 둘과 엮기지 싫었다. “괜찮아. 너희들의 행복을 빌게. 백년해로 하길 바래.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나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지
수지가 돌아오자 나는 녹화해둔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예진이 배가 불룩한 상태로 남자와 춤을 추는 모습은 한눈에 봐도 민망했다. 수지는 영상을 한참 동안 보더니 태연하게 술을 마시며 말했다. “봤어. 내 옆에서 춤추고 있었거든. 배가 불룩한데 남자 다리 사이에서 몸을 문지르다니. 정말 창피하더라.”나는 수지를 힐끗 보며 미소로 신호를 보내자 수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이거 네 전남편이 바람피운 그 사촌 여동생인 거야?”나는 조용히 엄지를 치켜세웠다.수지는 흥분한 얼굴로 내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영상을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뭐 하려는 거야?”내가 물었다.수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왕권에게 보냈어!”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솔직히 수지의 짓궂은 행동이 싫지 않았다. 대학 시절부터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수지는 처음부터 왕권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왕권은 찌질하고 비겁한 남자야.” 수지의 말은 늘 단호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니, 얼마나 정확한 평가였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우리는 바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권은 화가 난 얼굴로 바에 나타났다. 그는 곧바로 이예진을 찾아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며 말했다.“이예진, 나와. 이야기하자.”수지는 즉시 DJ에게 돈을 보내 음악을 멈추게 했고 바 안은 갑작스러운 정적에 휩싸였으며 모든 시선이 왕권과 이예진에게 쏠렸다.이예진은 왕권을 보자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고 함께 가려고 하지 않았다.“왜 이래요?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왕권은 구경하는 시선을 참을 수 없어 이예진의 얼굴에 뺨을 세게 때렸다.“네가 감히 바람을 피워?” 이예진은 얼굴을 감싸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아니에요, 오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데 날 이렇게 때려요?”왕권은 이예진의 말을 믿지 않았고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눈앞에서 춤추던 영상을 재생했다.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남자는 이미 사라졌지만, 증거는 충분했다.이예진은 계속 변명을
이곳은 강해그룹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당연히 여기의 직원들은 우리가 여기서 식사하고 있다는 사실과 나를 환영하기 위해 준비된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왕권의 사촌 고모가 경비원을 밀치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너 일하기 싫은 거지? 당장 저년을 쫓아내지 않으면 널 신고할 거야!”그녀의 목소리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고 눈썹을 살짝 치켜들며 경비원을 바라보았다.경비원은 당황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가씨, 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낼까요?”왕권의 어머니는 얼른 끼어들며 소리쳤다.“빨리 쫓아내, 내 눈에 거슬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그렇죠.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빨리 정리하는 게 좋죠.”경비원은 무전기로 몇 명의 동료를 호출했고, 곧 네 명의 경비원이 ‘두 사모님’을 밖으로 쫓아냈다.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왕권의 어머니와 사촌 고모는 왕권의 이름을 외쳤다.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왕권이 나타났고 얼굴에는 놀라움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장소연!!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엄마를 놔줘!”나는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미안, 내 이름은 장소연이 아니고 강현아야.”왕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더듬거리며 말했다.“네가, 강 대표님이 오랫동안 찾던 딸 강현아였어?”“그래, 바로 나야.”나는 왕권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후회와 놀라움이 흥미로웠고, 그 표정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특별 대우를 받지 않고 나는 이직 전의 직장으로 출근했다. 한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왕권과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점심시간이 되자 왕권은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계단으로 끌고 갔다.“소연아, 아니 현아야,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될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할게.”나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돈이 있다고 달라붙은 거니? 아니면 내가 사적인 원한으로 너를 해고
왕권의 얼굴엔 고통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너 예전엔 이렇게 냉정하게 굴지 않았잖아.” 이예진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본인이 어떤 처지인지 잘 알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나는 이 광경을 보며 마치 우스갯소리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지? 제발 날 떠나지 말라고 할까, 아니면 ‘친자확인 해봤어?’라고 할까?”왕권은 입술을 꽉 다물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죽은 파리를 삼킨 듯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자신이 아이를 못 낳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이를 감추기 위해 억지로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임을 깨달았다.‘정말 세상이 넓으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왕권을 바라봤다.이예진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장소연, 밥은 마구 먹어도 말은 함부로 하지 마! 네가 아직도 내 남편을 사랑해서 우리 사이를 망가뜨리려고 하는 거지?”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누군가는 속삭이며 나를 가리켰다. “부부 사이를 방해하려는 못된 여자라니.”나는 이예진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한낮부터 헛된 꿈을 꾸네? 결혼 중에 사촌 여동생이랑 바람피우고, 아내한테 맨몸으로 집을 나가라니... 그런 남자를 내가 왜 사랑해야 하지? 내가 질려서 너한테 떠넘긴 거야. 근데 보니까 너희 꽤 잘 어울리더라?”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덧붙였다. “축하해. 진짜 끼리끼리 만났네.”주변 사람들은 놀란 소식에 숨을 삼키며 대화를 들었고 비난의 화살은 곧 그들 둘에게 돌려졌다.“진짜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네.”나는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이런 창피한 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뒤에서 이예진은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왕권과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두 사람은 여전히 문 앞에서 싸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어 두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권은 이예진의 배에 뽀뽀하며 찍은 사진을 모멘트에 올렸다.[나는 곧 아빠가 된다!]그 문구를 본 순간,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건강검진 결과를 꺼내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렸다. [나는 외동딸이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자는 싫어.]단톡방은 정적에 휩싸였고, 왕권은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를 차단하고 연락처를 삭제한 뒤 그룹 방에서 조용히 탈퇴했다....이혼 후 2개월 동안 나는 정신 없이 바빴다. 직장 복귀를 위해 자격증 시험 준비하고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내 삶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현아야, 엄마가 피부관리를 예약해뒀단다. 가서 좀 쉬어라. 너무 고생하지 마.”그 말을 듣자 한동안 잊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결혼 생활 동안 매일 집안일에 시달리며, 자신을 돌보거나 즐길 여유조차 없었다.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왕권과의 결혼으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순간,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네. 엄마 고마워요.”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바보 같은 아이. 엄마는 네가 겪었던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보상해줄 거야. 앞으로는 절대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못할 거다.”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엄마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오후, 외출하려던 순간, 집에서 일하는 이모님이 조용히 다가와 봉투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아가씨, 이건 사모님이 주신 거예요. 저녁에 연회가 있는데 기사님이 6시에 모시러 온다고 하셨어요.”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새 주민등록등본과 신분증, 은행카드, 그리고 벤틀리 차 키가 들어있었다.그것들을 본 순간, 나는 가슴이 울컥했지만 다시는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는 곧바로 차를 운전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화장도 하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웃는 거야?”나는 이혼 협의서에 선명하게 찍힌 왕권의 서명을 확인한 뒤, 싸늘한 시선으로 시어머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웃을 이유가 뭐죠? 이런 집안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다행인데요. 차라리 한턱내고 고기라도 구워 먹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하세요.”시어머니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다시 한번 말해봐!”나는 시어머니가 내게 들이민 손가락을 가볍게 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 어머니가 아니시니까, 더 이상 참아드릴 이유도 없겠죠. 자, 서명할까요? 아니면 말까요?”시어머니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결국 조용히 손을 내렸다. 내가 서명을 거부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나는 침착하게 서류에 서명하고 고개를 들었다. “왕권을 불러오세요. 지금 당장 이혼 수속을 밟아야 합니다.”시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쉽게 동의할 줄 몰랐던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 그래,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지. 바로 우리 아들을 부를게.”정말로 풍자적인 상황이었다. 잠시 후, 왕권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라고 하더니 차를 타라고 했다. 차 문을 열자 조수석에 이예진이 앉아 있었다. 나는 차갑게 물었다.“이게 무슨 뜻이야? 이혼하러 가는 길에 내연녀를 데리고 나오다니,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껏 해야지.”왕권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예진이가 임신했어. 돌봐야 해서 조수석에 앉힌 거야. 너는 뒷자리에 앉아.”나는 그의 어이없는 태도에 헛웃음을 지었다.‘네가 선천성 무정자증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이러는구나. 웃기지도 않는다.’이예진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언니, 미안해.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나는 냉소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런 말을 내가 받아줄 거라 생각해? 뻔뻔하기가 이루 말
택시에서 내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왕권의 사촌 여동생, 이예진이었다.‘이예진이 임신을 했다고? 그런데 왜 사촌 오빠인 왕권이랑 산전 검사를 함께 받으러 온 거지?’내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납득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화면에는 ‘경찰서’라는 발신지가 떴다.“여보세요?”[안녕하세요, 장소연 씨 맞으십니까? 여기는 경찰서입니다.]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예전에 하셨던 건강검진 자료를 통해 연락 드리는 겁니다. 한 부부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는데, 장소연 씨의 혈액형이 그분들과 99%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직접 와서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예상치 못한 소식에 나는 병원을 잊고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경찰서에 도착한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손에 쥔 펜던트를 꺼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주셨던 그 펜던트였다.“이 펜던트는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목에 걸려 있었던 거란다. 혹시 네 친부모를 만나게 된다면 이 펜던트가 너를 증명해 줄 거야.”할머니는 내가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아이임을 숨기려 하지 않으셨다. 시내에서 약을 사러 가던 어느 날, 할머니는 우연히 나를 발견하셨다. 마치 운명처럼, 거센 바람 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를 보고선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셨다.나는 펜던트를 경찰에게 건네며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긴장된 채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경찰서 앞에 멈췄다.차에서 내린 여인은 부유해 보이는 세련된 중년 여성이었고 펜던트를 보자마자 손을 떨며 눈물을 쏟았다.“현아야! 엄마야! 잃어버린 내 딸아!”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제야 나는 내 진짜 이름이 강현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눈물을 쏟았다. 친엄마의 품은 어릴 적 내가 꿈꿨던 엄마의 품이었다.잠시
시어머니는 나를 향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이 여자랑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이제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내 머리 위에 올라서려고 하다니!”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몸이 떨렸다.왕권은 짜증이 난 듯 시어머니를 거실로 밀어내며 말했다.“엄마, 됐어요. 그만하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왕권은 돌아와 손에 들고 있던 티슈로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그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위로가 아닌 귀찮음이 엿보였다. “소연아, 엄마가 연세도 많고 심장병도 있으시잖아. 너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 이번 한 번만 더 참아줘. 가서 엄마께 사과하자. 응?”왕권은 내가 마음이 약하고 착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시어머니께 사과하러 갔다.그러나 왕권은 알지 못했다. 내가 양보할수록 시어머니의 괴롭힘은 더 심해진다는 것을.그날 밤, 생리가 갑작스레 시작되어 침대 시트와 잠옷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무 피곤했던 나는 이튿날 빨 생각으로 화장실에 두고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시어머니는 문도 두드리지 않고 방에 들어와 더럽혀진 침대 시트를 내 머리 위에 던지며 소리쳤다.“이게 뭐니? 얼른 일어나서 씻어! 이런 걸 보고도 잠이 와?!”시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안에서 울렸지만, 나는 아랫배가 심하게 아파 침대에서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어머님, 제가 지금 배가 너무 아파요. 조금만 쉬었다가 바로 씻을게요.”하지만 시어머니는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화가 난 듯 나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소리쳤다.“배가 아프긴 뭐가 아파! 결혼한 지 꽤 됐잖아. 그런데 아직도 임신 소식이 없니?”시어머니가 이불을 세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알몸 상태로 노출될 뻔했다. 황급히 가슴을 감싸고 이불을 붙들었다. 그 순간, 내 자존심이 그녀의 발밑에 처참히 짓밟히는 듯했다.“지금 옷 입고 나갈 테니 나가세요.” 내 목소리도 결국 거칠어지고 말았다.그때 휴대폰 벨
나는 왕권과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평범함에 안정감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우리는 자연스레 연인으로 되었다.대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연봉이 얼마 되지 않았다.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라 허름한 빌라를 임대하여 꿈을 펼치기로 하였다.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우리는 늘 왕권이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왕권은 설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늘 작은 선물을 주며 나를 웃게 했다.그리고 형편이 어려울 때는 집 앞 작은 분식점에서 만두 한 접시를 사주며 나를 위로하곤 했다.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힘겹게 살아왔다.사람들은 나를 두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할머니가 주워 온 아이야.”“부모님한테 버려진 아이래.”이런 말들이 내 어린 귀를 할퀴었지만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할머니께서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주셨다.하지만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나는 모는 걸 잃은 기분이었다. 가족이 없다는 것에 나는 늘 외로웠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왕권에게 의지하게 되었다.연애하는 동안 왕권은 늘 다정하고 따뜻했으며 무엇보다 내 출신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안심시켰고 나는 그 친절함과 배려심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결핍했던 가족의 사랑을 그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어느 날, 왕권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소연아, 평생 나와 함께 하면 안 될까?”그 말에 나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권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 더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그 약속을 믿었고 망설임 없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하지만 약혼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왕권의 친척들은 내 출신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올케, 소연이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문제 없겠죠? 전염병이 있는 건 아니겠죠?”나를 향한 의심은 노골적이었다.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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