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온지유도 인사하는 수밖에 없었다.“안녕하세요, 전 온지유라고 해요.”여이현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담담하게 말했다.“소개는 그만하고 이만 가죠.”아이는 아주머니의 품에서 조용해졌다.제나는 계속 그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자꾸만 온지유와 여이현을 힐끗힐끗 보았다.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여이현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맺혔다. 그걸 발견한 제나는 기회라고 생각해 얼른 직접 만든 손수건을 건넸다.“대장님, 땀이 나셨네요. 제가 닦아드릴게요.”그녀는 손을 뻗었다.그러나 여이현의 이마에 닿기도 전에 여이현은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며 차가운 눈빛으로 보았다.“그럴 필요 없습니다!”제나가 말했다.“아, 죄송해요, 대장님. 전 그냥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서...”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문 채 그녀를 무시해 버렸다.제나는 다소 민망해졌다.또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 방금 두 사람의 행동과 대화를 전부 들었다.제나와 여이현이 꽤나 오랫동안 함께 했던 것 같았다.땀까지 닦아주려는 것을 보면 말이다.온지유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여이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가 닦아줘.”그의 말과 행동은 제나의 눈에 전부 들어왔다.제나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뭐?”그러나 온지유는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자신에게 한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여이현은 마침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그들은 산에서도 무장하고 있었고 아직 산길이 남아 있었던지라 다른 사람보다 10배는 더 힘들 것이었다.이것 또한 그들의 일상 훈련이기도 했다.여이현은 이미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나고 있었다.아린은 여이현의 말을 듣자마자 잔뜩 흥분하는 얼굴로 온지유를 보았다.역시나 두 사람의 모습은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그녀는 속으로 찰칵, 찰칵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두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한 제나는 다시 마음속에 욕망의 불꽃이 타올랐다.그녀는 더는 전쟁의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애당초 그녀도 원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로 외국인이었던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려 온지유를 보았다.더는 가만히 지켜볼 순 없었다.“지유 씨, 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요. 옷 다 젖었잖아요.”아주머니들이 온지유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린도 말했다.“제 옷으로 갈아입어요. 언니랑 저랑 몸매가 비슷한 것 같으니까요.”“그래.”온지유는 바구니에 있던 약초를 전부 꺼내 널었다.그들에겐 그들만의 전통 옷이 있었다.천부터 재봉까지 전부 직접 만들어서 입었다.다소 민족적 느낌이 나는 옷이었다.옷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사용되었는데 전부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대표하는 색이었다.온지유는 그들의 옷이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옷을 갈아입자 아린이 놀라며 말했다.“우와, 언니. 정말로 예뻐요. 제 옷을 입으니까 더 예쁜 것 같아요!”“그래?”온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린의 칭찬에 다소 부끄러워졌다.“정말이에요. 얼른 대장님께 보여주러 가요!”아린은 온지유를 끌고 나가려 했다.온지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굳이 보여줘야 하는 거야?”아린이 말했다.“대장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고요. 그러니 당연히 언니가 얼마나 예쁜지를 보여줘야죠. 그 김에 그 애 엄마도 포기하게 말이에요.”아린은 계획이 있었다.여이현이 온지유에게만 잘해준다는 것을 눈치챘던 그녀였고 애초에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애 엄마가 나타나 여이현의 주위를 맴돌고 있지 않겠는가.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고 있는 제나를 보니 심히 눈에 거슬렸다.온지유는 아린의 손에 억지로 끌려 나왔다.여이현은 동료들과 길가에 서 있었다. 이때 성재민이 온지유를 발견하고 여이현에게 눈빛을 보냈다.“대장님!”여이현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온지유가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아린은 자기 옷
온지유는 여이현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그녀가 말한 건 사실이었으니까.앞으로 그녀와 여이현은 가는 길이 달라질 테니 당연히 한곳에서 죽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여이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세상에 여이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여이현이 어떤 눈빛으로 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아린의 팔에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겼다.아린은 여전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상황이 끝나버릴 줄은 몰랐다....대나무와 목재로만 지어진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건물 주위로 산도 있고 죽림도 있었다.아름다운 환경에 건물은 더 고전적인 분위기가 났다.건물은 아주 컸다. 몇십 평은 되는 것 같았고 건물 표면엔 정교하게 조각된 도안이 가득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남자가 서재에 있었다.서재도 꽤나 크고 넓었다. 벽 가득 책이 꽂혀 있었고 책장의 길이는 대략 7, 8m는 되는 것 같았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책이 있었다.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책을 읽었다.“오빠.”여자가 들어오며 다소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왔으면서 왜 말도 안 해 준 거예요? 오빠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잖아요.”남자는 고개를 들며 담담하게 여자를 보았다.“여긴 왜 왔어.”“보고 싶으니까 당연히 와야지.”여자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오빠 진짜 너무해. 왔으면서 나 보러 오지도 않고 말이야.”“잘 지내고 있었잖아. 그럼 된 거지.”“그래. 잘 지내고 있었지.”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하지만 오빠가 없으니까 삶이 지루하더라고.”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나한테 왜 쌀쌀맞은데?”여자는 냉담한 남자의 반응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난 오빠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잖아.”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를 보고 있는 여자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다른 오빠들은 동생을 그렇게 아껴준다고
율은 또 물었다.“다른 사람한테도 저래요?”“전 도련님과 접촉해본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제가 봐온 도련님은 평소에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흥미가 없으셨습니다.”김명무가 그녀에게 말했다.그 덕에 율은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그럼 집을 비운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도련님께서는 근처 마을에 산책가는 걸 좋아하셨습니다.”“마을에 산책할 게 뭐가 있다고요? 마을에 볼 것도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도련님께선 남들보다 많이 다르시지요.”“아빠는 오빠한테 관심이 없대요?”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오빠를 신경 써주길 바랐다.그랬다면 적어도 자신의 오빠가 자기에게도 쌀쌀맞게 굴지 않았을 테니까.“네, 관심이 없으십니다.”김명무가 말했다.율은 궁금해졌다. 마을에 대체 뭐가 있는 것인지.그녀도 구경하고 싶어졌다....“언니랑 대장님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은 건 제 착각일까요?”아린은 좋은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했다.“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은데, 또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그래, 네 말이 맞아.”온지유가 대답했다.“네?”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온지유의 신경은 여이현이 아닌 다른 곳에 팔린 상태였었다.그녀는 이 마을에 오래 머물고 있었지만 법로에 관한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혹시 말이야. 전에 법로의 도움을 받은 적 없어? 이번엔 마을이 꽤나 심각하게 망가져서 난 계속 법로가 너희들을 지켜줄 거로 생각했거든.”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아린이 답했다.“우리 마을은 확실히 예전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어요. 최근에 동맹군의 눈에 띄게 되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법로는 저희에게 이미 충분히 잘해줬어요.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물자도 많이 나눠주었죠. 내전은 정부에서도 관리하지 못하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아린은 이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물자도 주었다고?”온지유가 물었다.“언제? 난 왜 모르는데?
온지유는 제나를 보았다. 그 의미를 어떻게 눈치 못 챌 수가 있겠는가.제나는 암시하고 있었다.온지유는 태연하게 말했다.“여이현 씨한테 만들어 주려고요?”제나는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대장님께선 저랑 제 아들에게 아주 잘 대해주신다고요. 그래서 너무 고마워요. 귀국할 때도 저랑 제 아들을 데리고 가주신다고 했었어요. 심지어 우리를 구해주기도 하셨으니 저랑 제 아들에겐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제나는 이내 한 마디 더 보탰다.“대장님 줄곧 혼자 다니시는 것 같던데, 애인 없는 거 맞으시겠죠?”온지유가 말했다.“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 같네요.”제나는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직접 물어봐요. 그래서 지유 씨한테 물어보러 온 거예요. 대장님이랑 대화도 많이 나누는 것 같아서 지유 씨가 아는 줄 알았죠...”“두 사람 여기까지 함께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럼 당연히 알게 되었을 텐데요. 왜 굳이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죠?”“전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제나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지유 씨, 전 대장님이 지유 씨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지유 씨가 절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기분이 나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온지유는 쓴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지라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런 의미가 아니라면서요. 그럼 저도 그런 의미가 아닌 거예요. 요리를 배우고 싶은 거라면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전 요리 못하니까요. 전 제일 간단한 요리도 할 줄 모르거든요.”“네, 알겠어요.”제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몰래 웃고 있었다.온지유가 뭐든 잘하는 매력이 흘러넘치는 여자인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오히려 그녀가 할 줄 아는 것이 더 많았다.빨래와 요리, 청소는 여자로서 응당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척척 잘 해냈다.하지만 그녀는 여이현에게 직접 요리를 만들어 저녁 한 상 차려주고 싶었다.이
온지유는 여이현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줄 알았다. 그래서 벨트만 놓고 가려고 했으나 제나가 여이현의 품에 안겨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온지유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들어온 타이밍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했다.괜히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제나는 온지유가 마침 잘 들어왔다고 생각해 얼른 여이현에게 고백했다.“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장님의 아내가 되어드리고 싶어요. 설령 이곳에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 상관없어요...”그녀는 다소 비굴하게 말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그녀와 아이에겐 더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이 지켜줄 수 있었기에 이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던지라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만약 여이현이 그녀를 데리고 화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와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많이 양보해서 설령 여이현이 이곳에 마음에 담아둔 여자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여이현이 분명 사람을 보내 그녀를 지켜줄 테니까.Y 국 국민은 어차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의지할 곳만 있으면 평범한 백성에서 탈출했다.내전은 여전히 빈번했고 고통을 받는 건 국민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타이밍에 온지유가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제나의 손을 떼어냈다.온지유는 이곳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안으로 더 들어가지도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미안해. 난 그냥 물건 전해주려고 온 거야. 이것만 놓고 갈게.”안으로 더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가까운 곳에 있던 선반 위에 놓았다.“온지유.”여이현이 그녀를 불렀다.그러나 온지유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빠르게 나가버렸다.표정은 담담했지만 속은 아니었던지라 얼른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바로 쫓아가고 싶어 했다. 온지유가 자신과 제나 사이를 오해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제나는 포기할 수 없었고 마지막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나랑 제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우연히 구해준 난민이었어.”그의 말에 온지유는 웃음만 나왔다.“그래, 맞아. 나도 알아. 이미 두 사람에 대해 들었거든. 하지만 갈 곳을 잃은 여자와 아이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제나 씨만 구해준 거야? 그냥 제나 씨가 이쁘니까 구해준 거잖아.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만약 나중에 둘이 정말로 그런 사이로 발전한다고 해도 넌 그냥 그 아이의 새아빠만 될 수밖에 없어. 물론 너만 좋다면 뭐가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겠지!”“난 그 여자가 내 천막에 있는 줄 정말로 몰랐어.”여이현이 말했다.“하지만 절대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제나 씨를 구해준 건 제나 씨 남편이 우리나라 사람이어서 그랬어. 제나 씨 남편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거든. 그것 빼곤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온지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그의 손을 확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나한테 설명을 왜 해. 우린 이미 이혼한 사인데. 네가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라고!”여이현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공기만 잡혔다.급해진 나머지 그는 그녀와 이혼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따라 나와 그녀를 잡은 뒤 설명한 것이다.그녀의 오해를 사는 건 정말로 싫었다.몸이 저도 모르게 먼저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하지만 진정이 되었을 때 그는 이 충동적인 감정을 참아야 했다.“미안해.”여이현이 나직하게 말했다.“내가 실수를 했어.”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그가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이다.그러나 그녀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는 수밖에 없었다.“일찍 쉬어.”여이현이 그녀에게 말했다.“너무 늦게까지 눈 뜨고 있지 말고.”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 마치 누가 먼저 분노를 터뜨릴지 관찰하는 것처럼.여이현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어 다시 몸을 돌려 천막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녀는 여전히
그 순간 온지유는 눈이 확대되었다.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여이현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벌리며 달콤하게 입안을 헤집었다.이내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꽉 끌어안았다. 행여나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그동안 그녀가 그리웠던 마음을 풀고 있었다.그녀가 너무도 그리웠다.매일매일 그리움 속에서 살았다.위험한 순간에도 머릿속에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의 뜨거운 키스에서 자신을 향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래서 거부하지 않았다. 두 팔을 그의 넓은 등반에 올리며 최선을 다해 그를 받아들였다.스르륵 눈을 감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눈물이 똑 흘러내렸다.여이현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뜨거운 키스를 했다.말할 필요도 없이 행동으로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그의 천막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보이는 건 여이현의 품이었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두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만졌다. 그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쌕쌕 숨을 쉬고 있었다.제나가 가져왔던 음식은 이미 치워버린 지 오래였다.천막엔 오직 둘 뿐이었다.온지유는 더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여하간에 많은 일을 겪었고 내전 중인 국가에 머물고 있었던지라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기려고 했다.이런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설령 후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여이현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 불어오는 숨이 뜨거웠음에도 온지유의 허리를 팔에 핏대가 설 때까지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곤 나직하게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곳은 언제 어디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그냥 내 곁에 있어. 그래야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으니까.”온지유가 시야에 사라졌을 때 여이현은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사실 불안하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