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여이현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그녀가 말한 건 사실이었으니까.앞으로 그녀와 여이현은 가는 길이 달라질 테니 당연히 한곳에서 죽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여이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세상에 여이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여이현이 어떤 눈빛으로 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아린의 팔에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겼다.아린은 여전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상황이 끝나버릴 줄은 몰랐다....대나무와 목재로만 지어진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건물 주위로 산도 있고 죽림도 있었다.아름다운 환경에 건물은 더 고전적인 분위기가 났다.건물은 아주 컸다. 몇십 평은 되는 것 같았고 건물 표면엔 정교하게 조각된 도안이 가득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남자가 서재에 있었다.서재도 꽤나 크고 넓었다. 벽 가득 책이 꽂혀 있었고 책장의 길이는 대략 7, 8m는 되는 것 같았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책이 있었다.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책을 읽었다.“오빠.”여자가 들어오며 다소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왔으면서 왜 말도 안 해 준 거예요? 오빠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잖아요.”남자는 고개를 들며 담담하게 여자를 보았다.“여긴 왜 왔어.”“보고 싶으니까 당연히 와야지.”여자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오빠 진짜 너무해. 왔으면서 나 보러 오지도 않고 말이야.”“잘 지내고 있었잖아. 그럼 된 거지.”“그래. 잘 지내고 있었지.”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하지만 오빠가 없으니까 삶이 지루하더라고.”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나한테 왜 쌀쌀맞은데?”여자는 냉담한 남자의 반응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난 오빠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잖아.”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를 보고 있는 여자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다른 오빠들은 동생을 그렇게 아껴준다고
율은 또 물었다.“다른 사람한테도 저래요?”“전 도련님과 접촉해본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제가 봐온 도련님은 평소에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흥미가 없으셨습니다.”김명무가 그녀에게 말했다.그 덕에 율은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그럼 집을 비운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도련님께서는 근처 마을에 산책가는 걸 좋아하셨습니다.”“마을에 산책할 게 뭐가 있다고요? 마을에 볼 것도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도련님께선 남들보다 많이 다르시지요.”“아빠는 오빠한테 관심이 없대요?”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오빠를 신경 써주길 바랐다.그랬다면 적어도 자신의 오빠가 자기에게도 쌀쌀맞게 굴지 않았을 테니까.“네, 관심이 없으십니다.”김명무가 말했다.율은 궁금해졌다. 마을에 대체 뭐가 있는 것인지.그녀도 구경하고 싶어졌다....“언니랑 대장님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은 건 제 착각일까요?”아린은 좋은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했다.“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은데, 또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그래, 네 말이 맞아.”온지유가 대답했다.“네?”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온지유의 신경은 여이현이 아닌 다른 곳에 팔린 상태였었다.그녀는 이 마을에 오래 머물고 있었지만 법로에 관한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혹시 말이야. 전에 법로의 도움을 받은 적 없어? 이번엔 마을이 꽤나 심각하게 망가져서 난 계속 법로가 너희들을 지켜줄 거로 생각했거든.”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아린이 답했다.“우리 마을은 확실히 예전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어요. 최근에 동맹군의 눈에 띄게 되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법로는 저희에게 이미 충분히 잘해줬어요.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물자도 많이 나눠주었죠. 내전은 정부에서도 관리하지 못하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아린은 이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물자도 주었다고?”온지유가 물었다.“언제? 난 왜 모르는데?
온지유는 제나를 보았다. 그 의미를 어떻게 눈치 못 챌 수가 있겠는가.제나는 암시하고 있었다.온지유는 태연하게 말했다.“여이현 씨한테 만들어 주려고요?”제나는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죠. 대장님께선 저랑 제 아들에게 아주 잘 대해주신다고요. 그래서 너무 고마워요. 귀국할 때도 저랑 제 아들을 데리고 가주신다고 했었어요. 심지어 우리를 구해주기도 하셨으니 저랑 제 아들에겐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제나는 이내 한 마디 더 보탰다.“대장님 줄곧 혼자 다니시는 것 같던데, 애인 없는 거 맞으시겠죠?”온지유가 말했다.“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 같네요.”제나는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직접 물어봐요. 그래서 지유 씨한테 물어보러 온 거예요. 대장님이랑 대화도 많이 나누는 것 같아서 지유 씨가 아는 줄 알았죠...”“두 사람 여기까지 함께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럼 당연히 알게 되었을 텐데요. 왜 굳이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죠?”“전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제나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지유 씨, 전 대장님이 지유 씨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지유 씨가 절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기분이 나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온지유는 쓴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지라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런 의미가 아니라면서요. 그럼 저도 그런 의미가 아닌 거예요. 요리를 배우고 싶은 거라면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전 요리 못하니까요. 전 제일 간단한 요리도 할 줄 모르거든요.”“네, 알겠어요.”제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몰래 웃고 있었다.온지유가 뭐든 잘하는 매력이 흘러넘치는 여자인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오히려 그녀가 할 줄 아는 것이 더 많았다.빨래와 요리, 청소는 여자로서 응당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척척 잘 해냈다.하지만 그녀는 여이현에게 직접 요리를 만들어 저녁 한 상 차려주고 싶었다.이
온지유는 여이현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줄 알았다. 그래서 벨트만 놓고 가려고 했으나 제나가 여이현의 품에 안겨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온지유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들어온 타이밍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했다.괜히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제나는 온지유가 마침 잘 들어왔다고 생각해 얼른 여이현에게 고백했다.“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장님의 아내가 되어드리고 싶어요. 설령 이곳에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 상관없어요...”그녀는 다소 비굴하게 말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그녀와 아이에겐 더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이 지켜줄 수 있었기에 이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던지라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만약 여이현이 그녀를 데리고 화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와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많이 양보해서 설령 여이현이 이곳에 마음에 담아둔 여자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여이현이 분명 사람을 보내 그녀를 지켜줄 테니까.Y 국 국민은 어차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의지할 곳만 있으면 평범한 백성에서 탈출했다.내전은 여전히 빈번했고 고통을 받는 건 국민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타이밍에 온지유가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제나의 손을 떼어냈다.온지유는 이곳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안으로 더 들어가지도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미안해. 난 그냥 물건 전해주려고 온 거야. 이것만 놓고 갈게.”안으로 더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가까운 곳에 있던 선반 위에 놓았다.“온지유.”여이현이 그녀를 불렀다.그러나 온지유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빠르게 나가버렸다.표정은 담담했지만 속은 아니었던지라 얼른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바로 쫓아가고 싶어 했다. 온지유가 자신과 제나 사이를 오해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제나는 포기할 수 없었고 마지막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나랑 제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우연히 구해준 난민이었어.”그의 말에 온지유는 웃음만 나왔다.“그래, 맞아. 나도 알아. 이미 두 사람에 대해 들었거든. 하지만 갈 곳을 잃은 여자와 아이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제나 씨만 구해준 거야? 그냥 제나 씨가 이쁘니까 구해준 거잖아.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만약 나중에 둘이 정말로 그런 사이로 발전한다고 해도 넌 그냥 그 아이의 새아빠만 될 수밖에 없어. 물론 너만 좋다면 뭐가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겠지!”“난 그 여자가 내 천막에 있는 줄 정말로 몰랐어.”여이현이 말했다.“하지만 절대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제나 씨를 구해준 건 제나 씨 남편이 우리나라 사람이어서 그랬어. 제나 씨 남편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거든. 그것 빼곤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온지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그의 손을 확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나한테 설명을 왜 해. 우린 이미 이혼한 사인데. 네가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라고!”여이현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공기만 잡혔다.급해진 나머지 그는 그녀와 이혼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따라 나와 그녀를 잡은 뒤 설명한 것이다.그녀의 오해를 사는 건 정말로 싫었다.몸이 저도 모르게 먼저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하지만 진정이 되었을 때 그는 이 충동적인 감정을 참아야 했다.“미안해.”여이현이 나직하게 말했다.“내가 실수를 했어.”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그가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이다.그러나 그녀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는 수밖에 없었다.“일찍 쉬어.”여이현이 그녀에게 말했다.“너무 늦게까지 눈 뜨고 있지 말고.”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 마치 누가 먼저 분노를 터뜨릴지 관찰하는 것처럼.여이현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어 다시 몸을 돌려 천막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녀는 여전히
그 순간 온지유는 눈이 확대되었다.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여이현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벌리며 달콤하게 입안을 헤집었다.이내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꽉 끌어안았다. 행여나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그동안 그녀가 그리웠던 마음을 풀고 있었다.그녀가 너무도 그리웠다.매일매일 그리움 속에서 살았다.위험한 순간에도 머릿속에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의 뜨거운 키스에서 자신을 향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래서 거부하지 않았다. 두 팔을 그의 넓은 등반에 올리며 최선을 다해 그를 받아들였다.스르륵 눈을 감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눈물이 똑 흘러내렸다.여이현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뜨거운 키스를 했다.말할 필요도 없이 행동으로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그의 천막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보이는 건 여이현의 품이었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두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만졌다. 그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쌕쌕 숨을 쉬고 있었다.제나가 가져왔던 음식은 이미 치워버린 지 오래였다.천막엔 오직 둘 뿐이었다.온지유는 더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여하간에 많은 일을 겪었고 내전 중인 국가에 머물고 있었던지라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기려고 했다.이런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설령 후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여이현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 불어오는 숨이 뜨거웠음에도 온지유의 허리를 팔에 핏대가 설 때까지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곤 나직하게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곳은 언제 어디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그냥 내 곁에 있어. 그래야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으니까.”온지유가 시야에 사라졌을 때 여이현은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사실 불안하
여이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난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난 이미 충분히 잘살고 있어.”그 말에 온지유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뜨거운 액체가 두 눈에서 흘러나올 것 같았다.고개를 젖히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느낌이 싫었다.“그럼 이것만 물을게. 내 독은 어떻게 해독한 거야? 해독제는 어디서 난 거냐고.”온지유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러 명이 열심히 해독제를 찾으러 다녔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그런데 여이현이 무심코 가져와 그녀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너무도 이상했다.여이현은 한참 침묵했다.“그 해독제는 내가 애원해서 받은 거야.”온지유가 물었다.“누구한테 애원한 건데?”“아버지.”온지유는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아버지?”“응, 네가 아는 내 아버지 아니고 나를 낳아주신 친아버지한테.”여이현은 냉담하게 말했다.온지유는 뜻밖이었다.“친아버지를 찾았어?”“아니,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셨어.”온지유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하지만 여이현의 어투에서 여이현이 그다지 친부를 찾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여하간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 친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러나 그런 친부를 받아들인 건 오로지 그녀의 해독제를 위해서였다.이런 생각에 온지유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여이현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내가 널 힘들게 했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아니, 그런 적 없어. 네 목숨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온지유는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친아버지랑 거래한 거야?”“응.”여이현이 답했다.“난 아버지랑 거래했어. 3개월만 지나면 난 더 이상 여이현이 아니게 될 거야. 내가 가진 모든 건 전부 너한테 줄 생각이야. 네가 나 대신 지켜줘. 그건 전부 할아버지가 나한테 주신 거니까. 나 대신 잘 보관하고 있어. 그거면 남은 생도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야.”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여
“해도 돼?”여이현이 잠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정말 후회 안 하겠어?”그는 온지유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온지유가 충동적인 마음으로 하지 않길 바랐다.“응, 후회 안 해.”온지유는 그를 보았다.“결혼 생활 그래도 꽤 오래 했는데, 적어도 이번엔 진짜 부부로 살아보고 싶어.”그녀는 그에게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여하간에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기도 했으니까.비록 두 사람 사이엔 아이도 있었지만.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쉬웠다. 그와 이렇게 끝을 마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알았어.”여이현은 몸을 구부리더니 온지유의 입술에 키스했다.그의 행동은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온지유를 하늘이 내려준 소중한 선물처럼 말이다.온지유는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황홀한 기분이 들었고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너무 편안하고 몸을 감싸 안는 손길이 부드러워 그녀는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가끔 감전된 것처럼 몸이 짜릿짜릿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야릇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여이현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최선을 다해 억제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다칠까 봐 말이다.그러나 피가 뜨거워지며 충동이 머릿속을 지배해 버렸다.시뻘게진 두 눈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음을. 온지유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세게 주지 않았지만 붉은 손자국을 남기고 말았다.그는 그녀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온지유는 흘러나오는 소리를 참으며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밤새 내내 그에게 시달렸다.가끔은 뜨거운 열기에 몸이 후끈거리기도 했고 부드러운 그의 행동에 편안하기도 했다....이불이 유난히도 푹신했다.온지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온몸이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붕 뜬 것 같았다. 심지어 아프기도 했다.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천막이었다.그녀가 살던 집이 아니었다.황홀했던 어젯밤도 꿈이 아니었다.어젯밤 그녀는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