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다소 기대하는 얼굴이었다.“그럼 내일은 언제쯤 찾아오면 될까요?”“그건 저희도 모릅니다.”그러자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내일 다시 찾아와 여이현과 함께 밥이라도 먹으려고 했으나 만나기 벌써 만나기 어려웠다.여자는 자신이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내일 일찍 찾아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마침 용경호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여이현이 다른 여자를 온지유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에이, 설마 아니겠지.”“하지만 목욕물까지 받아두라고 하셨잖아.”“대장님이 다른 여자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할 리가 없어. 이건 말도 안 돼.”“우리 대장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용경호는 혼잣말로 자신을 설득하면서 여이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이 온지유의 대용품까지 찾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온지유와 여이현은 이미 이혼했기에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여자는 고개를 들자 마침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용경호를 발견하곤 얼른 불렀다.“경호 씨!”용경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구해주었던 여자였다.이름은 제나.그들은 이곳에서 수많은 난민을 구해주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의 남편은 사망했다. 남편은 그들과 같은 나라 사람이었다.여자는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가족을 찾고 싶어 했다.원래는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난민이 가득한 곳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까.거기에다 제나의 남편은 죽기 전 그들에게 제나를 데리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달라고 했다. 자신의 부모님이 제나를 잘 돌봐줄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데리고 오게 된 것이다.오는 길 내내 제나는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가끔 병사들의 찢어진 옷을 바느질해주며 사소한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제나였습니까.”용경호는 그녀에게 친절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
용경호가 말했다.“괜찮습니다. 전부 대장님을 위한 일이니 말입니다.”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용경호도 걸음을 옮겼다.다만 제나는 용경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것을 잊지 않았다.너무도 궁금했다. 여이현이 관심을 보인다는 여자가 누군지.제나는 바로 처소로 가지 않았다. 근처에 서 있는 병사를 잡고 물었다.“전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건데, 언제쯤 다시 출발할 수 있을까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제나는 이내 떠보듯 물었다.“대장님께서 다정하게 대했다는 여자분도 이 마을 사람인가요?”병사는 곰곰이 생각하곤 말했다.“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제나는 병사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같은 나라 사람이라니.'‘어쩐지 왜 쑥덕대나 했더니.'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고마워요.”그녀는 처소로 돌아갔다.아이는 이미 깬 상태였다.“엄마, 어디 갔었어요?”남자아이도 Y 국 사람이었던지라 피부색이 구릿빛이었고 Y 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눈을 뜨지 제가나 없자 마음이 불안해졌다.제나가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바로 끌어안았다.제나는 아이에겐 다정한 엄마였다.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대장님 만나러 잠깐 나갔다 왔어.”아이가 물었다.“그 멋있는 아저씨요?”“그래.”제나는 아이의 옆에 앉아 우유를 한잔 건넸다.“그 멋있는 아저씨가 행여나 네가 우유 먹을 수 없을까 봐 특별히 널 위해 젖소를 잡아 왔단다.”아이는 입맛을 다시더니 우유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엄마, 맛있어요.”아이에겐 우유란 아주 맛있는 것이었다. 만족한 듯 아이는 입가에 묻은 우유도 혀로 핥았다.제나는 손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멋쟁이 아저씨가 좋아?”“좋아요! 아저씨가 준 우유도 맛있어요!”아이는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그러자 제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래, 우리한테도 아주 다정하시지.”...어젯밤, 온지유는 따듯한 물에 목욕을 했다.따듯한 물에 몸을 담가본 적이 언젠지도
바로 이때, 온지유는 수많은 여자들이 손에 도구를 들고 등에 바구니를 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중엔 아린도 있었다.“아린!”온지유는 아린을 불렀다.“약초 캐러 가는 거야? 이렇게 일찍 가?”아린이 답했다.“당연하죠. 일찍 가야 해요. 그래야 좋은 약초를 캘 수 있거든요. 어떤 약초는 이슬이 마르면 상태가 안 좋아지거든요. 참, 오늘 죽순도 캐보려고요. 지금 이 계절엔 죽순이 가득하니까요!”“그럼 나도 같이 가.”온지유는 어차피 할 일이 없었고 손발도 멀쩡하니 따라가서 구경이라도 하려고 했다.“그래요, 그럼 도구랑 바구니를 챙겨드릴게요.”아린은 열정적으로 말했다.온지유는 빠르게 그들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함께 산을 올라 약초를 캐려 했다.그녀들은 보드라운 온지유의 손을 보았다. 거친 일이라곤 하나도 해보지 않은 그런 손이었던지라 한마디씩 했다.“흠, 아가씨는 잘 캐지 못할 것 같네요.”온지유가 대답했다.“저 할 수 있어요. 보기엔 이래도 힘이 꽤 장난 아니거든요.”그녀는 Y 국 언어로 말했다.비록 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언어를 자주 듣다 보니 어느새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그러자 그녀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아주 똑똑하신 분이었네. 우리 말도 다 할 줄 알고 말이에요.”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조금 따라 할 줄만 알아요.”온지유는 그녀들의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그녀들은 온지유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아이고, 아가씨 정말로 대단하네요. 역시나 사람은 지식이 많아 봐야 한다니까요.”아린이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오며 작게 말했다.“정말로 할 줄 알게 된 거예요? 대단해요!”온지유는 선망의 눈빛으로 보는 아린을 보았다.“찰리가 조금 가르쳐줘서 할 줄 알게 된 거야. 조금밖에 못 해.”“그래도 이 정도면 대단한 거죠!”아린이 그녀에게 말했다.“제가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네요.”온지유는 눈썹을 튕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함께 산에 올라갔다.나무는 아주 컸고
뭐가 어찌 되었든 여이현에게 법로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저쪽에 현지 여성들이 약초를 캐고 있습니다.”그들은 열심히 약초를 캐고 있는 여자들을 발견했다.“이번에 동맹군들이 쳐들어와 약초를 대부분 빼앗아 갔으니 다시 캐야 할 겁니다. 약초는 현지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 말입니다.”“어라 근데...”성재민이 갑자기 의아한 목소리를 내더니 눈을 비볐다.“제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왜 현지인들 사이에 익숙한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까.”그의 말에 여이현도 고개를 돌려 약초를 캐고 있는 사람들 쪽을 보았다. 그 사이엔 온지유도 있었다.온지유는 빠르게 그녀들 사이에 적응했다.즐겁게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며 약초를 캐고 있었다.이곳의 여자들은 대부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할 줄 아는 언어도 Y 국의 언어뿐이었다.젊은 사람들만 학교를 조금 다녔었기에 그녀와 몇 마디 나눌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온지유는 문제없이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여이현은 성재민을 보며 말했다.“잘 못 본 게 아니야.”성재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네? 그럼 사모님께서 Y 국까지 따라오셨단 말입니까?”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며 말했다.“앞으로 사모님이 아니라 온지유 씨라고 해.”“네, 알겠습니다, 대장님.”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내 걱정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산길은 험하니 산 아래까지 호위해줘.”“네, 알겠습니다.”온지유는 약초를 캤다. 오늘 캔 약초를 바싹 말린다면 몇만 원에 팔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약초가 많은 것은 아니었고 찾기도 힘들었다.그녀는 약초를 바구니에 넣었다.“언니, 빨리 와요! 여기에 죽순이 있어요! 죽순이 조금 커서 도움이 필요해요. 언니 빨리 와요, 이 죽순이면 저녁에 맛있는 요리를 해드릴 수 있다고요!”아린은 잔뜩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죽순은 멧돼지 고기보다 더 비쌌다.게다가 말리면 더 오래 보관하고 먹을 수 있었다.육포처럼 말이다.맛도 비슷했다.죽순 돼지고기볶음, 확실히 구미가
온지유는 바지 밑단이 젖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뿐만 아니라 약초 캐러 온 사람 모두 젖었다.그랬기에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약초 캐러 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어차피 문제가 되지 않았다.“이따가 가서 다른 바지로 갈아입으면 돼.”온지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몸에 찬 기운이 들어가면 안 돼. 다리는 더 특히 주의해야 해. 나중에 류머티즘 질환에 걸릴 수 있으니까.”“그냥 잠깐일 뿐이야.”온지유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이따가 돌아가면 새 바지로 갈아입으면 돼.”여이현의 신경은 여전히 온통 젖어버린 그녀의 바지에 가 있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녀의 바지 밑단을 올렸다.온지유는 그의 행동에 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더니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얼른 말렸다.“뭐 하려는 거야. 난 정말로 괜찮다니까.”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무릎 보호대를 빼내더니 온지유의 다리에 착용해 주었다.다들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두 사람을 보았다.아린은 얼른 입을 가리며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아린은 순간 도파민이 분비되었다.꼭 로맨틱한 드라마 보는 것 같았다.어느 나라 사람이든 대부분 환상으로 가득한 드라마를 좋아했다.여이현은 그녀의 다리에 무릎 보호대를 꽉 묶은 후 담담하게 말했다.“이 무릎 보호대는 방수 기능이 있으니까 하고 있으면 좀 많이 나을 거야.”온지유는 약초 캐러 온 여자들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나만 있고, 저분들이 없는 건 불공평한 일이잖아. 대장님으로서 이 도리를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아.”그녀는 무릎 보호대를 빼려고 했다.그러자 여이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다른 사람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내 행동에 불만도 없을 테니까.”온지유는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보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여이현의 두 눈을 보면 자꾸만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
아린은 방금 온지유와 여이현의 모습을 그저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만 보았다.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달콤해 이가 썩을 것 같았다.온지유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여이현의 사이엔 씁쓸한 감정만 흘렀다.아린은 신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신무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바뀐 거야. 설마, 또 나한테 쥐를 던질 거는 아니지?!”아린은 바로 멈칫했다.“에이, 그때는 철이 없어서 언니를 조금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이젠 잊어주세요. 그리고 신무열 님이랑 대장님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요.”그녀는 이내 온지유를 보더니 웃었다.“신무열 님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저희한테도 친절하시죠. 하지만 대장님께서는 언니를 좋아하고 계시죠.”“대체 어딜 봐서 날 좋아한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여이현도 다른 사람들한테 친절한 것 같은데.”아린은 곰곰이 생각했다.“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대장님께선 무뚝뚝한 분이시잖아요. 오로지 언니한테만 다정하시죠. 신무열 님은 아니에요. 누구한테나 다 다정하셔서 저희 모두가 신무열 님을 좋아하고 있죠.”신무열의 이름이 나오자 아린은 더 말이 많아졌다.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여이현은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그랬기에 ‘신무열'이라는 이름도 당연히 들었다.마을 사람 중 신무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두 여자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아 신무열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여이현은 주의력을 돌렸다. 그 순간 누군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용경호는 어디에 있지?”성재민이 답했다.“아, 아침부터 일찍 사람들을 데리고 제나 씨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았습니다.”여이현은 수상함을 느끼며 물었다.“뭐하러 갔지?”“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부터 살금살금 움직이면서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성재민도 용경호가 뭐하러 갔는지 몰랐다.제나는 아이와 함께 외출했던지라 멀리 나가진 못했을
제나 뿐만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니 울었던 것 같았다.여이현은 제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용경호를 보았다.용경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하간에 이 아이디어에 동의를 한 사람은 그였으니 말이다.“대장님, 죄송합니다.”“오늘 저녁 일은 네가 전부 맡아서 해!”여이현이 직설적으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들은 다시 산에서 내려갔다.다만 제나는 다리를 다쳤던지라 걸을 수 없었기에 병사에게 업히게 되었다.아린은 제나를 보더니 온지유에게 말했다.“저 여자를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아이도 그렇고요. 아마 전에 구해준 사람들이겠죠?”온지유가 답했다.“그렇겠지. 오면서 구한 난민은 많으니까.”아린이 또 말했다.“난민이 그렇게나 많았다면서 왜 저 여자만 데리고 온 거예요? 괜히 민폐만 되고 있잖아요.”“쉿, 조용히 해.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온지유는 서슴없이 말을 하는 아린을 보며 주의를 시키었다.제나는 병사의 등에 업혀 있었지만 앞서가고 있는 여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술을 틀어 물던 그녀는 병사에게 여이현을 따라잡아 달라고 했다.“대장님.”제나가 그를 불렀다.여이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무슨 일이죠?”제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어젯밤에 찾으러 갔는데 쉬고 계셨다면서요. 그래서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경호 씨 만나게 되어서 대장님께 차라도 우려 드리면 어떨까 상의하게 된 거예요. 제가 따온 찻잎 향이 아주 예술이거든요. 맛도 아주 좋고요. 비록 많이 따진 못했지만 대장님께서 마시기엔 충분한 양이에요. 게다가 아침 이슬을 맞아 차향이 더 풍부해졌죠.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단맛이 느껴질 거예요...”제나는 여이현에게 잘 보여 점수를 따고 싶었다.그래서 생색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나 잘 보살펴주시면 됩니다.”“그래도 저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대장
용경호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그는 온지유가 절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대용품을 찾은 것으로 여겼다.정말이지 한순간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당연히 알고 있었지.”용경호가 말했다.“하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잖아. 참, 홍혜주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함께 오신 것이 아닙니까?”그의 말에 온지유의 표정이 변했다.“저랑 혜주 언니는 흩어지게 되었어요. 저도 지금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저도 언니를 찾고 싶어요.”용경호는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그럼 저희랑 함께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혜주 씨라면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온지유는 홍혜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도망치는 데 성공했는지도 몰랐다.어쨌든 그녀는 어떻게든 법로의 영역에 들어가야 했다.뒤에 있던 제나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보는 눈빛부터 달랐기에 그녀는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온지유의 피부색과 얼굴을 보았다.단번에 어제 용경호가 말한 여자임을 눈치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대에 여자라곤 그녀 한 명뿐이었다.비록 지금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지만 온지유의 존재만으로 평온함은 깨져버렸다.제나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그들의 시선을 다시 집중시켜보려고 했다. 이렇게 존재감이 흐릿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기 아들을 보았다.“으앙!!!”이때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들도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보았다.“가일, 왜 그러니?”제나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내려주세요. 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봐야겠어요.”병사는 얼른 제나를 내려주었다.제나는 절뚝이며 아이에게 다가가 품에 안고는 달랬다.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제나 씨, 아이가 왜 우는 겁니까?”용경호가 물었다.“혹시 아까 넘어진 곳이 아픈 건 아닙니까?”“모르겠어요.”제나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내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대장님, 카일 좀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