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다소 기대하는 얼굴이었다.“그럼 내일은 언제쯤 찾아오면 될까요?”“그건 저희도 모릅니다.”그러자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내일 다시 찾아와 여이현과 함께 밥이라도 먹으려고 했으나 만나기 벌써 만나기 어려웠다.여자는 자신이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내일 일찍 찾아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마침 용경호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여이현이 다른 여자를 온지유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에이, 설마 아니겠지.”“하지만 목욕물까지 받아두라고 하셨잖아.”“대장님이 다른 여자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할 리가 없어. 이건 말도 안 돼.”“우리 대장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용경호는 혼잣말로 자신을 설득하면서 여이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이 온지유의 대용품까지 찾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온지유와 여이현은 이미 이혼했기에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여자는 고개를 들자 마침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용경호를 발견하곤 얼른 불렀다.“경호 씨!”용경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구해주었던 여자였다.이름은 제나.그들은 이곳에서 수많은 난민을 구해주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의 남편은 사망했다. 남편은 그들과 같은 나라 사람이었다.여자는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가족을 찾고 싶어 했다.원래는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난민이 가득한 곳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까.거기에다 제나의 남편은 죽기 전 그들에게 제나를 데리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달라고 했다. 자신의 부모님이 제나를 잘 돌봐줄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데리고 오게 된 것이다.오는 길 내내 제나는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가끔 병사들의 찢어진 옷을 바느질해주며 사소한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제나였습니까.”용경호는 그녀에게 친절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
용경호가 말했다.“괜찮습니다. 전부 대장님을 위한 일이니 말입니다.”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용경호도 걸음을 옮겼다.다만 제나는 용경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것을 잊지 않았다.너무도 궁금했다. 여이현이 관심을 보인다는 여자가 누군지.제나는 바로 처소로 가지 않았다. 근처에 서 있는 병사를 잡고 물었다.“전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건데, 언제쯤 다시 출발할 수 있을까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제나는 이내 떠보듯 물었다.“대장님께서 다정하게 대했다는 여자분도 이 마을 사람인가요?”병사는 곰곰이 생각하곤 말했다.“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제나는 병사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같은 나라 사람이라니.'‘어쩐지 왜 쑥덕대나 했더니.'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고마워요.”그녀는 처소로 돌아갔다.아이는 이미 깬 상태였다.“엄마, 어디 갔었어요?”남자아이도 Y 국 사람이었던지라 피부색이 구릿빛이었고 Y 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눈을 뜨지 제가나 없자 마음이 불안해졌다.제나가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바로 끌어안았다.제나는 아이에겐 다정한 엄마였다.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대장님 만나러 잠깐 나갔다 왔어.”아이가 물었다.“그 멋있는 아저씨요?”“그래.”제나는 아이의 옆에 앉아 우유를 한잔 건넸다.“그 멋있는 아저씨가 행여나 네가 우유 먹을 수 없을까 봐 특별히 널 위해 젖소를 잡아 왔단다.”아이는 입맛을 다시더니 우유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엄마, 맛있어요.”아이에겐 우유란 아주 맛있는 것이었다. 만족한 듯 아이는 입가에 묻은 우유도 혀로 핥았다.제나는 손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멋쟁이 아저씨가 좋아?”“좋아요! 아저씨가 준 우유도 맛있어요!”아이는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그러자 제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래, 우리한테도 아주 다정하시지.”...어젯밤, 온지유는 따듯한 물에 목욕을 했다.따듯한 물에 몸을 담가본 적이 언젠지도
바로 이때, 온지유는 수많은 여자들이 손에 도구를 들고 등에 바구니를 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중엔 아린도 있었다.“아린!”온지유는 아린을 불렀다.“약초 캐러 가는 거야? 이렇게 일찍 가?”아린이 답했다.“당연하죠. 일찍 가야 해요. 그래야 좋은 약초를 캘 수 있거든요. 어떤 약초는 이슬이 마르면 상태가 안 좋아지거든요. 참, 오늘 죽순도 캐보려고요. 지금 이 계절엔 죽순이 가득하니까요!”“그럼 나도 같이 가.”온지유는 어차피 할 일이 없었고 손발도 멀쩡하니 따라가서 구경이라도 하려고 했다.“그래요, 그럼 도구랑 바구니를 챙겨드릴게요.”아린은 열정적으로 말했다.온지유는 빠르게 그들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함께 산을 올라 약초를 캐려 했다.그녀들은 보드라운 온지유의 손을 보았다. 거친 일이라곤 하나도 해보지 않은 그런 손이었던지라 한마디씩 했다.“흠, 아가씨는 잘 캐지 못할 것 같네요.”온지유가 대답했다.“저 할 수 있어요. 보기엔 이래도 힘이 꽤 장난 아니거든요.”그녀는 Y 국 언어로 말했다.비록 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언어를 자주 듣다 보니 어느새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그러자 그녀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아주 똑똑하신 분이었네. 우리 말도 다 할 줄 알고 말이에요.”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조금 따라 할 줄만 알아요.”온지유는 그녀들의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그녀들은 온지유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아이고, 아가씨 정말로 대단하네요. 역시나 사람은 지식이 많아 봐야 한다니까요.”아린이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오며 작게 말했다.“정말로 할 줄 알게 된 거예요? 대단해요!”온지유는 선망의 눈빛으로 보는 아린을 보았다.“찰리가 조금 가르쳐줘서 할 줄 알게 된 거야. 조금밖에 못 해.”“그래도 이 정도면 대단한 거죠!”아린이 그녀에게 말했다.“제가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네요.”온지유는 눈썹을 튕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함께 산에 올라갔다.나무는 아주 컸고
뭐가 어찌 되었든 여이현에게 법로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저쪽에 현지 여성들이 약초를 캐고 있습니다.”그들은 열심히 약초를 캐고 있는 여자들을 발견했다.“이번에 동맹군들이 쳐들어와 약초를 대부분 빼앗아 갔으니 다시 캐야 할 겁니다. 약초는 현지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 말입니다.”“어라 근데...”성재민이 갑자기 의아한 목소리를 내더니 눈을 비볐다.“제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왜 현지인들 사이에 익숙한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까.”그의 말에 여이현도 고개를 돌려 약초를 캐고 있는 사람들 쪽을 보았다. 그 사이엔 온지유도 있었다.온지유는 빠르게 그녀들 사이에 적응했다.즐겁게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며 약초를 캐고 있었다.이곳의 여자들은 대부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할 줄 아는 언어도 Y 국의 언어뿐이었다.젊은 사람들만 학교를 조금 다녔었기에 그녀와 몇 마디 나눌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온지유는 문제없이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여이현은 성재민을 보며 말했다.“잘 못 본 게 아니야.”성재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네? 그럼 사모님께서 Y 국까지 따라오셨단 말입니까?”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며 말했다.“앞으로 사모님이 아니라 온지유 씨라고 해.”“네, 알겠습니다, 대장님.”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내 걱정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산길은 험하니 산 아래까지 호위해줘.”“네, 알겠습니다.”온지유는 약초를 캤다. 오늘 캔 약초를 바싹 말린다면 몇만 원에 팔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약초가 많은 것은 아니었고 찾기도 힘들었다.그녀는 약초를 바구니에 넣었다.“언니, 빨리 와요! 여기에 죽순이 있어요! 죽순이 조금 커서 도움이 필요해요. 언니 빨리 와요, 이 죽순이면 저녁에 맛있는 요리를 해드릴 수 있다고요!”아린은 잔뜩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죽순은 멧돼지 고기보다 더 비쌌다.게다가 말리면 더 오래 보관하고 먹을 수 있었다.육포처럼 말이다.맛도 비슷했다.죽순 돼지고기볶음, 확실히 구미가
온지유는 바지 밑단이 젖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뿐만 아니라 약초 캐러 온 사람 모두 젖었다.그랬기에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약초 캐러 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어차피 문제가 되지 않았다.“이따가 가서 다른 바지로 갈아입으면 돼.”온지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몸에 찬 기운이 들어가면 안 돼. 다리는 더 특히 주의해야 해. 나중에 류머티즘 질환에 걸릴 수 있으니까.”“그냥 잠깐일 뿐이야.”온지유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이따가 돌아가면 새 바지로 갈아입으면 돼.”여이현의 신경은 여전히 온통 젖어버린 그녀의 바지에 가 있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녀의 바지 밑단을 올렸다.온지유는 그의 행동에 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더니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얼른 말렸다.“뭐 하려는 거야. 난 정말로 괜찮다니까.”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무릎 보호대를 빼내더니 온지유의 다리에 착용해 주었다.다들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두 사람을 보았다.아린은 얼른 입을 가리며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아린은 순간 도파민이 분비되었다.꼭 로맨틱한 드라마 보는 것 같았다.어느 나라 사람이든 대부분 환상으로 가득한 드라마를 좋아했다.여이현은 그녀의 다리에 무릎 보호대를 꽉 묶은 후 담담하게 말했다.“이 무릎 보호대는 방수 기능이 있으니까 하고 있으면 좀 많이 나을 거야.”온지유는 약초 캐러 온 여자들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나만 있고, 저분들이 없는 건 불공평한 일이잖아. 대장님으로서 이 도리를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아.”그녀는 무릎 보호대를 빼려고 했다.그러자 여이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다른 사람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내 행동에 불만도 없을 테니까.”온지유는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보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여이현의 두 눈을 보면 자꾸만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
아린은 방금 온지유와 여이현의 모습을 그저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만 보았다.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달콤해 이가 썩을 것 같았다.온지유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여이현의 사이엔 씁쓸한 감정만 흘렀다.아린은 신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신무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바뀐 거야. 설마, 또 나한테 쥐를 던질 거는 아니지?!”아린은 바로 멈칫했다.“에이, 그때는 철이 없어서 언니를 조금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이젠 잊어주세요. 그리고 신무열 님이랑 대장님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요.”그녀는 이내 온지유를 보더니 웃었다.“신무열 님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저희한테도 친절하시죠. 하지만 대장님께서는 언니를 좋아하고 계시죠.”“대체 어딜 봐서 날 좋아한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여이현도 다른 사람들한테 친절한 것 같은데.”아린은 곰곰이 생각했다.“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대장님께선 무뚝뚝한 분이시잖아요. 오로지 언니한테만 다정하시죠. 신무열 님은 아니에요. 누구한테나 다 다정하셔서 저희 모두가 신무열 님을 좋아하고 있죠.”신무열의 이름이 나오자 아린은 더 말이 많아졌다.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여이현은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그랬기에 ‘신무열'이라는 이름도 당연히 들었다.마을 사람 중 신무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두 여자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아 신무열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여이현은 주의력을 돌렸다. 그 순간 누군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용경호는 어디에 있지?”성재민이 답했다.“아, 아침부터 일찍 사람들을 데리고 제나 씨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았습니다.”여이현은 수상함을 느끼며 물었다.“뭐하러 갔지?”“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부터 살금살금 움직이면서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성재민도 용경호가 뭐하러 갔는지 몰랐다.제나는 아이와 함께 외출했던지라 멀리 나가진 못했을
제나 뿐만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니 울었던 것 같았다.여이현은 제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용경호를 보았다.용경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하간에 이 아이디어에 동의를 한 사람은 그였으니 말이다.“대장님, 죄송합니다.”“오늘 저녁 일은 네가 전부 맡아서 해!”여이현이 직설적으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들은 다시 산에서 내려갔다.다만 제나는 다리를 다쳤던지라 걸을 수 없었기에 병사에게 업히게 되었다.아린은 제나를 보더니 온지유에게 말했다.“저 여자를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아이도 그렇고요. 아마 전에 구해준 사람들이겠죠?”온지유가 답했다.“그렇겠지. 오면서 구한 난민은 많으니까.”아린이 또 말했다.“난민이 그렇게나 많았다면서 왜 저 여자만 데리고 온 거예요? 괜히 민폐만 되고 있잖아요.”“쉿, 조용히 해.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온지유는 서슴없이 말을 하는 아린을 보며 주의를 시키었다.제나는 병사의 등에 업혀 있었지만 앞서가고 있는 여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술을 틀어 물던 그녀는 병사에게 여이현을 따라잡아 달라고 했다.“대장님.”제나가 그를 불렀다.여이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무슨 일이죠?”제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어젯밤에 찾으러 갔는데 쉬고 계셨다면서요. 그래서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경호 씨 만나게 되어서 대장님께 차라도 우려 드리면 어떨까 상의하게 된 거예요. 제가 따온 찻잎 향이 아주 예술이거든요. 맛도 아주 좋고요. 비록 많이 따진 못했지만 대장님께서 마시기엔 충분한 양이에요. 게다가 아침 이슬을 맞아 차향이 더 풍부해졌죠.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단맛이 느껴질 거예요...”제나는 여이현에게 잘 보여 점수를 따고 싶었다.그래서 생색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나 잘 보살펴주시면 됩니다.”“그래도 저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대장
용경호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그는 온지유가 절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대용품을 찾은 것으로 여겼다.정말이지 한순간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당연히 알고 있었지.”용경호가 말했다.“하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잖아. 참, 홍혜주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함께 오신 것이 아닙니까?”그의 말에 온지유의 표정이 변했다.“저랑 혜주 언니는 흩어지게 되었어요. 저도 지금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저도 언니를 찾고 싶어요.”용경호는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그럼 저희랑 함께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혜주 씨라면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온지유는 홍혜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도망치는 데 성공했는지도 몰랐다.어쨌든 그녀는 어떻게든 법로의 영역에 들어가야 했다.뒤에 있던 제나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보는 눈빛부터 달랐기에 그녀는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온지유의 피부색과 얼굴을 보았다.단번에 어제 용경호가 말한 여자임을 눈치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대에 여자라곤 그녀 한 명뿐이었다.비록 지금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지만 온지유의 존재만으로 평온함은 깨져버렸다.제나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그들의 시선을 다시 집중시켜보려고 했다. 이렇게 존재감이 흐릿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기 아들을 보았다.“으앙!!!”이때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들도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보았다.“가일, 왜 그러니?”제나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내려주세요. 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봐야겠어요.”병사는 얼른 제나를 내려주었다.제나는 절뚝이며 아이에게 다가가 품에 안고는 달랬다.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제나 씨, 아이가 왜 우는 겁니까?”용경호가 물었다.“혹시 아까 넘어진 곳이 아픈 건 아닙니까?”“모르겠어요.”제나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내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대장님, 카일 좀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