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바지 밑단이 젖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뿐만 아니라 약초 캐러 온 사람 모두 젖었다.그랬기에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약초 캐러 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어차피 문제가 되지 않았다.“이따가 가서 다른 바지로 갈아입으면 돼.”온지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몸에 찬 기운이 들어가면 안 돼. 다리는 더 특히 주의해야 해. 나중에 류머티즘 질환에 걸릴 수 있으니까.”“그냥 잠깐일 뿐이야.”온지유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이따가 돌아가면 새 바지로 갈아입으면 돼.”여이현의 신경은 여전히 온통 젖어버린 그녀의 바지에 가 있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녀의 바지 밑단을 올렸다.온지유는 그의 행동에 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더니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얼른 말렸다.“뭐 하려는 거야. 난 정말로 괜찮다니까.”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무릎 보호대를 빼내더니 온지유의 다리에 착용해 주었다.다들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두 사람을 보았다.아린은 얼른 입을 가리며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아린은 순간 도파민이 분비되었다.꼭 로맨틱한 드라마 보는 것 같았다.어느 나라 사람이든 대부분 환상으로 가득한 드라마를 좋아했다.여이현은 그녀의 다리에 무릎 보호대를 꽉 묶은 후 담담하게 말했다.“이 무릎 보호대는 방수 기능이 있으니까 하고 있으면 좀 많이 나을 거야.”온지유는 약초 캐러 온 여자들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나만 있고, 저분들이 없는 건 불공평한 일이잖아. 대장님으로서 이 도리를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아.”그녀는 무릎 보호대를 빼려고 했다.그러자 여이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다른 사람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내 행동에 불만도 없을 테니까.”온지유는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보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여이현의 두 눈을 보면 자꾸만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
아린은 방금 온지유와 여이현의 모습을 그저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만 보았다.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달콤해 이가 썩을 것 같았다.온지유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여이현의 사이엔 씁쓸한 감정만 흘렀다.아린은 신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신무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바뀐 거야. 설마, 또 나한테 쥐를 던질 거는 아니지?!”아린은 바로 멈칫했다.“에이, 그때는 철이 없어서 언니를 조금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이젠 잊어주세요. 그리고 신무열 님이랑 대장님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요.”그녀는 이내 온지유를 보더니 웃었다.“신무열 님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저희한테도 친절하시죠. 하지만 대장님께서는 언니를 좋아하고 계시죠.”“대체 어딜 봐서 날 좋아한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여이현도 다른 사람들한테 친절한 것 같은데.”아린은 곰곰이 생각했다.“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대장님께선 무뚝뚝한 분이시잖아요. 오로지 언니한테만 다정하시죠. 신무열 님은 아니에요. 누구한테나 다 다정하셔서 저희 모두가 신무열 님을 좋아하고 있죠.”신무열의 이름이 나오자 아린은 더 말이 많아졌다.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여이현은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그랬기에 ‘신무열'이라는 이름도 당연히 들었다.마을 사람 중 신무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두 여자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아 신무열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여이현은 주의력을 돌렸다. 그 순간 누군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용경호는 어디에 있지?”성재민이 답했다.“아, 아침부터 일찍 사람들을 데리고 제나 씨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았습니다.”여이현은 수상함을 느끼며 물었다.“뭐하러 갔지?”“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부터 살금살금 움직이면서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성재민도 용경호가 뭐하러 갔는지 몰랐다.제나는 아이와 함께 외출했던지라 멀리 나가진 못했을
제나 뿐만 아니라 아이의 얼굴에도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니 울었던 것 같았다.여이현은 제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용경호를 보았다.용경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하간에 이 아이디어에 동의를 한 사람은 그였으니 말이다.“대장님, 죄송합니다.”“오늘 저녁 일은 네가 전부 맡아서 해!”여이현이 직설적으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들은 다시 산에서 내려갔다.다만 제나는 다리를 다쳤던지라 걸을 수 없었기에 병사에게 업히게 되었다.아린은 제나를 보더니 온지유에게 말했다.“저 여자를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아이도 그렇고요. 아마 전에 구해준 사람들이겠죠?”온지유가 답했다.“그렇겠지. 오면서 구한 난민은 많으니까.”아린이 또 말했다.“난민이 그렇게나 많았다면서 왜 저 여자만 데리고 온 거예요? 괜히 민폐만 되고 있잖아요.”“쉿, 조용히 해.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온지유는 서슴없이 말을 하는 아린을 보며 주의를 시키었다.제나는 병사의 등에 업혀 있었지만 앞서가고 있는 여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술을 틀어 물던 그녀는 병사에게 여이현을 따라잡아 달라고 했다.“대장님.”제나가 그를 불렀다.여이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무슨 일이죠?”제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어젯밤에 찾으러 갔는데 쉬고 계셨다면서요. 그래서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경호 씨 만나게 되어서 대장님께 차라도 우려 드리면 어떨까 상의하게 된 거예요. 제가 따온 찻잎 향이 아주 예술이거든요. 맛도 아주 좋고요. 비록 많이 따진 못했지만 대장님께서 마시기엔 충분한 양이에요. 게다가 아침 이슬을 맞아 차향이 더 풍부해졌죠.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단맛이 느껴질 거예요...”제나는 여이현에게 잘 보여 점수를 따고 싶었다.그래서 생색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나 잘 보살펴주시면 됩니다.”“그래도 저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대장
용경호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그는 온지유가 절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대용품을 찾은 것으로 여겼다.정말이지 한순간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당연히 알고 있었지.”용경호가 말했다.“하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잖아. 참, 홍혜주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함께 오신 것이 아닙니까?”그의 말에 온지유의 표정이 변했다.“저랑 혜주 언니는 흩어지게 되었어요. 저도 지금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저도 언니를 찾고 싶어요.”용경호는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그럼 저희랑 함께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혜주 씨라면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온지유는 홍혜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도망치는 데 성공했는지도 몰랐다.어쨌든 그녀는 어떻게든 법로의 영역에 들어가야 했다.뒤에 있던 제나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보는 눈빛부터 달랐기에 그녀는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온지유의 피부색과 얼굴을 보았다.단번에 어제 용경호가 말한 여자임을 눈치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대에 여자라곤 그녀 한 명뿐이었다.비록 지금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지만 온지유의 존재만으로 평온함은 깨져버렸다.제나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그들의 시선을 다시 집중시켜보려고 했다. 이렇게 존재감이 흐릿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기 아들을 보았다.“으앙!!!”이때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들도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보았다.“가일, 왜 그러니?”제나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내려주세요. 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봐야겠어요.”병사는 얼른 제나를 내려주었다.제나는 절뚝이며 아이에게 다가가 품에 안고는 달랬다.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제나 씨, 아이가 왜 우는 겁니까?”용경호가 물었다.“혹시 아까 넘어진 곳이 아픈 건 아닙니까?”“모르겠어요.”제나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내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대장님, 카일 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온지유도 인사하는 수밖에 없었다.“안녕하세요, 전 온지유라고 해요.”여이현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담담하게 말했다.“소개는 그만하고 이만 가죠.”아이는 아주머니의 품에서 조용해졌다.제나는 계속 그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자꾸만 온지유와 여이현을 힐끗힐끗 보았다.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여이현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맺혔다. 그걸 발견한 제나는 기회라고 생각해 얼른 직접 만든 손수건을 건넸다.“대장님, 땀이 나셨네요. 제가 닦아드릴게요.”그녀는 손을 뻗었다.그러나 여이현의 이마에 닿기도 전에 여이현은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며 차가운 눈빛으로 보았다.“그럴 필요 없습니다!”제나가 말했다.“아, 죄송해요, 대장님. 전 그냥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서...”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문 채 그녀를 무시해 버렸다.제나는 다소 민망해졌다.또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 방금 두 사람의 행동과 대화를 전부 들었다.제나와 여이현이 꽤나 오랫동안 함께 했던 것 같았다.땀까지 닦아주려는 것을 보면 말이다.온지유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여이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가 닦아줘.”그의 말과 행동은 제나의 눈에 전부 들어왔다.제나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뭐?”그러나 온지유는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자신에게 한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여이현은 마침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그들은 산에서도 무장하고 있었고 아직 산길이 남아 있었던지라 다른 사람보다 10배는 더 힘들 것이었다.이것 또한 그들의 일상 훈련이기도 했다.여이현은 이미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나고 있었다.아린은 여이현의 말을 듣자마자 잔뜩 흥분하는 얼굴로 온지유를 보았다.역시나 두 사람의 모습은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그녀는 속으로 찰칵, 찰칵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두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한 제나는 다시 마음속에 욕망의 불꽃이 타올랐다.그녀는 더는 전쟁의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애당초 그녀도 원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로 외국인이었던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려 온지유를 보았다.더는 가만히 지켜볼 순 없었다.“지유 씨, 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요. 옷 다 젖었잖아요.”아주머니들이 온지유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린도 말했다.“제 옷으로 갈아입어요. 언니랑 저랑 몸매가 비슷한 것 같으니까요.”“그래.”온지유는 바구니에 있던 약초를 전부 꺼내 널었다.그들에겐 그들만의 전통 옷이 있었다.천부터 재봉까지 전부 직접 만들어서 입었다.다소 민족적 느낌이 나는 옷이었다.옷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사용되었는데 전부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대표하는 색이었다.온지유는 그들의 옷이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옷을 갈아입자 아린이 놀라며 말했다.“우와, 언니. 정말로 예뻐요. 제 옷을 입으니까 더 예쁜 것 같아요!”“그래?”온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린의 칭찬에 다소 부끄러워졌다.“정말이에요. 얼른 대장님께 보여주러 가요!”아린은 온지유를 끌고 나가려 했다.온지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왜 굳이 보여줘야 하는 거야?”아린이 말했다.“대장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고요. 그러니 당연히 언니가 얼마나 예쁜지를 보여줘야죠. 그 김에 그 애 엄마도 포기하게 말이에요.”아린은 계획이 있었다.여이현이 온지유에게만 잘해준다는 것을 눈치챘던 그녀였고 애초에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애 엄마가 나타나 여이현의 주위를 맴돌고 있지 않겠는가.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고 있는 제나를 보니 심히 눈에 거슬렸다.온지유는 아린의 손에 억지로 끌려 나왔다.여이현은 동료들과 길가에 서 있었다. 이때 성재민이 온지유를 발견하고 여이현에게 눈빛을 보냈다.“대장님!”여이현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온지유가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아린은 자기 옷
온지유는 여이현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그녀가 말한 건 사실이었으니까.앞으로 그녀와 여이현은 가는 길이 달라질 테니 당연히 한곳에서 죽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여이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세상에 여이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여이현이 어떤 눈빛으로 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아린의 팔에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겼다.아린은 여전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상황이 끝나버릴 줄은 몰랐다....대나무와 목재로만 지어진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건물 주위로 산도 있고 죽림도 있었다.아름다운 환경에 건물은 더 고전적인 분위기가 났다.건물은 아주 컸다. 몇십 평은 되는 것 같았고 건물 표면엔 정교하게 조각된 도안이 가득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남자가 서재에 있었다.서재도 꽤나 크고 넓었다. 벽 가득 책이 꽂혀 있었고 책장의 길이는 대략 7, 8m는 되는 것 같았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책이 있었다.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책을 읽었다.“오빠.”여자가 들어오며 다소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왔으면서 왜 말도 안 해 준 거예요? 오빠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잖아요.”남자는 고개를 들며 담담하게 여자를 보았다.“여긴 왜 왔어.”“보고 싶으니까 당연히 와야지.”여자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오빠 진짜 너무해. 왔으면서 나 보러 오지도 않고 말이야.”“잘 지내고 있었잖아. 그럼 된 거지.”“그래. 잘 지내고 있었지.”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하지만 오빠가 없으니까 삶이 지루하더라고.”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나한테 왜 쌀쌀맞은데?”여자는 냉담한 남자의 반응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난 오빠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잖아.”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를 보고 있는 여자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다른 오빠들은 동생을 그렇게 아껴준다고
율은 또 물었다.“다른 사람한테도 저래요?”“전 도련님과 접촉해본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제가 봐온 도련님은 평소에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흥미가 없으셨습니다.”김명무가 그녀에게 말했다.그 덕에 율은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그럼 집을 비운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도련님께서는 근처 마을에 산책가는 걸 좋아하셨습니다.”“마을에 산책할 게 뭐가 있다고요? 마을에 볼 것도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도련님께선 남들보다 많이 다르시지요.”“아빠는 오빠한테 관심이 없대요?”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오빠를 신경 써주길 바랐다.그랬다면 적어도 자신의 오빠가 자기에게도 쌀쌀맞게 굴지 않았을 테니까.“네, 관심이 없으십니다.”김명무가 말했다.율은 궁금해졌다. 마을에 대체 뭐가 있는 것인지.그녀도 구경하고 싶어졌다....“언니랑 대장님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은 건 제 착각일까요?”아린은 좋은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했다.“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은데, 또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그래, 네 말이 맞아.”온지유가 대답했다.“네?”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온지유의 신경은 여이현이 아닌 다른 곳에 팔린 상태였었다.그녀는 이 마을에 오래 머물고 있었지만 법로에 관한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혹시 말이야. 전에 법로의 도움을 받은 적 없어? 이번엔 마을이 꽤나 심각하게 망가져서 난 계속 법로가 너희들을 지켜줄 거로 생각했거든.”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아린이 답했다.“우리 마을은 확실히 예전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어요. 최근에 동맹군의 눈에 띄게 되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법로는 저희에게 이미 충분히 잘해줬어요.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물자도 많이 나눠주었죠. 내전은 정부에서도 관리하지 못하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아린은 이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물자도 주었다고?”온지유가 물었다.“언제? 난 왜 모르는데?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