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의 목소리에 여이현의 차가운 얼굴이 순간 반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역시나 온지유가 그곳에 서 있었다.온지유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버리기 전에 막아야 했다.여이현이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사모님.”배진호가 공손히 온지유를 불렀다.온지유는 진지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똑바로 바라봤다.여이현은 별말 없었으나 그 눈길은 온지유에게 왜 여기에 있는지 묻는 듯했다.온지유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가며 말했다.“이현 씨만 들어와요. 다른 사람들은 오지 마세요. 할 말이 있어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여이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감히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여이현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온지유의 진지함에 못 이겨 그녀의 말을 따랐다.엘리베이터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윽고 여이현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온지유는 말없이 여이현의 개인 사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여이현이 따라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여이현이 들어 온 것을 확인하고 온지유는 문을 닫고는 그를 압박하듯 물었다.“이현 씨 설마 노승아를 납치했어요?”여이현은 그녀와 문 사이에 좁은 공간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지유의 눈빛은 그를 추궁하고 있었고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좁은 공간을 벗어나려 발길을 옮겼다.“이상한 말을 함부로 하지 마.”여이현은 온지유의 뒤에 서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노승아를 내가 납치했다는 증거라도 있어?”온지유는 돌아서서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조금 전에 했던 말 다 들었어요. 노승아를 세상에서 없애겠다는 건가요? 그게 말이 돼요? 노승아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연예인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쉽게 사라져요?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예요? 당신은 단지 여진 그룹의 대표일 뿐이 아니에요. 법을 아는 사
여이현의 말에 온지유의 얼굴이 굳었다.걱정돼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 여이현은 무책임한 말만 하고 있었다.“이현 씨,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해요?”그 말에 여이현은 되려 웃음을 터트렸다.“날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잖아. 이게 바로 나야. 그리고 앞으로는 이보다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르고!”여이현의 낯선 표정을 마주한 온지유는 이제껏 자신이 한 걱정도 모두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여이현을 힘껏 밀치고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괜한 생각을 했나 보네요. 당신 정신은 이젠 고칠 약도 없어 보이네요. 그렇게 내 말이 듣기 싫으면 저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거예요.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사세요. 상관 안 할 테니까. 당신이 재밌으면 됐어요!”여이현은 뒤로 두발 물러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온지유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온지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여이현이 갑자기 바뀐 것도.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피에로가 된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바로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오기로 한 목적을 떠올려 다시 발길을 멈췄다.“실은 오늘 노승아를 찾으러 온 거였어요. 전에 조직으로 끌려 들어간 일이 노승아와 연관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요. 노승아의 성격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내 지워진 기억도 바로 조직에 있던 때의 기억이에요. 왜 그 기억에 당신이 끼어 들어온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전 노승아가 지금 어디에 있던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여이현의 눈길이 흔들렸다. 무언가 눈치챈 듯한 기색이었다.온지유는 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딱히 따로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온지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듯한 눈길이었다. 그와 온지유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을지도 몰랐다.온지유가 사무실을 떠나려는 찰
나 죽는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아픈 거예요?”온지유는 살면서 이 정도의 아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여이현은 보고만 있어도 같이 식은땀이 흘렀다.“안 죽어, 괜찮을 거야. 아이가 곧 태어날 거니까 조금만 더 참자.”“아악!”온지유는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핏줄을 세우고 여이현을 바라봤다.“이현 씨, 이 아이는 당신 아이니까 꼭 잘 대해줘야 해요. 우리 아이의 인생은 당신에게 맡겼어요.”온지유는 아이를 낳으면 탈진해서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아직 숨 쉴 겨를이 있을 때 꼭 모든 것을 분부 해둬야 했다. 여이현이 두 사람의 아이를 잘 대해주도록.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약간의 피비린내를 느꼈다.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말이 없자 거절당한 줄 알고 계속 말했다.“이 아이는 당신의 첫 아이예요... 이담에... 이담에 다른 아내를 얻게 되더라도... 아이는 홀대하지 마세요... 이 아이에게는 당신밖에 없으니까...”온지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어느새 좌석 시트는 여이현의 힘에 의해 찢어졌다.여이현은 온지유를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더 이상 피비린내를 맡을 수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괜찮아, 지유야. 넌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런 말 하지 마.”“이런 때에도 약속 한번 못 해주는 거예요?”온지유는 여이현의 긍정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도 마음 놓고 죽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여이현은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고 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대답 좀 해봐요!”온지유는 거의 발악하며 눈물을 쏟아냈다.“내가 없어지면 아이는 당신밖에 없단 말이에요. 아이의 아빠라면 가여운 우리 애한테 잘 대해 달라고요!”온지유는 울먹였다.온지유도 아이가 소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여이현이 제대로 아빠 노릇을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그러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넌
곧 배진호에게서 소식이 들려왔다.“여 대표님, 의사를 찾았습니다. 산부인과 전문의고 30년 경력의 베테랑이십니다.”의사는 중년의 여성분이었고 안경을 쓴 모습에서 학사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외모에서부터 충분히 신뢰감을 주었다.“제발 제 아내를 구해 주세요. 아내와 아이 모두 무사히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원하시는 만큼의 보수를 챙겨 드리겠습니다!”여이현은 그저 의사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그녀와 아이를 구해야 했다.“길을 비켜 주세요. 빨리 들어가 봐야 합니다!의사도 긴장된 모습으로 서둘러 온지유를 살펴보기 위해 차 안으로 들어갔다.도로는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차를 빼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온지유는 이미 하혈을 하고 있었다.원래 제왕절개 수술을 약속해 둔 상태였고 출산 예정일도 바로 이 시기였다.온지유는 이미 담당 의사와 연락을 해둔 상태였다.오늘 노승아를 만나서 일을 마무리 지으면 병원에 가서 출산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나오려고 하는 바람에 자연 분만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그래서 다른 것들을 손에 쥐어 보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건 없었고 그저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렀다.의사는 옆에서 온지유를 위로하며 말했다.“긴장하지 마세요. 힘 빼고 심호흡하며 다리를 벌려 보세요!”온지유는 의식이 거의 희미해질 정도였지만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벌렸다.고통은 온몸에 퍼져 나갔고 이렇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느꼈다.의사는 온지유를 계속해서 다독이며 상태를 살폈다.바깥에서는 여이현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앞의 상황 좀 보고 오세요. 빨리 지유를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요!”여이현은 초조하게 지시했다.아이를 낳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데 거기에다 독까지 중독된 상태였다.지금 이렇게 교통 체증 속에 갇혀 있는 건 매초 그녀의 생명
그 말을 하는 여이현의 눈은 점점 더 붉어졌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아이를 위한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그녀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여이현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 상태 때문이든 온지유 죽음 때문이든 만약 아이에게 엄마가 없어진다면 그는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그래서 마음 아프더라도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자신을 미워하게 되더라도 모성애를 일깨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온지유는 강한 여자였고 이번에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역시나 온지유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방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더 이상 기운 없이 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여이현, 이 나쁜 새끼!”그녀가 있는 힘껏 힘을 주자 드디어 뭔가가 몸에서 쭉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그 순간 온지유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부었다. 온지유는 온몸이 가벼워지고 그대로 기운이 빠져 쓰러졌다.“와앙!”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의사는 갓 태어난 아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여이현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었다.“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남자아이네요!”의사도 기쁜 표정이었다.의사는 아이를 여이현에게 보여주었다.아직 처치도 끝나지 않은 작은 아기는 연약한 피부에서 피 냄새를 풍기며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아무런 방어도 못 하는 어린 아기의 모습에 여이현은 큰 자극을 받았다.그 순간 그는 아기를 움켜쥐고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여이현은 그저 주먹을 꽉 쥔 채 아이를 쳐다볼 수조차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데려가세요.”의사는 여이현이 기뻐할 줄 알았지만 돌아온 차가운 반응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아빠인 여이현이 그리 말하니 의사는 곧바로 아기를 멀리 데리고 갔다.그의 눈빛은 마치 아이를 죽일 듯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당장 아이를
여이현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온지유는 자신이 이미 죽은 줄 알았다.눈 앞은 온통 어둠뿐이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공포만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아직 아이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아기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건강한지조차 알지 못했다.온지유는 강한 생존 본능을 느꼈지만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에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그 사람은 키가 크고 체격도 건장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그저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온지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공포를 느꼈다.그녀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누구세요?”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온지유는 확신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나를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거예요?”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온지유는 그가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듯이 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때, 그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온지유는 겁이 났지만 이 지경에 저 흐릿한 무언가를 굳이 두려워해야 할까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이미 본인이 귀신이 되었는데 뭐가 더 두려울 게 있겠는가?온지유는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그 그림자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온지유는 얼굴이 없는 그림자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꺄악!”온지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것은 꿈이 아니었다.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현실과 꿈이 겹친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모든 것이 존재했던 것 같으면서도 마치 꿈인 것 같았다.그녀는 병실에 있었다.“온지유 씨, 괜찮으세요?”간호사가 비명을 듣고 급히 들어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온지유는 간호사를 바라봤다. 여전히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저... 어떻게 된 거죠?”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마치
온지유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놀라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기적 같았다.꿈을 꾼 것처럼 믿기지 않았다.그때, 문이 열리고 여이현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여전히 고고한 모습이었다. 깊은 눈매는 온지유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는 여전히 빛나는 사람이었다.“몸 상태는 어때? 불편한 곳은 없어?”여이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온지유는 너무 기뻐서 다시 침대에서 내려왔다.“괜찮아요. 우리 아기 봤어요? 간호사가 아기가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다고 난 볼 수 없대요.”여이현은 온지유가 맨발로 내려오는 걸 보고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봤어. 귀엽더라. 눈은 너를 닮았고 코는 나를 닮았어. 울음소리도 크고 힘이 넘치던데. 아마 나중에 장난꾸러기가 되겠어.”그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온지유는 슬리퍼를 신으며 말했다.“정말요? 진짜 장난꾸러기라면 좋겠네요. 괴롭힘당하지 않고 강하게 자라겠죠. 하지만 잘 교육해야 해요. 아이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말이에요.”“알았어.”여이현은 담요를 가져다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방금 출산 했으니 조리를 잘해야 해.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마. 바람을 많이 쐬면 나중에 두통이 생길 수 있다고 들었어.”“알아요. 나도 이미 다 알아봤으니까요.”온지유는 전에 이미 산후조리에 대해 공부를 했었다.“이 한 달 동안 잘 회복해야 아기를 안아볼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계속해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에게 옷을 덮어주며 말했다.“너를 위해 산후조리식을 준비해 뒀어. 조금 있다가 가져다줄 테니까 잘 챙겨 먹어.”“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아직 둘 사이 갈등을 잊지 않았다.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 그녀는 그 문제들을 일부러 회피하고 있었다.아무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
여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줬다.“지유야, 늘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해 줘서 정말 고마워.”여이현의 말에 온지유는 안심하고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줘요, 네? 나와 아기 모두 온전한 가정이 필요해요. 아이가 건강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는 게 제 소원이에요. 당신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죠?”여이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넌 나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거야.”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렸다.“왜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알아요. 비록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나는 당신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알겠어.”여이현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그럼 대답해 줄게. 네 말이 맞아. 노승아는 내가 감금해 두었어.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내 손에 있지 않아.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내가 잡혀서 벌을 받는 일은 없을 거야. 노승아가 너에게 했던 모든 일은 내가 이미 되갚아 줬으니까.”말을 하며 여이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마치 온지유를 대신해 복수를 했다는 사실이 매우 통쾌하다는 듯했다.온지유는 그 말에 오히려 불안해졌다.“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여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노승아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온지유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이현이 그리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여이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좀 지루할 거야. 네 친구들을 자주 불러서 얘기 나눌 수 있도록 할게. 나도 시간 날 때마다 들를 거고.”“알겠어요.”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럼, 아기는 언제쯤 볼 수 있어요?”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그건 의사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 네가 산후조리 기간을 마칠 때쯤이면 볼 수 있을 거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