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승아 씨는 며칠째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행방불명 상태예요.”회사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온지유는 노승아에게 기억을 되찾았다고 겁줘서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하지만 돌아온 답은 노승아가 며칠째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는 답이었다.뭔가 이상했다.온지유는 노승아가 출소 후 어디 행사에도 참여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그 행사는 한산하게 끝나 노승아의 입지는 바닥을 쳤으며 경력도 완전히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종까지 될 정도는 아니었다.혹시 실종을 빙자해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으려는 건가?전형적인 노승아의 수법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회사도 모른다면 단순한 홍보 전략은 아닌 듯했다.온지유는 다시 물었다.“그래도 회사 직원인데 신고는 안 하나요?”“우리가 승아 씨 가족도 아니고 회사에도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까요.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요. 말 한마디라도 회사 이미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그 말을 듣고 온지유는 차가운 현실을 느꼈다.여이현이 처음 연예 기획사를 설립했을 때는 그 모든 게 노승아를 위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노승아가 실종됐는데도 모두가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니.온지유는 그들의 냉혹함과 무정함에 화가 났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노승아는 출소하고 나서 다시 연예계에 복귀했다.사람들이 그녀가 출소한 사실을 모르는 만큼 큰 영향은 없어야 했다.문제가 된 건 그 기사 때문이었다.그리고 만약 회사가 나서서 조치를 취했다면 기사는 금세 사라졌을 것이다.그녀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회사가 공세를 펼쳤다면 기사 삭제는 물론이고 여론도 잠잠해졌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마치 노승아가 회사에서 버림받은 듯했다.달리 홍보도 없고 네티즌들의 비난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한때 회사의 대표 연예인이었던 노승아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여이현이 노승아를 그렇게 아꼈다면 지금쯤 모든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그런데 왜
온지유의 목소리에 여이현의 차가운 얼굴이 순간 반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역시나 온지유가 그곳에 서 있었다.온지유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버리기 전에 막아야 했다.여이현이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사모님.”배진호가 공손히 온지유를 불렀다.온지유는 진지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똑바로 바라봤다.여이현은 별말 없었으나 그 눈길은 온지유에게 왜 여기에 있는지 묻는 듯했다.온지유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가며 말했다.“이현 씨만 들어와요. 다른 사람들은 오지 마세요. 할 말이 있어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여이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감히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여이현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온지유의 진지함에 못 이겨 그녀의 말을 따랐다.엘리베이터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윽고 여이현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온지유는 말없이 여이현의 개인 사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여이현이 따라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여이현이 들어 온 것을 확인하고 온지유는 문을 닫고는 그를 압박하듯 물었다.“이현 씨 설마 노승아를 납치했어요?”여이현은 그녀와 문 사이에 좁은 공간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지유의 눈빛은 그를 추궁하고 있었고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좁은 공간을 벗어나려 발길을 옮겼다.“이상한 말을 함부로 하지 마.”여이현은 온지유의 뒤에 서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노승아를 내가 납치했다는 증거라도 있어?”온지유는 돌아서서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조금 전에 했던 말 다 들었어요. 노승아를 세상에서 없애겠다는 건가요? 그게 말이 돼요? 노승아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연예인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쉽게 사라져요?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예요? 당신은 단지 여진 그룹의 대표일 뿐이 아니에요. 법을 아는 사
여이현의 말에 온지유의 얼굴이 굳었다.걱정돼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 여이현은 무책임한 말만 하고 있었다.“이현 씨,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해요?”그 말에 여이현은 되려 웃음을 터트렸다.“날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잖아. 이게 바로 나야. 그리고 앞으로는 이보다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르고!”여이현의 낯선 표정을 마주한 온지유는 이제껏 자신이 한 걱정도 모두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여이현을 힘껏 밀치고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괜한 생각을 했나 보네요. 당신 정신은 이젠 고칠 약도 없어 보이네요. 그렇게 내 말이 듣기 싫으면 저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거예요.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사세요. 상관 안 할 테니까. 당신이 재밌으면 됐어요!”여이현은 뒤로 두발 물러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온지유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온지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여이현이 갑자기 바뀐 것도.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피에로가 된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바로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오기로 한 목적을 떠올려 다시 발길을 멈췄다.“실은 오늘 노승아를 찾으러 온 거였어요. 전에 조직으로 끌려 들어간 일이 노승아와 연관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요. 노승아의 성격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내 지워진 기억도 바로 조직에 있던 때의 기억이에요. 왜 그 기억에 당신이 끼어 들어온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전 노승아가 지금 어디에 있던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여이현의 눈길이 흔들렸다. 무언가 눈치챈 듯한 기색이었다.온지유는 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딱히 따로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온지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듯한 눈길이었다. 그와 온지유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을지도 몰랐다.온지유가 사무실을 떠나려는 찰
나 죽는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아픈 거예요?”온지유는 살면서 이 정도의 아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여이현은 보고만 있어도 같이 식은땀이 흘렀다.“안 죽어, 괜찮을 거야. 아이가 곧 태어날 거니까 조금만 더 참자.”“아악!”온지유는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핏줄을 세우고 여이현을 바라봤다.“이현 씨, 이 아이는 당신 아이니까 꼭 잘 대해줘야 해요. 우리 아이의 인생은 당신에게 맡겼어요.”온지유는 아이를 낳으면 탈진해서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아직 숨 쉴 겨를이 있을 때 꼭 모든 것을 분부 해둬야 했다. 여이현이 두 사람의 아이를 잘 대해주도록.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약간의 피비린내를 느꼈다.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말이 없자 거절당한 줄 알고 계속 말했다.“이 아이는 당신의 첫 아이예요... 이담에... 이담에 다른 아내를 얻게 되더라도... 아이는 홀대하지 마세요... 이 아이에게는 당신밖에 없으니까...”온지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어느새 좌석 시트는 여이현의 힘에 의해 찢어졌다.여이현은 온지유를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더 이상 피비린내를 맡을 수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괜찮아, 지유야. 넌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런 말 하지 마.”“이런 때에도 약속 한번 못 해주는 거예요?”온지유는 여이현의 긍정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도 마음 놓고 죽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여이현은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고 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대답 좀 해봐요!”온지유는 거의 발악하며 눈물을 쏟아냈다.“내가 없어지면 아이는 당신밖에 없단 말이에요. 아이의 아빠라면 가여운 우리 애한테 잘 대해 달라고요!”온지유는 울먹였다.온지유도 아이가 소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여이현이 제대로 아빠 노릇을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그러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넌
곧 배진호에게서 소식이 들려왔다.“여 대표님, 의사를 찾았습니다. 산부인과 전문의고 30년 경력의 베테랑이십니다.”의사는 중년의 여성분이었고 안경을 쓴 모습에서 학사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외모에서부터 충분히 신뢰감을 주었다.“제발 제 아내를 구해 주세요. 아내와 아이 모두 무사히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원하시는 만큼의 보수를 챙겨 드리겠습니다!”여이현은 그저 의사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그녀와 아이를 구해야 했다.“길을 비켜 주세요. 빨리 들어가 봐야 합니다!의사도 긴장된 모습으로 서둘러 온지유를 살펴보기 위해 차 안으로 들어갔다.도로는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차를 빼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온지유는 이미 하혈을 하고 있었다.원래 제왕절개 수술을 약속해 둔 상태였고 출산 예정일도 바로 이 시기였다.온지유는 이미 담당 의사와 연락을 해둔 상태였다.오늘 노승아를 만나서 일을 마무리 지으면 병원에 가서 출산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나오려고 하는 바람에 자연 분만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그래서 다른 것들을 손에 쥐어 보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건 없었고 그저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렀다.의사는 옆에서 온지유를 위로하며 말했다.“긴장하지 마세요. 힘 빼고 심호흡하며 다리를 벌려 보세요!”온지유는 의식이 거의 희미해질 정도였지만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벌렸다.고통은 온몸에 퍼져 나갔고 이렇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느꼈다.의사는 온지유를 계속해서 다독이며 상태를 살폈다.바깥에서는 여이현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앞의 상황 좀 보고 오세요. 빨리 지유를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요!”여이현은 초조하게 지시했다.아이를 낳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데 거기에다 독까지 중독된 상태였다.지금 이렇게 교통 체증 속에 갇혀 있는 건 매초 그녀의 생명
그 말을 하는 여이현의 눈은 점점 더 붉어졌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아이를 위한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그녀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여이현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 상태 때문이든 온지유 죽음 때문이든 만약 아이에게 엄마가 없어진다면 그는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그래서 마음 아프더라도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자신을 미워하게 되더라도 모성애를 일깨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온지유는 강한 여자였고 이번에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역시나 온지유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방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더 이상 기운 없이 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여이현, 이 나쁜 새끼!”그녀가 있는 힘껏 힘을 주자 드디어 뭔가가 몸에서 쭉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그 순간 온지유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부었다. 온지유는 온몸이 가벼워지고 그대로 기운이 빠져 쓰러졌다.“와앙!”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의사는 갓 태어난 아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여이현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었다.“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남자아이네요!”의사도 기쁜 표정이었다.의사는 아이를 여이현에게 보여주었다.아직 처치도 끝나지 않은 작은 아기는 연약한 피부에서 피 냄새를 풍기며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아무런 방어도 못 하는 어린 아기의 모습에 여이현은 큰 자극을 받았다.그 순간 그는 아기를 움켜쥐고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여이현은 그저 주먹을 꽉 쥔 채 아이를 쳐다볼 수조차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데려가세요.”의사는 여이현이 기뻐할 줄 알았지만 돌아온 차가운 반응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아빠인 여이현이 그리 말하니 의사는 곧바로 아기를 멀리 데리고 갔다.그의 눈빛은 마치 아이를 죽일 듯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당장 아이를
여이현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온지유는 자신이 이미 죽은 줄 알았다.눈 앞은 온통 어둠뿐이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공포만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아직 아이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아기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건강한지조차 알지 못했다.온지유는 강한 생존 본능을 느꼈지만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에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그 사람은 키가 크고 체격도 건장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그저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온지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공포를 느꼈다.그녀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누구세요?”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온지유는 확신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나를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거예요?”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온지유는 그가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듯이 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때, 그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온지유는 겁이 났지만 이 지경에 저 흐릿한 무언가를 굳이 두려워해야 할까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이미 본인이 귀신이 되었는데 뭐가 더 두려울 게 있겠는가?온지유는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그 그림자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온지유는 얼굴이 없는 그림자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꺄악!”온지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것은 꿈이 아니었다.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현실과 꿈이 겹친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모든 것이 존재했던 것 같으면서도 마치 꿈인 것 같았다.그녀는 병실에 있었다.“온지유 씨, 괜찮으세요?”간호사가 비명을 듣고 급히 들어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온지유는 간호사를 바라봤다. 여전히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저... 어떻게 된 거죠?”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마치
온지유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놀라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기적 같았다.꿈을 꾼 것처럼 믿기지 않았다.그때, 문이 열리고 여이현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여전히 고고한 모습이었다. 깊은 눈매는 온지유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는 여전히 빛나는 사람이었다.“몸 상태는 어때? 불편한 곳은 없어?”여이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온지유는 너무 기뻐서 다시 침대에서 내려왔다.“괜찮아요. 우리 아기 봤어요? 간호사가 아기가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다고 난 볼 수 없대요.”여이현은 온지유가 맨발로 내려오는 걸 보고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봤어. 귀엽더라. 눈은 너를 닮았고 코는 나를 닮았어. 울음소리도 크고 힘이 넘치던데. 아마 나중에 장난꾸러기가 되겠어.”그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온지유는 슬리퍼를 신으며 말했다.“정말요? 진짜 장난꾸러기라면 좋겠네요. 괴롭힘당하지 않고 강하게 자라겠죠. 하지만 잘 교육해야 해요. 아이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말이에요.”“알았어.”여이현은 담요를 가져다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방금 출산 했으니 조리를 잘해야 해.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마. 바람을 많이 쐬면 나중에 두통이 생길 수 있다고 들었어.”“알아요. 나도 이미 다 알아봤으니까요.”온지유는 전에 이미 산후조리에 대해 공부를 했었다.“이 한 달 동안 잘 회복해야 아기를 안아볼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계속해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에게 옷을 덮어주며 말했다.“너를 위해 산후조리식을 준비해 뒀어. 조금 있다가 가져다줄 테니까 잘 챙겨 먹어.”“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아직 둘 사이 갈등을 잊지 않았다.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 그녀는 그 문제들을 일부러 회피하고 있었다.아무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