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줬다.“지유야, 늘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해 줘서 정말 고마워.”여이현의 말에 온지유는 안심하고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줘요, 네? 나와 아기 모두 온전한 가정이 필요해요. 아이가 건강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는 게 제 소원이에요. 당신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죠?”여이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넌 나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거야.”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렸다.“왜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알아요. 비록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나는 당신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알겠어.”여이현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그럼 대답해 줄게. 네 말이 맞아. 노승아는 내가 감금해 두었어.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내 손에 있지 않아.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내가 잡혀서 벌을 받는 일은 없을 거야. 노승아가 너에게 했던 모든 일은 내가 이미 되갚아 줬으니까.”말을 하며 여이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마치 온지유를 대신해 복수를 했다는 사실이 매우 통쾌하다는 듯했다.온지유는 그 말에 오히려 불안해졌다.“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여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노승아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온지유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이현이 그리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여이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좀 지루할 거야. 네 친구들을 자주 불러서 얘기 나눌 수 있도록 할게. 나도 시간 날 때마다 들를 거고.”“알겠어요.”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럼, 아기는 언제쯤 볼 수 있어요?”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그건 의사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 네가 산후조리 기간을 마칠 때쯤이면 볼 수 있을 거
온지유도 감개무량했다.“언니를 만난 것도 나에겐 큰 행운이었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거네요.”여이현은 두 사람이 대화에 푹 빠진 걸 보고 덧붙였다.“홍혜주 씨는 이제 우리 팀 사람이야. 전에 호신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 나중에 혜주 씨에게 배워도 좋을 것 같아.”“정말요?”온지유의 눈이 반짝였다.“좋아요! 산후조리 끝나면 꼭 배우고 싶어요!”여이현은 온지유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차올랐다.물론, 그는 그녀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천천히 이야기 나눠. 시간은 많으니까.”여이현은 말했다.그 모습에 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가려고요?”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다 끝내고 나면 다시 올게.”“알겠어요.”온지유는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다.여이현은 병실을 나서며 문을 살며시 닫았다.문밖에는 이미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나이가 지긋한 50대의 남성이었다.그는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정장을 입은 채 마치 집사 같은 인상을 풍겼다.그의 뒤에는 체격이 우람한 경호원 네다섯 명이 따르고 있었다.그는 공손하게 여이현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3개월이 당신의 기한입니다. 약속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여이현의 얼굴은 차가웠고 목소리도 무미건조했다.“알고 있어요.”집사는 여이현의 확고한 대답을 듣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렇게 말한 후 집사는 그의 일행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병원 앞에는 여러 대의 고급 승용차가 대기 중이었고 수많은 경호원들이 경계하고 있었다.그들은 그야말로 대단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옆에 서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그가 지금까지 그들을 보며 웃지 못했던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대표님, 3개월 후에
온지유는 혼란스러웠다.“이유가 뭐죠?”홍혜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 냈다.“하루 종일 연구실에 있어서 아주 바쁠 거예요. 전화를 받기 어려우니 방해하지 마세요. 일 끝나면 분명 보러 올 것 같아요.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연구실의 성과도 신경 써야 하니까요.”홍혜주의 말을 듣고 나서 온지유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인명진이 본업에 집중하는 것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반인과 달리,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알겠어요. 바쁜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볼게요.”온지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홍혜주는 온지유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안심했지만, 표정이 어색해졌다.그러나 온지유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될까 봐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하고 싶었던 말을 삼키고 나서 홍혜주는 온지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소대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지유 씨 덕분에 새로운 신분을 얻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모든 게 두 분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말 감사해요. 소대장님,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홍혜주는 마치 맹세하듯 말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이렇게 답했다.“언니,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자매잖아요. 예전에는 언니가 저를 지켜줬으니, 이제는 제가 언니를 지켜줄 차례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현 씨의 덕도 좀 보긴 했지만, 제가 있는 한 언니는 무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홍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지유의 어깨에 기대었다.“정말 감사해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온지유는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홍혜주를 끌어안았다.“그리고 제가 호신술을 배울 수 있는 것도 다 언니 덕이잖아요.”“그러니 잘 회복하세요. 제가 가진 모든 기술을 다 알려줄게요.”홍혜주가 웃으며 말했다.온지유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지금보다 더 큰 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지선율은 감정에 북받쳐 훌쩍이며 수상소감을 이어나갔다.“특별히 감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했지만, 이 ‘글로리’라는 작품이 성공을 거둔 것은 모두 온지유 씨의 덕분입니다. 온지유 씨는 저뿐만 아니라 우리 드라마 팀 전체를 구해줬어요. 그녀 없이는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었었을 겁니다. 지유 씨도 이 작품을 완성시킨 감독이니 꼭 기억해 주세요. 온지유 씨, 감사합니다!”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또 한 번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온지유는 그 길고 험난했던 여정이 떠오르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지선율이 수상소감을 마치자, 장다희가 무대에 올라와 수상소감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어 보였다.“10년 전, 저는 무명 배우였어요. 그리고 이어진 10년 동안 성공도 맛보고 실패도 겪었죠. 하지만 결국엔 다시 일어섰습니다!”그녀의 말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또 한 번 큰 박수가 이어졌다.장다희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앞에서 지선율 감독님께서 언급했던 것처럼, 제가 가장 감사드리고 싶은 분은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또 한분의 감독님이에요. 바로 온지유 씨입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감독님은 저를 끌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상을 받게 해준 은인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저를 사랑해 주는 팬들이라면 이분의 이름을 꼭 기억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의 공동 연출을 맡았던 온지유 감독님을 기억해 주세요!”온지유는 조금 민망해하며 싱긋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시상식에 참가하여 자신을 언급할 거라고 사전에 말한 적 없었기에 더 큰 감동이었다. 온지유는 원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장다희의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그녀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예상대로 그날 밤 온지유의 이름은 실시간 검
녹음 파일이 재생되자 거친 숨소리와 힘든 목소리가 들렸다.그리고 곧 나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의 다 찾은 것 같아. 하지만 확실하진 않아.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어... 휴대폰은 들고 갈 수 없어.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휴대폰을 반입할 수 없거든. 갖고 들어갔다가 들키면 큰일 나니까... 지유야, 난 아직 살아 있어. 너를 위해서,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야. 마지막으로 이걸 주운 분께 제 연락처에 있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주길 부탁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그 한마디로 녹음은 끝이 났다.‘민우는 무사할 거야!’온지유는 휴대폰을 꽉 쥐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아직 상황이 버틸만할 거야. 나쁘지 않을 거야. 모든 게 잘될 거야!’온지유는 전화를 걸어준 상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이 조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민우가 그 조직에 들어갔다면 정말 무사히 나올 수 있을까? 그런 게 아니라면 민우의 부모님께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온지유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몸조리 중이었고 아직 호신술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가봤자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깊은 밤, 여이현이 온지유를 찾아왔다.온지유가 깊이 잠든 시간에 맞춰 살며시 병실로 들어왔다.그는 잠깐이라도 온지유의 얼굴을 보려고 찾아왔던 것이었다.방 안으로 들어가니, 창문 커튼이 걷혀 있었다.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온지유의 하얀 피부를 더욱 환하게 비추었다.여이현은 침대 옆에 서서 그윽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그런데 그 순간, 온지유가 그의 손을 잡으며 눈을 떴다.여이현은 자는 줄 알았던 온지유가 움직이자 깜짝 놀랐다.“이 시간에 왜 온 거죠?”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온지유는 조금 안심하며 말했다.“그럼요. 좋은 사람이죠.”“나도 누군가가 네 곁에 함께했으면 좋겠어.”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그 말에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여이현은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이며 말했다.“어서 자.”“그런 식으로 잠재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현 씨는 예전과 다르게 변했어요. 요즘 이현 씨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요.”그녀의 말은 여이현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그는 멀어지는 게 맞는 건지, 더 가까워져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여이현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실망하게 할까 봐 두려웠어. 그리고 네가 나를 미워할까 봐 겁났어.”온지유는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그 누구도 곁에 없는 것처럼 느꼈다.그리고 계속해서 밀려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고 싶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여이현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다시 아프게 된 건가요? 모든 게 잘못된 것 같아요. 다 잃어버린 것 같고, 아무것도 곁에 남지 않은 것 같아요.”아이도 곁에 없었고 나민우도 없었고 심지어 인명진조차 없었다. 게다가 여이현마저 떠날 것만 같은 낌새를 보이자, 그녀는 불안해했다.여이현은 주먹을 꼭 쥐고 몸을 돌려 그녀를 다시 안아주었다.그의 턱이 그녀의 머리에 살짝 닿았다.“내가 여기 있잖아. 난 항상 옆에 있을 거야. 내 몸이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은 절대 너를 떠난 적 없어.”“정말인가요?”온지유는 여이현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말했다.“널 속이려던 적은 없어. 난 네가 잘 살아가길 바랄 뿐이야.”온지유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눈물을 흘렸다.“깨어난 뒤로 모든 게 이상해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긴 건가요...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아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이현 씨...”“볼 수 있어.”여이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꼭
온지유는 큰 충격에 빠졌다.간호사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아기가 여기에 없을 리가 없잖아!’그녀는 충격 속에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간호사님,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죠? 제가 며칠 전에 출산했는데, 제 아기가 여기 없으면 어디 있겠어요?”온지유는 다른 문제일 가능성도 생각했다.“만약 제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다면, 아기 아빠인 ‘여이현’이라는 이름으로도 찾아보세요. 여이현이요.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온지유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마음속에는 불안이 가득했다.간호사는 다시 확인했다.“여이현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아기는 없습니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그럴 리가 없어요!”온지유는 믿지 않았다.“제가 직접 찾아볼게요. 제가 확인해야겠어요!”그녀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간호사가 이름을 찾지 못했으리라 의심하며,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목록에서 이름을 찾지 못하자, 온지유는 점점 더 절망에 빠져갔다.‘당황해서 이름을 제대로 찾지 못했을 거야! 그렇겠지?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계속해서 진상을 파악하려 했다.“제가 직접 찾아볼게요. 아마 뭔가 잘못된 걸 거예요.”그러나 간호사는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여기까지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온지유의 감정은 점점 격해졌다.“저는 이제 막 출산을 마친 엄마예요. 모두 아기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잖아요. 아기가 없을 리가 없어요. 지금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고 거짓말하는 거죠? 다들 나를 속이고 있어요. 아기는 분명 여기 있다고요!”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병실에서도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나도 나를 속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를 속일 수 있겠지... 설마... 모두 나를 속이고 있던 거였어!’“환자분, 진정하세요...”간호사는 온지유를 달래려 했다.“저희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요.”“다시 확인
온지유는 붉은 눈으로 여이현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옆에 간호사들이 있었지만 온지유는 눈치 보지 않았다.“여이현, 도대체 언제쯤이면 솔직해질 수 있어? 언제쯤이면 나를 속이지 않을 수 있냐고! 왜 아이를 잃은 일까지 나를 속인 거야!”“미안해.”온지유는 절규하듯 외쳤다.“미안하면 뭐가 달라져? 아이가 돌아와? 도대체 뭘 한 거야! 어떻게 아이가 죽을 수 있어? 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여이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에는 냉정하고 단호한 빛이 서려 있었다.“그 애는 태어날 때 이미 죽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온지유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깊은 증오로 변해갔고, 여이현을 향한 분노가 들끓었다. 그녀는 충격에 몸을 떨며, 그의 팔을 덥석 물었다.여이현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쏟아내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온지유는 계속해서 여이현을 노려보았다.여이현의 팔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무표정한 여이현의 얼굴은 오히려 온지유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온지유는 이를 악물고 그의 팔을 더 깊게 물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셨지만,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입가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온지유는 떨리는 목소리로 차갑게 물었다.“여이현, 왜 너는 내게 재앙만 가져다주는 거야? 내가 살아 있는데 내 아이는 왜 죽어야만 했던 거야? 왜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내 아이는 어디 있어? 살아 있으면 보고 싶고, 죽었으면 그 시신이라도 봐야겠어.”여이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이미 묻었어.”온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어디에 묻었어?”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온지유는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지금은 네 몸이 중요해. 몸조리 먼저 하고, 그때 이야기하자.”그러나 온지유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내 아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