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지선율은 감정에 북받쳐 훌쩍이며 수상소감을 이어나갔다.“특별히 감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했지만, 이 ‘글로리’라는 작품이 성공을 거둔 것은 모두 온지유 씨의 덕분입니다. 온지유 씨는 저뿐만 아니라 우리 드라마 팀 전체를 구해줬어요. 그녀 없이는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었었을 겁니다. 지유 씨도 이 작품을 완성시킨 감독이니 꼭 기억해 주세요. 온지유 씨, 감사합니다!”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또 한 번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온지유는 그 길고 험난했던 여정이 떠오르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지선율이 수상소감을 마치자, 장다희가 무대에 올라와 수상소감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어 보였다.“10년 전, 저는 무명 배우였어요. 그리고 이어진 10년 동안 성공도 맛보고 실패도 겪었죠. 하지만 결국엔 다시 일어섰습니다!”그녀의 말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또 한 번 큰 박수가 이어졌다.장다희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앞에서 지선율 감독님께서 언급했던 것처럼, 제가 가장 감사드리고 싶은 분은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또 한분의 감독님이에요. 바로 온지유 씨입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감독님은 저를 끌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상을 받게 해준 은인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저를 사랑해 주는 팬들이라면 이분의 이름을 꼭 기억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의 공동 연출을 맡았던 온지유 감독님을 기억해 주세요!”온지유는 조금 민망해하며 싱긋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시상식에 참가하여 자신을 언급할 거라고 사전에 말한 적 없었기에 더 큰 감동이었다. 온지유는 원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장다희의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그녀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예상대로 그날 밤 온지유의 이름은 실시간 검
녹음 파일이 재생되자 거친 숨소리와 힘든 목소리가 들렸다.그리고 곧 나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의 다 찾은 것 같아. 하지만 확실하진 않아.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어... 휴대폰은 들고 갈 수 없어.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휴대폰을 반입할 수 없거든. 갖고 들어갔다가 들키면 큰일 나니까... 지유야, 난 아직 살아 있어. 너를 위해서,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야. 마지막으로 이걸 주운 분께 제 연락처에 있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주길 부탁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그 한마디로 녹음은 끝이 났다.‘민우는 무사할 거야!’온지유는 휴대폰을 꽉 쥐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아직 상황이 버틸만할 거야. 나쁘지 않을 거야. 모든 게 잘될 거야!’온지유는 전화를 걸어준 상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이 조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민우가 그 조직에 들어갔다면 정말 무사히 나올 수 있을까? 그런 게 아니라면 민우의 부모님께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온지유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몸조리 중이었고 아직 호신술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가봤자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깊은 밤, 여이현이 온지유를 찾아왔다.온지유가 깊이 잠든 시간에 맞춰 살며시 병실로 들어왔다.그는 잠깐이라도 온지유의 얼굴을 보려고 찾아왔던 것이었다.방 안으로 들어가니, 창문 커튼이 걷혀 있었다.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온지유의 하얀 피부를 더욱 환하게 비추었다.여이현은 침대 옆에 서서 그윽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그런데 그 순간, 온지유가 그의 손을 잡으며 눈을 떴다.여이현은 자는 줄 알았던 온지유가 움직이자 깜짝 놀랐다.“이 시간에 왜 온 거죠?”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온지유는 조금 안심하며 말했다.“그럼요. 좋은 사람이죠.”“나도 누군가가 네 곁에 함께했으면 좋겠어.”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그 말에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여이현은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이며 말했다.“어서 자.”“그런 식으로 잠재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현 씨는 예전과 다르게 변했어요. 요즘 이현 씨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요.”그녀의 말은 여이현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그는 멀어지는 게 맞는 건지, 더 가까워져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여이현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실망하게 할까 봐 두려웠어. 그리고 네가 나를 미워할까 봐 겁났어.”온지유는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그 누구도 곁에 없는 것처럼 느꼈다.그리고 계속해서 밀려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고 싶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여이현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다시 아프게 된 건가요? 모든 게 잘못된 것 같아요. 다 잃어버린 것 같고, 아무것도 곁에 남지 않은 것 같아요.”아이도 곁에 없었고 나민우도 없었고 심지어 인명진조차 없었다. 게다가 여이현마저 떠날 것만 같은 낌새를 보이자, 그녀는 불안해했다.여이현은 주먹을 꼭 쥐고 몸을 돌려 그녀를 다시 안아주었다.그의 턱이 그녀의 머리에 살짝 닿았다.“내가 여기 있잖아. 난 항상 옆에 있을 거야. 내 몸이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은 절대 너를 떠난 적 없어.”“정말인가요?”온지유는 여이현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말했다.“널 속이려던 적은 없어. 난 네가 잘 살아가길 바랄 뿐이야.”온지유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눈물을 흘렸다.“깨어난 뒤로 모든 게 이상해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긴 건가요...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아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이현 씨...”“볼 수 있어.”여이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꼭
온지유는 큰 충격에 빠졌다.간호사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아기가 여기에 없을 리가 없잖아!’그녀는 충격 속에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간호사님,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죠? 제가 며칠 전에 출산했는데, 제 아기가 여기 없으면 어디 있겠어요?”온지유는 다른 문제일 가능성도 생각했다.“만약 제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다면, 아기 아빠인 ‘여이현’이라는 이름으로도 찾아보세요. 여이현이요.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온지유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마음속에는 불안이 가득했다.간호사는 다시 확인했다.“여이현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아기는 없습니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그럴 리가 없어요!”온지유는 믿지 않았다.“제가 직접 찾아볼게요. 제가 확인해야겠어요!”그녀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간호사가 이름을 찾지 못했으리라 의심하며,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목록에서 이름을 찾지 못하자, 온지유는 점점 더 절망에 빠져갔다.‘당황해서 이름을 제대로 찾지 못했을 거야! 그렇겠지?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계속해서 진상을 파악하려 했다.“제가 직접 찾아볼게요. 아마 뭔가 잘못된 걸 거예요.”그러나 간호사는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여기까지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온지유의 감정은 점점 격해졌다.“저는 이제 막 출산을 마친 엄마예요. 모두 아기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잖아요. 아기가 없을 리가 없어요. 지금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고 거짓말하는 거죠? 다들 나를 속이고 있어요. 아기는 분명 여기 있다고요!”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병실에서도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나도 나를 속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를 속일 수 있겠지... 설마... 모두 나를 속이고 있던 거였어!’“환자분, 진정하세요...”간호사는 온지유를 달래려 했다.“저희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요.”“다시 확인
온지유는 붉은 눈으로 여이현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옆에 간호사들이 있었지만 온지유는 눈치 보지 않았다.“여이현, 도대체 언제쯤이면 솔직해질 수 있어? 언제쯤이면 나를 속이지 않을 수 있냐고! 왜 아이를 잃은 일까지 나를 속인 거야!”“미안해.”온지유는 절규하듯 외쳤다.“미안하면 뭐가 달라져? 아이가 돌아와? 도대체 뭘 한 거야! 어떻게 아이가 죽을 수 있어? 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여이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에는 냉정하고 단호한 빛이 서려 있었다.“그 애는 태어날 때 이미 죽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온지유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깊은 증오로 변해갔고, 여이현을 향한 분노가 들끓었다. 그녀는 충격에 몸을 떨며, 그의 팔을 덥석 물었다.여이현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쏟아내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온지유는 계속해서 여이현을 노려보았다.여이현의 팔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무표정한 여이현의 얼굴은 오히려 온지유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온지유는 이를 악물고 그의 팔을 더 깊게 물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셨지만,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입가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온지유는 떨리는 목소리로 차갑게 물었다.“여이현, 왜 너는 내게 재앙만 가져다주는 거야? 내가 살아 있는데 내 아이는 왜 죽어야만 했던 거야? 왜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내 아이는 어디 있어? 살아 있으면 보고 싶고, 죽었으면 그 시신이라도 봐야겠어.”여이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이미 묻었어.”온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어디에 묻었어?”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온지유는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지금은 네 몸이 중요해. 몸조리 먼저 하고, 그때 이야기하자.”그러나 온지유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내 아이
온지유는 작은 상자를 품에 안고 울부짖으며 절규했다.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슬픔이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키려 했던 그녀였지만, 왜 자신만 살아남고 아이는 떠나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며 묵직한 감정이 가슴 깊숙이 뒤엉켰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온지유를 들어 올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아이는 다시 생길 거야. 네가 이겨내야 해.”그러나 온지유는 이성을 잃은 채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의 슬픔은 너무나도 컸고, 그 슬픔은 그가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로 치유될 수 없었다.그녀가 아이를 기다려온 만큼, 지금 느끼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느껴졌다.여이현을 본 순간, 그녀의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거칠게 밀쳐냈다.“나한테서 떨어져!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 ‘아이는 또 생길 거야’라는 말로 다 덮으려고 하는 거야? 넌 전혀 슬프지 않은 거지? 넌 마음이 없는 거야? 처음부터 넌 우리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여이현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온지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고개를 홱 돌리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너는 나를 만질 자격조차 없어!”여이현의 손은 공중에서 멈췄고, 그 순간 그의 눈에는 잠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온지유는 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깊은 실망을 느꼈다. 그가 늘 이토록 망설이며, 한 번도 자신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그녀의 실망은 그가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온전히 싸우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삶에서 언제나 첫 번째가 아니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참 대단해. 여이현, 너는 모
온지유의 얼굴에는 눈물과 흙이 뒤섞여 있었고,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모든 힘이 빠져 결국 그녀는 기절하고 말았다.여이현은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그의 걱정이 깊어졌다.온지유의 눈물이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이현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대장님.”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그들을 둘러쌌다. 여이현은 온지유를 가로로 안고서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여기를 깨끗하게 정리해 줘요.”홍혜주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정말 이대로 가는 건가요? 온지유 씨는 분명 엄청난 상처를 받았을 거예요.”여이현은 눈을 감았다 뜨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거예요. 살아 있어야 희망이 있을 거잖아요. 비록 아이는 죽었지만, 지유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요.”그에게는 아이의 목숨보다 온지유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그녀가 그를 미워하더라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홍혜주는 잠시 말을 잃고 침묵했다. 누구도 온지유의 이런 극심한 슬픔을 마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남은 일은 혜주 씨가 맡아서 처리해 주세요. 지유를 잘 보호해 줘요. 내가 부탁한 일은 잊지 말고...”홍혜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온지유를 안고 침대로 옮겼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후,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흙이 묻은 손을 씻기고, 손톱에 낀 흙까지 세심하게 제거해 주었다.그녀의 상처 난 손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속으로 깊은 아픔을 느꼈다. 물을 몇 번이나 갈아가며, 그는 끈기 있게 그녀의 상처를 보살폈다.마지막으로 그의 눈길은 온지유의 얼굴에 다시 머물렀다.여이현은 몇 시간 동안 온지유 곁에 조용히 머물렀다. 그녀가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후,
온지유는 배진호가 찾아오자 잠시 놀랐고, 시선을 문 쪽으로 향하며 물었다.“누가 왔나요?”홍혜주는 문을 열자, 들어온 사람은 배진호였다.온지유는 순간 여이현이 온 것으로 생각해 표정이 잠시 변했다. 하지만 이내 실망한 듯 속으로 생각했다.‘배 비서 혼자 온 것뿐이네...’그녀는 한 번 더 문밖을 힐끗 바라봤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배진호는 서류철을 들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고, 그의 등장은 온지유에게 의아함을 안겨주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배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온지유는 그가 왜 찾아왔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어두운 생각을 잠시 뒤로하고, 차분하게 물었다.“배 비서님, 왜 오신 거예요? 여이현 씨는요? 이현 씨가 보내서 온 건가요? 무슨 일이죠?”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고, 배진호도 그녀와 여이현 사이에 깊은 균열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그만큼 이 상황이 쉽지 않음을 눈치챘다.배진호는 서류철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대표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서류에 서명을 부탁드리려고요.”온지유는 그의 말을 듣고 허탈하게 비웃음을 터뜨렸다.“서명하라고요? 무슨 서류인데요? 이혼 서류도 이미 다 서명했는데, 아직도 나와 관련된 서류가 남아 있나요?”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이혼할 때 이미 그녀는 별장 한 채와 몇십억 원을 받은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이 말하길 그들은 이혼 협의서를 작성했지만 법적으로 이혼 절차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했다.그러나 그들이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자신이 서명할 서류가 있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이건 재산과 지분을 이전하는 서류입니다.”배진호는 그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온지유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배진호를 바라본 후, 서류를 집어 들고 한 번 더 확인했다.서류를 훑어본 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온지유에게 넘기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온지유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
온지유는 그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할 겨를도 없을 수 있어요?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들도 휴가가 있던데 명진 씨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요? 당신 생각도 잘 알아요.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괜찮지만 그래도 결국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할 에너지가 있으면 친자식을 낳으면 되잖아요.”지금은 좋은 마음으로 입양했다 하여도 커서 입양한 자녀들 간의 모순으로 불행하게 된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온지유의 걱정이 틀리진 않았다.인명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 말은 왜 해. 너의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내가 왜 다른 아이를 입양할 생각 하겠어? 법로가 나한테 너하고 별이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고 또 별이가 나중에 크면 이 삼촌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잖아. 그때가 서 별이가 날 너희 별장으로 데리고 가면 우린 또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온지유는 인명진의 이런 생각에 너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임무를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명진 씨 옆에는 반드시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온지유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명진의 자료를 만들었고 바로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분명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데 혹시나 인명진이 원하지 않으면 되려 부담이라도 될가봐 다시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그때 여이현은 집에 돌아와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 요즘 항상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온지유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인명진 씨 땜에 그래.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삶을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인명진 씨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냥 혼자 살고 있잖아. 금방 그의 자료를 만들어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 했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에게 빌붙어 사는 작은 변호사가 아니었고 심지어 임다혜와의 앙금도 풀고 둘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김혜연 쪽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온지유는 여름방학에 윤별을 데리고 Y 국으로 갈 계획이었고 인명진도 직접 나설 예정이었다.온지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결혼도 하고 홍혜주는 출산도 앞두고 있었고 양시은과 나도현도 이젠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인명진만 미혼에 아직도 혼자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만난 남자를 처음엔 좋게 보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자 안심되었다.심지어 나민우도 지난달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고 결국 이제 남은 건 인명진뿐이었다.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많이 도와준 인명진을 가족으로 생각한 온지유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어 하지 않으려던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명진 씨, 제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자기 행복 찾아 잘 살고 있는데 명진 씨도 이젠 그럴 때가 된 거 같아요. 명진 씨처럼 훌륭한 남자가 본인만 원한다면 좋은 사람은 많을 거잖아요.”인명진은 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전에 여이현이 죽었다고 생각한 5년 동안은 인명진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그 뒤로 인명진은 뒤에서 지켜주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온지유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네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나설 수 있어 좋고 더욱이 법로가 떠나시면서 옆에서 너를 잘 지켜주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하지만 저는 명진 씨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명진 씨도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셔야죠. 홍혜주 씨도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데 이젠 정말 명진 씨만 남았어요. 그러면...”온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명진은 말을 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인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건 아니잖아. 율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어.”인명진은 항상 온지유가 행복하
현민아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준 예물인데 나한테서 뺏어가려 하지 마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잖아요. 근데... 아빠는 사기꾼이야.”현민아의 끝없는 투정 부림에 현민아의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집 계약서도 돌려받았고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현민아의 아버지는 현민아가 원하든 하지 않든 일단 둘러메고 집으로 들어갔다.양시은은 옆에 서 있는 하민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니 이런 일로 어떤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돼. 유치원에서도 일부러 남을 냉정하게 대해서도 안 돼, 알았지?”“알겠어요.”하민은 양시은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최정숙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우리 귀염둥이 손자가 유치원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그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말했다.“집 계약서 8권이면 재산도 적지 않은데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양시은은 최정숙이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요즘 애들이 뭘 알겠어요. 애들끼리 뭔 생각을 못 하겠어요.”“엄마, 왜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만들어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에 정말 탄복해요. 집 계약서 8권이 뭐가 대단하다고, 우리 하민이랑 비기면 턱도 없는걸요. 그 여자아이는 단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지금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도 이십여 년이나 남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변할 것으로 생각한 나도현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혼약을 맺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와 같이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일은 귀찮다고만 생각되었다.최정숙은 나도현의 말에 변명하며 말했다.“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라고는 안 했잖아? 뭐가 그렇게 안 달아 할 지경이니?”“그럴 만도 했잖아요. 전에 저도 엄마가 벌려놓은 이런 일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는데 제 아들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죠.”나도현의 말에는 토하나라도
“제가 어제 집에 돌아와 하민이의 가방을 열어보니 이런 집 계약서들이 있었어요. 현민아가 가방에 집어넣었나 봐요.”알고 보니 하민이가 잘생겼다고 오랫동안 지켜본 현민아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하민이가 평소에 말을 잘 안 한 것 땜에 삼촌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었고 그런 행동이 귀여웠던 삼촌은 조롱하는 식으로 현민아에게 친구보다 결혼이 좋은 거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에 현민아가 몰래 집 계약서들을 학교에 가져가 예물이라면서 하민이의 가방에 넣어 준 것이었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말을 듣고 더욱 난처해졌다.“우리 꼬마 아가씨, 넌 아직 어려서 예물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 다음부터는 남의 책가방에 물건을 함부로 넣으면 안 돼.”현민아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난 하민이랑 친구 하고 싶단 말이에요. 친구가 되고 싶으면 뭐라도 보여줘야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잖아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시은도 현민아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하민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민아가 어디서 어떤 말을 듣고 저런 행동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에 두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현민아 아버님, 여기 집 현민아가 넣어 둔 계약서들입니다.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현민아의 아버지가 계약서를 확인하자 현민아는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전 돌려받기 싫어요. 아빠가 말했었잖아요. 이미 준 것은 곧 엎질러진 물이랑 같아 주워 담을 수 없다면서요. 그럼 책임을 져야잖아요. 이 물건들은 제가 이미 하민한테 줬고 하민이도 받아들이고 집에 가져갔으니 앞으로 제 사람이 될 건데 이렇게 다시 제가 준 예물을 회수하면 앞으로 저보고 어떻게 하민이랑 잘 지내라는 거예요? 아빠가 이렇게 하면 하민이 한테는 제가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현민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울어댔다.요즘 아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서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 현민아 아버지와 양시은도 현민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만 양시은이 예상치 못했던
“어젯밤에 집에 도착했는데 네가 없길래 전화하려고 하자 마침 여이현 씨가 널 데려다주셨어.”나도현은 어제 마음이 심란하여 술을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여기 비타민이라도 좀 먹어.”양시은은 나도현이 깨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고 비타민 한 알을 건네주었다.나도현도 어제 양시은과 잘 소통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심지어 양시은이 너무 바쁜 탓에 돌아오지 못하면 그녀가 간 도시를 찾으러 가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출장에서 돌아와 지금 옆에 있는 양시은을 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넌 이러는 내가 싫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넌 하나뿐인 내 남편인데 왜 싫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양시은은 항상 아이가 평안하고 나도현이 건강하고 그렇게 그들 세 식구가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매우 소박한 소원을 품고 지내왔다.“하지만 나...”“어제 여이현 씨가 널 데려왔을 때 나한테 둘이 잘 소통해 보라고 하길래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예측했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널 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양시은은 나도현의 옆에 앉아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이 심리 건강에도 안 좋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진심을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했다.양시은의 말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나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전날 술자리에서 여이현과 배진호가 양시은의 우수함을 부정하지 말고 더욱이 양시은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한 말이 생각나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내 생각이 좀 많이 유치했던 것 같아.”“아니야, 날 사랑하는 표현이라는 거 잘 알아. 만약 내가 너라면 너보다 더 했을지도 몰라. 나도현, 내가 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마.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네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양시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도현의 두 손을 잡고 말하자 그는 더 부끄러워졌다.나도현의 도움과 격려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착하게 자란 윤별은 초등학교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으며 여이현도 매우 기뻐했다.하지만 윤별은 항상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작은 빨간 꽃을 만들어 외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붙여놨다.온지유는 윤별의 행동을 눈치채고 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며 말했다.“별아, 너무 슬퍼하지 마. 외할아버지는 지금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셔서 우리를 보고 계실 꺼야. 그리고 내년이면 외숙모 집에서 별이 남동생과 여동생도 태어날 거야.”“그런데요 엄마, 외할아버지께서 제가 1학년이 되어 글자를 배우면 공부를 가르쳐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또...”윤별은 말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전에 윤별이가 브람을 따라갔을 때 브람은 매우 엄하게 대했지만, 온경준이 경성에 데려다 키우는 동안은 윤별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면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었다.그리고 윤별의 몸이 허약하니 온경준은 옆에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쓴 약도 잘 먹게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여 먹이면서 많은 추억을 쌓아 주었다.그때 윤별은 온경준에게 물었었다.“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온경준의 집은 Y 국이었고 윤별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다.“별이랑 엄마가 어디에 있으면 할아버지 집은 거기에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예전에 많은 잘못을 했고 그렇게 되어 너희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었어.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되였는데 할아버지가 어찌 Y 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겠어? 게다가 이쪽에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온경준은 그때 윤별이랑 함께 많은 수공예도 했고 병아리도 기르고 꽃을 심고 풀도 심었지만, 지금은 반 친구들 외에 하민 동생이 놀러 오고 평소에 윤별은 항상 혼자였다.온지유는 윤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외할아버지는 그저 우리보다 먼저 다른 세계로 가신 거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사명이라는 걸 가지고 와.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앞으로 때가
여이현이 추천해 주겠다는 의사는 인명진이었다.인명진의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당시 그와 지석훈이 하민에게 수술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하민은 지금처럼 이렇게 빨리 낫지 않았을 것이다.“난 병이 없거든.”나도현이 자신의 심병을 인정하지 않자 여이현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지난 4년 동안 치료해 온 걸 아니까 너의 이런 심리는 이해는 할 수 있어. 근데 넌 배 비서가 말했듯이 양시은 씨의 우수함을 부정하면 안 돼. 그녀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텐데 네 옆에만 가둬 두고 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게다가 네가 뭐 사랑을 강제로 시키는 대표도 아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지 마.”나도현은 여이현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답답하고 복잡한 이 심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는 양시은이 모두에게 존중받는 것도 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앞에서만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시다 보니 나도현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양시은은 오늘 저녁에야 출장에서 돌아왔고 여이현이 만취한 나도현을 데려온 것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여이현 씨, 저의 남편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둘이 잘 소통해 봐요.”여이현의 한마디에 양시은은 바로 눈치채고 나도현이 열일곱 살 난 아이 같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은은 도우미를 불러 나도현을 위층으로 옮기고 침대에 눕혀 신발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줬다.금방 출장 다녀온 탓에 힘들었지만 인내성 있게 나도현을 돌보았고 혹시라도 토할까봐 곁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나도현은 갑자기 양시은을 품에 안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시은, 나 정말 널 너무 사랑해. 그래서 또 잃을까 봐 두려워.”“너의 마음을 나도 다 알고 있어.”“니가 너무 우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볼까 봐 겁이 나, 그리고...”양시은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바보야, 너는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