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홍혜주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은 자신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홍혜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죽을지도 모르고, 감옥에 갈 수도 있겠죠. 이미 내 운명은 받아들였어요. 난 좋은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공을 세워 죄를 씻을 기회가 있다면요?”홍혜주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정말 그런 기회가 있어요?”여이현은 그녀에게 말했다.“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공을 세워 죄를 갚을 기회가 주어져요.”이 말을 듣고 홍혜주의 눈에는 잠시 실망이 비쳤다.“나에겐 그런 기회가 없겠죠.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싸우고 설치는 것 말고는 아무 쓸모도 없는데.”여이현은 그녀에게 말했다.“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어요. 상처가 회복되면 사람들을 구하러 가세요.”홍혜주는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여이현의 말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그녀에게 다가왔다.자신의 인생에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도 사람들을 구할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세상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고 느꼈다.홍혜주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녀도 인정받고 싶었다.여이현은 병실을 나왔다. 용경호와 성재민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말했다.“홍혜주 씨를 병실로 데려다줘.”“제가요?”용경호는 자신을 가리켰다.“너는 나와 감옥에 가고.”여이현이 성재민에게 말했다.“알겠습니다!”그들이 병원을 떠나자 용경호는 마치 자신이 소외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어서 나 좀 부축해요!”홍혜주는 용경호에게 말했다.용경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대장님의 명령을 잊은 거예요? 어서 부축하세요!”홍혜주는 손을 내밀었다. 그를 곤란하게 할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용경호는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그녀를 부축했다.홍혜주는 만족스러운 듯했다....여이현과 성재민은 함께 감옥에 도착했다.여이현을 보자 감옥의 간수들이 공손하게 말했다.“대장님!”이 감옥은 섬에 위치해 있었고 규모도 매우
흉터남은 웃으며 말했다.“침착한 거 보니까 노석명에게서 해독제를 얻은 모양이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노석명이 진짜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리 없잖아.”그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당신, 몸에 이상이 느껴지지 않나?”쿵!여이현은 두 손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커다란 소리가 울렸고 그의 차가운 눈빛이 흉터남을 향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답해!”흉터남은 여이현의 붉어진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해독제를 받지 못했군.”여이현의 팔에는 혈관이 도드라졌고, 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듯했다. 손마디에서 소리가 났다.흉터남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별다른 저항 없이 입을 열었다.“법로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나도 노석명도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지.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리고 노석명과 내가 원수라거나 그런 건 없었어. 그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지. 노석명이 내 이익을 건드리려고 했고, 난 그걸로 그를 위협했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난 지금 이렇게 죄수 신세를 지게 된 거야.”그는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위협?”여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뭘 더 알고 있죠?”그 말을 듣고 흉터남은 일부러 말을 아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천히 옆에 놓인 물을 집어 들었다.잔을 입에 가까이 대자 여이현의 눈빛이 변했다. 의심이 들었는지 흉터남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움직이지 마!”흉터남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이 감옥은 네 사람들로 가득하잖아. 내가 여기서 죽을 일은 없을 거야. 물도 이미 확인했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흉터남은 갑자기 목이 막힌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잔 속의 물은 무색무취였지만 그는 이미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그걸 마셨어?”여이현은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흉터남은 갑자기 피를 토해냈다.그조차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감옥에 들어왔을 때부터 누군가 자신
이 사건은 감옥의 명성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이었고 감옥장으로서 그의 자리도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대장님, 제 부주의였습니다...”여이현은 그 말을 듣고서도 앞에 있는 교도관을 바라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그의 눈은 붉게 변했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교도관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그 충격은 매우 강력했다.교도관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쓰러져 기침을 했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다.그러나 여이현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다시 끌어올리며 말했다.“조직이 보낸 놈이냐?”교도관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 임무는 끝났어.”그의 표정은 마치 세뇌된 사람처럼 신성한 임무를 완수한 것 같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임무를 완수했으니 그의 삶도 완전한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노석명이야, 아니면 법로야? 그 사람들이 숨기려는 게 뭐지?”여이현이 날카롭게 물었다.“모르지.”교도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내 임무는 그 사람을 죽이는 것뿐이었어!”그의 비열한 모습에 여이현의 눈에는 더 큰 분노가 깃들었다. 분노는 마치 홍수처럼 폭발했고 주먹으로 교도관을 세게 두 대 때렸다.교도관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었다.그러나 여이현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피를 본 그는 더욱 폭주했고 교도관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다시 발로 차기 시작했다.그는 그를 죽일 기세로 계속해서 공격했다.“대장님!”그의 부하들은 그가 위험해 보이자 다급히 달려와 말리기 시작했다.“이러다 진짜 사람 죽습니다!”“비켜!”여이현은 그들을 거칠게 밀쳐내며 붉은 눈으로 미친 듯이 쏘아봤다.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그의 힘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두 사람이 말려도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감옥장은 그 모습을 보고 완전히 얼어붙었고 그저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그가 화를 자신에게 돌릴까 두려웠다.“어서 대장님을 붙잡아!”결국 다섯 명
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사소한 단서라도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알겠습니다, 대표님.”여이현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그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긴장했다.흉터남이 죽었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온지유가 깨어나고, 그녀는 자신이 병실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해독제를 받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저 헛된 희망에 그쳤을 뿐이었다.그래도 이 결과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법로가 내린 독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지금도 여전히 머리가 아파왔다.“지유 씨.”온지유가 고개를 들자 지선율, 장다희, 그리고 백지희가 병실로 들어와 있었다.온지유는 약간 놀라며 웃었다.“다들 어쩌다 같이 온 거예요?”“전화가 안 돼서 우리가 엄청 걱정했어. 결국 여 대표님한테 연락했지. 병원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이 왔어. 몸은 괜찮아?”백지희가 말했다.그녀는 온지유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였기에 온지유의 전화가 안 통할 때는 바로 여이현에게 연락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온지유의 상태를 몰랐지만 백지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큰 일은 아니야. 이제 괜찮아졌어.”온지유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모두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해요.”지선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유 씨 요즘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 임신 중인데 조심해야죠. 입원까지 하면 어떡해요.”장다희는 방금 일이 끝나서 함께 온 것이었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여 대표님이랑은 화해한 거예요?”백지희는 온지유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의 사생활이었기에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친구라 하더라도 너무 깊게 끼어들지 않으려는 배려였다.온지유는 간략하게 대답했다.“네, 그런 셈이죠.”장다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너무 잘됐네요.”지선율은 옆에서 과일을 깎으며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잘된 거라고요? 난 그렇게 쉽게 용서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날 노승아 편을 들었던 건 잊을 수
지선율은 거부감이 들었다.“됐어요, 연애는 너무 귀찮은 것 같아요.”그녀는 연애를 해 본 적 없었다. 애초에 연애가 귀찮은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여초, 여중, 여고, 여대의 루트를 밟은 그녀는 남자와 접촉해 본 적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연애할 생각이 없거니와, 남자를 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쪽쪽이 너무 귀여워요.”온지유는 선물 받은 것을 구경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아기를 위해 신경 써줘서.”“고맙긴요. 저희를 요정 대모 정도로 생각해 주면 돼요.”“연예인에, 감독에, 작가에, 예술가까지... 굳이 노력할 필요 없이 평생 요정 대모만 믿고 살아도 될 것 같은데요?”백지희는 장난으로 말했다.“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다이아몬드 수저 물려줄 아버지만 있으면 됐지.”“그러면 안 돼. 난 애를 너무 오냐오냐 키우지 않을 거야. 나쁜 버릇이라도 들면 내가 죽어서도 관 뚜껑 열어 던지고 튀어나올 수가 있어.”그녀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가 왜 이런 비유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온지유도 단어 선택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금방 말을 이었다.“장난이야. 신경 쓰지 마. 애는 내가 잘 가르쳐야지.”“놀랐잖아요, 지유 씨!”지선율은 가슴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잘난 아버지도 좋지만 잘난 어머니도 있잖아요. 우리 지유 씨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어요. 그리고 또 좋은 소식 있어요. 우리 작품 대상 후보가 됐어요!”온지유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그럼요!”지선율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우리 다희 씨 여우주연상 받을지도 몰라요. 정말 너무 기대돼요.”“다행이네요.”온지유는 진심으로 기뻤다.“지유 씨도 시상식에 와야 해요. 감독 겸 투자자니까, 자리를 비우면 안 되죠!”“시상식이 언제예요?”“다음 달이요. 저희 결전의 날이죠.”지선율은 온지유의 볼에 마구 뽀뽀를 해댔다. 엄청 상기된 모습이었다.백지희도 똑같이 기뻤다.“노력이 헛되지 않았네. 우리 온 감독님 축하해.”“아니야
온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이현이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이 달랐다.“아들한테 너무 한 거 아니에요?”여이현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입꼬리를 올렸다.“인성에 문제 있는 애로 키우면 장가는 어떻게 가겠어? 장가갔다고 해도 남의 집 귀한 딸을 고생시키면 안 되지.”이 말은 온지유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이 미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피해줬다.병실 문이 닫힌 다음 온지유는 다소 원망하는 말투로 탓했다.“이현 씨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네요? 근데 저랑 결혼했을 때는 왜 그랬어요? 이현 씨 입에서 나온 말 같지가 않네요.”여이현은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내가 잘못했어. 내가 했던 잘못이니까 우리 애는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후회를 남기면 안 되니까.”“이현 씨 후회하고 있어요?”여이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너무 늦게 정신 차린 건 후회돼. 근데 너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해.”온지유는 과거를 떠올려봤다. 참 다사다난했다.여이현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여호산은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두 사람을 억지로 묶어놓지 않았을까?그녀는 진작 여이현을 사랑했다. 그래서 혼인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감정을 제치고 궁금한 것이 또 있었다. 그녀와 여이현은 중학교 때 처음 만난 것이 아니다. 또 여이현은 그녀를 구해준 적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왜 여이현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을까?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여이현은 잠깐 있다가 나가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일도 있고 부대 일도 있어서 전보다 훨씬 바빠졌다.온지유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사명과 신념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영웅으로 나라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여이현이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병실에서 그녀는 오늘 받은 선물들을 정리했다. 아이의 탄생을
백지희는 온지유를 꼭 끌어안았다. 온지유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다. 세월이 지나자, 이제는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온지유는 하루 종일 병실에 있는 것이 싫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입원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백지희와 함께 산책하기로 했다.“너 지유니?”두 사람이 걷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와서 물었다. 그녀도 온지유를 제대로 알아본 것이 맞는지 확실치 않은 모양이었다.온지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얼굴은 꽤 익숙했다. 그러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한참 망설였다. 그러자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나 잊었어? 그렇게 많이 변했나... 우리 고등학교 때 같이 앉았었잖아. 수업 끝나고 수다 떤 적도 있고, 기억 안 나?”“미안한데 기억이 잘 안 나네. 혹시 이름이...?”“나 유다은이야. 진짜 기억 안 나?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유다은은 아주 활기찼다.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도 보기 좋았다.“이게 몇 년 만이야. 너 임신했어? 얼굴은 그대로네. 전이랑 똑같이 예뻐.”유다은은 온지유의 외모를 항상 부러워했다. 반에서도 그녀는 모두가 인정하는 퀸카였다. 지금도 그녀의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풍성한 머리카락도, 조각 같은 몸매와 얼굴도 여전했다.고등학교 동창이라면 온지유도 관심이 갔다. 유다은의 말을 들으면서 살짝 떠오르는 기억도 있었다.“알겠다. 우리 같아 앉아서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도 했었는데, 맞지?”“맞아! 나 빠순이였잖아. 책상에 우리 오빠들 사진으로 가득했었지.”“그래!”온지유가 떠올린 것을 보고 유다은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폴짝 뛰었다.“졸업하면서 연락처 못 받아서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졸업 후에는 말 한마디 못 했어. 나만 친하다고 생각한 건가 싶었어. 너 갑자기 말수도 적어지고 그래서 나 꽤 놀랐었다?”고등학교 때는 모두 단순했다. 서로 음해하고 모함할 것도 없다. 지금의 생활보다는 훨씬 좋
온지유는 안색이 확 변하면서 유다은의 손을 잡았다.“방금 뭐라고?”그녀는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유다은이 노승아를 알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노승아는 여이현을 짝사랑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 노승아와 친했을 리가 없다. 원수지간이면 모를까.‘중학교 때 이현 씨를 만났던 게 아니라면 어떻게 노승아를 알았지? 말도 안 돼.’이 순간 그녀는 모든 기억이 가짜가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유다은은 자신이 말실수라도 한 줄 알았다.“미안해, 내가 말실수했어? 너 왜 그래?”온지유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면서 되물었다.“내가 노승아랑 친하게 지냈었다고? 확실해?”그녀는 간절하게 답을 원했다.그녀의 반응에 유다은도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그녀가 자신만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애써 기억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친했었어. 네 입으로 나한테 불쌍한 동생이라고 했거든. 그때 엄청 친하게 지내길래 나는 지금도 연락하는 줄 알았는데?”온지유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전부터 노승아와 알고 지냈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유다은의 손을 놓은 그녀는 힘 풀린 다리로 뒷걸음질 쳤다.“지유야, 너 괜찮아?”유다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너 또 뭐 아는 거 없어?”백지장 같은 과거에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이 있을지 상상도 안 됐다.“글쎄. 우리도 그냥 공부 얘기에 취미 얘기만 해서, 특별한 건 없었어. 노승아 때문에 그래?”“나 혹시 노승아랑 자주 만났었어?”“그건 나도 잘 몰라. 전해 들은 게 전부라.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않았을걸?”그렇다면 노승아가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녀가 조직에 가게 된 것도 노승아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10대 때는 사기에 별다른 인식이 없었을 것이다. 노승아의 거짓말에 마음이 약해져서 동정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노승아의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