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남은 웃으며 말했다.“침착한 거 보니까 노석명에게서 해독제를 얻은 모양이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노석명이 진짜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리 없잖아.”그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당신, 몸에 이상이 느껴지지 않나?”쿵!여이현은 두 손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커다란 소리가 울렸고 그의 차가운 눈빛이 흉터남을 향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답해!”흉터남은 여이현의 붉어진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해독제를 받지 못했군.”여이현의 팔에는 혈관이 도드라졌고, 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듯했다. 손마디에서 소리가 났다.흉터남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별다른 저항 없이 입을 열었다.“법로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나도 노석명도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지.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리고 노석명과 내가 원수라거나 그런 건 없었어. 그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지. 노석명이 내 이익을 건드리려고 했고, 난 그걸로 그를 위협했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난 지금 이렇게 죄수 신세를 지게 된 거야.”그는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위협?”여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뭘 더 알고 있죠?”그 말을 듣고 흉터남은 일부러 말을 아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천히 옆에 놓인 물을 집어 들었다.잔을 입에 가까이 대자 여이현의 눈빛이 변했다. 의심이 들었는지 흉터남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움직이지 마!”흉터남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이 감옥은 네 사람들로 가득하잖아. 내가 여기서 죽을 일은 없을 거야. 물도 이미 확인했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흉터남은 갑자기 목이 막힌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잔 속의 물은 무색무취였지만 그는 이미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그걸 마셨어?”여이현은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흉터남은 갑자기 피를 토해냈다.그조차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감옥에 들어왔을 때부터 누군가 자신
이 사건은 감옥의 명성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이었고 감옥장으로서 그의 자리도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대장님, 제 부주의였습니다...”여이현은 그 말을 듣고서도 앞에 있는 교도관을 바라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그의 눈은 붉게 변했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교도관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그 충격은 매우 강력했다.교도관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쓰러져 기침을 했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다.그러나 여이현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다시 끌어올리며 말했다.“조직이 보낸 놈이냐?”교도관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 임무는 끝났어.”그의 표정은 마치 세뇌된 사람처럼 신성한 임무를 완수한 것 같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임무를 완수했으니 그의 삶도 완전한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노석명이야, 아니면 법로야? 그 사람들이 숨기려는 게 뭐지?”여이현이 날카롭게 물었다.“모르지.”교도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내 임무는 그 사람을 죽이는 것뿐이었어!”그의 비열한 모습에 여이현의 눈에는 더 큰 분노가 깃들었다. 분노는 마치 홍수처럼 폭발했고 주먹으로 교도관을 세게 두 대 때렸다.교도관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었다.그러나 여이현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피를 본 그는 더욱 폭주했고 교도관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다시 발로 차기 시작했다.그는 그를 죽일 기세로 계속해서 공격했다.“대장님!”그의 부하들은 그가 위험해 보이자 다급히 달려와 말리기 시작했다.“이러다 진짜 사람 죽습니다!”“비켜!”여이현은 그들을 거칠게 밀쳐내며 붉은 눈으로 미친 듯이 쏘아봤다.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그의 힘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두 사람이 말려도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감옥장은 그 모습을 보고 완전히 얼어붙었고 그저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그가 화를 자신에게 돌릴까 두려웠다.“어서 대장님을 붙잡아!”결국 다섯 명
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사소한 단서라도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알겠습니다, 대표님.”여이현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그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긴장했다.흉터남이 죽었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온지유가 깨어나고, 그녀는 자신이 병실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해독제를 받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저 헛된 희망에 그쳤을 뿐이었다.그래도 이 결과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법로가 내린 독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지금도 여전히 머리가 아파왔다.“지유 씨.”온지유가 고개를 들자 지선율, 장다희, 그리고 백지희가 병실로 들어와 있었다.온지유는 약간 놀라며 웃었다.“다들 어쩌다 같이 온 거예요?”“전화가 안 돼서 우리가 엄청 걱정했어. 결국 여 대표님한테 연락했지. 병원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이 왔어. 몸은 괜찮아?”백지희가 말했다.그녀는 온지유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였기에 온지유의 전화가 안 통할 때는 바로 여이현에게 연락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온지유의 상태를 몰랐지만 백지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큰 일은 아니야. 이제 괜찮아졌어.”온지유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모두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해요.”지선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유 씨 요즘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 임신 중인데 조심해야죠. 입원까지 하면 어떡해요.”장다희는 방금 일이 끝나서 함께 온 것이었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여 대표님이랑은 화해한 거예요?”백지희는 온지유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의 사생활이었기에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친구라 하더라도 너무 깊게 끼어들지 않으려는 배려였다.온지유는 간략하게 대답했다.“네, 그런 셈이죠.”장다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너무 잘됐네요.”지선율은 옆에서 과일을 깎으며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잘된 거라고요? 난 그렇게 쉽게 용서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날 노승아 편을 들었던 건 잊을 수
지선율은 거부감이 들었다.“됐어요, 연애는 너무 귀찮은 것 같아요.”그녀는 연애를 해 본 적 없었다. 애초에 연애가 귀찮은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여초, 여중, 여고, 여대의 루트를 밟은 그녀는 남자와 접촉해 본 적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연애할 생각이 없거니와, 남자를 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쪽쪽이 너무 귀여워요.”온지유는 선물 받은 것을 구경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아기를 위해 신경 써줘서.”“고맙긴요. 저희를 요정 대모 정도로 생각해 주면 돼요.”“연예인에, 감독에, 작가에, 예술가까지... 굳이 노력할 필요 없이 평생 요정 대모만 믿고 살아도 될 것 같은데요?”백지희는 장난으로 말했다.“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다이아몬드 수저 물려줄 아버지만 있으면 됐지.”“그러면 안 돼. 난 애를 너무 오냐오냐 키우지 않을 거야. 나쁜 버릇이라도 들면 내가 죽어서도 관 뚜껑 열어 던지고 튀어나올 수가 있어.”그녀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가 왜 이런 비유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온지유도 단어 선택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금방 말을 이었다.“장난이야. 신경 쓰지 마. 애는 내가 잘 가르쳐야지.”“놀랐잖아요, 지유 씨!”지선율은 가슴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잘난 아버지도 좋지만 잘난 어머니도 있잖아요. 우리 지유 씨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어요. 그리고 또 좋은 소식 있어요. 우리 작품 대상 후보가 됐어요!”온지유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그럼요!”지선율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우리 다희 씨 여우주연상 받을지도 몰라요. 정말 너무 기대돼요.”“다행이네요.”온지유는 진심으로 기뻤다.“지유 씨도 시상식에 와야 해요. 감독 겸 투자자니까, 자리를 비우면 안 되죠!”“시상식이 언제예요?”“다음 달이요. 저희 결전의 날이죠.”지선율은 온지유의 볼에 마구 뽀뽀를 해댔다. 엄청 상기된 모습이었다.백지희도 똑같이 기뻤다.“노력이 헛되지 않았네. 우리 온 감독님 축하해.”“아니야
온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이현이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이 달랐다.“아들한테 너무 한 거 아니에요?”여이현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입꼬리를 올렸다.“인성에 문제 있는 애로 키우면 장가는 어떻게 가겠어? 장가갔다고 해도 남의 집 귀한 딸을 고생시키면 안 되지.”이 말은 온지유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이 미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피해줬다.병실 문이 닫힌 다음 온지유는 다소 원망하는 말투로 탓했다.“이현 씨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네요? 근데 저랑 결혼했을 때는 왜 그랬어요? 이현 씨 입에서 나온 말 같지가 않네요.”여이현은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내가 잘못했어. 내가 했던 잘못이니까 우리 애는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후회를 남기면 안 되니까.”“이현 씨 후회하고 있어요?”여이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너무 늦게 정신 차린 건 후회돼. 근데 너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해.”온지유는 과거를 떠올려봤다. 참 다사다난했다.여이현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여호산은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두 사람을 억지로 묶어놓지 않았을까?그녀는 진작 여이현을 사랑했다. 그래서 혼인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감정을 제치고 궁금한 것이 또 있었다. 그녀와 여이현은 중학교 때 처음 만난 것이 아니다. 또 여이현은 그녀를 구해준 적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왜 여이현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을까?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여이현은 잠깐 있다가 나가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일도 있고 부대 일도 있어서 전보다 훨씬 바빠졌다.온지유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사명과 신념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영웅으로 나라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여이현이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병실에서 그녀는 오늘 받은 선물들을 정리했다. 아이의 탄생을
백지희는 온지유를 꼭 끌어안았다. 온지유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다. 세월이 지나자, 이제는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온지유는 하루 종일 병실에 있는 것이 싫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입원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백지희와 함께 산책하기로 했다.“너 지유니?”두 사람이 걷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와서 물었다. 그녀도 온지유를 제대로 알아본 것이 맞는지 확실치 않은 모양이었다.온지유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얼굴은 꽤 익숙했다. 그러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한참 망설였다. 그러자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나 잊었어? 그렇게 많이 변했나... 우리 고등학교 때 같이 앉았었잖아. 수업 끝나고 수다 떤 적도 있고, 기억 안 나?”“미안한데 기억이 잘 안 나네. 혹시 이름이...?”“나 유다은이야. 진짜 기억 안 나?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유다은은 아주 활기찼다.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도 보기 좋았다.“이게 몇 년 만이야. 너 임신했어? 얼굴은 그대로네. 전이랑 똑같이 예뻐.”유다은은 온지유의 외모를 항상 부러워했다. 반에서도 그녀는 모두가 인정하는 퀸카였다. 지금도 그녀의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풍성한 머리카락도, 조각 같은 몸매와 얼굴도 여전했다.고등학교 동창이라면 온지유도 관심이 갔다. 유다은의 말을 들으면서 살짝 떠오르는 기억도 있었다.“알겠다. 우리 같아 앉아서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도 했었는데, 맞지?”“맞아! 나 빠순이였잖아. 책상에 우리 오빠들 사진으로 가득했었지.”“그래!”온지유가 떠올린 것을 보고 유다은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폴짝 뛰었다.“졸업하면서 연락처 못 받아서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졸업 후에는 말 한마디 못 했어. 나만 친하다고 생각한 건가 싶었어. 너 갑자기 말수도 적어지고 그래서 나 꽤 놀랐었다?”고등학교 때는 모두 단순했다. 서로 음해하고 모함할 것도 없다. 지금의 생활보다는 훨씬 좋
온지유는 안색이 확 변하면서 유다은의 손을 잡았다.“방금 뭐라고?”그녀는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유다은이 노승아를 알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노승아는 여이현을 짝사랑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 노승아와 친했을 리가 없다. 원수지간이면 모를까.‘중학교 때 이현 씨를 만났던 게 아니라면 어떻게 노승아를 알았지? 말도 안 돼.’이 순간 그녀는 모든 기억이 가짜가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유다은은 자신이 말실수라도 한 줄 알았다.“미안해, 내가 말실수했어? 너 왜 그래?”온지유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면서 되물었다.“내가 노승아랑 친하게 지냈었다고? 확실해?”그녀는 간절하게 답을 원했다.그녀의 반응에 유다은도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그녀가 자신만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애써 기억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친했었어. 네 입으로 나한테 불쌍한 동생이라고 했거든. 그때 엄청 친하게 지내길래 나는 지금도 연락하는 줄 알았는데?”온지유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전부터 노승아와 알고 지냈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유다은의 손을 놓은 그녀는 힘 풀린 다리로 뒷걸음질 쳤다.“지유야, 너 괜찮아?”유다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너 또 뭐 아는 거 없어?”백지장 같은 과거에 얼마나 더 놀라운 일이 있을지 상상도 안 됐다.“글쎄. 우리도 그냥 공부 얘기에 취미 얘기만 해서, 특별한 건 없었어. 노승아 때문에 그래?”“나 혹시 노승아랑 자주 만났었어?”“그건 나도 잘 몰라. 전해 들은 게 전부라.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않았을걸?”그렇다면 노승아가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녀가 조직에 가게 된 것도 노승아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10대 때는 사기에 별다른 인식이 없었을 것이다. 노승아의 거짓말에 마음이 약해져서 동정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노승아의
온지유도 알았다. 그녀는 노승아를 너무 얕봤다. 노승아는 쉽게 여길 상대가 아닌데도 말이다.“우리 이만 돌아가자.”온지유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 노승아가 얼마나 많은 짓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난 조직에서 무슨 일을 겪었지? 노승아는 또 어떻게 나를 데려갔을까? 그리고 난 왜 멀쩡히 나왔지? 노석명은 왜 나를 무서워하고?’답을 알 수 없는 질문투성이였다. 진실은 엄청난 비밀을 동반했을 것이다.온지유는 뭐라도 떠올랐으면 했다. 그러면 지금보다는 덜 답답했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일부러 그녀의 기억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이때 백지희가 말했다.“지유야, 노승아가 석방됐대!”“뭐? 그게 정말이야?”“응, 나 방금 봤어. 옛날 사진은 아닌 것 같아. 이거 봐, 식당 앞에서 찍힌 거야.”백지희는 자신의 핸드폰을 온지유에게 보여줬다. 노승아가 일행과 식당에 있는 사진이었다.사람들은 노승아에게 새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떠들어댔다. 여이현과 공개 연애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스캔들이 나왔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노승아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부정적인 스캔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잊히지만 않으면 장땡이었다. 어쩌면 이 기사도 그녀가 일부러 냈을 수 있다.그 말인즉슨 노승아가 정말로 석방되었다.“지긋지긋하다. 그런 짓을 하고도 석방된 거야? 도대체 누가 끄집어냈어?”백지희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콩밥을 먹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감옥에 몇 년 들어갔다가 나오면 연예계 생활도 끝장이다.온지유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승아가 여이현의 도움 없이 석방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스캔들이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승아가 해명글을 올렸다. 남자친구가 아닌 드라마 팀 회식이라고 했다.“직접 글을 올렸어! 석방이 맞다니까!”백지희가 말했다.노승아가 구속됐던 일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이 아니니 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
온지유는 그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할 겨를도 없을 수 있어요?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들도 휴가가 있던데 명진 씨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요? 당신 생각도 잘 알아요.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괜찮지만 그래도 결국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할 에너지가 있으면 친자식을 낳으면 되잖아요.”지금은 좋은 마음으로 입양했다 하여도 커서 입양한 자녀들 간의 모순으로 불행하게 된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온지유의 걱정이 틀리진 않았다.인명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 말은 왜 해. 너의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내가 왜 다른 아이를 입양할 생각 하겠어? 법로가 나한테 너하고 별이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고 또 별이가 나중에 크면 이 삼촌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잖아. 그때가 서 별이가 날 너희 별장으로 데리고 가면 우린 또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온지유는 인명진의 이런 생각에 너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임무를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명진 씨 옆에는 반드시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온지유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명진의 자료를 만들었고 바로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분명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데 혹시나 인명진이 원하지 않으면 되려 부담이라도 될가봐 다시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그때 여이현은 집에 돌아와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 요즘 항상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온지유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인명진 씨 땜에 그래.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삶을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인명진 씨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냥 혼자 살고 있잖아. 금방 그의 자료를 만들어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 했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에게 빌붙어 사는 작은 변호사가 아니었고 심지어 임다혜와의 앙금도 풀고 둘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김혜연 쪽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온지유는 여름방학에 윤별을 데리고 Y 국으로 갈 계획이었고 인명진도 직접 나설 예정이었다.온지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결혼도 하고 홍혜주는 출산도 앞두고 있었고 양시은과 나도현도 이젠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인명진만 미혼에 아직도 혼자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만난 남자를 처음엔 좋게 보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자 안심되었다.심지어 나민우도 지난달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고 결국 이제 남은 건 인명진뿐이었다.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많이 도와준 인명진을 가족으로 생각한 온지유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어 하지 않으려던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명진 씨, 제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자기 행복 찾아 잘 살고 있는데 명진 씨도 이젠 그럴 때가 된 거 같아요. 명진 씨처럼 훌륭한 남자가 본인만 원한다면 좋은 사람은 많을 거잖아요.”인명진은 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전에 여이현이 죽었다고 생각한 5년 동안은 인명진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그 뒤로 인명진은 뒤에서 지켜주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온지유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네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나설 수 있어 좋고 더욱이 법로가 떠나시면서 옆에서 너를 잘 지켜주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하지만 저는 명진 씨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명진 씨도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셔야죠. 홍혜주 씨도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데 이젠 정말 명진 씨만 남았어요. 그러면...”온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명진은 말을 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인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건 아니잖아. 율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어.”인명진은 항상 온지유가 행복하
현민아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준 예물인데 나한테서 뺏어가려 하지 마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잖아요. 근데... 아빠는 사기꾼이야.”현민아의 끝없는 투정 부림에 현민아의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집 계약서도 돌려받았고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현민아의 아버지는 현민아가 원하든 하지 않든 일단 둘러메고 집으로 들어갔다.양시은은 옆에 서 있는 하민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니 이런 일로 어떤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돼. 유치원에서도 일부러 남을 냉정하게 대해서도 안 돼, 알았지?”“알겠어요.”하민은 양시은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최정숙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우리 귀염둥이 손자가 유치원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그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말했다.“집 계약서 8권이면 재산도 적지 않은데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양시은은 최정숙이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요즘 애들이 뭘 알겠어요. 애들끼리 뭔 생각을 못 하겠어요.”“엄마, 왜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만들어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에 정말 탄복해요. 집 계약서 8권이 뭐가 대단하다고, 우리 하민이랑 비기면 턱도 없는걸요. 그 여자아이는 단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지금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도 이십여 년이나 남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변할 것으로 생각한 나도현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혼약을 맺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와 같이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일은 귀찮다고만 생각되었다.최정숙은 나도현의 말에 변명하며 말했다.“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라고는 안 했잖아? 뭐가 그렇게 안 달아 할 지경이니?”“그럴 만도 했잖아요. 전에 저도 엄마가 벌려놓은 이런 일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는데 제 아들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죠.”나도현의 말에는 토하나라도
“제가 어제 집에 돌아와 하민이의 가방을 열어보니 이런 집 계약서들이 있었어요. 현민아가 가방에 집어넣었나 봐요.”알고 보니 하민이가 잘생겼다고 오랫동안 지켜본 현민아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하민이가 평소에 말을 잘 안 한 것 땜에 삼촌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었고 그런 행동이 귀여웠던 삼촌은 조롱하는 식으로 현민아에게 친구보다 결혼이 좋은 거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에 현민아가 몰래 집 계약서들을 학교에 가져가 예물이라면서 하민이의 가방에 넣어 준 것이었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말을 듣고 더욱 난처해졌다.“우리 꼬마 아가씨, 넌 아직 어려서 예물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 다음부터는 남의 책가방에 물건을 함부로 넣으면 안 돼.”현민아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난 하민이랑 친구 하고 싶단 말이에요. 친구가 되고 싶으면 뭐라도 보여줘야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잖아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시은도 현민아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하민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민아가 어디서 어떤 말을 듣고 저런 행동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에 두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현민아 아버님, 여기 집 현민아가 넣어 둔 계약서들입니다.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현민아의 아버지가 계약서를 확인하자 현민아는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전 돌려받기 싫어요. 아빠가 말했었잖아요. 이미 준 것은 곧 엎질러진 물이랑 같아 주워 담을 수 없다면서요. 그럼 책임을 져야잖아요. 이 물건들은 제가 이미 하민한테 줬고 하민이도 받아들이고 집에 가져갔으니 앞으로 제 사람이 될 건데 이렇게 다시 제가 준 예물을 회수하면 앞으로 저보고 어떻게 하민이랑 잘 지내라는 거예요? 아빠가 이렇게 하면 하민이 한테는 제가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현민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울어댔다.요즘 아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서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 현민아 아버지와 양시은도 현민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만 양시은이 예상치 못했던
“어젯밤에 집에 도착했는데 네가 없길래 전화하려고 하자 마침 여이현 씨가 널 데려다주셨어.”나도현은 어제 마음이 심란하여 술을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여기 비타민이라도 좀 먹어.”양시은은 나도현이 깨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고 비타민 한 알을 건네주었다.나도현도 어제 양시은과 잘 소통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심지어 양시은이 너무 바쁜 탓에 돌아오지 못하면 그녀가 간 도시를 찾으러 가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출장에서 돌아와 지금 옆에 있는 양시은을 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넌 이러는 내가 싫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넌 하나뿐인 내 남편인데 왜 싫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양시은은 항상 아이가 평안하고 나도현이 건강하고 그렇게 그들 세 식구가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매우 소박한 소원을 품고 지내왔다.“하지만 나...”“어제 여이현 씨가 널 데려왔을 때 나한테 둘이 잘 소통해 보라고 하길래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예측했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널 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양시은은 나도현의 옆에 앉아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이 심리 건강에도 안 좋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진심을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했다.양시은의 말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나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전날 술자리에서 여이현과 배진호가 양시은의 우수함을 부정하지 말고 더욱이 양시은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한 말이 생각나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내 생각이 좀 많이 유치했던 것 같아.”“아니야, 날 사랑하는 표현이라는 거 잘 알아. 만약 내가 너라면 너보다 더 했을지도 몰라. 나도현, 내가 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마.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네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양시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도현의 두 손을 잡고 말하자 그는 더 부끄러워졌다.나도현의 도움과 격려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착하게 자란 윤별은 초등학교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으며 여이현도 매우 기뻐했다.하지만 윤별은 항상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작은 빨간 꽃을 만들어 외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붙여놨다.온지유는 윤별의 행동을 눈치채고 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며 말했다.“별아, 너무 슬퍼하지 마. 외할아버지는 지금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셔서 우리를 보고 계실 꺼야. 그리고 내년이면 외숙모 집에서 별이 남동생과 여동생도 태어날 거야.”“그런데요 엄마, 외할아버지께서 제가 1학년이 되어 글자를 배우면 공부를 가르쳐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또...”윤별은 말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전에 윤별이가 브람을 따라갔을 때 브람은 매우 엄하게 대했지만, 온경준이 경성에 데려다 키우는 동안은 윤별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면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었다.그리고 윤별의 몸이 허약하니 온경준은 옆에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쓴 약도 잘 먹게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여 먹이면서 많은 추억을 쌓아 주었다.그때 윤별은 온경준에게 물었었다.“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온경준의 집은 Y 국이었고 윤별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다.“별이랑 엄마가 어디에 있으면 할아버지 집은 거기에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예전에 많은 잘못을 했고 그렇게 되어 너희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었어.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되였는데 할아버지가 어찌 Y 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겠어? 게다가 이쪽에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온경준은 그때 윤별이랑 함께 많은 수공예도 했고 병아리도 기르고 꽃을 심고 풀도 심었지만, 지금은 반 친구들 외에 하민 동생이 놀러 오고 평소에 윤별은 항상 혼자였다.온지유는 윤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외할아버지는 그저 우리보다 먼저 다른 세계로 가신 거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사명이라는 걸 가지고 와.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앞으로 때가
여이현이 추천해 주겠다는 의사는 인명진이었다.인명진의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당시 그와 지석훈이 하민에게 수술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하민은 지금처럼 이렇게 빨리 낫지 않았을 것이다.“난 병이 없거든.”나도현이 자신의 심병을 인정하지 않자 여이현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지난 4년 동안 치료해 온 걸 아니까 너의 이런 심리는 이해는 할 수 있어. 근데 넌 배 비서가 말했듯이 양시은 씨의 우수함을 부정하면 안 돼. 그녀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텐데 네 옆에만 가둬 두고 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게다가 네가 뭐 사랑을 강제로 시키는 대표도 아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지 마.”나도현은 여이현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답답하고 복잡한 이 심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는 양시은이 모두에게 존중받는 것도 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앞에서만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시다 보니 나도현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양시은은 오늘 저녁에야 출장에서 돌아왔고 여이현이 만취한 나도현을 데려온 것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여이현 씨, 저의 남편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둘이 잘 소통해 봐요.”여이현의 한마디에 양시은은 바로 눈치채고 나도현이 열일곱 살 난 아이 같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은은 도우미를 불러 나도현을 위층으로 옮기고 침대에 눕혀 신발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줬다.금방 출장 다녀온 탓에 힘들었지만 인내성 있게 나도현을 돌보았고 혹시라도 토할까봐 곁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나도현은 갑자기 양시은을 품에 안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시은, 나 정말 널 너무 사랑해. 그래서 또 잃을까 봐 두려워.”“너의 마음을 나도 다 알고 있어.”“니가 너무 우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볼까 봐 겁이 나, 그리고...”양시은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바보야, 너는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