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은아, 꼭 나아야 해. 넌 아직 날 받아들이지 않았잖아.”나도현이 침대 앞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을 얼굴에 대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양시은은 한밤중에 정신이 들었다. 한잠 자고 깨어나니 두통이 한결 덜했다. 흐릿한 시야로 고개를 돌리자 침대 앞에 있는 나도현의 모습이 보였다.나도현은 평소 깔끔을 중요시하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셔츠가 구겨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담요도 덮지 않고 앉아 있었다.양시은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어느새 조각 같은 나도현의 얼굴에 닿았다. 그 얼굴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양시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던 찰나 손목이 잡혔다.“자고 일어나자마자 날 만지는 걸 보니 많이 좋아진 모양이네? 마음이 바뀐 거야?”나도현의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에는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온종일 아픈 양시은을 돌보느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체력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나도현의 말을 들은 양시은의 얼굴이 순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이 손 놔! 그냥 네가 여기서 자는 걸 보고 감기라도 걸렸다가 내 탓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야.”말을 마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적막이 흘렀다.예전에 그들 사이에 불쾌한 일이 많았었다. 그때 나도현은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고 싸울 때마다 상처는 늘 양시은의 몫이었다.양시은 역시 그 일에 자신이 이토록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미안해, 그땐 내가 잘못했어. 널 믿지 않았던 건 내 책임이야.”나도현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별로 신경 쓰지 않아.”양시은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혼자 있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예전의 일에 대해서 조금의 불쾌함 외엔 다른 감정이 없었다.“하민이는 어때?”“하민이는 괜찮아. 네 열도 내렸으니 내일 낮에 같
양시은은 여전히 나도현은 양채은의 남자라고 고집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나도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나도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채은이 사람이라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내 생각은 물어본 적 있어? 아니면 내가 보이지도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건가?”그는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 손을 자기 가슴에 대었다. 나도현의 온도와 힘찬 심장 박동이 그녀의 손끝에 전해졌다. 양시은이 당황한 기색으로 몸부림쳤다.“나도현, 이거 놔. 난 이미 너와 아무 관계 없다고 했잖아.”“그럼 하민이는 어쩔 거야? 하민이 신경도 안 쓸 거야?”나도현이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건드리며 말했다.하민이 얘기에 양시은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쿡쿡 찔렀다.나도현이 침묵을 지키는 양시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시은아, 날 계속 밀어내지 마. 난 네 곁에 남아서 너를 계속 지키고 싶어.”그는 양채은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양채은의 죽음이 안타깝긴 했지만 양채은보다 더 걱정됐던 사람은 양시은이었다. 나도현은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나도현, 우린 이미 끝났어. 내가 아플 때 병간호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볼 거야.”“시은아, 내가 네 곁에 있는 게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어?”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흐르자 나도현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너 아직 휴식이 필요해.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떠나는 게 어때? 지금 이 시각에 어딜 가려고?”양시은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기에 지금 떠나는 것이 더 어색할 뿐이었다. 머릿속의 오만가지 생각을 정리한 뒤 침묵을 지켰다.말없이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도현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먼저 쉬어. 날 원하지 않으면 내가 떠날게.”나도현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면서 하인에게 양시은을 돌보라고 명령을
하민이가 수술실로 들어갔다.박은희의 초조한 모습이 눈에 뜨이자 양시은은 좀 전에 박은희를 의심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사모님, 죄송해요. 제가 오해를 했어요. 전 또...”“괜찮아. 네 마음 이해해.”박은희는 복잡한 눈길로 양시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내가 예전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지. 하민이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시은 씨를 미워했을 거야. 마음을 바꿀 리도 없을 것이고.’“모두 그만 하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오셨어요.”나도현이 두 사람의 얘기를 끊고 앞으로 나서서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나도현도 수술이 잘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도 양시은처럼 수술실에 들어간 아이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다.양시은은 바삐 돌아치는 나도현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잠시 후 하민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심장 이식수술은 고난도 수술이라 지속시간이 아주 길었다. 그들은 점심부터 저녁까지 수술실 밖에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길 손꼽아 기다리며 수술중이라는 간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수술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양시은은 몸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다리는 내내 눈앞이 새까매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한 나도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넌 얼른 들어가서 휴식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난 떠나면 안 돼. 하민이가 수술이 끝나서 깨어났다가 날 만나지 못하면 울음을 터뜨릴 거야.”“걱정하지 마. 수술이 끝났다 하더라도 마취가 풀려야 애가 깨어나.”양시은이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세우자 나도현은 온갖 방법을 써서 그녀를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시은아, 네 모습을 하민이가 보면 걱정할 거야.”다른 핑계를 대면 양시은이 거절할 게 뻔해서 하민이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민이는 양시은이 자신이 목숨처럼 끔찍이 아끼는 존재였기에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시은은 입원한 하민이를 돌보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매일 병원에서 지냈다.“엄마, 새우 죽 먹고 싶어요.”하민이가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자 양시은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민이가 점차 건강을 되찾고 있었지만 새우 죽을 먹겠다는 아이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안 돼.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못 먹는다고 했잖아. 다른 거 먹는 게 어때?”양시은이 도시락을 꺼내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만두가 들어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하민이는 그 말을 듣고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좋아요. 전 엄마가 만든 만두를 제일 좋아해요!”그 말을 듣는 양시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엄마가 먹여줄게. 천천히 먹어야 해.”“뜨거워요.”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하민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또 저 보러 왔어요?”양시은의 몸이 순간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요 며칠 동안 나도현이 자주 와서 이미 익숙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심한 반응을 하게 되었다. 양시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현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일 시간을 내서 아이를 보러 올 수 있는 건지? 하민이가 있는 앞에서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어 나도현이 물건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하민이에게 줄 선물이야. 새로운 장난감 마음에 들어?”나도현이 가방에서 장난감을 꺼내며 하민이 앞에서 흔들자 하민이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좋아요, 감사합니다. 도현 아저씨!’하민이는 손에 작은 로봇 장난감을 들고 나도현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아이들은 정말 장난감을 좋아했다. 입원한 동안 이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지루해졌던 하민이는 새 장난감의 등장에 날아갈 듯 기뻐했다.“하민이에게 장난감을 가져다줬네.”양시은이 말했다.하민이는 심장병으로 앓고 있었지만 말을 잘 듣
나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그는 양시은의 상태를 확인한 뒤 큰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나도현은 그녀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고 양시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이때 하민이가 양시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많이 피곤해요?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저는 남자아이니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웃는 얼굴로 그의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하민이 다 컸네. 엄마는 그래도 너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는걸.”나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나도 네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난 지금 아주 좋아. 만약 채은이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나 이젠 괜찮아.”“그럼 간병인을 부를게. 내일 하루는 쉬고 모레 다시 하민이를 보러 와.”양시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어?”양채은의 사고 이후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복에 전념했다.일주일 동안의 치료를 거쳐 많이 나아졌는데 왜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는 지금 네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해? 화장실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봐.”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간 늦게까지 밤을 새웠고 다음 날 하민이를 보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엄청 피곤해 보였을 수밖에. 심지어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를 잡아 파운데이션으로 간신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하민이도 같이 양시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협공 덕분에 양시은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약속한 뒤 나도현은 믿을 만한 간병인을 구하러 갔다
양시은은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나도현도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으니 못 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하민이를 돌보는 간호사가 책임감 있게 일을 한 덕분에 양시은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나도현은 지석훈에게 양시은의 진료를 부탁했다.“지석훈에게 별일 없다고 해서 네 진료를 부탁해 봤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석훈에게는 털어놓을 불평이 많았다.‘내가 할 일이 없었다고? 뭔 소리야? 나도현 네가 나를 병원에서 강제로 끌어낸 거잖아.’“진료는 끝났어요. 위가 좀 안 좋네요. 요즘 거의 안 먹죠? 그리고 조금씩 먹어야 해요.”양시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나도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양시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그 외에 다른 건 없어?”“다른 건 없어. 그냥 푹 쉬면 돼. 그럼 난 먼저 갈게. 병원 일이 많아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날 부르지 마.”지석훈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병원에 수술이 있다며 급히 떠났다.양시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먼저 하인에게 물었다.“시은 씨, 최근에 음식을 거의 안 먹었나요?”하인은 양시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네... 거의 안 드세요. 제가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정말 입맛이 없어. 이 사람들 잘못 아니야.”양시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했고 후에는 하민이를 보러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속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현이 요즘에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있어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 입맛이 없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복용하고 있는 약도 그녀의 식욕에 영향을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양시은은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나도현도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으니 못 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하민이를 돌보는 간호사가 책임감 있게 일을 한 덕분에 양시은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나도현은 지석훈에게 양시은의 진료를 부탁했다.“지석훈에게 별일 없다고 해서 네 진료를 부탁해 봤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석훈에게는 털어놓을 불평이 많았다.‘내가 할 일이 없었다고? 뭔 소리야? 나도현 네가 나를 병원에서 강제로 끌어낸 거잖아.’“진료는 끝났어요. 위가 좀 안 좋네요. 요즘 거의 안 먹죠? 그리고 조금씩 먹어야 해요.”양시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나도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양시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그 외에 다른 건 없어?”“다른 건 없어. 그냥 푹 쉬면 돼. 그럼 난 먼저 갈게. 병원 일이 많아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날 부르지 마.”지석훈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병원에 수술이 있다며 급히 떠났다.양시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먼저 하인에게 물었다.“시은 씨, 최근에 음식을 거의 안 먹었나요?”하인은 양시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네... 거의 안 드세요. 제가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정말 입맛이 없어. 이 사람들 잘못 아니야.”양시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했고 후에는 하민이를 보러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속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현이 요즘에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있어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 입맛이 없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복용하고 있는 약도 그녀의 식욕에 영향을
나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그는 양시은의 상태를 확인한 뒤 큰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나도현은 그녀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고 양시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이때 하민이가 양시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많이 피곤해요?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저는 남자아이니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웃는 얼굴로 그의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하민이 다 컸네. 엄마는 그래도 너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는걸.”나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나도 네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난 지금 아주 좋아. 만약 채은이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나 이젠 괜찮아.”“그럼 간병인을 부를게. 내일 하루는 쉬고 모레 다시 하민이를 보러 와.”양시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어?”양채은의 사고 이후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복에 전념했다.일주일 동안의 치료를 거쳐 많이 나아졌는데 왜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는 지금 네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해? 화장실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봐.”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간 늦게까지 밤을 새웠고 다음 날 하민이를 보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엄청 피곤해 보였을 수밖에. 심지어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를 잡아 파운데이션으로 간신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하민이도 같이 양시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협공 덕분에 양시은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약속한 뒤 나도현은 믿을 만한 간병인을 구하러 갔다
양시은은 입원한 하민이를 돌보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매일 병원에서 지냈다.“엄마, 새우 죽 먹고 싶어요.”하민이가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자 양시은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민이가 점차 건강을 되찾고 있었지만 새우 죽을 먹겠다는 아이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안 돼.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못 먹는다고 했잖아. 다른 거 먹는 게 어때?”양시은이 도시락을 꺼내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만두가 들어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하민이는 그 말을 듣고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좋아요. 전 엄마가 만든 만두를 제일 좋아해요!”그 말을 듣는 양시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엄마가 먹여줄게. 천천히 먹어야 해.”“뜨거워요.”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하민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또 저 보러 왔어요?”양시은의 몸이 순간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요 며칠 동안 나도현이 자주 와서 이미 익숙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심한 반응을 하게 되었다. 양시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현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일 시간을 내서 아이를 보러 올 수 있는 건지? 하민이가 있는 앞에서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어 나도현이 물건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하민이에게 줄 선물이야. 새로운 장난감 마음에 들어?”나도현이 가방에서 장난감을 꺼내며 하민이 앞에서 흔들자 하민이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좋아요, 감사합니다. 도현 아저씨!’하민이는 손에 작은 로봇 장난감을 들고 나도현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아이들은 정말 장난감을 좋아했다. 입원한 동안 이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지루해졌던 하민이는 새 장난감의 등장에 날아갈 듯 기뻐했다.“하민이에게 장난감을 가져다줬네.”양시은이 말했다.하민이는 심장병으로 앓고 있었지만 말을 잘 듣
하민이가 수술실로 들어갔다.박은희의 초조한 모습이 눈에 뜨이자 양시은은 좀 전에 박은희를 의심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사모님, 죄송해요. 제가 오해를 했어요. 전 또...”“괜찮아. 네 마음 이해해.”박은희는 복잡한 눈길로 양시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내가 예전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지. 하민이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시은 씨를 미워했을 거야. 마음을 바꿀 리도 없을 것이고.’“모두 그만 하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오셨어요.”나도현이 두 사람의 얘기를 끊고 앞으로 나서서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나도현도 수술이 잘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도 양시은처럼 수술실에 들어간 아이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다.양시은은 바삐 돌아치는 나도현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잠시 후 하민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심장 이식수술은 고난도 수술이라 지속시간이 아주 길었다. 그들은 점심부터 저녁까지 수술실 밖에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길 손꼽아 기다리며 수술중이라는 간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수술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양시은은 몸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다리는 내내 눈앞이 새까매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한 나도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넌 얼른 들어가서 휴식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난 떠나면 안 돼. 하민이가 수술이 끝나서 깨어났다가 날 만나지 못하면 울음을 터뜨릴 거야.”“걱정하지 마. 수술이 끝났다 하더라도 마취가 풀려야 애가 깨어나.”양시은이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세우자 나도현은 온갖 방법을 써서 그녀를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시은아, 네 모습을 하민이가 보면 걱정할 거야.”다른 핑계를 대면 양시은이 거절할 게 뻔해서 하민이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민이는 양시은이 자신이 목숨처럼 끔찍이 아끼는 존재였기에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시은은 여전히 나도현은 양채은의 남자라고 고집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나도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나도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채은이 사람이라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내 생각은 물어본 적 있어? 아니면 내가 보이지도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건가?”그는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 손을 자기 가슴에 대었다. 나도현의 온도와 힘찬 심장 박동이 그녀의 손끝에 전해졌다. 양시은이 당황한 기색으로 몸부림쳤다.“나도현, 이거 놔. 난 이미 너와 아무 관계 없다고 했잖아.”“그럼 하민이는 어쩔 거야? 하민이 신경도 안 쓸 거야?”나도현이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건드리며 말했다.하민이 얘기에 양시은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쿡쿡 찔렀다.나도현이 침묵을 지키는 양시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시은아, 날 계속 밀어내지 마. 난 네 곁에 남아서 너를 계속 지키고 싶어.”그는 양채은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양채은의 죽음이 안타깝긴 했지만 양채은보다 더 걱정됐던 사람은 양시은이었다. 나도현은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나도현, 우린 이미 끝났어. 내가 아플 때 병간호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볼 거야.”“시은아, 내가 네 곁에 있는 게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어?”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흐르자 나도현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너 아직 휴식이 필요해.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떠나는 게 어때? 지금 이 시각에 어딜 가려고?”양시은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기에 지금 떠나는 것이 더 어색할 뿐이었다. 머릿속의 오만가지 생각을 정리한 뒤 침묵을 지켰다.말없이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도현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먼저 쉬어. 날 원하지 않으면 내가 떠날게.”나도현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면서 하인에게 양시은을 돌보라고 명령을
“시은아, 꼭 나아야 해. 넌 아직 날 받아들이지 않았잖아.”나도현이 침대 앞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을 얼굴에 대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양시은은 한밤중에 정신이 들었다. 한잠 자고 깨어나니 두통이 한결 덜했다. 흐릿한 시야로 고개를 돌리자 침대 앞에 있는 나도현의 모습이 보였다.나도현은 평소 깔끔을 중요시하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셔츠가 구겨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담요도 덮지 않고 앉아 있었다.양시은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어느새 조각 같은 나도현의 얼굴에 닿았다. 그 얼굴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양시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던 찰나 손목이 잡혔다.“자고 일어나자마자 날 만지는 걸 보니 많이 좋아진 모양이네? 마음이 바뀐 거야?”나도현의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에는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온종일 아픈 양시은을 돌보느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체력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나도현의 말을 들은 양시은의 얼굴이 순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이 손 놔! 그냥 네가 여기서 자는 걸 보고 감기라도 걸렸다가 내 탓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야.”말을 마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적막이 흘렀다.예전에 그들 사이에 불쾌한 일이 많았었다. 그때 나도현은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고 싸울 때마다 상처는 늘 양시은의 몫이었다.양시은 역시 그 일에 자신이 이토록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미안해, 그땐 내가 잘못했어. 널 믿지 않았던 건 내 책임이야.”나도현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별로 신경 쓰지 않아.”양시은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혼자 있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예전의 일에 대해서 조금의 불쾌함 외엔 다른 감정이 없었다.“하민이는 어때?”“하민이는 괜찮아. 네 열도 내렸으니 내일 낮에 같
양채은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나 이미 죽은 거 아니었어? 왜 눈을 뜰 수 있는 거지?’“드디어 깨어났어요?”이는 낮고 익숙한 목소리였다.잠시 뒤 양채은은 눈앞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이었구나!’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마스크남이였다. 마스크남은 양채은의 분노에 찬 모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저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그쪽을 구해낸 거예요. 제가 아니었으면 그쪽은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건데요. 생명의 은인에게 예의를 좀 갖추죠.” 양채은은 소리를 내지 못했기에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양채은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마스크남이 그녀를 툭툭 치면서 입을 열었다.“잘 치료받으세요. 그쪽이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채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심한 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양시은이 잠결에 양채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사랑하는 여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도현이 급한 마음에 지석훈을 불러왔다.“난 너희 둘만의 전용 의사가 아니야.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지석훈은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결국 병을 보러 집으로 찾아왔다. 그가 검사를 마치자마자 나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시은이 어때? 어젯밤부터 열이 나서 약을 먹였는데도 나아지지 않아.”나도현은 양시은 걱정에 너무 초조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무뚝뚝해 보였다. 그는 원래 양시은을 데리고 병원에 가보려 했는데 그녀가 원하지 않았기에 지석훈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이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연약한 모습은 그로 하여금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지석훈은 한참의 고민 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양시은
나도현은 양시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랑 채은이 통화 내용을 전부 들었어. 시은아, 채은이는 네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래. 과거에 갇혀 있지 말고 우리도 앞을 보며 살아야지.”나도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일은 이렇게 된 이상 그들도 이제는 앞을 향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들은 양채은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주었고 마지막을 잘 보내줬다.나도현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양시은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단 말인가?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나도현, 난 잊을 수가 없어. 채은이만 생각하면 네가 걔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생각나. 채은이 죽음이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난 잊을 수가 없어. 이 모든 책임이 다 나한테 있으니까...”“정신 차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잖아. 그럼 하민이는 어떡해? 시은아, 넌 하민이가 아빠 사랑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나도현의 말은 못처럼 양채은의 마음속에 박혀 들어갔다. 양시은은 양채은이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에게 전화로 나도현과 잘 지내라던 말을 잊지 않았다.나도현이 한창 그녀를 설득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는 하민이가 그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모님도 이제는 그들을 반대하시지 않았지만 너무 늦었다.양시은은 깊이 한숨을 들이키고 대답했다.“난 하민이가 널 따라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우리 관계가 어떻든 우리가 하민의 아빠엄마인 건 영원히 변하지 않아.”양시은은 지금까지도 마음속의 그 장벽을 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양시은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더는 그들을 막는 사람이 없으니 나도현은 양시은이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여 한 가족이 오붓하게 잘 지낼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럼 넌 먼저 휴식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아 하니까 나는 밖에 나가 있을게. 시은아,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리지 마. 탓해야 할 게 있다면 그건 전부 내 탓이야. 내가 채은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오해하게 만든 거야.”나도현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양시은의 상태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친동생이 죽은 뒤로 그녀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잠을 자기만 하면 양채은이 너무 아프다며 우는 모습이 꿈속에 나타났다.이번에도 양시은은 양채은의 모습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나도현이 먼저 불을 켰다.순간 방안은 따뜻한 주황색 불빛으로 가득 찼고 나도현의 듬직한 모습이 그녀 눈앞에 드리워졌다. 하민이가 지금 병원에 있으니 양시은은 애를 보러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나도현이 말렸다.“너 지금 그 몸으로 어딜 가리고? 걱정하지 마. 병원에는 어머니가 있고 의료팀도 있어.”양시은이 병원에 가지 않은 제일 중요한 이유는 하민이에게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그래서 나도현의 말대로 별장에 남아 있었는데 그녀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지석훈을 불러줄까?”나도현은 관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지금 양시은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장례식에서 잠깐의 기억 혼란이 있었던 후로 나도현은 그녀가 동생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에 쌓여서 언젠가는 병이 될까 봐 걱정됐다.“지석훈 씨를 불러서 심리 상담을 하라고?”양시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지석훈은 의사였고 의사로서 능력이 출중했기에 심리 상담도 해줄 수 있었지만 양시은은 필요 없다고 하며 병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너무 슬퍼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생이 그녀 곁을 떠났다.나도현이 양시은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주면서 말했다.“너에게 병이 있다는 뜻이 아니야. 난 네가 모든 것을 혼자 짊어져서 괴로울까 봐 걱정돼서 그래. 시은아, 채은이에 대한 일은...”그때 나도현이 강태경의 신분으로 양채은에게 접근한 건 양시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감정에 휘둘려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었다.후에 돌발상황이 생겨서 양채은이 그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양채은이 갑작스러운 감정폭발로 그 일을 저질렀을 때 양채은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양채은 배 속의 아이는 그의 것이 아니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