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채은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나 이미 죽은 거 아니었어? 왜 눈을 뜰 수 있는 거지?’“드디어 깨어났어요?”이는 낮고 익숙한 목소리였다.잠시 뒤 양채은은 눈앞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이었구나!’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마스크남이였다. 마스크남은 양채은의 분노에 찬 모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저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그쪽을 구해낸 거예요. 제가 아니었으면 그쪽은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건데요. 생명의 은인에게 예의를 좀 갖추죠.” 양채은은 소리를 내지 못했기에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에 찬 눈길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양채은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마스크남이 그녀를 툭툭 치면서 입을 열었다.“잘 치료받으세요. 그쪽이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채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심한 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양시은이 잠결에 양채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사랑하는 여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도현이 급한 마음에 지석훈을 불러왔다.“난 너희 둘만의 전용 의사가 아니야.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지석훈은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결국 병을 보러 집으로 찾아왔다. 그가 검사를 마치자마자 나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시은이 어때? 어젯밤부터 열이 나서 약을 먹였는데도 나아지지 않아.”나도현은 양시은 걱정에 너무 초조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무뚝뚝해 보였다. 그는 원래 양시은을 데리고 병원에 가보려 했는데 그녀가 원하지 않았기에 지석훈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이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연약한 모습은 그로 하여금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지석훈은 한참의 고민 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양시은
“시은아, 꼭 나아야 해. 넌 아직 날 받아들이지 않았잖아.”나도현이 침대 앞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을 얼굴에 대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양시은은 한밤중에 정신이 들었다. 한잠 자고 깨어나니 두통이 한결 덜했다. 흐릿한 시야로 고개를 돌리자 침대 앞에 있는 나도현의 모습이 보였다.나도현은 평소 깔끔을 중요시하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셔츠가 구겨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담요도 덮지 않고 앉아 있었다.양시은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어느새 조각 같은 나도현의 얼굴에 닿았다. 그 얼굴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양시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던 찰나 손목이 잡혔다.“자고 일어나자마자 날 만지는 걸 보니 많이 좋아진 모양이네? 마음이 바뀐 거야?”나도현의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에는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온종일 아픈 양시은을 돌보느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체력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나도현의 말을 들은 양시은의 얼굴이 순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이 손 놔! 그냥 네가 여기서 자는 걸 보고 감기라도 걸렸다가 내 탓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야.”말을 마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적막이 흘렀다.예전에 그들 사이에 불쾌한 일이 많았었다. 그때 나도현은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고 싸울 때마다 상처는 늘 양시은의 몫이었다.양시은 역시 그 일에 자신이 이토록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미안해, 그땐 내가 잘못했어. 널 믿지 않았던 건 내 책임이야.”나도현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별로 신경 쓰지 않아.”양시은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혼자 있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예전의 일에 대해서 조금의 불쾌함 외엔 다른 감정이 없었다.“하민이는 어때?”“하민이는 괜찮아. 네 열도 내렸으니 내일 낮에 같
양시은은 여전히 나도현은 양채은의 남자라고 고집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나도현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나도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채은이 사람이라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내 생각은 물어본 적 있어? 아니면 내가 보이지도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건가?”그는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 손을 자기 가슴에 대었다. 나도현의 온도와 힘찬 심장 박동이 그녀의 손끝에 전해졌다. 양시은이 당황한 기색으로 몸부림쳤다.“나도현, 이거 놔. 난 이미 너와 아무 관계 없다고 했잖아.”“그럼 하민이는 어쩔 거야? 하민이 신경도 안 쓸 거야?”나도현이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건드리며 말했다.하민이 얘기에 양시은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쿡쿡 찔렀다.나도현이 침묵을 지키는 양시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시은아, 날 계속 밀어내지 마. 난 네 곁에 남아서 너를 계속 지키고 싶어.”그는 양채은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양채은의 죽음이 안타깝긴 했지만 양채은보다 더 걱정됐던 사람은 양시은이었다. 나도현은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나도현, 우린 이미 끝났어. 내가 아플 때 병간호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볼 거야.”“시은아, 내가 네 곁에 있는 게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어?”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흐르자 나도현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너 아직 휴식이 필요해.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떠나는 게 어때? 지금 이 시각에 어딜 가려고?”양시은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기에 지금 떠나는 것이 더 어색할 뿐이었다. 머릿속의 오만가지 생각을 정리한 뒤 침묵을 지켰다.말없이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도현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먼저 쉬어. 날 원하지 않으면 내가 떠날게.”나도현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면서 하인에게 양시은을 돌보라고 명령을
하민이가 수술실로 들어갔다.박은희의 초조한 모습이 눈에 뜨이자 양시은은 좀 전에 박은희를 의심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사모님, 죄송해요. 제가 오해를 했어요. 전 또...”“괜찮아. 네 마음 이해해.”박은희는 복잡한 눈길로 양시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내가 예전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던지. 하민이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시은 씨를 미워했을 거야. 마음을 바꿀 리도 없을 것이고.’“모두 그만 하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오셨어요.”나도현이 두 사람의 얘기를 끊고 앞으로 나서서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나도현도 수술이 잘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도 양시은처럼 수술실에 들어간 아이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다.양시은은 바삐 돌아치는 나도현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잠시 후 하민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심장 이식수술은 고난도 수술이라 지속시간이 아주 길었다. 그들은 점심부터 저녁까지 수술실 밖에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길 손꼽아 기다리며 수술중이라는 간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수술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양시은은 몸이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기다리는 내내 눈앞이 새까매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한 나도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넌 얼른 들어가서 휴식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난 떠나면 안 돼. 하민이가 수술이 끝나서 깨어났다가 날 만나지 못하면 울음을 터뜨릴 거야.”“걱정하지 마. 수술이 끝났다 하더라도 마취가 풀려야 애가 깨어나.”양시은이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세우자 나도현은 온갖 방법을 써서 그녀를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시은아, 네 모습을 하민이가 보면 걱정할 거야.”다른 핑계를 대면 양시은이 거절할 게 뻔해서 하민이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민이는 양시은이 자신이 목숨처럼 끔찍이 아끼는 존재였기에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시은은 입원한 하민이를 돌보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매일 병원에서 지냈다.“엄마, 새우 죽 먹고 싶어요.”하민이가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자 양시은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민이가 점차 건강을 되찾고 있었지만 새우 죽을 먹겠다는 아이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안 돼.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못 먹는다고 했잖아. 다른 거 먹는 게 어때?”양시은이 도시락을 꺼내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만두가 들어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하민이는 그 말을 듣고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좋아요. 전 엄마가 만든 만두를 제일 좋아해요!”그 말을 듣는 양시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엄마가 먹여줄게. 천천히 먹어야 해.”“뜨거워요.”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하민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또 저 보러 왔어요?”양시은의 몸이 순간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요 며칠 동안 나도현이 자주 와서 이미 익숙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심한 반응을 하게 되었다. 양시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현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일 시간을 내서 아이를 보러 올 수 있는 건지? 하민이가 있는 앞에서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어 나도현이 물건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하민이에게 줄 선물이야. 새로운 장난감 마음에 들어?”나도현이 가방에서 장난감을 꺼내며 하민이 앞에서 흔들자 하민이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좋아요, 감사합니다. 도현 아저씨!’하민이는 손에 작은 로봇 장난감을 들고 나도현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아이들은 정말 장난감을 좋아했다. 입원한 동안 이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지루해졌던 하민이는 새 장난감의 등장에 날아갈 듯 기뻐했다.“하민이에게 장난감을 가져다줬네.”양시은이 말했다.하민이는 심장병으로 앓고 있었지만 말을 잘 듣
나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그는 양시은의 상태를 확인한 뒤 큰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나도현은 그녀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고 양시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이때 하민이가 양시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많이 피곤해요?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저는 남자아이니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웃는 얼굴로 그의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하민이 다 컸네. 엄마는 그래도 너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는걸.”나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나도 네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난 지금 아주 좋아. 만약 채은이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나 이젠 괜찮아.”“그럼 간병인을 부를게. 내일 하루는 쉬고 모레 다시 하민이를 보러 와.”양시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어?”양채은의 사고 이후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복에 전념했다.일주일 동안의 치료를 거쳐 많이 나아졌는데 왜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는 지금 네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해? 화장실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봐.”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간 늦게까지 밤을 새웠고 다음 날 하민이를 보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엄청 피곤해 보였을 수밖에. 심지어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를 잡아 파운데이션으로 간신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하민이도 같이 양시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협공 덕분에 양시은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약속한 뒤 나도현은 믿을 만한 간병인을 구하러 갔다
양시은은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나도현도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으니 못 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하민이를 돌보는 간호사가 책임감 있게 일을 한 덕분에 양시은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나도현은 지석훈에게 양시은의 진료를 부탁했다.“지석훈에게 별일 없다고 해서 네 진료를 부탁해 봤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석훈에게는 털어놓을 불평이 많았다.‘내가 할 일이 없었다고? 뭔 소리야? 나도현 네가 나를 병원에서 강제로 끌어낸 거잖아.’“진료는 끝났어요. 위가 좀 안 좋네요. 요즘 거의 안 먹죠? 그리고 조금씩 먹어야 해요.”양시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나도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양시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그 외에 다른 건 없어?”“다른 건 없어. 그냥 푹 쉬면 돼. 그럼 난 먼저 갈게. 병원 일이 많아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날 부르지 마.”지석훈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병원에 수술이 있다며 급히 떠났다.양시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먼저 하인에게 물었다.“시은 씨, 최근에 음식을 거의 안 먹었나요?”하인은 양시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네... 거의 안 드세요. 제가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정말 입맛이 없어. 이 사람들 잘못 아니야.”양시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했고 후에는 하민이를 보러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속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현이 요즘에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있어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 입맛이 없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복용하고 있는 약도 그녀의 식욕에 영향을
하민이 말을 들은 양시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네, 도현 아저씨는 하민이에게 아주 많은 선물을 줬어요. 그리고 전 그 할머니도 좋아요.”“그렇구나.”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바로 꿈에서도 보고 싶다던 친아빠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신나 하는 하민이를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해 났다. 그때 나도현과 나씨 가문에게 하민이를 숨긴 결정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민이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면 하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하민이가 말하다 말고 누구를 봤는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양시은의 손을 놓고 뛰어갔다.“도현 아저씨!”하민이가 나도현의 품에 와락 안기자 남자는 무릎을 꿇고 그를 안아 들었다. 평소에 다른 이들에게 얼음처럼 차갑게 굴던 나도현이 하민이를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저씨가 바빠서 이틀 동안이나 하민이를 못 만났는데 엄마 말은 잘 들었어?”“네. 제가 말을 잘 들어서 엄마가 절 데리고 놀러 간대요. 도현 아저씨도 같이 갈 수 있나요?”두 사람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양시은을 바라보았다.양시은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는 하민이에게 다가가서 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요 나쁜 아들, 도현 아저씨를 보면 엄마가 없어도 되는 거야? ”“아니요. 하민이는 엄마도 같이 있어야 되요.”양시은은 부드러운 눈길로 히죽 웃으며 그녀 손을 잡으러 다가오는 하민이를 바라보았다. 나도현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얼른 타.”양시은은 하민이를 안고 차에 올랐다. 하민이가 엄마와 앉겠다고 해서 조수석에는 사람이 앉지 않았다. 나도현이 운전기사를 불러와서 그들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가운데 하민이가 끼어 있으니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았기에 양시은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양채은이 세상을 떠난 후로 양시은은 나도현을 더 꺼리게 되었다.예전에는 혼자 있는 것
“방에 있으면서 할 일이 없어서요.”뜻밖에도 그가 한마디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을 안 하기보다 못했다.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방안에서 할 일이 없다니요?”안색이 어두워진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아프면 푹 쉬어야죠. 책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얼른 가서 쉬어요.”누군가에게 이렇게 쫓기는 일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물론 은서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은서우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나 인명진은 침대로 가지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방금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협회에서 나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나도 조금 전에 확인한 거고요. 시간 되면 한번 왔다 가라고 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명진의 얼굴을 살폈다. 협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그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분명 불쾌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방법을 생각해 그를 달래주려 했다.“뭐 하러요?”아니나 다를까 그는 듣자마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협회에서 몰래 은서우를 찾아가다니. 그것도 그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는 인명진이 화가 난 이유를 오해했다. 그가 자신이 협회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자신은 협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난 갈 생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조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왜요? 협회에 들어가면 좋은 점이 많을 텐데.”협회가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초보 의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초보 의사들의 입장에서 협회는 기를 쓰고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다. 의학계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고 수많은 의료 서적들을 볼 수 있으니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은서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난 가지 않을 거예요.”“나 때문인가요?”그가 미간
은서우는 협회에서 왜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편지 끝에는 협회에 오라는 초대까지 있었다.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협회의 호의가 아니라 상대방이 또 이런 방식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인명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었다. 이혜성은 내키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고 싶지 않아? 이건 협회의 초대야. 우리처럼 풋내기 신인은 평소에 이렇게 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하지만 협회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당분간은 그럴 생각 없는데.”“그럼 지도 교수는...”“그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 설득하지 마. 협회에 대해 좋은 인상이 있는 게 아니라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혜성은 그녀가 협회에 들어가길 바랬지만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친구를 보며 은서우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마음속의 걱정은 여전했다.한편, 인명진은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고 내일은 그가 경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은서우는 마침 그의 집으로 가서 이 일을 그에게 전해주려고 했다.결국 혼자서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인명진이 병이 날 줄은 몰랐다.가사 도우미한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아프다고요? 그럴 리가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인명진 같은 사람도 아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에요. 꽤 심한 모양이더라고요. 급성 장염 때문에 아직도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살펴보고 가셨고요.”“지금은 2층 침실에서 자고 계십니다.”그녀한테 인명진은 뭐든 해내는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고 화낼
이 협회는 의학계에서 설립한 협회였고 회원들은 모두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신석림처럼 유명한 의사거나 이준서같이 배경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협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집단을 만들지 않고 사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본업에만 충실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협회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한때 인명진도 협회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협회에서 탈퇴했다. 이것들은 모두 그녀가 우연히 인명진한테서 알게 된 사실이다. 오랫동안 협회에 대해 궁금했던 그녀는 마침내 협회의 포럼을 봤고 저도 모르게 눈이 움직였다.그러다가 이내 빨간색으로 표시된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이름도 없는 젊은 의사가 무엇 때문에 전무후무한 수술을 성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클릭하면 그 내막을 볼 수 있습니다.]이혜성은 냉큼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어디나 이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야. 신경 쓸 거 없어.”이혜성이 자신에게 보여주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은서우는 그 안의 내용이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약간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협회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걸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이런 사람이 글을 올리도록 하는 것을 보면 협회가 어떤 곳인지 충분히 설명이 되니까.”이혜성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급히 다가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 간도 크다.”은서우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왜 말하면 안 되는데? 내 실력으로 성공시킨 수술이야. 그런데 그들은 뒤에서 악의적으로 날 비방하고 있어. 들어가 안 봤길래 다행이지 들어가 봤으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을지 상상도 안 돼.”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화를 낼 줄 안다. 하물며 원래 성격이 톡 쏘는 은서우는 더 말할 것도 없지.어쩌면 전에 하도 참고 살아서 이제 와서 폭발한
조금 전에 그가 직접 배웅까지 했던 김민재였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인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고 충고 한마디 할까 해서요. 모든 사람이 당신의 냉담함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가끔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무슨 뜻인가요?”인명진은 핸드폰을 꽉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의미 없는 전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 생각 해보셨습니까? 어쩌면 상대방도 원하고 있다는걸요.”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사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멋도 없고 차갑기만 죽은 나무처럼 심장이 얼어붙은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봄이 돌아오면 그가 새싹을 틔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다.은서우는 그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독단적인 선택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그녀를 차갑게 밀어냈다. 계속해서 자신을 속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이 누군가에 의해 들통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가장 진실한 문제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은 선생님처럼 좋은 여자는 언제든지 다른 남자한테 빼앗길 수가 있으니까.”말을 마친 김민재는 쿨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김민재의 전화를 끊고 그는 차 시트에 기대어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와 김민재는 사실 친분이 좀 있었고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친구 사이였다. 김민재는 그를 진심으로 상대했고 방금 한 말도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진심 어린 충고였을 것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곱씹다 보니 그의 눈
그녀는 업무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인명진이 왜 갑자기 이 일에 개입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김민재가 병원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는 남자의 마음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A 도시 병원에 김민재가 아는 의사라고는 은서우 뿐이었고 만약 그가 병원에 남아 있는다면 분명 은서우한테 자신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럼 경성에 있는 인명진은 어쩔 방법이 없게 된다.자신이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생각하니 인명진의 눈빛에 저절로 한기가 돌았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은서우는 에어컨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옷을 적게 챙겨 입은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전혀 인명진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퇴원 절차는 이내 이루어졌고 그날 오후, 김민재는 사람들을 불러 짐정리를 하고 퇴원 준비를 했다. 자신이 치료한 환자이고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은서우는 특별히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를 배웅하러 왔다. 김민재는 옆에 있던 인명진을 보고 일부러 물었다.“은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인명진을 보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 그녀한테 물어본 것이지 인명진한테 물어본 것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 일은 그녀의 일이니 그녀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이런 일까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니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대담하게 대답했다.“그래요.”이내 팔을 뻗어 김민재와 포옹했다. 남녀 사이의 애틋한 포옹이 아니라 단순히 작별의 의미에서의 포옹이었고 닿는 순간 이내 몸이 떨어졌다. 그러나 인명진은 그 모습을 보기가 불편했고 은서우가 김민재의 품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손을 뻗어 옷깃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원장님?”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너무 과격하게 반응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때, 김민재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인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두려워서 그랬을 겁니다. 소문
이준서가 이를 악문 채 그녀를 쳐다보며 뭔가 따지려고 하는데 그때 인명진이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인명진은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당신이 이곳에서 행패를 부릴 입장은 아닌 것 같네요.”“인명진.”그의 말을 무시한 채 인명진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아파요?”손목이 빨개졌다. 그러나 진지한 그의 옆모습을 본 순간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프지 않아요. 당신이 있으면 저 사람도 나한테 어찌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여기서 그만 얘기하고 얼른 가요.”“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인명진은 담담하게 이준서를 쳐다보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번 내기에서는 내가 이겼습니다. 돌아가서 당신 선생님께 전해요. 협회에서 경성과 A 도시의 일까지 손을 뻗지 말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그 나이에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될 겁니다.”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긴 복도를 떠났다.이준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은서우는 보지 않았다.다만 인명진이 조금 걱정되었다. “아까 한 얘기 말이에요. 정말 저들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거예요? 신 선생님 쪽은...”어쨌거나 신석림은 의학계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마저도 그의 명성을 들었을 정도이니 인명진이 곤경에라도 처할까 봐 두려웠다.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사이가 틀어진 지는 오래되었어요.”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그제야 안심되었다. 한편, 김민재는 수술이 끝난 후에도 약을 복용하면서 체내의 세포 분열 속도를 억제하였다. 관찰 기간은 몇 달에서 반년 정도였다.그래도 그는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은서우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평생 이 연구소를 떠날 수 없었을 겁니다.”김민재가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은서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처음 그가 이
그 당시 그는 이 일이 이준서 그리고 신석림과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었다.“당신들은 협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많은 환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허구한 날 어떻게 하면 독점할 생각부터 하고 있네요. 나도 당신들 같은 사람으로 만들 생각입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인명진은 경멸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준서의 얼굴에 웃음이 점차 사라졌다. 그가 인명진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랐다.“그거 알아요? 난 당신같이 잘난 척하는 사람이 참 별로더라고요. 좋은 마음에서 귀띔해 주는 건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어차피 수술이 실패하면 당신은 내기에서...”내기에서 진다는 말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잠시 후, 수술실의 불이 꺼졌고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은서우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가장 먼저 인명진에게로 달려갔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에는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인명진 씨, 나 해냈어요. 수술 성공했다고요.”그가 자신의 품 안에서 폴짝폴짝 뛰는 그녀를 한 손으로 받쳐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어요.“잘했어요.”간단한 한마디 말이었지만 은서우는 만족스러웠다.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이 순간만큼은 보람을 느꼈다. 이건 단지 그녀에 대한 인정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의심했던 것 같다. 열등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는 걸 그녀조차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고 보이지 않는 열등감과 어둠이 모두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녀도 이젠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방금 수술할 때...”이준서를 발견한 순간, 은서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자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은서우는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고 누락된 부분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서우 씨, 힘내요.”옆에 있던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수술은 특별하기 때문에 조수와 간호사는 모두 병원의 사람들이 아니었고 프로젝트팀에서 배정된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준서 쪽의 사람들이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은서우는 매우 초조했다. 직접 수술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데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수술을 마쳐야 하니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은서우는 장갑을 착용하고 수술 준비를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인명진이었다. 불안과 걱정이 싹 사라졌고 순식간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온몸에 힘이 솟아올랐다.혼자가 아닌 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수술은 오랫 시간 진행되었다. 내과와 관련된 모든 수술은 쉬운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심장과 골수에 관한 수술이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했다.그녀는 온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에 집중하였고 자칫 사고라도 날까 봐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였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수술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드디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메스가 쟁반 위에 떨어졌다. 은서우는 마스크와 소독 장갑을 벗고 활짝 웃었다.“수술 성공입니다”수술실 밖, ‘수술 중’이라는 네온사인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남자는 밖에서 아무 말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다리던 사람이 나와 환하게 웃으며 그한테 자신이 해냈다고 말하길 바랐다. 이때, 이준서가 다가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이렇게 늦게 나온 걸 보면 내가 내기에서 이긴 것 같네요. 안 그래요
“김수연.”무거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고 이내 은서우는 검은색 양복에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게 보였다.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남자의 하얀 속눈썹과 눈을 보고 은서우는 한눈에 알아봤다. 백색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환자 김민재라는 것을. 김민재도 여기서 인명진과 은서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여긴 어떻게...”인명진도 김민재를 알아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과하라고 하세요.”김민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수연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은서우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어요. 용서해 줘요.”그녀가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 김민재도 평소 제멋대로 굴던 동생이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용서할게요. 하지만 성격 좀 고쳐요. 누구나 당신을 용서해 주는 건 아니니까. 여기저기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지 말고요.”말을 마치고 난 은서우는 바로 자리를 떴다.김민재가 그녀의 환자이긴 하지만 이 일은 김수연과 그녀 사이의 일이었고 지금은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그들과 더 접촉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명진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원장님, 감사합니다.”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나한테 고맙다고 해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방금 원장님께서 나서서 편들어 주셨잖아요. 다만 오랫동안 적어두었던 노트가 없어졌네요.”그녀는 열심히 강의를 들으며 메모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노트가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져서 그녀는 화가 났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인명진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노트가 없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서우 씨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니까.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한테 문자 해요. 아니면 우리 집에 와요. 내가 따로 가르쳐줄게요.”그 말에 은서우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정말이에요?”“내가 언제 거짓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