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채은은 심호흡을 하고 최후의 협박을 했다.“그럼 미안하지만 하민이는 내가 데려갈게요. 아마 당신이랑 시은이는 평생 하민이를 못 볼 거예요.”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돌아서서 자신의 차에 타려고 했다.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하게 옆에 있던 사람은 어느새 다가와 그녀를 제압해 버렸다.나도현의 눈빛은 차갑고 위험했다.“이번엔 도망 못 가. 하민이를 내놔. 미성년자 유괴가 무슨 죄인지 너도 잘 알잖아.”양채은은 입술을 깨물었다.“날 감옥에 보내겠다는 거예요?”“그건 내 전문 분야지. 하지만 하민이를 데려오면 네 변호를 맡아줄 수도 있어.”나도현의 태도는 확고했다.양채은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모든 법 조항을 줄줄 외우고 다녔고 그의 마음은 법전으로 꽁꽁 싸매져 따뜻한 구석이라곤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매정하군요. 하지만 난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바로 그때 저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보니 검은색의 수수한 차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그들 사이에 멈춰 섰다.차에서 후드티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근육이 탄탄한 팔로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의 목에는 날카로운 칼이 겨누어져 있었다.남자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을 풀어줘. 안 그러면 얘를 죽일 거야.”하민이었다.양채은은 마스크를 쓴 남자를 보고 놀랐다.“네가 여긴 왜 왔어?”“네가 일을 망칠 줄 알았지.”마스크를 쓴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있어서 원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당신 도대체 누구야?”나도현은 차갑게 묻는 동시에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하민이를 구할 기회를 찾았다.마스크를 쓴 남자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칼을 하민이의 목에 더 바짝 댔다. 하민이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지만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그는 마치 도움을 구하듯 무력한 눈빛으로 나도현을 바라보았다.“나 변호사님, 양채은을 붙잡는 게 중요한지 아니면 이 아이의 목숨이 중요한지 잘 생각해 보시지.”마스크를 쓴 남
차는 멀리 사라졌다.마스크를 쓴 남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차 문을 닫고는 룸미러로 양채은을 쳐다보았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양채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실패했으면 우리 둘 다 여기서 끝장이었어.”마스크를 쓴 남자는 화가 난 듯했다.양채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걔는 내 조카고 몸도 약해. 우리랑 도망 다니는 건 좋지 않아.”마스크를 쓴 남자는 비웃으며 되물었다.“너 정말 이런 식으로 평생 살 생각이야?”“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난 이미 그 사람과 완전히 끝났는데.”양채은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속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마스크를 쓴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일단 상황을 좀 보자.”양채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견딜 수 없는 복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그때야 마스크 남자는 양채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왜 그래?”대답을 듣기도 전에 양채은은 의식을 잃었다. 마스크를 쓴 남자는 황급히 앞으로 나가 핸들을 잡고 차를 세운 후, 급히 차에서 내렸다.그때야 그는 양채은의 아래에 피가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채은아, 정신 차려!”하지만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고 반응이 없었다. 유산 수술 후 제대로 몸조리도 못 해서 하혈을 하는 게 분명했다.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채은을 뒷좌석에 눕히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한편, 아까 그 자리에서는 부하들이 모여들었다.“쫓아갈까요?”“됐어.”나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하민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졌다.“아저씨랑 엄마 보러 갈까?”하민은 원래 그의 행동에 불만이었지만 엄마를 볼 수 있다는 말에 눈이 반짝였다.“좋아요!”얼마 전 큰 병을 앓았던 터라 몸이 허약해 보였던 그였지만 엄마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나도현은 곧바로 그를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양시은은 아직 미열이 있었지만 그래도 열은 좀 내린 상태였다. 약을 먹고 나니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엄마!”환청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하민이가 문
분명 할 말이 있는 듯했다.나도현은 망설임 없이 보모에게 하민을 데리고 나가 놀게 하라고 지시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할 말 있으면 해.”“이번에 아이를 찾아줘서 정말 고마워. 신세 많이 졌어. 근데 나도 여기 오래 머물기가 그래. 이제 하민이도 돌아왔으니 나도 이젠 가야겠다.”“시은아.”나도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렇게 금방 배은망덕하게 굴 거야?”“폐 끼치기 싫어.”양시은은 헛기침을 하며 민망함을 감췄다. “알았어.”나도현은 차갑게 말하고 돌아서서 나가버렸다.양시은은 그가 그렇게 쉽게 승낙할 줄 몰라서 잠시 당황했다.하지만 이게 나았다. 질척거리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기느니,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나았던 것이다.나도현이 나가보니 하민은 보모들과 같이 놀고 있었다.그는 눈을 굴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장난감 하나를 하민에게 건넸다.“네 엄마가 떠난다는데, 넌 어떻게 할 거야?”“당연히 엄마랑 같이 가야죠.”하민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나도현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네 엄마는 지금 아프시잖아. 너도 몸이 약한데 엄마 혼자 너까지 돌보면 너무 힘들 거야.”“그럼 어떡해요?”하민은 갑자기 놀 기분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들고 큰 눈을 깜빡였다.나도현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집을 봐. 보모도 많고 너랑 엄마를 잘 돌봐줄 수 있어. 그리고 가정 주치의도 있어서 언제든지 진료를 받을 수 있어서 너희 두 사람을 잘 보살필 수 있지.”“아저씨, 혹시 엄마를 붙잡아 두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하민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어린아이에게 속마음을 들킨 나도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냥 너희들이 걱정돼서 그래.”하민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그럼 좋아요. 엄마한테 말해볼게요.”양시은은 떠날 준비를 하다가 하민의 말에 의아했다.“여기가 뭐가 좋아? 내 집만큼 편한 곳이 없지. 집에 가자.”“엄마, 저 여기 있을래요. 여기 엄청 재미있어요.”하민은 입술을 깨물며 애처롭게 말했다.“그
오늘은 최정숙이 찾아왔다.양시은은 그녀가 올 줄 몰랐다. 양시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최정숙 역시 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두 사람을 갈라놓은 건 자신이었다. 그 당시 그들은 새로운 신분을 얻었고 강태경이 나도현이 되면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니 그녀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을 포기하지 못했고 양시은 또한 그 세월 동안 나도현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심지어 나도현의 하나뿐인 아들 하민이까지 양시은은 아무런 불평 없이 키우고 있었다.8억은 분명 집안 문제를 해결하는데 써버렸을 텐데 양시은은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양시은은 참 괜찮은 아이였다.그녀는 진심으로 양시은이 존경스러웠다.하지만 양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시고 도현 씨를 설득하세요. 그 사람이 놓지 않으려는 거예요.”그녀는 독하고 돈만 밝히는 여자 노릇도 했다.하지만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니 최정숙이 그들을 완전히 갈라놓으려면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했고 나도현이 바로 그 근본적인 문제였다.최정숙은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뜻을 존중하려 할 줄은 몰랐다.“너 분명 도현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었는데, 왜 말하지 않았어?”양시은은 고개를 숙였다.“저는 제 나름의 생각이 있고 아주머니도 아주머니 나름의 생각이 있겠죠. 만약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우리 관계를 허락하셨다면 8억을 주면서 그를 떠나라고 하지 않았을 테죠.”8억을 받았으니, 약속은 지켜야 했다.그리고 최정숙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니 가능성 없는 싸움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양시은은 단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최정숙은 그제야 양시은의 강인함과 나도현의 고집을 깨달았다.“네가 8억을 받고 도현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그 아이는 널 찾아 미친 듯이 헤맸어. 그런데 결국에는 찾지 못했지. 그러다가 도현은 심한 우울증에 걸렸어.”양시은은 숨이 턱 막혔다.최정숙의
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평생 그와 함께하고 싶은 꿈을 꿨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그녀는 더 이상 나도현과 함께할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저는 도현 씨와 다시 만날 생각 없어요. 아주머니, 우리 관계를 더 이상 반대 안 하신다니 고마워요. 우리는 4년이나 떨어져 있었고 저도 더 이상 예전의 양시은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 사람 기억 속에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어요.”나도현이 자신을 계속 미워해도 괜찮았다. 미움이 오래되면 그도 언젠가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이다.“왜? 도현이가 널 계속 미워하게 놔둘 거야? 하민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 아니면 양채은 때문이야? 도현이를 그녀에게 양보할 생각이야?”최정숙은 정곡을 찔렀다.그녀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들 두 사람 모두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냥 도현 씨와 너무 오래 떨어져서...”“하지만 도현이는 널 잊지 못했어.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네가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말할게.”최정숙은 차분하게 말했다.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그녀에게는 이제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아 있었다. 바로 아들의 행복이었다.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하는 법. 나도현의 마음의 병은 양시은만이 고칠 수 있었다.“아주머니, 말씀하지 마세요.”“도현이가 널 얼마나 챙기는지 못 봤어?”아플 때 나도현은 곧바로 지석훈을 불렀고 그녀를 여기에 가둬 놓았지만 생활에 필요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심지어 하민이가 양시은의 아이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위해 사람을 찾아다녔다.이 순간, 최정숙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그녀는 심호흡을 했다.“시은아, 도현은 하민이를 처음 본 순간 친자 확인을 했어. 하지만 내가 손을 썼어.”양시은은 담담했다.처음에 나도현이 그렇게 화를 내며 추궁했을 때 그녀는 그가 분명 뭔가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누군가 막았을 거라는 것도
나도현은 지금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현재 무형의 힘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양시은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도현아.”그런 나도현의 모습을 본 박은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나도현의 이름을 불러 그를 깨우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상황 파악을 마친 양시은은 박은희를 위로하며 말했다.“사모님, 얼른 지석훈 씨한테 전화를 걸어서 급한 일이니 한번 와 보시라고 전해주세요.”나도현이 병원에 가게 되면 여러 가지 기사가 뜨게 되고 누군가 이 틈을 타 수작을 부릴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나도현을 위해서라도 지석훈을 부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그래, 지금 당장 연락을 하마.”박은희는 양시은의 말을 들은 뒤에야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다.한편, 지석훈은 박은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나도현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들고 이리도 달려왔다.나도현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미처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돈과 명예 거의 모든 것을 손에 쥔 나도현을 이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이는 양시은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지석훈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고개를 푹 숙인 채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양시은을 대신해 박은희가 대답했다.“이 모든 게 나 때문이야. 시은 씨 아이가 도현이 아이라는 것을 도현이가 알게 되었지 뭐야.”지석훈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나도현이 첫사랑을 지금까지 잊지 못한 것도 핫이슈인데 나도현과 양시은 사이에 아이가 있다니!지금까지 미워했던 첫사랑이 자신을 배신한 적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이를 혼자서 힘들게 키워온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도현이 쓰러진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검사를 마친 지석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박은희가 급히 물었다.“석훈아, 우리 도현이 괜찮은 거야?”‘우리 도현이가 잘못된다
양시은은 양채은의 실종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양채은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양채은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그녀에게 가족은 동생 양채은 밖에 남지 않았다.“아니. 그런 거 아니야.”나도현이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채은이 도망갔어. 시은아, 채은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서 전부 설명해 줄 테니까 제발 믿어줘. 내가 채은이를 이용한 건 맞아. 하지만 걔한테 손을 댄 적은 없어. 내가 채은이를 속였지만 물질적인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잖아.”양채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준 돈으로 양시은의 생활비와 하민이 병원비를 대어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도현을 사랑했고 그와 함께 여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양채은이 아직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녀가 돌아와서 언니가 나도현과 함께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양시은은 양채은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4년이란 시간이 지났기에 그녀와 나도현 모두 많이 달라졌고 이제는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나도현,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예전 건 따지지 마. 네 엄마가 너를 위해 고른 약혼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임다혜 씨랑 잘 지내.”나도현은 양시은이 예전에는 400만을 위해 그를 포기하고 이제는 양채은 때문에 그를 포기할 줄은 몰랐다.양채은이 그에 대한 사랑은 정말 시험을 거칠 수 없었다.“양채은, 그럼 하민이는 어쩌려고? 하민이가 나랑 있으면 너랑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울 거잖아? 내가 하민이에게 더 좋은 치료와 교육을 마련할 수 있어. 애는 아직 어리잖아. 예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나도현의 눈시울이 점점 빨개졌다.그의 말에 양시은의 머릿속에 문뜩 하민이가 떠올랐다. 나도현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민이가 나도현과 함께 있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나도현이 하민이가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걸 알았으니 더는
나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 고마워. 그쪽은 너한테 맡길게.”“그래.”회사에 있었던 여이현은 대답을 마친 뒤 나도현의 전화를 끊고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전화를 받은 온지유는 웃음기 어린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근무시간에는 근무에만 집중하라고 내가 말했잖아. 집에 산후 도우미가 있으니까 집안일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사랑하는 여인의 웃음소리에 감염된 듯 여이현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네가 말한 거 다 기억하고 있어. 내가 너에게 전화를 친 건 다름 아닌 도현이 때문이야. 나도현 첫사랑의 애가 많이 아파서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 네가 인명진 씨한테 연락을 보냈으면 해서 그래.”“알았어. 지금 당장 연락해 볼게.”나도현과 여이현은 절친이었기에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었다.온지유가 인명진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해 주자 인명진은 흔쾌히 승낙했다.“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내일 같이 가보자.”인명진은 온지유가 먼저 그에게 연락을 줘서 엄청 기뻤다. 다른 이를 위해서 찾아온 것이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그는 온지유 마음속에는 여이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바랄 것이 없었고 함께 있을 희망이 없으니 오로지 온지유를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와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다면 인명진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온지유는 근무 중인 여이현에게 방해가 될까 봐 전화 대신 문자를 보냈다.[인명진 씨 오늘 시간 없으니까 내일 당신이 인명진 씨랑 같이 도현 씨 만나러 가봐.][알았어.] 여이현은 아무런 의견 없이 채팅 기록을 캡처해서 나도현에게 보냈고 문자를 받은 나도현은 이 기쁜 소식을 바로 양시은에게 전해주었다.“시은아, 우리 아이 치료받을 수 있어.”하지만 양시은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돈과 권력만 있으면 정말 뭐든 할 수 있구나.’나도현은 양시은의 복잡한 감정을 모른 채 그저 아이를 걱정해서 침묵을 지키는 줄로 알고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애를 썼다.“
“방에 있으면서 할 일이 없어서요.”뜻밖에도 그가 한마디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을 안 하기보다 못했다.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방안에서 할 일이 없다니요?”안색이 어두워진 그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아프면 푹 쉬어야죠. 책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얼른 가서 쉬어요.”누군가에게 이렇게 쫓기는 일이 처음이라 좀 신기했다.물론 은서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은서우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나 인명진은 침대로 가지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방금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죠?”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협회에서 나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나도 조금 전에 확인한 거고요. 시간 되면 한번 왔다 가라고 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명진의 얼굴을 살폈다. 협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그가 이 얘기를 들으면 분명 불쾌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분이 안 좋아지면 방법을 생각해 그를 달래주려 했다.“뭐 하러요?”아니나 다를까 그는 듣자마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협회에서 몰래 은서우를 찾아가다니. 그것도 그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는 인명진이 화가 난 이유를 오해했다. 그가 자신이 협회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자신은 협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난 갈 생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조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왜요? 협회에 들어가면 좋은 점이 많을 텐데.”협회가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초보 의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초보 의사들의 입장에서 협회는 기를 쓰고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다. 의학계의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고 수많은 의료 서적들을 볼 수 있으니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은서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난 가지 않을 거예요.”“나 때문인가요?”그가 미간
은서우는 협회에서 왜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편지 끝에는 협회에 오라는 초대까지 있었다.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협회의 호의가 아니라 상대방이 또 이런 방식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를 노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인명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었다. 이혜성은 내키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고 싶지 않아? 이건 협회의 초대야. 우리처럼 풋내기 신인은 평소에 이렇게 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하지만 협회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당분간은 그럴 생각 없는데.”“그럼 지도 교수는...”“그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 설득하지 마. 협회에 대해 좋은 인상이 있는 게 아니라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혜성은 그녀가 협회에 들어가길 바랬지만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친구를 보며 은서우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마음속의 걱정은 여전했다.한편, 인명진은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고 내일은 그가 경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은서우는 마침 그의 집으로 가서 이 일을 그에게 전해주려고 했다.결국 혼자서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인명진이 병이 날 줄은 몰랐다.가사 도우미한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아프다고요? 그럴 리가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인명진 같은 사람도 아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에요. 꽤 심한 모양이더라고요. 급성 장염 때문에 아직도 열이 많이 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살펴보고 가셨고요.”“지금은 2층 침실에서 자고 계십니다.”그녀한테 인명진은 뭐든 해내는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고 화낼
이 협회는 의학계에서 설립한 협회였고 회원들은 모두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신석림처럼 유명한 의사거나 이준서같이 배경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협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집단을 만들지 않고 사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본업에만 충실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협회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한때 인명진도 협회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협회에서 탈퇴했다. 이것들은 모두 그녀가 우연히 인명진한테서 알게 된 사실이다. 오랫동안 협회에 대해 궁금했던 그녀는 마침내 협회의 포럼을 봤고 저도 모르게 눈이 움직였다.그러다가 이내 빨간색으로 표시된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이름도 없는 젊은 의사가 무엇 때문에 전무후무한 수술을 성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클릭하면 그 내막을 볼 수 있습니다.]이혜성은 냉큼 핸드폰을 빼앗아 버렸다.“어디나 이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야. 신경 쓸 거 없어.”이혜성이 자신에게 보여주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은서우는 그 안의 내용이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약간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협회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걸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이런 사람이 글을 올리도록 하는 것을 보면 협회가 어떤 곳인지 충분히 설명이 되니까.”이혜성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급히 다가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 간도 크다.”은서우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왜 말하면 안 되는데? 내 실력으로 성공시킨 수술이야. 그런데 그들은 뒤에서 악의적으로 날 비방하고 있어. 들어가 안 봤길래 다행이지 들어가 봤으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을지 상상도 안 돼.”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화를 낼 줄 안다. 하물며 원래 성격이 톡 쏘는 은서우는 더 말할 것도 없지.어쩌면 전에 하도 참고 살아서 이제 와서 폭발한
조금 전에 그가 직접 배웅까지 했던 김민재였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인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고 충고 한마디 할까 해서요. 모든 사람이 당신의 냉담함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가끔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무슨 뜻인가요?”인명진은 핸드폰을 꽉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의미 없는 전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 생각 해보셨습니까? 어쩌면 상대방도 원하고 있다는걸요.”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사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멋도 없고 차갑기만 죽은 나무처럼 심장이 얼어붙은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봄이 돌아오면 그가 새싹을 틔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다.은서우는 그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독단적인 선택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그녀를 차갑게 밀어냈다. 계속해서 자신을 속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이 누군가에 의해 들통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가장 진실한 문제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은 선생님처럼 좋은 여자는 언제든지 다른 남자한테 빼앗길 수가 있으니까.”말을 마친 김민재는 쿨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김민재의 전화를 끊고 그는 차 시트에 기대어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와 김민재는 사실 친분이 좀 있었고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친구 사이였다. 김민재는 그를 진심으로 상대했고 방금 한 말도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진심 어린 충고였을 것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곱씹다 보니 그의 눈
그녀는 업무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인명진이 왜 갑자기 이 일에 개입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김민재가 병원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는 남자의 마음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A 도시 병원에 김민재가 아는 의사라고는 은서우 뿐이었고 만약 그가 병원에 남아 있는다면 분명 은서우한테 자신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럼 경성에 있는 인명진은 어쩔 방법이 없게 된다.자신이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생각하니 인명진의 눈빛에 저절로 한기가 돌았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은서우는 에어컨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옷을 적게 챙겨 입은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전혀 인명진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퇴원 절차는 이내 이루어졌고 그날 오후, 김민재는 사람들을 불러 짐정리를 하고 퇴원 준비를 했다. 자신이 치료한 환자이고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은서우는 특별히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를 배웅하러 왔다. 김민재는 옆에 있던 인명진을 보고 일부러 물었다.“은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인명진을 보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 그녀한테 물어본 것이지 인명진한테 물어본 것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 일은 그녀의 일이니 그녀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이런 일까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니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대담하게 대답했다.“그래요.”이내 팔을 뻗어 김민재와 포옹했다. 남녀 사이의 애틋한 포옹이 아니라 단순히 작별의 의미에서의 포옹이었고 닿는 순간 이내 몸이 떨어졌다. 그러나 인명진은 그 모습을 보기가 불편했고 은서우가 김민재의 품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손을 뻗어 옷깃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원장님?”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너무 과격하게 반응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때, 김민재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인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두려워서 그랬을 겁니다. 소문
이준서가 이를 악문 채 그녀를 쳐다보며 뭔가 따지려고 하는데 그때 인명진이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인명진은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당신이 이곳에서 행패를 부릴 입장은 아닌 것 같네요.”“인명진.”그의 말을 무시한 채 인명진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아파요?”손목이 빨개졌다. 그러나 진지한 그의 옆모습을 본 순간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프지 않아요. 당신이 있으면 저 사람도 나한테 어찌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여기서 그만 얘기하고 얼른 가요.”“그래요.”고개를 끄덕이던 인명진은 담담하게 이준서를 쳐다보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번 내기에서는 내가 이겼습니다. 돌아가서 당신 선생님께 전해요. 협회에서 경성과 A 도시의 일까지 손을 뻗지 말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그 나이에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될 겁니다.”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긴 복도를 떠났다.이준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은서우는 보지 않았다.다만 인명진이 조금 걱정되었다. “아까 한 얘기 말이에요. 정말 저들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거예요? 신 선생님 쪽은...”어쨌거나 신석림은 의학계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마저도 그의 명성을 들었을 정도이니 인명진이 곤경에라도 처할까 봐 두려웠다.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사이가 틀어진 지는 오래되었어요.”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그제야 안심되었다. 한편, 김민재는 수술이 끝난 후에도 약을 복용하면서 체내의 세포 분열 속도를 억제하였다. 관찰 기간은 몇 달에서 반년 정도였다.그래도 그는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은서우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평생 이 연구소를 떠날 수 없었을 겁니다.”김민재가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은서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처음 그가 이
그 당시 그는 이 일이 이준서 그리고 신석림과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었다.“당신들은 협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많은 환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허구한 날 어떻게 하면 독점할 생각부터 하고 있네요. 나도 당신들 같은 사람으로 만들 생각입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인명진은 경멸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준서의 얼굴에 웃음이 점차 사라졌다. 그가 인명진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랐다.“그거 알아요? 난 당신같이 잘난 척하는 사람이 참 별로더라고요. 좋은 마음에서 귀띔해 주는 건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어차피 수술이 실패하면 당신은 내기에서...”내기에서 진다는 말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잠시 후, 수술실의 불이 꺼졌고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은서우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가장 먼저 인명진에게로 달려갔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에는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인명진 씨, 나 해냈어요. 수술 성공했다고요.”그가 자신의 품 안에서 폴짝폴짝 뛰는 그녀를 한 손으로 받쳐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어요.“잘했어요.”간단한 한마디 말이었지만 은서우는 만족스러웠다.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이 순간만큼은 보람을 느꼈다. 이건 단지 그녀에 대한 인정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의심했던 것 같다. 열등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는 걸 그녀조차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고 보이지 않는 열등감과 어둠이 모두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녀도 이젠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방금 수술할 때...”이준서를 발견한 순간, 은서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자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은서우는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고 누락된 부분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서우 씨, 힘내요.”옆에 있던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수술은 특별하기 때문에 조수와 간호사는 모두 병원의 사람들이 아니었고 프로젝트팀에서 배정된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준서 쪽의 사람들이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은서우는 매우 초조했다. 직접 수술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데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수술을 마쳐야 하니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은서우는 장갑을 착용하고 수술 준비를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인명진이었다. 불안과 걱정이 싹 사라졌고 순식간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온몸에 힘이 솟아올랐다.혼자가 아닌 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수술은 오랫 시간 진행되었다. 내과와 관련된 모든 수술은 쉬운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심장과 골수에 관한 수술이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했다.그녀는 온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에 집중하였고 자칫 사고라도 날까 봐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였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수술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드디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메스가 쟁반 위에 떨어졌다. 은서우는 마스크와 소독 장갑을 벗고 활짝 웃었다.“수술 성공입니다”수술실 밖, ‘수술 중’이라는 네온사인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남자는 밖에서 아무 말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다리던 사람이 나와 환하게 웃으며 그한테 자신이 해냈다고 말하길 바랐다. 이때, 이준서가 다가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이렇게 늦게 나온 걸 보면 내가 내기에서 이긴 것 같네요. 안 그래요
“김수연.”무거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고 이내 은서우는 검은색 양복에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게 보였다.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남자의 하얀 속눈썹과 눈을 보고 은서우는 한눈에 알아봤다. 백색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환자 김민재라는 것을. 김민재도 여기서 인명진과 은서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여긴 어떻게...”인명진도 김민재를 알아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과하라고 하세요.”김민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수연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은서우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어요. 용서해 줘요.”그녀가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 김민재도 평소 제멋대로 굴던 동생이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용서할게요. 하지만 성격 좀 고쳐요. 누구나 당신을 용서해 주는 건 아니니까. 여기저기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지 말고요.”말을 마치고 난 은서우는 바로 자리를 떴다.김민재가 그녀의 환자이긴 하지만 이 일은 김수연과 그녀 사이의 일이었고 지금은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그들과 더 접촉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명진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원장님, 감사합니다.”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나한테 고맙다고 해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방금 원장님께서 나서서 편들어 주셨잖아요. 다만 오랫동안 적어두었던 노트가 없어졌네요.”그녀는 열심히 강의를 들으며 메모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노트가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져서 그녀는 화가 났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인명진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노트가 없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서우 씨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니까.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한테 문자 해요. 아니면 우리 집에 와요. 내가 따로 가르쳐줄게요.”그 말에 은서우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정말이에요?”“내가 언제 거짓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