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할 말이 있는 듯했다.나도현은 망설임 없이 보모에게 하민을 데리고 나가 놀게 하라고 지시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할 말 있으면 해.”“이번에 아이를 찾아줘서 정말 고마워. 신세 많이 졌어. 근데 나도 여기 오래 머물기가 그래. 이제 하민이도 돌아왔으니 나도 이젠 가야겠다.”“시은아.”나도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렇게 금방 배은망덕하게 굴 거야?”“폐 끼치기 싫어.”양시은은 헛기침을 하며 민망함을 감췄다. “알았어.”나도현은 차갑게 말하고 돌아서서 나가버렸다.양시은은 그가 그렇게 쉽게 승낙할 줄 몰라서 잠시 당황했다.하지만 이게 나았다. 질척거리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기느니,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나았던 것이다.나도현이 나가보니 하민은 보모들과 같이 놀고 있었다.그는 눈을 굴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장난감 하나를 하민에게 건넸다.“네 엄마가 떠난다는데, 넌 어떻게 할 거야?”“당연히 엄마랑 같이 가야죠.”하민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나도현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네 엄마는 지금 아프시잖아. 너도 몸이 약한데 엄마 혼자 너까지 돌보면 너무 힘들 거야.”“그럼 어떡해요?”하민은 갑자기 놀 기분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들고 큰 눈을 깜빡였다.나도현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집을 봐. 보모도 많고 너랑 엄마를 잘 돌봐줄 수 있어. 그리고 가정 주치의도 있어서 언제든지 진료를 받을 수 있어서 너희 두 사람을 잘 보살필 수 있지.”“아저씨, 혹시 엄마를 붙잡아 두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하민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어린아이에게 속마음을 들킨 나도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냥 너희들이 걱정돼서 그래.”하민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그럼 좋아요. 엄마한테 말해볼게요.”양시은은 떠날 준비를 하다가 하민의 말에 의아했다.“여기가 뭐가 좋아? 내 집만큼 편한 곳이 없지. 집에 가자.”“엄마, 저 여기 있을래요. 여기 엄청 재미있어요.”하민은 입술을 깨물며 애처롭게 말했다.“그
오늘은 최정숙이 찾아왔다.양시은은 그녀가 올 줄 몰랐다. 양시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최정숙 역시 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두 사람을 갈라놓은 건 자신이었다. 그 당시 그들은 새로운 신분을 얻었고 강태경이 나도현이 되면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니 그녀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을 포기하지 못했고 양시은 또한 그 세월 동안 나도현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심지어 나도현의 하나뿐인 아들 하민이까지 양시은은 아무런 불평 없이 키우고 있었다.8억은 분명 집안 문제를 해결하는데 써버렸을 텐데 양시은은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양시은은 참 괜찮은 아이였다.그녀는 진심으로 양시은이 존경스러웠다.하지만 양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시고 도현 씨를 설득하세요. 그 사람이 놓지 않으려는 거예요.”그녀는 독하고 돈만 밝히는 여자 노릇도 했다.하지만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그러니 최정숙이 그들을 완전히 갈라놓으려면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했고 나도현이 바로 그 근본적인 문제였다.최정숙은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뜻을 존중하려 할 줄은 몰랐다.“너 분명 도현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었는데, 왜 말하지 않았어?”양시은은 고개를 숙였다.“저는 제 나름의 생각이 있고 아주머니도 아주머니 나름의 생각이 있겠죠. 만약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우리 관계를 허락하셨다면 8억을 주면서 그를 떠나라고 하지 않았을 테죠.”8억을 받았으니, 약속은 지켜야 했다.그리고 최정숙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니 가능성 없는 싸움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양시은은 단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최정숙은 그제야 양시은의 강인함과 나도현의 고집을 깨달았다.“네가 8억을 받고 도현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그 아이는 널 찾아 미친 듯이 헤맸어. 그런데 결국에는 찾지 못했지. 그러다가 도현은 심한 우울증에 걸렸어.”양시은은 숨이 턱 막혔다.최정숙의
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평생 그와 함께하고 싶은 꿈을 꿨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그녀는 더 이상 나도현과 함께할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저는 도현 씨와 다시 만날 생각 없어요. 아주머니, 우리 관계를 더 이상 반대 안 하신다니 고마워요. 우리는 4년이나 떨어져 있었고 저도 더 이상 예전의 양시은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 사람 기억 속에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어요.”나도현이 자신을 계속 미워해도 괜찮았다. 미움이 오래되면 그도 언젠가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이다.“왜? 도현이가 널 계속 미워하게 놔둘 거야? 하민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 아니면 양채은 때문이야? 도현이를 그녀에게 양보할 생각이야?”최정숙은 정곡을 찔렀다.그녀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들 두 사람 모두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냥 도현 씨와 너무 오래 떨어져서...”“하지만 도현이는 널 잊지 못했어.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네가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말할게.”최정숙은 차분하게 말했다.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그녀에게는 이제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아 있었다. 바로 아들의 행복이었다.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하는 법. 나도현의 마음의 병은 양시은만이 고칠 수 있었다.“아주머니, 말씀하지 마세요.”“도현이가 널 얼마나 챙기는지 못 봤어?”아플 때 나도현은 곧바로 지석훈을 불렀고 그녀를 여기에 가둬 놓았지만 생활에 필요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심지어 하민이가 양시은의 아이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위해 사람을 찾아다녔다.이 순간, 최정숙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그녀는 심호흡을 했다.“시은아, 도현은 하민이를 처음 본 순간 친자 확인을 했어. 하지만 내가 손을 썼어.”양시은은 담담했다.처음에 나도현이 그렇게 화를 내며 추궁했을 때 그녀는 그가 분명 뭔가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누군가 막았을 거라는 것도
나도현은 지금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현재 무형의 힘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양시은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도현아.”그런 나도현의 모습을 본 박은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나도현의 이름을 불러 그를 깨우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상황 파악을 마친 양시은은 박은희를 위로하며 말했다.“사모님, 얼른 지석훈 씨한테 전화를 걸어서 급한 일이니 한번 와 보시라고 전해주세요.”나도현이 병원에 가게 되면 여러 가지 기사가 뜨게 되고 누군가 이 틈을 타 수작을 부릴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나도현을 위해서라도 지석훈을 부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그래, 지금 당장 연락을 하마.”박은희는 양시은의 말을 들은 뒤에야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다.한편, 지석훈은 박은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나도현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들고 이리도 달려왔다.나도현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미처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돈과 명예 거의 모든 것을 손에 쥔 나도현을 이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이는 양시은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지석훈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고개를 푹 숙인 채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양시은을 대신해 박은희가 대답했다.“이 모든 게 나 때문이야. 시은 씨 아이가 도현이 아이라는 것을 도현이가 알게 되었지 뭐야.”지석훈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나도현이 첫사랑을 지금까지 잊지 못한 것도 핫이슈인데 나도현과 양시은 사이에 아이가 있다니!지금까지 미워했던 첫사랑이 자신을 배신한 적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이를 혼자서 힘들게 키워온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도현이 쓰러진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검사를 마친 지석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박은희가 급히 물었다.“석훈아, 우리 도현이 괜찮은 거야?”‘우리 도현이가 잘못된다
양시은은 양채은의 실종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양채은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양채은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그녀에게 가족은 동생 양채은 밖에 남지 않았다.“아니. 그런 거 아니야.”나도현이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채은이 도망갔어. 시은아, 채은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서 전부 설명해 줄 테니까 제발 믿어줘. 내가 채은이를 이용한 건 맞아. 하지만 걔한테 손을 댄 적은 없어. 내가 채은이를 속였지만 물질적인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잖아.”양채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준 돈으로 양시은의 생활비와 하민이 병원비를 대어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도현을 사랑했고 그와 함께 여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양채은이 아직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녀가 돌아와서 언니가 나도현과 함께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양시은은 양채은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4년이란 시간이 지났기에 그녀와 나도현 모두 많이 달라졌고 이제는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나도현,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예전 건 따지지 마. 네 엄마가 너를 위해 고른 약혼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임다혜 씨랑 잘 지내.”나도현은 양시은이 예전에는 400만을 위해 그를 포기하고 이제는 양채은 때문에 그를 포기할 줄은 몰랐다.양채은이 그에 대한 사랑은 정말 시험을 거칠 수 없었다.“양채은, 그럼 하민이는 어쩌려고? 하민이가 나랑 있으면 너랑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울 거잖아? 내가 하민이에게 더 좋은 치료와 교육을 마련할 수 있어. 애는 아직 어리잖아. 예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나도현의 눈시울이 점점 빨개졌다.그의 말에 양시은의 머릿속에 문뜩 하민이가 떠올랐다. 나도현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민이가 나도현과 함께 있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나도현이 하민이가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걸 알았으니 더는
나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 고마워. 그쪽은 너한테 맡길게.”“그래.”회사에 있었던 여이현은 대답을 마친 뒤 나도현의 전화를 끊고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전화를 받은 온지유는 웃음기 어린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근무시간에는 근무에만 집중하라고 내가 말했잖아. 집에 산후 도우미가 있으니까 집안일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사랑하는 여인의 웃음소리에 감염된 듯 여이현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네가 말한 거 다 기억하고 있어. 내가 너에게 전화를 친 건 다름 아닌 도현이 때문이야. 나도현 첫사랑의 애가 많이 아파서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 네가 인명진 씨한테 연락을 보냈으면 해서 그래.”“알았어. 지금 당장 연락해 볼게.”나도현과 여이현은 절친이었기에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었다.온지유가 인명진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해 주자 인명진은 흔쾌히 승낙했다.“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내일 같이 가보자.”인명진은 온지유가 먼저 그에게 연락을 줘서 엄청 기뻤다. 다른 이를 위해서 찾아온 것이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그는 온지유 마음속에는 여이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바랄 것이 없었고 함께 있을 희망이 없으니 오로지 온지유를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와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다면 인명진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온지유는 근무 중인 여이현에게 방해가 될까 봐 전화 대신 문자를 보냈다.[인명진 씨 오늘 시간 없으니까 내일 당신이 인명진 씨랑 같이 도현 씨 만나러 가봐.][알았어.] 여이현은 아무런 의견 없이 채팅 기록을 캡처해서 나도현에게 보냈고 문자를 받은 나도현은 이 기쁜 소식을 바로 양시은에게 전해주었다.“시은아, 우리 아이 치료받을 수 있어.”하지만 양시은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돈과 권력만 있으면 정말 뭐든 할 수 있구나.’나도현은 양시은의 복잡한 감정을 모른 채 그저 아이를 걱정해서 침묵을 지키는 줄로 알고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애를 썼다.“
하민은 여태껏 나도현이 자기 친아버지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아이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막무가내로 데려간다면 아이에게 큰 상처를 줄 것이 틀림없다.하민의 이름을 들은 양시은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그녀는 잔혹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지만 나도현에게 붙잡혔다.“그만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지금 얘기해서 어쩌라고? 나도현, 난 절대로 널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나도 하민이를 그냥 보내줄 순 없어. 정말로 방법이 없다면 하민이에게 네 존재를 영원히 비밀로 하면 돼.”“시은아, 네 결정이 하민이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몰라? 하민이 올해 고작 3살이야. 어렸을 때부터 병마와 싸울 수밖에 없었고 아빠도 곁에 없었잖아. 지금 애 아빠가 나타났는데 그걸 끝까지 숨기겠다고?”양시은은 나도현의 말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내가 채은이를 데려올게.”두 사람 사이에 놓인 제일 큰 문제는 양채은이였기 때문에 양채은을 찾아온다면 모든 일이 나도현 뜻대로 잘 풀릴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해서 양채은을 찾아다니는 것에 몰두했다.한편, 양채은은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산한 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서 몸이 많이 허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요즘에 자주 악몽을 꾸니 정신이 흐리멍텅해졌다.나도현이 양시은을 위해서 하민이를 구하러 왔으니 하민이를 양시은 곁으로 돌려보낸 것이 분명했다.나도현은 양시은을 위해서 다시 강태경이 되었고 그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도 여전히 양시은이었다.양채은은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것 같았고 그녀가 지금까지 벌인 모든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쪽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도대체 뭐죠? 나도현 씨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인가요?”양채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마스크남을 주시하며 물었다.마스크남은 얼굴을 마스크 뒤에 숨긴 채 눈동자만 드러냈기에 말을 마친 양채은은 마스크남의 온도 없이 차가운
지금 이 순간 양채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고통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양시은은 양채은으로부터 걸어온 전화를 보고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받았다. “너 어디야?”“언니...”전화에서 양채은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은 이른 시간 안에 상황 파악을 마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채은아, 너 지금 어디 있어? 나도현, 채은이 아마도 사고 난 것 같아. 네 사람을 동원해서 채은이의 위치를 찾아봐 줘. 채은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어...”양시은이 잔뜩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양시은의 말을 듣고 있던 양채은의 머릿속에 갑자기 언니와 나도현이 함께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현은 지금쯤 하민이를 집으로 데려가서 언니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양채은은 분노가 아닌 안도감을 느꼈다.“언니, 지금까지 정말 고생 많았어. 이젠 도현 씨랑 잘 지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도현 씨가 아니라 강태경 씨였어. 그저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해서 그런 거야. 하민이를 위해서라도 내 생각하지 말고 나도현 씨와 행복하게 잘 살아. 하민이에게 아빠가 있어야 하잖아. 언니는 영원히 내가 제일 사랑하는 유일한 내 가족이야. 난 한 번도 언니를 원망한 적 없어...”나도현은 강태경이라는 이름으로 양채은을 만났기 때문에 그녀는 강태경만을 좋아할 것이다.양시은은 양채은의 상황을 눈치채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채은아, 그런 말 하지 마. 너 지금 어디 있어? 어디 있는지 말해. 우리가 지금 널 찾으러 갈게. 꼭 버텨야 해. 제발.”“아니,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언니, 너무 슬퍼하지 마. 도현 씨는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잖아. 난 언니가 행복하길 바래.”양채은이 가까스로 고통을 참아내며 힘겹게 진심 어린 마지막 축복을 했다. 점점 약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양시은은 멘탈이 붕괴하기 직전이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말대로 위성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은서우는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고 누락된 부분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서우 씨, 힘내요.”옆에 있던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수술은 특별하기 때문에 조수와 간호사는 모두 병원의 사람들이 아니었고 프로젝트팀에서 배정된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준서 쪽의 사람들이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은서우는 매우 초조했다. 직접 수술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데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수술을 마쳐야 하니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은서우는 장갑을 착용하고 수술 준비를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인명진이었다. 불안과 걱정이 싹 사라졌고 순식간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온몸에 힘이 솟아올랐다.혼자가 아닌 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있었다. 수술은 오랫 시간 진행되었다. 내과와 관련된 모든 수술은 쉬운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심장과 골수에 관한 수술이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했다.그녀는 온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에 집중하였고 자칫 사고라도 날까 봐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였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수술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드디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메스가 쟁반 위에 떨어졌다. 은서우는 마스크와 소독 장갑을 벗고 활짝 웃었다.“수술 성공입니다”수술실 밖, ‘수술 중’이라는 네온사인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남자는 밖에서 아무 말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다리던 사람이 나와 환하게 웃으며 그한테 자신이 해냈다고 말하길 바랐다. 이때, 이준서가 다가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이렇게 늦게 나온 걸 보면 내가 내기에서 이긴 것 같네요. 안 그래요
“김수연.”무거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고 이내 은서우는 검은색 양복에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게 보였다.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남자의 하얀 속눈썹과 눈을 보고 은서우는 한눈에 알아봤다. 백색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환자 김민재라는 것을. 김민재도 여기서 인명진과 은서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여긴 어떻게...”인명진도 김민재를 알아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과하라고 하세요.”김민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수연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은서우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어요. 용서해 줘요.”그녀가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 김민재도 평소 제멋대로 굴던 동생이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용서할게요. 하지만 성격 좀 고쳐요. 누구나 당신을 용서해 주는 건 아니니까. 여기저기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지 말고요.”말을 마치고 난 은서우는 바로 자리를 떴다.김민재가 그녀의 환자이긴 하지만 이 일은 김수연과 그녀 사이의 일이었고 지금은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그들과 더 접촉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명진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원장님, 감사합니다.”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나한테 고맙다고 해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방금 원장님께서 나서서 편들어 주셨잖아요. 다만 오랫동안 적어두었던 노트가 없어졌네요.”그녀는 열심히 강의를 들으며 메모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노트가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져서 그녀는 화가 났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인명진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노트가 없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서우 씨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니까.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한테 문자 해요. 아니면 우리 집에 와요. 내가 따로 가르쳐줄게요.”그 말에 은서우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정말이에요?”“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힘들게 적어놓은 노트가 이렇게 망가져 버렸다니?“나한테 왜 이래요? 그쪽이랑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그녀는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화가 나기도 했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부자들은 이렇게 돈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인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자리 하나 때문에 돈을 쓰고 그녀의 성과를 망가뜨려 놓다니. 찾아가서 따지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적은 노트는 이미 사라졌고 이 세상에 똑같은 건 없으니까. 그러나 말로라도 그 여자를 혼내줘야 할 것 같았다. 김수연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수연도 도망갈 생각이 없었으니까.힘들게 적어두었던 노트가 망가진 것을 보고 화를 벌컥 내는 은서우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수연을 보고 그녀는 물 한 잔을 들어 김수연을 향해 뿌렸다. “아악.”비명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그곳에는 인명진을 숭배하는 사람들, 업계의 유명 인사들 그리고 강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소리를 들은 인명진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소란을 피우는 주인공이 은서우일 줄은 몰랐다. 김수연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은서우를 향해 달려들었고 바로 그 순간, 인명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은서우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에요?”그가 품에 안긴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은서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의 김수연이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여자가 왜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르겠네요. 다짜고짜 말도 없이 나한테 물을 뿌렸다고요.”인명진 앞에서 김수연은 애써 자신의 화를 억눌렀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한 남자는 인명진뿐이었다. 특별히 시간 내서 이 강의를 들으러 온 것도 인명진을 보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은서우가 제일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했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게다가 인명진이 은서우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
김수연이 막 뭐라고 하려는 찰나, 밖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몸에 걸친 흰 가운이 그의 분위기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은서우는 노려보면서 화를 꾹 참으며 다른 자리에 앉았다. 같은 시각, 인명진의 시선이 무대 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은서우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잠시 멈추는 것 같았지만 또 단지 자신의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세포 구조에 대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건 제가 박사 학위를 취득할 때 썼던 논문입니다. 다들 한번 보시죠.”그가 프로젝터를 켜고 화면을 클릭했다. 그는 의외로 강의에 능숙했다. 심지어 일부 대학의 교수들보다도 더 이해하기 쉽게 강의를 했고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은서우는 집중해서 들으며 가끔 펜을 들고 뭔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이혜성은 빼곡한 메모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은서우, 나중에 네가 승진하고 월급이 오르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고 하더라도 난 절대 널 질투하지 않을 거야. 진심이야.”은서우처럼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노트 필요하면 빌려줄게.”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됐어. 난 지금도 좋아.”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이혜성은 정중히 거절했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은서우는 깊은 여운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그때,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간호사가 그녀에게 노트를 빌려달라고 했다.은서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간호사 아닌가요?”‘간호사의 평가도 이젠 이렇게 어려운 건가?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시대에 뒤처지기라도 한 건지.’간호사는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 시선을 슬쩍 피했다. “부탁이에요. 은 선생님. 저한테 빌려주세요. 조금 있다가 돌려드릴게요.”“그래요. 빌려줄게요. 잊지 말고 빨리 돌려줘요.”은서우는 한마디 당부하며 간호사에게 노트를 넘겨주었다. 그 노트는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라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간호사는 눈빛을 반짝이
시간이 거의 다 된 것을 발견하고 은서우는 이혜성에게 얼른 앉으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여인이 거들먹거리며 은서우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그녀의 자리를 빤히 노려보았다. “일어나 봐요. 이 자리는 내가 앉을 거니까.”은서우는 눈살을 찌푸렸고 눈앞의 여자는 병원에서 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다만 명품 목걸이에 명품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콧대가 높은 부잣집 아가씨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자리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투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트집을 잡으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이 자리를 원해서 이러는 것인지 은서우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옆자리를 짚으며 말했다.“저쪽에 빈자리가 있거든요. 앉고 싶으면 저쪽으로 가시죠.”말을 마치고는 더 이상 그 여자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난 꼭 이 자리에 앉아야겠어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내 말 안 들려요?”말로는 부족한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고 기어코 강제로 자리에서 끌어올렸다.은서우도 화가 치밀어 올라 그 여자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내가 먼저 와서 앉은 자리예요. 주변에 자리가 그렇게 많은데 왜 나한테 이래요?”“난 딱 그쪽 자리가 마음에 들어요. 왜 양보를 안 해주지? 뭐 대단한 의사도 아니면서. 받아요.”그녀는 은서우의 손에 카드를 쥐여주었고 은서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여자는 팔짱을 낀 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 카드에 4천만 원이 있어요. 비밀번호는 없고요. 자리를 뺏지 않고 대신 살게요. 됐죠? 이 정도 금액은 그쪽 연봉만큼은 될 거니까 이거 받고 당장 꺼져요. 앞에서 얼씬거리지 말고.”카드를 쥐고 있던 은서우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차가운 촉감... 그녀가 이전에 가장 원했던 것이었다.예전에 돈이 없던 은서우라면 어쩌면 이 돈 받고 자리를 비켜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카드를 손에 쥐여주는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전에
서우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기억하기에 인명진은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술 안 마시지 않아요?”인명진은 절대적인 이성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평소에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권유를 받아도 거절하곤 했었다.예전에 경성 중심병원에 있을 적, 사람들이 일을 부탁하면서 술을 보내와도 인명진은 모두 돌려보냈다.인명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차분히 말을 꺼냈다. “새 병원으로 옮기고 난 후 아무 선물도 못 해줬네요.”“저한테 주는 선물이에요?”인명진은 놀란 서우의 표정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하고 다른 것을 사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웨이터에게 손짓하려는 인명진을 서우는 황급히 막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이 함께 거리르 누비며 쇼핑한다면 커플이 데이트하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도 물론이고 인명진 성격에 이 와인보다 더 싼 선물을 살 리도 없었기에 서우는 선물을 환불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그날 마음에 상처를 입은 후, 서우는 인명진과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 오해하고 싶지 않았다.인명진은 한참 동안 서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마음에 드는 물건이 생기면 나한테 말해요.”서우는 가슴이 콩닥콩닥했지만 차분한 인명진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고는 혼자 속으로 그저 이직 축하선물일 뿐이니 오바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였다.식사가 끝난 후, 인명진은 서우를 집으로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 인명진은 문 앞에서 머뭇거리더니 자신 주소를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요즘 친구의 집에 살고 있어요. 정원로 10번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요. 전화 걸어도 되고요.”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인명진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온 은서우는 온몸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비싼 와인이 담긴 쇼핑백이 놓여있었다.그녀는 와인을 꺼내 와인셀러에 넣은
임명진은 서우랑 눈이 마주쳤고 서우는 자연스럽게 차에 올랐다.인명진은 뒷좌석에 앉으려는 그녀를 제지했다.“조수석에 앉아요, 그게 편해요.”서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괜히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그대로 따랐다.보통 조수석은 여자 친구 자리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임명진을 보니 그런 걸 따지는 사람 같지는 않아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차에 올라탄 후, 서우가 안전벨트를 하자 갑자기 눈앞에 핸드폰 하나가 나타났다.고개를 든 서우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임명진은 손을 운전대에 올려둔 채, 얼굴을 돌려 서우를 보며 말했다.“아직 식당을 알아보지 않았어요. 난 운전해야 하니까 서우 씨가 뭐 먹고 싶은지 찾아봐요.”서우는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그렇게 임명진은 운전하고, 은서우는 옆에서 핸드폰을 보며 식당을 찾았다.후보 세 곳을 골랐지만 서우는 선택 장애가 있는지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서우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스테이크, 생선구이, 회 중에 뭐가 좋아요?”세 곳 모두 평점이 꽤 높은 식당이어서 더 찾아보지 않았다.서우는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잘 먹는 스타일이라 웬만한 건 다 잘 먹는 편이었다.임명진은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회는 기생충이 많아서 안 돼요. 그리고 생선구이에 쓰는 생선은 깨끗하지 못해요.”서우는 역시 의사라 그런지 음식을 선택할 때도 신경을 많이 쓴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자신을 반성한 뒤,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그럼 스테이크 먹을까요?”임명진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그래요. 스테이크 먹어요.”서우는 인명진이 왜 뜸 들였는지 묻고 싶었지만 만약 그가 다른 걸 먹자고 했으면 속이 터졌을 것 같았다.그녀가 오랫동안 고민해서 고른 곳이니 거절 받고 싶지 않았기에 괜히 물어봤다가 기분만 상할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레스토랑은 쇼핑몰 3층에 있었고 인테리어가 꽤 고급스러운 데다가 잔잔한 음악도 흘러나와
서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난 진짜 괜찮아. 너희끼리 가.”혜성은 아쉬운 표정을 거두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사람들이 다 떠난 후, 서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시작하려 자료를 꺼내 놓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넋 놓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밖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서우는 방금전의 실수를 떠올리며 혼잣말했다. “혼자 김칫국 마시긴. 착각하고 난리야.”서우는 잠깐이지만 인명진도 자신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했다.그나마 이제라도 빨리 깨달았기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연애란 감정에 빠지는 건 서우에게 어울리지 않았고 지금은 커리어에만 집중해야 할 때였다.보통 사람이라면 실연의 아픔을 먹거나 놀러 다니며 풀지만 서우는 가장 고문인 일에 몰두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효과만큼은 대단했다.서우는 첫날 강연에 가지 않고 그 대신 메디컬 플랜을 완성했다. 밤샘 작업이었지만 지친 기색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완성 후, 서우는 무의식간에 인명진에게 전화를 걸어 플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통화가 끝난 후, 인명진에게서 돌아온 건 한마디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밤샘 작업을 했단 말이죠?”인명진의 말투는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담담했지만 서우는 오히려 자신이 사냥감이 된 듯한 위압감을 느꼈고 긴장하기 시작했다.“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오늘 다른 일이 없으니까 하루 휴가 내고 쉬면 돼요.”“그럼 오늘의 강연은 미루는 걸로 해요.”전화기 너머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낮은 소리라 서우는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왜요? 왜 연기해요? 삼 일 동안 하기로 했잖아요.”인명진은 평소 다망한 사람이었고 이번 병원 강연에 특별히 삼일 정도의 일정을 비워 두었다. 강연이 끝난 후, 바로 경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었으나 인명진은 스케줄을 바꾸려고 했다. “그렇긴 하지만, 어제 강연에 서우 씨는 참
인명진의 대답을 들은 원장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곧바로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원장은 감개무량한 듯 말을 이었다.“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난 타고났단 말이죠. 처음부터 저는 인원장님이 우리 병원의 귀인이 될 분이라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역시 제 생각이 맞았어요.”인명진은 담담하게 받아쳤다.“원장님께서도 제 큰 골칫거리를 해결해 줬으니 이건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원장은 당황했다.그가 언제 인명진을 도운 적이 있다는 말인가?문득 은서우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이 눈에 들어오자 원장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하하, 인원장님도 참, 너무 겸손하시네요! 은 선생님도 전문가이신데 골칫거리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득을 본 셈이죠.”은서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명진의 담담한 한마디가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정말 그녀 때문일까?서우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너무나 달콤한 설렘이었지만 그녀는 이성의 끈을 꼭 붙잡고 있었다.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은서우는 원장실을 나서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원장님, 진짜 저 때문인가요?”말을 끝내자마자 후회가 밀려온 서우는 곧바로 덧붙였다.“아, 죄송해요. 제가 깜빡하고 실수했네요. 이젠 원장님이 아니신데...”인명진은 역시나 담담히 대답했다.“원장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하지만... 다른 호칭이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방금 서우 씨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은 맞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여전히 차가워 보이는 그였지만 그 속에 감춰진 부드러움을 서우는 느낄 수가 있었다.은은하게 다가오는 그의 온기가 은서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근데... 왜죠?”그 순간 인명진도 멈칫했다.왜일까?인명진 자신도 모르고 있다가 은서우의 그 한마디 물음이 그를 깨닫게 한 것이었다.서우 혼자만의 혼란스러움이 두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