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훈은 약을 처방하고 링거를 넣으며 약도 나눠줬다. “이건 먹는 약이야. 하루 세 번이고 식후에 복용해.”지석훈은 나도현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나도현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연인의 눈에선 사소한 문제도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그냥 감기와 열뿐이야. 해열 주사도 맞고 링거도 맞고 약도 처방해줬어. 뭘 그렇게 걱정해? 약 바꿀 거면 내가 순서를 적어줄게. 이건 주사바늘인데 내가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그럼 난 갈게.” 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나도현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지석훈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링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나도현이 전화 폭탄을 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여자는 아직 깨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애정 어린 모습을 못 봐줄 거 같았다. 신석훈이 간지 얼마 안 되서 양시은이 눈을 떴다. 양시은은 침대 옆에 있던 나도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게 아닌지 잠시 의심이 들었다.“나도현?”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놀랍게도 나도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끝의 온기와 감촉을 느끼면서 양시은은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양시은은 어쩔 줄을 몰랐다. 나도현은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미워하고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다.“나...”양시은이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목도 엄청 아팠다.“말하지 마. 너 지금 40도 넘게 열이 나고 있어. 물 마실래? 내가 물 가져올게.”나도현은 예전과는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그의 따뜻한 눈빛은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 그와 함께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 나도현은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애틋하게 대했다. 나도현은 지금도 말 뿐인 게 아니였다. 나도현은 일어나서 그녀를 도와주려고 했고 그녀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그러나 나도현은 그녀를 가만히 들어서 편하게 기대게 해주었고 그
양시은은 잠시 말문이 막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 시절 자기가 나도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를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도현은 점점 더 그녀에게 다가가며 깊고 검은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혹시 너도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면 안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양시은은 입술을 살짝 비틀며 못마땅하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현 변호사님, 이 세상에서 나만큼 마음도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도 없을 거야. 만약 내가 마음이 약해 졌다면 처음부터 돈 때문에 떠나지 않았겠지.” 그의 동공이 갑자기 수축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늘 마음속에 떠안고 있던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고 자신을 속여온 것이 얼마나 웃기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그녀는 죄책감 없이 그저 이런 일을 벌이고 있었다. “용서해 달라는 거냐?”나도현은 침대 옆에 손을 대며 그 반짝이는 눈빛을 그녀에게 맞추었다. 그 눈빛 속에는 잔인함이 섞인 웃음이 묻어 있었다. “꿈도 꾸지 마. 양시은,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비로소 뭘 해야 할지 알게 되는 거야.” 양시은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을 바라보며 손이 살짝 떨려 뜨거운 물이 흘러나올 뻔했다.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그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나한테 복수하려고 당신 원래의 평온했던 삶을 망치는 게 그 정도로 가치가 있어?” “너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 양시은.” 그가 마치 모든 것을 지해하는 신처럼 천천히 덧붙였다. 양시은은 무엇을 하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듯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그저 컵을 들어 물을 천천히 마셨다. 달콤하고 따뜻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 불타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도현은 아무 말 없이 약을 그녀에게 던졌다. “먹어, 여기서 죽지 마.” 양시은 약을 받아 삼켰고 약의 쓴맛이 입안에 서서히 퍼졌지만 그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날 받아주지
세상 일이란 예기치 않게 변하기 마련이다. 모든 전환은 인생의 작은 순간 속에서 일어나며 운명은 이미 그녀에게 선택된 답을 주었고 그 답을 따라 그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했다. “양시은!” 그녀는 갑자기 눈을 뜨며 흐릿한 눈앞에 나도현의 모습이 간헐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웃으며 조롱처럼 말했다. “나도현 변호사님, 점점 더 멋있어 지네.” 하지만 나도현의 얼굴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눈을 좁히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왜 친한 척 해. 내게 빚진 것은 어떻게 갚을 건데?” 양시은은 머리를 세게 쳤다. ‘뭐지?’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잊어버린 것 같지?’ 그렇다. 그들 사이는 이미 서로를 모르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나도현은 이미 그녀의 목을 잡고 있었고 하얀 피부 아래에서 굵은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뭘로 갚을 거야?” 그는 점점 더 다가갔고 그 표정은 악몽처럼 흉악했다. 양시은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들이 맺혔다. “나도현, 가까이 오지 마. 제발...” 끝없이 계속되는 악몽 그 안에서 현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국 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도현은 침대 옆에 서서 입술을 꽉 닫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무서워하냐?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그때 날 떠났냐?” 침대 위의 양시은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까지 움켜잡은 채 얼굴이 창백하고 땀은 비오듯 흘러내렸다. 나도현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듯 급히 몸을 구부려서 그녀를 깨우려 애썼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그 목소리 속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 “양시은, 깨어나. 꿈이야.” 하지만 피부를 만지는 순간 그는 즉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더 세게 만져보니 그녀가 열이 세게 나고 있었다. ‘아까 주사 맞고 약을 먹었는데 왜 갑자기 다시 열이 나지?’ 아무리 불러도 양시은은
지석훈도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손으로 온도를 체크한 뒤 급하게 손을 빼었다. “상처가 감염된 것 같은데 그럴 리는 없는데. 약도 먹었고 상태는 나아져야 하는데.” 그는 급히 상황을 간단히 점검했다. 양시은의 눈꺼풀을 손으로 열고 손전등으로 비추어 봤다. 반응은 미약했다. 지석훈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며 급히 약을 하나 그녀의 입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안 되겠다. 여기서 해결할 수 없다. 빨리 큰 병원에 가서 자세히 검사 받아야 해.” 나도현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양시은을 그냥 안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지석훈은 불러봤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고 급하게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는 잠시 옷차림을 보았다. 흰색 잠옷에 대충 외투만 입고 발에는 체크 무늬 슬리퍼를 신고서도 이렇게 급히 온 것을 깨닫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자 그녀가 그를 이렇게 무정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나도현, 너 같은 놈은 절대 용서 안 해. 영원히!” 바람이 불어 지나가면서 그의 분노를 다 날려버렸다. 병원 안은 분주했고 나도현은 양시은을 안고 진료실로 직행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열 나서 혼수 상태예요.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습니다.” 응급실 의사들이 급히 달려와 구급 처치를 시작했다. 20분쯤 지나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상처가 감염된 건 아닌가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면역력이 약해져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입니다. 이런 열 증상은 드물고 상태는 이제 통제가 되었어요. 혈액 검사로 원인을 밝혀볼 예정입니다.” 양시은은 이제 많이 나아 보였다. 나도현은 두어 날 동안 그녀에게 별 문제가 없었고 별장이었지만 온도가 적당히 유지되었고 상처 감염도 아니었고 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까? 입원해야 할까요?” 나도현은 불편한 마음에도 그녀의 상태를 생각하며 물었다
나도현은 양시은의 행동을 느끼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아픈데도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유혹하냐?” 양시은은 급하게 기침을 하며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난이야.”나도현은 차분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침대 옆에 앉았다. 기침을 마친 양시은은 적당히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심해진 거 같지? 나 왜 이래?” “검사 결과는 아직 안 나왔어.” 나도현은 여전히 평온하게 대답했다. 양시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때 목이 갑자기 마르기 시작했다. 자리를 뜰 수는 없지만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던 차에 나도현은 따뜻한 물 한 컵을 그녀 앞에 가져다 주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 양시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잠시 온기가 퍼지는 듯했지만 그것은 금세 사라졌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무서운 존재야? 꿈속에 악몽으로 나올 만큼?” 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아니. 그냥...” 양시은은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나도현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웃으며 일어났다. “일찍 자.”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몇 개의 사건 기록을 살펴보았고 최근에 사건이 많았다. 다 보고나니 한시간이 지났고 양시은이 걱정되어 조용히 그녀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잠든 상태였다. 이번에는 악몽을 꾸지 않은 듯 꽤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자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그때 양시은이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았다. “가지 마.”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나도현의 마음 속에도 잠시 따뜻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가 그렇게 잠든 그녀를 바라보며 몇 년 전 그들 간의 사랑이 떠오르며 그때의 모든 것이 스치는 듯 했다. 그는 밤새 그녀 곁에 있었고 아침에야 자리를 떠났다. 햇살 한 줄기가 얼굴에 비춰지자 양시은은 눈을 떴다. 손에는 누군가의 잔여 온기가
“뭐라고?”나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언제나 냉철했던 그였지만 이 순간만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양시은이 그토록 아끼는 아이인데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양채은은 그의 변화된 표정을 보며 가슴 속에 얼음이 맺히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절규하듯 소리쳤다.“도현 씨의 약혼녀는 나예요. 당신이랑 이 아이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얘를 걱정하는 건데요?”나도현의 목소리는 차갑고 위협적이었는데 마치 이를 갈며 한 자 한 자 내뱉는 듯했다.“하민은 겨우 어린애일 뿐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양채은은 그의 눈빛에 겁먹고 한발 물러섰지만 곧 허리를 펴고 단호하게 따졌다.“무고하다고요? 그럼 나는요? 나야말로 제일 무고한 사람이 아닐까요! 난 아이도 잃고 당신도 잃고 엄마가 될 자격까지 잃었어요. 이 모든 게 다 당신이랑 시은이 때문이라고요!”“채은아, 정신 차려!”나도현은 앞으로 한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양채은은 이제 무너지고 미쳐버린 상태였다.“지금보다 더 정신이 말짱할 때가 없어요. 도현 씨,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그녀의 눈빛에는 한 가닥의 애처로움과 간청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나도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하민의 일은 네가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럼 가만 안 둘 테니까.”양채은은 냉소했다. 자신이 한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녀의 눈에는 결연한 빛이 스쳤다.“설명? 좋아요. 말해드리죠. 하민이는 당신이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보냈어요. 나랑 다시 시작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영원히 걔를 볼 생각하지 말아요.”“미쳤군!”나도현은 분노에 차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채은아. 이런 식으로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웃기지 마! 나 누구의 협박도 받지 않아!”양채은은 입술을 깨물었다.“당신이 날
양채은은 심호흡을 하고 최후의 협박을 했다.“그럼 미안하지만 하민이는 내가 데려갈게요. 아마 당신이랑 시은이는 평생 하민이를 못 볼 거예요.”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돌아서서 자신의 차에 타려고 했다.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하게 옆에 있던 사람은 어느새 다가와 그녀를 제압해 버렸다.나도현의 눈빛은 차갑고 위험했다.“이번엔 도망 못 가. 하민이를 내놔. 미성년자 유괴가 무슨 죄인지 너도 잘 알잖아.”양채은은 입술을 깨물었다.“날 감옥에 보내겠다는 거예요?”“그건 내 전문 분야지. 하지만 하민이를 데려오면 네 변호를 맡아줄 수도 있어.”나도현의 태도는 확고했다.양채은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모든 법 조항을 줄줄 외우고 다녔고 그의 마음은 법전으로 꽁꽁 싸매져 따뜻한 구석이라곤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매정하군요. 하지만 난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바로 그때 저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보니 검은색의 수수한 차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그들 사이에 멈춰 섰다.차에서 후드티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근육이 탄탄한 팔로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의 목에는 날카로운 칼이 겨누어져 있었다.남자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을 풀어줘. 안 그러면 얘를 죽일 거야.”하민이었다.양채은은 마스크를 쓴 남자를 보고 놀랐다.“네가 여긴 왜 왔어?”“네가 일을 망칠 줄 알았지.”마스크를 쓴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있어서 원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당신 도대체 누구야?”나도현은 차갑게 묻는 동시에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하민이를 구할 기회를 찾았다.마스크를 쓴 남자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칼을 하민이의 목에 더 바짝 댔다. 하민이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지만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그는 마치 도움을 구하듯 무력한 눈빛으로 나도현을 바라보았다.“나 변호사님, 양채은을 붙잡는 게 중요한지 아니면 이 아이의 목숨이 중요한지 잘 생각해 보시지.”마스크를 쓴 남
차는 멀리 사라졌다.마스크를 쓴 남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차 문을 닫고는 룸미러로 양채은을 쳐다보았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양채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실패했으면 우리 둘 다 여기서 끝장이었어.”마스크를 쓴 남자는 화가 난 듯했다.양채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걔는 내 조카고 몸도 약해. 우리랑 도망 다니는 건 좋지 않아.”마스크를 쓴 남자는 비웃으며 되물었다.“너 정말 이런 식으로 평생 살 생각이야?”“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난 이미 그 사람과 완전히 끝났는데.”양채은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속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마스크를 쓴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일단 상황을 좀 보자.”양채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견딜 수 없는 복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그때야 마스크 남자는 양채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왜 그래?”대답을 듣기도 전에 양채은은 의식을 잃었다. 마스크를 쓴 남자는 황급히 앞으로 나가 핸들을 잡고 차를 세운 후, 급히 차에서 내렸다.그때야 그는 양채은의 아래에 피가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채은아, 정신 차려!”하지만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고 반응이 없었다. 유산 수술 후 제대로 몸조리도 못 해서 하혈을 하는 게 분명했다.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채은을 뒷좌석에 눕히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한편, 아까 그 자리에서는 부하들이 모여들었다.“쫓아갈까요?”“됐어.”나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하민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졌다.“아저씨랑 엄마 보러 갈까?”하민은 원래 그의 행동에 불만이었지만 엄마를 볼 수 있다는 말에 눈이 반짝였다.“좋아요!”얼마 전 큰 병을 앓았던 터라 몸이 허약해 보였던 그였지만 엄마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나도현은 곧바로 그를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양시은은 아직 미열이 있었지만 그래도 열은 좀 내린 상태였다. 약을 먹고 나니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엄마!”환청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하민이가 문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