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이 뒤에서 돕지 않았다면 배진호 혼자 힘으로 무슨 수로 회사를 설립하고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예전에는 권다솔이 그를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틈을 파고들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배진호의 행동으로 인해 그 사랑에 금이 갔다.지금의 남태건은 자신이 그 금을 점점 더 크게 만들고 결국 완전히 깨트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대사관.소미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온지유와 여이현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차가 멈추자 온지유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뒤 소미를 차에서 데리고 내려오려고 했다.“싫어요! 저 차에서 안 내려요!”소미는 작은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볼을 타고 옷 위로 흘러내렸다.“부탁이에요. 저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전에는 저를 가족처럼 대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버리려는 거예요?”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지금 이 상황에서 소미는 아직도 도덕적 책임을 들먹이다니.온지유는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소미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그리고 강제로 그녀를 차에서 끌어내 대사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직원들 앞에서 온지유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저는 안 가요! 저는 당신들 나라 사람이 아니에요. 이분들이 제 아빠, 엄마예요. 우리는 가족이고 별이는 제 오빠라고요!”소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 쳤다.직원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자신의 운명이 바뀔 거라고 믿고 있었다.하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냉혹했다.사실이 아닌 몇 마디 거짓말로 모든 것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직원은 곧바로 소미의 입국 기록을 확인했다.이 기록은 그녀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었다. 직원은 온지유에게 말했다.“우리는 이 아이를 최대한 빨리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가족에게 연락할 것입니다.”가족이 그녀를 데리러 올지 말지는 그들 문제였다
소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그녀는 너무 어렸고 직원의 품에 안긴 상태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땅에 닿을 수 없었다.그저 온지유 가족 세 사람이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소미를 떠나보냈지만 온지유와 가족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이미 다 끝난 일이니까 이제 신경 쓰지 말고 음악이나 들으면서 기분을 풀어볼래?”여이현이 침묵을 깨며 말을 꺼냈다.온지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무 노래나 틀어줘.”여이현이 자동차 키를 꽂자 차량 스크린이 켜졌고 그 화면에 검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그의 얼굴은 온통 가면에 가려져 있었고 오직 두 눈만 보였다.그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여이현을 응시했다.“당신 누구야?”여이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왠지 이 남자가 소미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의 질문에 즉답하지 않고 한참을 비웃더니 되물었다.“여이현, 아이가 둘 있다며? 그런데 왜 차 안에는 한 명만 있지? 다른 아이는 데리고 나오기 싫었던 거야? 아니면 그럴 능력이 없었던 거야?”“네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능력까지는 없겠지.”여이현은 그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즉시 알아차렸다.그의 시선은 점점 더 차가워지며 단호히 말했다.“소미는 네놈이 보낸 거였군.”그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예전부터 그는 소미 뒤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독약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그 대신 그는 여전히 여이현을 도발하며 말했다.“알고 싶다면 직접 조사해 보라고. 다만 누가 더 빠를지 지켜보자고.”그 말을 마친 뒤 차량 스크린이 갑자기 꺼졌다.몇 초 뒤 화면이 다시 켜졌을 때는 이미 평소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온지유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소미를 대사관에 데려다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소식을 알고 우리 차까지 해킹한 걸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엄마랑 아빠가 처리할 거야.”온지유는 별이를 이 일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별이는 아직 어리니까 행복하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른들의 문제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별이는 그런 엄마와 아빠의 생각과 달랐다.“엄마, 아빠,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어요.”“네가 네 자기 몸을 잘 돌보는 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고 엄마랑 아빠는 너희를 잘 지킬 거야.”온지유는 손을 뻗어 별이의 작은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녀는 두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정체는 여이현이 철저히 파헤칠 것이다.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네, 저는 엄마 아빠를 믿어요! 두 분이 분명 잘 해내실 거라고요!”별이는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지었다.아이가 안전벨트를 바르게 착용한 것을 확인한 후 여이현은 차를 출발시켜 집으로 향했다....권다솔의 집.지난번 김영은과 권용민이 호텔까지 찾아온 뒤 권다솔은 정식으로 집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김영은은 집안의 가사 도우미들에게 말했다.“영양 있는 음식을 더 준비해서 다솔이의 건강을 잘 챙겨주세요.”“엄마,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 정말 괜찮아요.”권다솔은 이 모습을 보며 속이 시큰해지고 쓰라렸다.역시 그녀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은 친부모라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정말 큰 실수를 했었다.배진호 때문에 부모님과 다투다니, 그때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지금 네 모습을 좀 봐봐. 온몸에 살이 하나도 없잖니. 엄마는 이런 걸 다 겪어봤어. 여자는 아이를 낳든, 몸을 회복하든 반드시 영양을 잘 챙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병을 남기기 쉽단다. 네가 지금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왜 제대로 쉬면서 몸을 돌보지 않겠니?”김영은은 딸의 손을 꼭 붙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집안은 배진호의 집과는 전혀 달랐다.그들은 경
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딸이 더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나길 바란다.지금 배진호가 약간의 성과가 있는 이유는 여이현의 지원 덕분이다.만약 어느 날 여이현이 돕는 것을 멈춘다면?혹은 배진호가 창업에 성공한 뒤 새로운 여자를 만나 권다솔을 이용만 하고 차버린다면?그렇게 되면 권다솔은 너무나 불행하지 않겠는가?김영은은 이전부터 이런 점이 걱정되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딸의 행복을 막을 수 없었다.이번 다툼을 계기로 그녀는 더 확신하게 되었다.배진호는 절대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직접 진호 씨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봤거든요. 우리가 다시 화해하면 제가 뭐가 되는데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김영은은 처음에는 단순히 다툼 정도로만 알았지만 이 말을 듣자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참 기가 막히는구나. 지금부터 다른 여자랑 놀아났다면 나중에 창업 성공하면 두세 명씩 끌어안고 다니겠네? 이혼해라! 너희 둘, 내일 당장 가서 이혼하자. 이혼서류부터 받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권다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방으로 돌아간 뒤 달력을 보니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주말에는 법원이 문을 열지 않으니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권다솔은 휴대폰을 꺼내 배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다음 주 월요일 법원 앞에서 만나요.][다솔 씨, 법원에는 왜요?]배진호는 그녀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답장을 보냈다.그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사실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법원에 가자는 건 이혼증을 받으러 가자는 말이었다.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에게 매달려 보았다.[우리 둘이 먼저 한 번 만나요. 우리 사이에는 아직 오해가 많아요. 정말 이혼을 원한다면 오해를 풀고 나서 이야기해요.][둘이서 더 할 얘기는 없어요. 전에도 이혼 신고하러 가자고 했는데 당신은 나오지 않았죠.
아래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김영은과 마주쳤다.“어머님.”남태건은 정중하게 인사했다.김영은은 고개를 들어 남태건을 바라보며 점점 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권다솔에게로 향하자 눈에는 걱정이 어렸다.“다솔아,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다크서클이 심하니? 설마 어젯밤 한숨도 못 잔 거야?”생각해 보면 권다솔과 배진호는 서로 깊이 사랑했던 사이였다.지금 이혼을 결정한 것이 그녀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김영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래 끌며 고통받느니 짧게 끝내는 것이 낫다고 김영은은 생각했다.가슴 아프지만 딸을 위해 다시 그런 잘못된 관계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에요 엄마. 어젯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서 추워서 깼어요. 그래서 잠을 설친 거예요.”권다솔은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대충 변명을 했다.하지만 엄마인 김영은이 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딸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말했다.“오늘 주말이니까 둘이 밖에 나가서 좀 돌아다니렴. 가면서 내 스킨케어 제품 하나 사다 줄래? 마침 다 썼거든.”“네, 알겠습니다.”남태건이 웃으며 바로 대답했다.그는 김영은을 기쁘게 만드는 데 능숙했다. 몇 마디 말로도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김영은은 시계를 한번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래, 이제 너희 둘도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나가 놀아. 젊은 사람끼리 얘기 나눌 거리가 있잖아?”권다솔은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의 눈의 지울 수 없는 근심을 보며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자신이 잘못한 탓에 어머니까지 걱정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지금 남태건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또 그녀와 함께 연기를 해 준다니 권다솔은 굳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그럼 엄마, 저희 먼저 다녀올게요. 저녁에는 일찍 들어와서 같이 먹을게요.”“너희가 저녁을 안 먹고 들어와도 상관없어.
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사실 그녀도 아이를 정말 좋아했다.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기뻤다.그런데 결과는?아이를 잃었고 깊이 사랑했던 남편도 잃었다. 한때 행복했던 순간들은 마치 환상처럼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깨져버렸고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뿐이었다.“미안해. 내가 괜히 네 아픈 기억을 건드렸어. 다 내 잘못이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바보 같이...”남태건은 점점 초조해지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두 번째로 자신을 때리려 했지만 권다솔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지 마세요. 태건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건 태건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그녀가 아이를 잃은 건 남태건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게다가 방금 했던 말도 그녀에게 크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잃었다고 해서 주변 모든 사람이 그녀 앞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다.“그래도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다솔아, 기분이 안 좋으면 마음껏 화를 내.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써도 괜찮아. 난 널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남태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권다솔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끝없이 많은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보낸 메시지였다.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단 하나도 읽고 싶지 않았다.권다솔은 모든 메시지를 선택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의 휴대폰을 흘끗거렸다.각도상 화면의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 권다솔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한 사람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배진호다!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꼈다. 권다솔이 유산한 이후로 배진호는 남태건과 비교할 자격조차 없게 되었다.방금 일부러 떠본 결과 권다솔은 아직도 그 아이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무게가 가로막혀 있고 정미진이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둘이 다시 함께할
그와 권다솔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호구 짓’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다솔 씨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하거나 잘못한 적 없어. 오히려 내가 잘못했지. 그리고 어머니, 친아들한테 약을 먹이는 짓은 어머니밖에 못 할 겁니다.”배진호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그는 지금도 어머니가 자기에게 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픈 상황에서 아들로서 그 과거를 들추거나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결국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버틸 수밖에 없었고 그 기분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배성연은 약을 먹인 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처음 자신을 불렀을 때 이런 일까지 있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때 정미진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석규리는 급히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주머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지금 몸 상태로는 절대 화내면 안 된다고요. 일단 진정하시고 쉬셔야죠.”“규리야, 봤지?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못 하는데도 일부러 나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정미진은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시선은 아들을 향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아들이 병실에 있는 게 기분만 나빠진다면 차라리 나가는 게 낫겠어요. 그래야 어머니도 마음 편히 요양할 수 있겠죠.”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억눌린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계속된다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왜 자신은 이런 부모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가, 가려거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마. 네가 어릴 때 온갖 고생 다 하며 널 키웠는데 이젠 내가 늙고 병드니까 짐짝 취급을 받는구나. 됐다, 너희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내가 죽더라도 너는 부르지 않을 거야. 밖에서 네 맘대로 살고,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
“괜찮습니다. 전혀 번거롭지 않아요.”석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배진호와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더 함께 있고 싶은 마당에 어찌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겠는가?배성연은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오빠, 우리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규리 씨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배진호는 말없이 조용히 돌아서 나갔다. 어차피 다 정해진 상황이었다.그가 거절하기만 하면 불효자 취급을 당할 것이고, 그러면 정미진은 약도 주사도 거부할 게 뻔했다. 불효 소리를 듣는 건 상관없지만 정미진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긴다.‘정말로 이 길밖에 없는 건가.’석규리는 들뜬 표정으로 그를 뒤따랐다.쇼핑몰로 향하는 길 내내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지만, 배진호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형식적으로 나온 것일 뿐이었다. 대체 이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쇼핑몰 1층에는 다양한 화장품 매장이 있었다. 석규리는 무심코 립스틱 두 개를 골라 배진호에게 물었다.“진호 씨, 어떤 색이 더 괜찮아요?”배진호는 힐끗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똑같지 않아요?”“아니에요. 이건 토마토 레드고, 이건 자몽 레드라서 달라요.”“결국 다 빨간색 아니냐는 겁니다.”배진호는 전혀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석규리는 어쩔 수 없이 립스틱을 내려놓고 다른 제품을 골랐다.파운데이션을 고르던 중 그녀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권다솔과 낯선 남자가 함께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그 순간 석규리의 눈에 강렬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권다솔이 이렇게 빨리 다른 남자를 찾다니 말이다. 안 그래도 배진호 앞에서 권다솔을 깎아내릴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가 직접 확인하게 된 셈이다.‘좋아, 이걸로 변명도 못 하겠지.’석규리는 허둥지둥 돌아서서 배진호의 소매를 잡았다.“여긴 제가 원하는 게 없네요. 우리 다른 가게 한번 볼까요?”“정말 번거롭네요.”배진호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이 바닥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석규리의 손을 뿌
“당신들 누가 보낸 거지?”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다섯 남자를 주의 깊게 살피며 이들의 전투력을 속으로 가늠했다.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이 골목만 빠져나가서 남쪽으로 백 미터 정도만 가면 경찰서가 있었다. 설령 이들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찰서까지 달려가기만 하면 안전해질 수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은 온지유의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저 그녀가 겁먹어 차 안에서 내리길 주저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냘픈 여자가 이렇게 덩치 큰 사내 다섯 명을 보고 겁에 질려 몸도 못 가눌 만했다. 얼굴색 안 변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반항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들은 남녀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 원래부터 승산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5:1이다. 온지유가 반항해 봤자 상대가 되겠냐는 식이었다.“누가 보낸 건지는 알 필요 없어. 조용히 내려오면 우리도 좀 부드럽게 대해줄 수 있어. 아니면 말이야...”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는 차창 너머로 온지유를 음흉하게 훑어봤다.창문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좋은 몸매에 남자들의 시선이 더욱 탐욕스러워졌다. 애 키운 여자로는 안 보였다. 게다가 밤이라 주변에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없고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이가 없었다.“형님, 좀 있다가 저희도 한몫 챙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들도 침을 흘렸다.두목은 크게 웃었다.“그래, 내가 먼저 놀고 끝나면 너희가 알아서 해. 단 숨은 붙여둬야 해. 조직에서 시킨 대로 살아 있는 상태로 데려가 약 실험해야 하잖아.”조직이라는 단어에 남자들의 얼굴에는 잠깐 긴장감이 스쳤다. 이 작은 표정 변화는 온지유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이들이 속한 조직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약 실험이라는 단어에서 온지유는 바로 소미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와 같은 조직이 보낸 듯했다.저번에는 온하윤을 노리더니 이번엔 그녀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다행히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돌아다닌 덕에 이들을 집으로 유인
온지유는 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좋아, 다 들어줄게. 집에서 얌전하게 기다려, 엄마 금방 올게.”그녀는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차고에 가서 아무 차나 골라 탄 뒤 빠른 속도로 회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온지유는 뒤따라오는 차량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거리를 지날 때 멀리서 뒤따라오던 차 한 대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고 있었다.곧 온지유는 회사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정중히 인사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바쁘신데 신경 안 쓰셔도 돼요.”온지유는 발걸음을 재촉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이현에게 서류를 건넸다.여러 사람 앞에서 둘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부부인 만큼 눈빛 하나로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작은 비밀이었다.회의실에서 나오는 길에, 온지유는 여이현이 새로 채용한 비서와 마주쳐 가볍게 인사했다. 그녀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회사를 나와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거기에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있었고 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도 가까웠다.주말이라 패스트푸드 가게에는 인파로 북적였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많았고 손님이 많으니 음식 나오는 속도도 더뎠다.종업원이 물었다.“손님, 에그타르트가 다 팔렸어요. 지금 굽고 있어서 2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별이는 에그타르트를 유난히 좋아하고 특히 이 집 것을 제일 좋아한다. 이미 온 김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괜찮아요. 다 되면 불러주세요.”온지유는 기다리며 옆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국제 뉴스를 훑어봤다.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초 만에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주위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 뿐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착각인가?‘하지만 그녀는 원래 직업상 위협에 민감하며 여성의 육감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는
“별아, 엄마랑 정원에 잠깐 나갈까?”온지유는 별이 곁에 앉으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섯, 일곱 살 아이는 가장 활발한 나이였다. 온지유도 계속 별이를 집에만 가둬두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었다.만약 별이가 또 위험한 상황을 겪는다면, 어린 나이에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겠는가. 그 조직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절대 어린 나이라고 봐줄 녹록한 이들이 아닐 터였다.“알겠어요, 엄마.”별이는 손에 들고 있던 블록을 내려놓고 일어났다.별이는 흔들 침대에 누워 있는 온하윤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동생이 빨리 자라면 좋겠어요. 그럼 동생이랑도 같이 놀 수 있을 텐데요.”지금 온하윤은 울고 웃는 것밖에 못 하고 대부분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별이는 온하윤이 쉬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아빠가 그 나쁜 사람들을 다 잡으면, 그때 다시 예전처럼 친구들이랑 마음껏 밖에서 놀 수 있어. 동생도 조금씩 자라날 거야.”온지유는 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온하윤은 집에 있는 도우미에게 맡겼다.지금 계절엔 정원에 꽃이 많이 피어 있었고 한쪽에는 작은 흔들의자도 있었다. 온지유와 함께라서 별이는 한껏 즐겁게 놀았고 두 시간쯤 지나 모든 체력을 다 소진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는 걸 받아들였다.“엄마, 아까 엄청 예쁜 꽃을 봤어요. 그거 사진 찍어서 나중에 제가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고 싶어요.”별이는 들뜬 목소리로 일상을 온지유에게 전했다. 이런 사소한 일들도 모이면 행복을 이루는 조각들이었다.거실로 돌아오자, 별이는 한참 떠들어 목이 마른 듯했다. 마침 도우미가 물을 내밀며 말했다.“별아, 목마를 테니 이거 좀 마셔.”“감사합니다, 아주머니.”별이는 공손히 인사한 뒤 물을 받아 마셨다.그때 온지유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아직 잠든 온하윤을 깨우지 않으려고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 이 시간에 전화한 거 보니 조직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거야?”“조직 이름을 알아냈어.
그들은 정말 거짓말조차 제대로 못 했다. 아니면 속으로 배진호가 그들의 아들이기만 하면 혈연관계가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자식이 되어서 어떻게 부모랑 진심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따지면 불효자라는 딱지를 씌우면 그만이니, 자식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잊지 마요. 다솔 씨는 권씨 가문의 귀한 딸이고, 저랑 결혼했다고 해서 신분이 낮아지는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사람은 더욱 아니고요!”정미진이 처음 배상준과 결혼했을 때, 둘은 시골에 살았다. 배상준의 어머니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날마다 별의별 방법으로 트집을 잡았다. 나중에 두 사람이 힘들게 도시에 집을 마련해 따로 살게 된 뒤에야 상황이 나아졌다.정미진이 시어머니에게 시달린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권다솔은 다르다.이 점을 떠올리자, 정미진의 얼굴빛이 확 바뀌었다.“배진호, 너 도대체 누구 아들이야? 설마 남을 위해 나랑 싸우겠다는 거야?”“제 아내는 당연히 저와 한 식구고 가장 가까운 사이예요. 남이니 뭐니 할 것 없어요. 그 말대로라면 어머니도 누군가의 아내이니 우리 집에서 남인 거네요?”배진호는 이런 낡고 뒤떨어진 생각에 진저리가 났다.이제야 그는 권다솔이 결혼 생활 동안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참았는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그는 모든 정력을 회사에 쏟았다. 그동안 정미진은 언제나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했고 권다솔은 고자질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 배진호는 지금까지 완전히 속아 넘어간 셈이다. 이제야 정미진의 진짜 모습을 깨달았다.세간에서는 고부갈등이 남자가 중간에서 방관할 때 생긴다고 하는데, 그게 그의 잘못이라면 인정하고 고쳐야 한다.“너!”정미진은 얼굴이 벌게지고 가슴이 다시 욱신거렸다.‘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하지만 돌아서 나가려는 배진호를 보자 그걸 따질 틈도 없었다. 정미진은 서둘러 배상준에게 말했다.“당신, 병원 뒷문으로 나가서 빨리 집에 있는 홍경천 버려. 반드시 진호보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정미진은 다시 석규리와 함께 권다솔을 헐뜯는 말을 이어갔다. 둘이 한마디씩 주고받을 때마다 병실 안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지는 듯했다.그러다 문이 열리고 배진호가 들어왔다. 그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병실 안 사람들을 바라봤다.“다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왜 모두 권다솔을 헐뜯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 주제는 죄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음해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진호 씨, 어머님 몸도 안 좋은데 들어오자마자 왜 그렇게 언성을 높여요?”석규리가 부드러운 척하며 그의 손등을 잡았다.“진호 씨가 싫다면 얘기 안 할게요. 안 하면 되잖아요.”“그만해요. 연기 너무 어색하네요.”배진호는 바로 그녀를 밀어내듯 말했다.그는 문밖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 석규리와 정미진이 서로 딱딱 맞춰가며 권다솔을 비난하는 모습이 너무나 노골적이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정미진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 마음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그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진호야, 왜 들어오자마자 소란이니? 네가 계속 이런 태도면 다음부터 오지 마. 내가 죽어도 안 와도 돼.”정미진은 아까 의사가 보낸 문자를 떠올리며 배진호를 자극했다. 의사가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말해두었으니, 지금쯤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맞서지 못하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배진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어머니, 이 병실 하루 입원비가 40만 원이 넘어요. 제가 한 달 치를 미리 냈고 집에 돌아가면 중개인을 통해 간병인을 구해서 어머니를 잘 돌볼게요. 제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직접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진호 씨,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빠요?”석규리가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회사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어머니보다 중요할 순 없죠.”배진호가 오지 않으면 둘이 만날 기회가 줄어든다. 그러면 석규리가 호감을 쌓을 여지도 없었다. 이미 회계자료를 통해 배진호 회사가 곧 크게 성장할 것임을 파
“내가 무슨 일 있겠어? 너희도 알잖아, 나 원래 아프지도 않은데 그냥 진호 앞에서 쇼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안 하면 어쩌겠어? 지금쯤 그 애는 요물한테 완전히 세뇌당했을걸.”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꾀병을 부린다고 진짜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지금 정미진이 가장 신경 쓰는 건 배진호였다.“규리야, 아줌마가 부탁할게. 꼭 진호가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게 해줘. 내가 애를 간신히 정리한 것도 둘을 완전히 끊게 하려고 그런 거잖아.”배성연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선물을 힐끗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알겠어요, 어머님. 남자는 가장 약해졌을 때 여자의 위로를 거부하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권다솔 씨는 벌써 다른 남자까지 구했으니 저희가 힘 합치면 둘이 절대 다시 붙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석규리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녀는 오늘 남태건을 본 순간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바로 알아챘다. 어쩌면 그녀와 같은 부류일 지도 몰랐다.정미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잘 돌아가고 있군.’한편 병실 밖에서 배진호는 정미진의 검사 기록을 들고 의사를 찾았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였다.“에휴, 어머님 상태가 정말 심각하네요.”의사는 병록을 뒤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배진호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어머님한테 잘해드려요. 자식으로서 효도하는 게 중요하죠. 괜히 화나게 했다가 정말 ICU라도 들어가면 그땐 후회해도 늦어요. 심장도 안 좋네요. 심장 수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요?”배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수술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의 마음 한구석에 부끄러움이 스쳤다.‘엄마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엄마 병까지 의심하다니...’“이 수술은 위험 부담이 커요. 어머님 몸 상태도 좋지 않아서 수술대에 오르면 무사히 끝날지 장담 못 해요.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하는 게 좋아요.”의사는 계속 효도를 강조했다. 사실 그와 정미
“태건 씨? 두 사람 무슨 얘기 해요?”권다솔이 이쪽으로 다가왔다.남태건은 바로 배진호에게서 한발 물러나며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돌아가자. 어머니가 선물을 보면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등을 보이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자, 배진호는 순간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억지로 자신을 누르며 집안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진 권다솔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진호 씨, 봤죠? 권다솔 씨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방금도 두 사람이 저희 앞에서 자랑하듯 굴었어요.”석규리는 서둘러 흉을 보며 배진호와 팔짱을 끼려 했다.배진호는 티 안 나게 몸을 빼며 말했다.“차에 타요. 병원에 데려다줄게요.”“알겠어요. 얼른 돌아가죠. 어머님이랑 성연 씨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늦으면 안 좋잖아요.”석규리는 마지못해 그의 말에 따르며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배진호는 그녀를 힐끗 보고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뒷좌석에 앉아요.”“이미 앉았고 안전벨트도 맸는데 왜 또 내리라 하는 거예요? 어디 앉든 똑같아요. 얼른 출발해요. 여기서 병원까지 얼마 안 걸리잖아요.”석규리는 고개를 떨구며 눈에 못마땅한 기색을 감췄다.그가 이렇게까지 선을 긋고 멀리하니 답답하고 불쾌했다. 정미진에게 더 독하게 부탁해 그를 완전히 정신 잃게 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렇게만 했더라면 이후 무슨 말을 꾸며내든 마음대로였을 텐데 말이다.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만 석규리는 어떻게 하면 그가 권다솔을 완전히 잊을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계산했다.얼마 안 가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배진호는 혼자 문을 열고 내려섰고, 석규리는 그 뒤를 따라 병실로 향했다. 그는 병실에 들어가 손에 든 봉투를 배성연에게 건넸다.“이거 선물이야.”“고마워, 오빠.”배성연은 봉투 안을 살펴보고 환히 웃었다.“나랑 언니 취향이 진짜 비슷한 것 같아. 파운데이션 컬러까지 똑같네.”하지만 배진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배성연은 혼잣말처럼 몇 마디 하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다.남태건과 권다솔이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오는데 멀리서부터 배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배진호는 누군가와 부딪힌 차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그쪽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게 맞고 사진도 찍었으니 보험 처리를 할게요.”“안 돼. 네가 보험 처리한다면 바로 넘어가 줄 것 같아?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이 차 뭔 줄 알아? 비싼 차야. 당장 1000만 원 물어내. 한 푼도 깎지 말고.”남자는 막무가내로 우겼다. 그는 심지어 옆에 서 있던 석규리에게까지 시비를 걸었다.“너희 둘 어디 결혼하러 가? 운전은 왜 그렇게 급하게 해? 제정신이야?”배진호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참고 견뎠다.“책임질 테니 말 좀 가려 해요. 인신공격도 삼가세요.”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권다솔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문득 회사가 막 출범하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배진호는 사업을 키우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에 나가야 했다. 아마 고객들을 대할 때도 지금처럼 불편해도 참고 화가 나도 웃어넘겼을 것이다.그녀 어머니가 말했던 것 중 하나는 틀렸다. 배진호가 정말 그녀를 이용하려 했더라면 고객 붙잡느라 고생할 시간에 차라리 그녀의 집안에 매달렸을 테니 말이다.“내 차를 망가뜨려 놓고 내가 한두 마디 하는 것도 못 참아? 너랑 네 마누라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라고!”남자가 계속 악담을 퍼부었다.“우린 부부 사이 아니에요.”배진호가 짧게 반박했다.“부부가 아니면 내연 관계냐? 아니면 왜 손을 잡고 다녀? 내가 보기엔 둘 다 멀쩡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분명 매일 밤 한 이불 덮고 잘 거 아냐?”남자는 목청을 높여 일부러 주위 사람들 귀에 들어가도록 비아냥댔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배진호가 경찰을 부르려 할 때, 그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남태건을 발견했다.“어이쿠, 남 대표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그는 태도가 싹 바뀌어 허리를 굽혔다.남태건은
“생선구이 다 먹고 나서 1층 좀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네가 피곤해 보이네.”남태건은 권다솔의 눈 밑 다크서클을 보며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권다솔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제 잠을 잘 못 자서요. 집에 가서 좀 더 자지 않으면 너무 피곤할 것 같아요.”그러자 남태건은 미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도 결국 인정했다.“그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우선 편히 쉬어.”그들은 더 이상 화장품을 고르지 않았다. 남태건이 아예 중장년층용 세트 전부를 싹 쓸어 담았다. 에센스 제품까지 통으로 챙기니 점원의 입꼬리가 귀 뒤까지 넘어갈 듯했다.“손님 정말 통 크시네요. 이렇게나 많은 세트라면 세 사람이 써도 다 못 쓸걸요?”점원이 감탄을 흘렸다.“어머니께 드리고 싶은데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일단 다 사서 직접 써보시게 하려고요.”이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은 줄곧 권다솔에게 머물렀다.점원들은 눈치가 빨랐다. 입으로는 어머니라고 하지만 사실상 예비 장모님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남자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까?급기야 한 점원은 권다솔에게 다가와 치켜세웠다.“예비 신랑이 정말 좋네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신경 써주는 남자 찾기 힘들어요. 저도 애가 있지만 친정 갈 때 뭘 좀 챙기려 하면 남편은 내켜 하지도 않거든요.”그러자 권다솔이 고개를 저었다.“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세트들 제 카드로 결제할게요.”‘어차피 엄마한테 드릴 물건이니까...’점원 말대로라면 사위가 장모님을 위해 챙기는 선물이겠지만, 남태건과 그녀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 남의 돈을 이렇게 많이 쓸 수는 없었다.점원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너무 들떴나 싶었다. 그래도 누가 결제하든 상관없었다. 팔기만 하면 되는 법이니까.카드 결제는 금방 끝났다. 잠시 후 남태건이 세트 박스를 다 포장해 들고 왔을 때, 권다솔의 손에 영수증이 있는 걸 발견했다.“왜 네가 결제했어?”남태건은 의아해했다.“원래도 엄마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