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는 평생 다솔 씨 한 사람만을 사랑할 거예요. 다른 여자는 절대 쳐다보지 않을 겁니다.”배진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마음을 전했으니 부모가 계속 자기 뜻을 고집한다 하더라도 석규리는 최소한 자존심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다.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을 품었다 해도 한 남자에게 매달리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석규리의 시선은 여전히 배진호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진호 씨, 당신이 지금 당장 다솔 씨를 잊지 못해도 상관없어요.우리는 아직 젊고 시간은 충분히 많잖아요. 언젠가 당신이 제 마음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어요.”“그리고 지금 다솔 씨를 잊지 못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에요. 당신이 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나중에 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저에게도 그렇게 깊은 사랑을 줄 거라고 믿어요. 우린 정말 행복한 한 쌍이 될 거예요.”그녀의 말은 배상준과 정미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정미진은 석규리의 손을 꼭 잡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권다솔이 대단한 집안 딸일지 몰라도 굳이 돈 때문에 아들의 결혼을 희생해야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다.정미진은 단지 아들이 진심으로 사랑받으며 살길 바랐다.권다솔?정미진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늘 행동이 차분하지 않은 것 같았고 유산된 아이가 과연 배진호의 아이였을까 하는 의심까지 하고 있었다.오히려 아이가 유산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아이가 태어났다면 배진호는 평생 속아 남의 아이를 키우며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어머니로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게 할 수 없다.“어차피 이제 아이도 없잖아. 둘이 바로 이혼해. 그게 제일 좋고 짐도 없게 되잖아.”정미진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하지만 그녀는 이 말이 배진호의 인내심을 완전히 끊어버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배진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짐이라고요? 그 아이는 제 첫 아이였습니다.
배진호가 여전히 부모의 말을 따른다면 정말로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그는 더 이상 부모가 자신과 권다솔을 해칠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경미 씨, 손님들을 내보내 주세요.”“진호야! 네 엄마인데 어떻게 네가 나를 내쫓을 수 있어?”정미진의 얼굴빛이 험악해졌다.석규리는 눈물로 가득 찬 눈으로 말했다.“절 보고 싶지 않다면 제가 나가면 돼요. 하지만 저 때문에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화풀이하지 말아요. 두 분이 이렇게 진호 씨의 삶에 간섭하는 건 그만큼 진호 씨를 사랑하고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세상 부모 중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그 말을 부정하지 않지만 약이 든 차를 마신 이후 배진호는 생각을 바꿨다.사랑은커녕 그저 그를 완전히 통제하려는 욕심이 더 컸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었겠는가?“경미 씨, 다시 말하지만 손님들을 모시고 나가주세요.”그리고 배진호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건 박경미와 세 사람뿐이었다.박경미는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세 분, 이제 돌아가 주시죠.”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배상준이 입을 열었다.“경미 씨, 다솔 씨는 한 달에 얼마를 주고 있죠?”배상준은 지금 이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배진호는 현재 부모보다도 박경미를 더 신뢰하는 것 같았다.그렇다면 박경미를 매수해서 석규리와 배진호를 이어주게 하면 어떨까?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나.“제 월급은 배 대표님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액이 많고 적은 건 중요치 않아요. 제게 중요한 건 일을 할 때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거죠.”박경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오지랖이 넓으면 제 발목을 잡는다. 돈을 쥐여 준다고 해서 절대 그런 일에 가담할 수 없었다.정미진은 무언가 말을 더 하려 했지만 석규리가 고개를 저어 제지했다.돌아가는 길 운전석에는 배상준이, 뒷좌석에는 정미진과 석규리가 앉았다.정미진은 가는 길 내내 눈물을 훔치며 하소연했다.“저 여자가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우
두 사람이 정말로 관계를 맺기만 하면 정미진은 충분히 결혼을 강제로 성사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권다솔과의 아이를 잃은 상황에서 만약 석규리가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과연 배진호는 계속 무관심할 수 있을까?설령 임신에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최악의 경우 병원에 돈을 좀 쓰면 가짜 건강검진 보고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배진호가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이미 결혼까지 해버린 뒤라면 이런 사소한 일로 이혼을 할 리도 없을 것이다.“아무 일도 없었어요.”석규리는 입술을 꽉 물고 고개를 저었다.약기운이 도는 동안 별의별 수단을 다 써봤지만 그래도 배진호를 꾀어내는 데 실패했다.배진호의 마음에는 분명히 권다솔만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차라리 억지로라도 버티면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정미진의 얼굴빛이 변했다.“약을 그렇게 많이 넣었는데 효과가 하나도 없다고? 방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석규리는 얼굴을 붉히며 간단히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정미진은 찬바람을 들이마시며 숨을 멈췄다.정말이지 이상한 여자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목숨까지 내던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배진호가 그럴수록 정미진은 자신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길게 늘어질 바에야 차라리 빨리 갈라놓는 편이 낫다. 두 사람을 가능한 빨리 떼어놓아야 한다.“진호가 헤어지길 거부한다 해도 상관없어. 내가 직접 다솔 씨를 찾아갈 거야. 이미 이 집에서 나갔으니 다시는 못 돌아오게 만들면 되지.”정미진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한편 권다솔 쪽.집을 나온 뒤로 차를 몰고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그녀는 해변에 차를 세웠다. 모래사장 위를 걸어갈수록 점점 시야가 흐려졌다.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배진호 쪽 집은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친정집에 가자니 부모님의 잔소리를 또 듣게 될 게 뻔했다.처음부터 부모는 그녀가 배진호와 함께하는 것을 반대했다. 배진호의 집안이 변변찮아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난 당신이 참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아요. 하지만 태건 씨,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리 둘은 절대 함께할 수 없어요.”그녀는 남태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둘은 그저 친구로만 남을 뿐 그 이상은 있을 수 없었다.“네 마음속에는 아직도 배진호가 남아 있는 거야?”“그런 게 아니에요. 나랑 진호 씨는 이미 완전히 끝났어요.”“이미 끝났다면 왜 날 돌아보지 않는 건데? 다솔아, 넌 아직 젊잖아. 설마 그런 형편없는 사람 때문에 평생 혼자 살겠다고 작정한 거야?”남태건은 더 가까이 다가섰다.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었다. 권다솔도 예외는 아니었다.권다솔은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냥 내버려두자. 이렇게 오해하도록 놔두자.’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남태건의 말을 인정하는 듯했다.“다솔아,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만약 너희 사이에 아이가 있어서 아이를 위해 재혼하지 않으려는 거라면 이해하겠어. 하지만 지금 너희는 아무것도 없잖아.”남태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시선 속에는 은밀한 기쁨이 넘쳤다.그는 이미 결심했다. 만약 권다솔이 배진호의 아이를 낳더라도 상관없을 것이고 그녀를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이가 없다면 훨씬 더 좋은 일이었다.이렇게 하면 그들의 인연은 깔끔하게 끊길 것이다. 그리고 권다솔의 삶에서 배진호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남태건이 차지할 것이다.“그만해요. 저한테 이런 말을 하려고 온 거라면 당장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는 격해져 있었다.이 아이는 단순히 배진호만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아이이기도 했다.설령 배진호가 그의 말대로 한심한 남자라 해도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남태건은 급히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했으면 안 됐어.”“됐어요. 먼저 가세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권다솔은 뒤돌아 떠나버렸다.남태건은 그녀
“나는 당신 편이지 물론. 진호가 그렇게 고집부리는 걸 그대로 둘 순 없어. 하지만 당신도 건강을 생각해야 해. 정말 화병이라도 나면 우리 가정이 무너지는 거나 다름없잖아?”배상준은 부드럽게 아내를 달랬다.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내가 병이 난다는 건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그 병이 아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정미진은 뭔가 말하려다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그녀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지금 진호가 우리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잖아. 그런데 만약 내가 병원에 입원해서 응급 치료를 받게 되면 그때도 우리를 외면할 수 있을까?”“그래도 몸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하면 안 되지.”배상준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응급실이 어떤 곳인데, 거긴 중환자만 들어가는 곳이다.아내가 이런 엉뚱한 일을 계획하는 걸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정미진은 답답한 듯 무릎을 치며 말했다.“당신도 참 답답하네!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 꼭 병에 걸려야만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어? 우린 돈이 있는데 어디를 못 들어가겠어?”그녀의 진짜 의도는 단순히 병을 핑계 삼아 아들을 속여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석규리와 억지로라도 맺어주는 것이었다.그저 하나의 연극일 뿐 실제로 병에 걸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내가 둔했네. 젊었을 때도 당신 머리를 따라갈 수 없었는데 나이 드니 더 상대 못 하겠어.”배상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진호는 착한 아이잖아. 애가 아무리 다솔이를 좋아한다 해도 부모를 외면하진 않을 거야.”이 말은 정미진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이었다.둘은 단 한 명의 아들만을 위해 모든 사랑과 돈을 쏟아부었다.이런 상황에서 배진호가 부모님을 외면할 리가 있을까?설령 권다솔이 계속 옆에서 방해를 한다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권다솔은 이미 떠난 상태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들이 놓칠 이유는 없었다. 이번 기회에 그 둘의 관계를 단번에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한결 놓이네.”정미진은 웃으며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였다.그녀는 권다솔이 왜 굳이 자기 아들을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권다솔이 아무리 집에서 귀한 딸로서 자라왔더라도 시부모의 반대와 사촌 동생, 거기에 석규리까지 더해진다면 과연 그 고집이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볼 일이었다....한편, 권다솔은.그녀는 억울한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어차피 그녀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기어코 배진호와 결혼하려 했던 사람이었다.그때 부모님 앞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데 지금 돌아간다면 자존심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 아닌가?하지만 그녀는 부모님이 직접 차를 몰고 호텔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권다솔은 단순히 배달이 도착한 줄로만 알았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부모님과 그들 뒤에 선 남태건이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내가 안 왔으면 우리 딸이 그 못난 녀석에게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도 몰랐을 거야!”김영은은 딸을 보며 눈물이 고이는 것을 참지 못했다.“다솔아, 살이 많이 빠졌구나.”그 단순한 몇 마디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집을 떠난 뒤 그녀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몇 번이고 악몽에서 깨어나며 귓가에는 누군가가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 자신이 아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을.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다.남자는 아이를 잃은 뒤에도 쉽게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돌릴 수 있지만 여자는 그 상처 속에 오래도록 갇혀 버린다.특히 깊은 밤 모든 것이 고요해질 때 그 고통은 배가된다.“됐어, 무슨 얘기든 안에서 하자. 복도에서 서 있다가 괜히 사람들 눈에 띄겠어.”권용민은 말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권다솔은 서둘러 길을 비켜주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남태건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미 부모님과 함께 온 이상 그를 내쫓을 수도
권다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의 말을 거절했다.“엄마, 나 지금 겨우 진호 씨랑 헤어졌고 잠깐 머리 식히러 나온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벌써 다른 남자랑 결혼하라고 할 수 있어요? 난 정말 그렇게는 못 해요.”정말로 새로운 인연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야 가능한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지금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그녀는 남태건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시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다.“다솔아, 엄마도 네 생각과 같았어. 네가 먼저 이 상황에서 벗어난 뒤에 다시 시작해 보자고. 그런데 지금 네가 혼자 호텔에서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걸 보면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마음을 놓겠니?”김영은은 딸을 계속 설득했다. 차라리 남태건이 곁에 있어 준다면 최소한 서로 의지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권용민은 더 진지하게 말했다.“태건이는 너에게 정말 진심으로 잘하려고 노력 중이야. 그런데 네가 그 마음을 계속 거부해서 무슨 좋은 점이 있단 말이냐?”집안에서 딸을 평생 부양할 능력은 있었고 그녀를 책임지는 데 문제도 없었다.그러나 부모라는 존재는 언젠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올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다솔이는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배진호는 바깥에서 다른 여자들과 마음껏 즐길 수 있는데 그들의 딸은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 때문에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아빠, 엄마. 제 감정도 좀 생각해 주세요. 전 방금 아이를 잃었어요. 그런데 바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라고요? 저도 사람이에요. 애완동물 가게의 고양이도 아니잖아요. 봄이 되었다고 아무렇게나 짝지어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요.”권다솔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누구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도 않았다.권용민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권용민은 딸을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권다솔이 배진호를 잊지 못하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지기라도
권다솔은 확실히 이 일을 부모님들이 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더 이상 남태건에게 나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이어가지도 않고 이내 창밖의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봤다. 남태건이 뒤에서 무슨 말을 하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다시 부모님들을 언급하자 그제야 권다솔은 고개를 돌렸다.“다솔아, 네가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넌 여전히 두 분의 딸이야. 설마 정말 두 분이 아무 말 없으실 거라고 생각한거야? 너와 진호 씨 일은 이미 다 알고 계셨어. 네가 묵은 이 호텔도 부모님이 지분을 갖고 계시는걸.”권다솔은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점은 눈치채지 못했다.권다솔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 봤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은 이 호텔 체인의 지분을 1% 갖고 있었다.이 정도 지분으로는 호텔의 경영에는 손을 댈 수 없었지만 투숙인을 찾는것 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정말 남태건을 오해했던 것이었다.권다솔은 남태건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조금 전에는 당연히 태건 씨가 부모님을 데려온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저희는 정말로 함께 할 수 없어요.”“알아, 우리는 그저 친구일 뿐이라는 거.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부모님은 받아들이시지 않잖아. 예전부터 우리를 이어주려고 했던 분들이시고 지금 배진호와도 이런 꼴이 돼버렸으니 부모님들도 네가 빨리 다시 서길 바라는 거야.”남태건은 자신에게 아무런 사심도 없는듯한 프레임을 씌웠다.하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은 그의 계산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배진호의 일을 부모님에게 과장해 알린 것도, 권다솔이 묵고 있는 호텔을 알아내 직접 찾아온 것도 남태건이었다.그의 부모 역시 아들이 권다솔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니 더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양쪽 집안의 조건도 비슷했기에 혼사는 완벽한 선택이었다.“그러니까 우리 둘이 잠깐 연기를 하자. 부모님들께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당분간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널 많이 신경 쓰시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더는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으실 거야.”남태건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