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준은 백지희가 방금 한 말이 백시윤을 떼어내기 위한 말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백지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자 강서준은 포기할 수 없어 다시 한번 물었다.“저랑 결혼하면 백시윤을 영원히 떼어낼 수 있다고 하면요?”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두 눈엔 눈물이 맺혔다.“그건 서준 씨한테 불공평한 일이잖아요.”강서준은 씁쓸하게 웃었다.“불공평하든 공평하든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지희 씨는 백시윤 씨한테 그런 마음이 없는 거 제가 더 잘 아니까요. 전 지희 씨를 좋아하니까 기꺼이 이용당해드릴 수 있어요.”백지희는 목이 메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중요한 일을 쉽게 결정하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온지유는 백지희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놀라게 되었다.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지희를 한참 빤히 보던 온지유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 백지희에 바로 눈치를 챘다.온지유는 바로 백지희의 손을 잡고 설득했다.“아직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얼른 서준 씨한테 말해. 이 결혼할 수 없다고.”백지희는 고개를 저었다.“밤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지유야, 나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어. 너도 알잖아. 그런 거라면 나도 결혼은 한번 해보고 떠나고 싶어.”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백지희가 가엾게 느껴지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은 백시윤이었고 결혼식은 다음 주 일요일로 정했다.그리고 그날 백시윤은 모든 이의 만남을 거부했고 병실에만 박혀 하루 종일 멍하니 천장만 보았다.그 뒤로 백시윤은 더는 백지희를 찾아오지 않았지만, 사람을 시켜 백지희가 다시 전시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개인 자금으로 후원도 해주었다.새신부가 된 백지희는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매일 온지유와 함께 쇼핑하러 다녔고 새로 산 물건들은 전부 집으로 배달했다.신혼집도 강서준이 새로 매입한 별장이었다. 온지유의 집과 거리 하나를 두고
밤이 깊어지고 이곳저곳에 연락해 백시윤의 행방을 알아내던 김가은은 문자를 받게 되었다. 상대는 그녀에게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있다면서 이메일을 물어보았다.김가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라 상대의 문자를 무시했다.그러자 상대는 바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백시윤이 차 안에서 여자랑 키스하는 사진이었다.김가은은 고민도 하지 않고 이메일을 알려주었다.몇 분 뒤, 김가은은 백시윤과 백지희가 서로 끌어안고 키스하는 영상을 받게 되었다. 영상은 전문가가 찍은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영상을 받았다면 누군가가 보낸 야한 동영상인 줄 알았을 것이다.김가은은 분을 참지 못하고 꽃병을 들어 던져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다.그렇게 방은 처참하게 변해버렸다.분노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그녀는 가만히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서준과 백지희의 결혼식이 내일이라고 했죠? 어디서 하는지 알아요? 아, 그렇군요. 내일 데리러 오세요.”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음험하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백지희는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깨어나게 되었다. 밀려오는 숙취에 머리를 붙잡으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어, 나 집이야.”온지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계를 힐끗 본 후 따져 물었다.“집이라고. 새벽에 우리 집으로 오기로 한 거 잊었어? 설마 아직도 자는 거야?”백지희는 그제야 온지유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행여나 온지유가 늦잠을 자게 될까 봐 메이크업 전문가에게 온지유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온지유의 집에서 메이크업을 받은 후 결혼식장으로 가기로 했다.다만 그녀는 어제 너무 즐거웠던 나머지 과음을 하게 된 것이다.백지희는 속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욕했다. 얼른 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확실히 시간은 빠듯했다. 결혼식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온지유의 집으로 간다고 해도 부족한 시간이니 메이크업은
백지희는 바로 거절했다. 오늘은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오늘만 지나면 그녀는 마음 편히 강서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랬기에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을 데리러 온 차가 도착했고 여이현이 다가오며 알렸다.온지유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마무리하라고 한 뒤 별이와 백지희와 함께 방에서 내려왔다.결혼식장은 아주 북적거렸다. 하객으로 경성시의 유명한 가문들이 전부 참석했다.강씨 가문에서 백지희를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으나 기는 살려주었다.온지유는 조심히 차에서 내리며 작게 말했다.“그래도 강씨 가문에서는 널 신경 써주고 있네. 오늘 결혼식을 잊지 말고 나중에 고부 갈등이 생기면 네가 조금 참아줘.”백지희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던지라 당연히 그 도리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시부모님과 어떻게든 잘 지내보겠다고 말했다.“지희 씨.”강서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온지유는 바로 그를 놀렸다.“이렇게 예쁜 아내를 두었는데 꼭 잘해줘야 해요. 안 그러면 지희한테 Y 국 남자 소개해 줄 거니까요.”강서준은 연신 백지희에게 잘해주겠다며 맹세했다.사회자는 마이크를 잡으며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강서준과 백지희는 서로 팔짱을 끼고 함께 버진 로드를 걸었다. 내딛는 걸음 한 걸음이 두 사람의 미래를 향한 걸음이었다.별이는 백지희의 드레스 자락을 들어주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온지유는 별이를 칭찬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여 대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알지? 내가 저렇게 멋진 아들을 낳았다고.”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그녀에게 뽀뽀했다.“응, 맞아. 내가 전부 기억해두고 있으니까 나중에 제대로 보상해줄게.”보상이라곤 말했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온지유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기에 그를 살짝 째려보았다.“보상보단 난 실질적인 거 더 좋아해.”여이현은 나직하게 웃었다.“당연히 실질적인 보상이
강태규는 코웃음을 쳤다.“허, 할 말이 있으면 빨게 하게. 좋은 날 시간 다 잡아먹지 말고.”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사람이 차갑게 말해주었다.“할아버지, 이 사람들이 설마 지금 혼수예단을 더 달라고 요구할 거는 아니겠죠? 제가 듣기론 백지희 씨가 전시 사건으로 엄청난 돈을 잃었다고 하는데, 그 돈을 저희 강씨 가문 돈으로 메울 생각은 아니겠죠.”그러자 하객들은 서로 수군대기 시작했고 백지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강씨 가문 사람들에게 나중에 재산 전부 빼앗기기 전에 조심하라며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강씨 가문과 사업으로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업 외에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사이였으나 오늘만큼은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강태규는 서늘한 눈빛으로 젊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곤 다시 김가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잘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할 거네. 오늘은 두 아이가 가정을 이루는 좋은 날일 뿐 아니라 우리 두 가문에게도 중요한 날이니까. 결혼식이 무사히 끝난다면 앞으로 우리 강씨 가문은 백씨 가문을 도와줄 거네. 하지만 문제라도 생기게 해서 우리 강씨 가문의 명성을 망가뜨리는 짓을 하기라도 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네.”그것은 김가은이 원하는 것이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입을 열려던 순간 백시윤이 그녀를 끌어왔다.그리곤 강태규를 향해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어르신. 제 아내가 멋대로 한 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길 바랍니다. 제 아내 신경 쓰지 마시고 결혼식 계속 이어가시면 됩니다.”“에이, 백 대표 왜 그래요? 혹시 아내랑 잘 얘기가 되지 않은 거예요?”일전에 말을 꺼낸 사람이 다 꺼져가던 불씨에 부채질하며 말했다. 그러더니 버진로드에 서 있는 백지희를 음흉한 눈빛으로 보면서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아, 알겠네요. 전부터 백 대표가 여동생한테 엄청 신경 쓰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설마 그 관심 때문에 아내분 심기를 건드리게 된 건
백시윤은 무대로 올라가 김가은을 끌어내려고 하면서 욕설을 내뱉었다.“이런 씨... 이거 놔요, 여이현 씨. 왜 절 붙잡는 거죠? 얼른 놔요. 올라가야 하니까.”여이현은 코웃음을 치더니 주먹을 내리꽂았다.“여이현 씨, 지금 이 상황에 왜 절 때리는 거죠? 얼른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저것부터 막아야죠!”백시윤은 백지희의 결혼식이 망쳐질까 봐 걱정되었다. 설령 백지희와 강서준이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망쳐지길 바라지 않았다.여이현은 백시윤의 멱살을 잡고 이를 빠득 갈면서 따져 물었다.“하, 참 좋은 오빠네요.”말을 마친 후 그는 또 주먹을 날렸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또 한 방 더 날리더니 발을 들어 백시윤의 발을 꽉 밟았다.만약 김가은이 다급하게 내려와 여이현을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백시윤은 계속 맞고 있었을 것이다.여이현은 김가은의 손길을 뿌리치며 서늘하게 웃었다.“김가은 씨, 이제 만족해요? 앞으로 백씨 가문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지켜보세요.”그 순간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꺄악! 백지희 씨가 쓰러졌어요!”여이현의 뒤로 누군가 휙 지나갔다. 여이현을 미간을 찌푸린 채 김가은을 내동댕이치고 따라서 무대로 올라갔다.휙 지나간 사람은 온지유였다. 분명 임신한 몸이라 거동이 불편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주 빨랐다. 온지유는 백지희를 안아 올리려고 했다.“내가 할게.”이어서 다가온 여이현이 백지희를 안아 올리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서준을 보았다.“일단 하객부터 진정시키세요. 다른 건 나중에 다시 만나 얘기하죠.”“대표님, 전 지희 씨를 사랑해요. 결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꼭 지희 씨에게 전해주세요.”강서준은 영상이 어젯밤에 찍힌 것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백지희를 여전히 사랑했다.백지희가 백시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분명 누군가 함정을 판 것으로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한 강서준은 무대 아래에 있던 김가은을 보았다. 음험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말이다
“안 돼요, 할아버지. 전 지희 씨 곁으로 돌아갈래요.”강서준의 간절한 부탁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를 도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큰 일이 터지면 당연히 제일 먼저 자기 이익부터 따지게 되고 이미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눈앞에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강태규 일가는 이런 수모를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그렇게 강서준은 위층으로 끌려갔고 강태규는 곧바로 오지영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너한테 맡길게.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백씨 가문이 넘보지 못하게 막아야 해. 저런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오지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강태규가 굳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이 세상에 자기 아들이 여자한테 배신을 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강씨 가문의 사람이다.백시윤은 오늘날 자기 아내한테 뒤통수 맞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가슴이 아픈 건 둘째로 치고 백씨 가문을 제대로 망신시킨 꼴이 되었다.그러다가 이 사단에도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김가은을 보자 당장에라도 목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백시윤은 애써 침착한 얼굴로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이런 일을 벌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이나 해봤어?”김가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당연하죠. 전 그 자리에서 당신한테 뺨 맞을 각오도 했어요. 근데 예상 밖으로 당신이 여이현한테 맞는 바람에 저는 신경조차 쓸 겨를이 없었던 것 같네요.”백시윤은 여전히 얼얼하게 부은 자기 뺨을 어루만지며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당신도 백씨 가문의 사람인데 이런다고 얻어지는 게 뭐야?”김가은은 고개를 들고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백시윤 씨, 설마 제가 그 일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저를 우러러보는 것 같나요? 강씨 가문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소문내고 다니는지 모르죠? 당신이 백지희를 엄청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줬대요. 왜요, 아니면 어디 변명해 보세요!”
“백시윤 씨, 미쳤어요? 지희 씨는 당신 여동생이라고요.”김가은은 이때다 싶어 다시 백지희와 백시윤과의 관계를 되짚어줬다.그런 그녀를 백시윤은 그저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는데 갑자기 비서 장민준한테서 전화가 왔다.그는 백시윤이 시킨 대로 병원에서 백지희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 무조건 백지희에게 관련된 일이라고 판단한 그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오지영 사모님이 직접 오셔서 파혼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지희 씨가 지금 혼수상태가 된 사실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다고 했지만...”장민준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에 답답해진 백시윤이 버럭 화를 냈다.“했지만 뭐? 빨리 말해!”“이제 백씨 가문이 편하게 지낼 날은 끝났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그 말에 백시윤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계속 지켜보고 있어. 지희가 깨면 바로 알려주고.”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그에게 말했다.“아니다.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갈게. 여이현 씨랑 온지유 씨도 다 병원에 있어?”이때, 온지유가 장민준의 핸드폰을 빼앗아 가더니 수화기에 대고 차갑게 경고했다.“백시윤 씨, 지금 당장 당신네 사람들 데리고 가세요. 그리고 지희랑 두 번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온지유는 백지희를 저렇게 만든 사람이 백시윤이라고 생각했다.어쨌든 그런 일들은 남자 쪽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여자 혼자서는 못하기 때문이다.백지희가 오늘 결혼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백시윤이 찾아갔다는 건 분명 불순한 의도가 있어 보였다.그녀는 모든 잘못을 백시윤에게 뒤집어씌우더라도 이제 두 사람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백시윤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전화를 끊었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가은이 다시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온지유 씨는 보아하니 상황 파악이 잘 된 것 같은데 백지희 씨만 여전히 멍청하네요.”짝!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백시윤은 김가은의 뺨을 내리쳤다.“다시 한번 지희를 멍청하다고 하면 다음번에는 뺨이 아니라
“지희야, 날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백시윤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자, 백지희는 깜짝 놀랐는지 손을 냉큼 빼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전 지희가 아니라 동생이라니까요?”말을 마친 뒤 소파 쪽으로 다가가 다시 테이블 위의 컵을 들고 물을 마시려 했다.저기에 물컵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마셨던 물인지 몰라 백시윤은 재빨리 그녀의 손에서 물컵을 뺏앗았다.그 모습에 백지희는 깜짝 놀란 나머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하여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물컵을 되돌려준 뒤 낮은 소리로 달래줬다.“자, 여기. 물 마시려고 그래? 내가 다시 부어줄게.”“물, 물 마시고 싶어요.”약간 어눌해 보이는 모습에 백시윤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그때 김다은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본인이라고 자책했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백지희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던 그는 뭔가 결심이 섰다.바로 백지희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것이다.그러다가 재빨리 장민준에게 무조건 온지유가 돌아오기 전에 백지희를 데리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전하려 했다.하지만 이 시각, 예상 밖으로 장민준과 온지유가 의사 사무실에서 다투고 있었다.백시윤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는데 책상 위의 검사 결과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백시윤 씨, 지희를 저 꼴로 만들어 이제 속이 시원해요? 그러고도 지희 옆에 있고 싶다고요?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온지유는 지금 몸만 성했더라면 당장에라도 백시윤에게 달려들어 죽도록 패버리고 싶었다.백시윤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진단서를 읽어보고 또 읽어봤다.이 모든 게 다 사실이란 걸 인정하기 싫었지만 분명히 백지희가 정신적으로 문제 있다고 적혀있었다.너무 충격이 심해 미쳐버린 것이다.온지유는 보고서를 뺏어 들고 그에게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가증스럽게 지금 제 앞에서 연기하는 거예요? 일찍이 지희 곁을 떠났으면 일도 없었잖아요!”“미안해요...”백시윤은 고개를 떨구었다.사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