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희의 반응에 강서준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녀가 귀엽게만 느껴졌다.그녀를 데리고 갤러리로 온 뒤 다음 순서로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볼 생각을 했다. 커플들이 하는 데이트 코스로 준비했다.백지희는 다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녀는 어느새 백화점 앞에 와 있었다.반응하려던 순간 강서준은 이미 주차까지 하고 왔다.“어디로 가는 거예요?”그녀는 오늘 강서준이 모든 걸 준비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나 강서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강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매너 있게 문까지 열어주었다.“백지희 씨, 오늘은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희 씨를 에스코트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점심시간이니까 제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가는 중이고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백지희는 미간을 찌푸렸다.“미안해요, 서준 씨. 제 행동으로 서준 씨가 오해를 한 것 같네요. 지금이라도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어요. 저는...”“양식을 싫어해요?”강서준은 동문서답하면서 못 알아들은 척했다.백지희는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핸드폰을 꺼내 온지유를 불렀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강서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저기, 전 지유가 옆에 있는 게 더 편해서요. 혹시 불편하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전 지유를 기다리면 되니까요.”강서준은 당연히 떠날 사람이 아니었기에 바로 대답했다.“불편하긴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지금 바로 연락해서 임산부가 먹을 만한 음식도 주문해둘게요.”그녀가 무슨 수를 써도 강서준은 그녀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백지희는 다소 짜증이 났다.온지유가 도착하자 온지유의 팔짱을 끼며 수다를 떨었고 강서준이 끼어들 틈도 주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강서준은 누군가의 연락을 받게 되었고 먼저 가버렸다. 백지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온지유는 그런 그녀를 놀려주었다.“아니, 그러게 서준 씨랑 한번 만나보라니까.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단 말이야.”백지희는 손을 내저었다.“난 너처럼 살 수 없어. 난
다음 순간 백지희는 고통스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나는지 그녀도 몰랐다. 그저 가슴이 답답하고 너무도 아픈 감정이 차올라 눈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그런 백지희를 안아주며 묵묵히 토닥여주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사나운 눈빛으로 백시윤에게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경고하는 눈빛에선 경계도 가득했다. 백시윤은 온지유의 눈빛을 무시해버렸다. 오히려 온지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백지희 곁에 있어 줘서 말이다.그는 이내 장민준을 향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민준은 뭔가를 내밀었다.온지유는 잔뜩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백시윤 씨, 이건 무슨 뜻이죠? 설마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백시윤은 미소를 지었다.“저도 알고 있어요. 온지유 씨에게 이런 선물쯤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요.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네요. 제 성의도 담았으니 받아주시지요.”“아니요. 필요 없어요. 저와 백시윤 씨 사이는 선물까지 주고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온지유는 더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말을 마친 후 이내 작별 인사도 했다.백지희의 팔에 팔짱을 낀 채로 밖으로 나가려는데 장민준이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온지유는 차갑게 웃었다.“왜요? 설마 백시윤 씨는 우릴 이곳에 가둬두기라도 하려고요?”백시윤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가게 내버려 둬.”장민준은 길을 비켜주었다. 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백시윤을 힐끗 보았다.그러나 백시윤은 온지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고 신경이 온통 백지희에게 쏠려 있었다. 백지희의 뒷모습을 보는 백시윤의 눈빛은 엄청 괴로워 보였다.장민준은 백시윤이 어디 아픈 줄 알고 의사를 불러오려고 했으나 백시윤이 그를 불러세우며 지시를 내렸다.“지희한테 꽃다발 선물할 거야. 꽃이 싱싱한 꽃가게 알아보고 매일 카드랑 함께 다양한 꽃다발을 보내줘.”장민준은 이해가 가지 않았을뿐더러 조금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그대로 물었다간 욕먹을 것
백시윤이 보낸 꽃다발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백지희는 배달원이 오자마자 먼저 달려나가 받았다.마음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저 온지유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다.오늘도 카드를 갈기갈기 찢은 후 길가의 쓰레기통에 던지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온지유와 마주쳐 백지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올라갔다.“사실 네가 뭘 하든 상관 안 해. 난 네가 뭘 하든 전부 응원할 거니까. 우린 영원한 친구잖아. 나한테 들킬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온지유는 백지희가 자신에게 뭔갈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직설적으로 말했다.백지희는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에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나도 알아.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랬을 뿐이야. 괜찮아,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 나 믿고 시간 좀 줘.”온지유는 의아했다.“꽃다발을 주는 사람이 일반인은 아닌가 봐? 나마저도 건들면 안 되는 사람인 거야?”백지희는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마침 강서준과 여이현이 함께 들어오며 꽃다발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강서준은 바로 백지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꽃다발이라니요. 누가 선물하는 건데요? 꽃다발 좋아했어요? 제가 사드릴게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아니지, 꽃집에 있는 걸 전부 선물해드릴게요.”온지유는 긴장한 채로 백지희를 보는 강서준의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었다.강서준이 백시윤보다 더 믿음직했기 때문이다. 만약 백지희와 강서준이 연인 사이가 된다면 어쩌면 백시윤이 백지희를 포기할지도 모른다.그녀는 걸음을 떼고 백지희의 곁으로 다가가 팔을 잡으며 말했다.“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에 있겠어요. 서준 씨는 당연히 진심으로 한 말씀이겠죠? 빈말로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강서준은 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장미 꽃다발을 주문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꽃 배달이 도착했다. 우연하
백지희는 반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백시윤은 그녀보다 더 빨랐고 그녀의 팔을 단번에 잡았다.“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 지유가 곧 올 거예요.”백지희는 온지유를 핑계를 댔다. 지금의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온지유 뿐이었으니까.“맹세할게. 진짜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집까지 데려다주기만 할게.”백시윤은 그녀가 믿어주지 않을까 봐 소매를 걷어 팔에 남은 주삿바늘 자국을 보여주었다.“설령 너한테 뭔 짓을 하고 싶다고 해도 그럴 힘이 없어. 며칠 동안 매일 병원에서 링거 맞고 있었거든.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조금 힘들어.”바람이 불어오며 비가 두 사람의 몸을 적셨다. 백시윤은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얼른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백지희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공허한 눈빛으로 앞만 보았다.차에 올라탄 백시윤은 마음이 아픈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이러지 마. 나한테 이러지 마. 난 며칠 동안 네 얼굴 못 봐서 힘들었어. 너도 내 마음이 어떤지 잘 알잖아... 아니다, 넌 몰라. 어쨌든 난 살면서 널 단 한 번도 속인 적 없어. 이건 진짜야. 믿어줘.”백지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절 좀 내버려 둬요. 네?”백시윤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운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호텔로 가.”호텔이라는 두 글자에 백지희는 그날 하마터면 죽을 뻔한 기억이 떠올라 순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그녀는 차에서 내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백시윤이 그녀를 꽉 안아버렸다. 급한 마음에 그녀는 백시윤의 팔을 깨물었다.하필이면 주삿바늘이 있던 부위라 백시윤은 고통에 그녀를 놓아주고 말았다.그 짧은 순간에 백지희는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기사는 얼른 차를 세웠다. 백지희는 어두운 도로에서 힘겹게 일어난 후 도망치고 있었기에 걱정스럽게 백시윤에게 물었다.“대표님, 쫓을까요?”“쫓아.”백시윤의 한 마디에 사람들이 바로 그녀를 쫓아갔다.빗속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바로 쫓아왔다고
간호사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백시윤 씨가 꼭 백지희 씨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백지희 씨가 거절한다면 병원에 민원을 넣어서 곤욕을 치르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백지희 씨,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말고 받아주세요. 게다가 이 영양 식단은 백지희 씨 건강에 좋다고요.”돈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걸까?백지희는 화가 치밀었지만 애꿎은 간호사들에게 화풀이할 수 없기에 물건들을 내려놓으라고 했다.아침을 먹은 후 백지희는 온지유에게 문자로 입원한 사실을 알리면서 퇴원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녀는 온지유가 이미 병원에 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진료실에 온지유만 있을 뿐 아니라 여이현과 백시윤도 있었다.세 사람의 안색은 좋지 못했고 분위기도 심각했다.특히 온지유는 눈물을 참고 있었고 어깨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옆에 있던 여이현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무슨 말로 위로해줘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해요.”한참 지난 후 백시윤이 이 정적을 깨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제 신장을 지희한테 이식해줘요.”온지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백시윤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백지희는 신부전 진단을 받았다. 이것을 치료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신장이식이었다. 온지유는 거액을 들여서라도 기증자를 찾아 이식 수술을 시켜주고 싶었으나 백시윤이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했다.그 순간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백시윤을 다시 보게 되었다.‘백시윤은 대체 백지희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가족애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아니면 사랑인가?'‘그것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미 결혼했잖아.'‘설령 지희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기 일부터 처리한 후에 지희의 마음을 얻어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백시윤 씨, 신장이식은 어린 애들 장난이 아니에요. 그러니 진지하게 고민하고 말하세요.”의사가 그에게 경고했다. 여하간에 백시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사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백시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의사
이 부분을 온지유는 정확히 맞혔다. 김가은은 진료실에서 나온 뒤 이 소식을 어떻게든 백지희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결국 이날 오후 옆 병실에 있던 환자를 통해 백지희는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신부전.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해방감이 들기도 하면서 억울하기도 했다.외출했다가 돌아온 백지희는 화장실에 자신을 가두었다.온지유는 사실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묻기도 전에 의사가 백지희의 상태를 알려주었기에 옆 병실에 있던 환자가 백지희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리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 일부러 소식을 퍼뜨린 것이다.그녀는 바로 김가은이 떠올랐다. 원래부터 김가은에게 불만이 많았던 온지유는 지금 이 순간 폭발해버렸다.백시윤의 병실로 성큼성큼 걸어가 바로 김가은의 멱살을 잡고 따져 물었다.“대체 왜 그런 거예요. 지희는 당신을 해친 적 단 한 번도 없는 데, 대체 왜 지희를 자꾸 괴롭히는 거냐고요!”김가은은 눈짓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온지유를 떼어내며 그녀는 다시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허, 전 온지유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전 그저 온지유 씨가 백지희 씨 친구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망상을 하고 계시면 곤란하죠. 제가 아무리 밉다고 해도 그 정도로 멍청하고 뻔뻔한 사람은 아니거든요.”“그쪽이 아니면 지희가 어떻게 안 건데요.”온지유는 다시 달려들려고 했으나 자신을 잡고 있던 사람들 때문에 다시 당겨졌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어떻게든 김가은을 혼내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지금 이 순간 온지유는 자신이 임산부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다행히 여이현과 강서준이 제때 도착해 온지유를 말릴 수 있었다. 여이현은 빠르게 온지유에게 다가가 온지유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밀쳐낸 후 등 뒤로 보내며 지켜주었다.“건들기만 해봐요. 백시윤 씨, 아내 관리 잘해요.”여이현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백시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하려고 했으나 김가은이 먼저 말을
“당연하죠. 시윤 씨, 생각해봐요. 그 사람들은 지희 씨를 아주 좋아해요. 지희 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어떻게든 도와두려고 할 거라고요. 그러니 차라리 저희가 찾아뵙는 것보단 지희 씨가 가서 부탁하는 것이 낫겠죠.”김가은의 말로 백시윤은 희망을 얻게 되었다. 대충 핑계를 대면서 김가은을 떼어낸 그는 백지희의 병실로 왔다.백지희는 그를 보자마자 바로 경계했다.“여긴 왜 왔어요. 전 백시윤 씨 얼굴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가주세요. 안 그러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예요.”백시윤은 더는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병실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보았다.“신장 기증자는 내가 이미 찾았어. 그리고 그림도 전부 찾았어. 네가 고개만 끄덕이면 지금 바로 다시 갤러리에 전시하라고 할 거야.”“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백시윤 씨는 앞으로 제 일에 신경 꺼주세요.”백지희의 태도는 전보다 더 쌀쌀맞았다. 희망을 품고 달려온 백시윤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백지희를 한참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펜과 종이를 꺼내 기증자의 집 주소와 연락처를 적은 뒤 문가에 있던 소파에 올려두고 떠났다.백지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시윤이 질척이지 않는다면 그가 무엇을 했든 관심이 없었다.병실로 돌아온 강서준은 열려있는 문을 보며 놀란 마음으로 얼른 달려갔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는 백지희를 보고 나서야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관찰력이 뛰어난 그는 소파에 있는 메모지를 발견하곤 물었다.“이건 누가 남기고 간 거예요? 신장을 팔아 아들 대학교 등록금을 마련한다니요?”백지희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불만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대답을 듣지 못한 강서준은 메모지를 들고 간호사를 찾아갔다.간호사의 입에서 백시윤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강서준은 바로 뭔가 떠올라 메모지를 든 채 백시윤을 찾아갔다. 사실인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백지희는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니까.병실 앞에 도착하자 김가은과 마주치
강서준은 병실로 들어가자마자 말했다.“메모지에 적힌 건 사실이었어요. 우리 얼른 가요.”백지희는 이해가 가지 않아 마치 괴물을 보듯 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기증자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정해진 미래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강서준은 그런 그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안아 올려 밖으로 나갔다.“뭐해요. 내려놔요.”지나가던 간호사와 환자들이 저마다 고개를 돌려 그녀와 강서준을 보았다. 백지희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강서준은 절대 그녀를 내려줄 생각이 없었다.강서준이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자 백지희는 결국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이러면 제가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요?”강서준은 시동을 걸었다.“오해예요. 전 그냥 지희 씨가 계속 살아가길 바랄 뿐이에요. 겨우 희망을 찾았는데 그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말을 하면서 그는 속도를 올렸다. 신호등까지 무시한 채 엄청나게 빠르게 세영시로 도착했다.메모지에 적힌 주소대로 걸음을 옮기자 낡고 허름한 집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당황했다.전혀 작은 구멍가게로 생계를 이어가는 집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폐가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제 뒤에 있어요.”만약의 상황을 위해 강서준은 백지희를 등 뒤로 보낸 후 손을 뻗어 노크했다.문에 손이 닿자마자 열렸다.마당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강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여기가 이재진 씨 댁 맞아요?”빨래를 널던 할머니는 멈칫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들을 경계하듯 눈을 가늘게 접으며 한참 위아래 훑어보았다.그러고 난 후 고개를 끄덕였다.“이재진은 내 남편이에요. 내 남편은 왜 찾아요.”강서준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백지희와 안으로 들어갔다.할머니 앞으로 다가온 그는 먼저 백지희를 소개한 뒤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할머니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빨래를 내려
남태건은 권다솔의 멘탈이 무너지고 아주 힘들어할 때 손을 내밀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권다솔의 기억 속 그의 이미지도 뒤바뀔 것이고 철저하게 배진호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네, 대표님. 그럼 전 이만 처리하라던 서류를 마저 하러 가겠습니다.”비서는 그의 마음이 완벽하게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악플의 위력은 어마무시했다. 그런데 남태건은 도와주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기에 비서는 남태건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다만 그는 일개 비서였고 월급쟁이였던지라 그가 끼어들 처지는 아니었다.비서가 나가자 남태건은 계속하던 일을 하면서 드문드문 여론을 확인했다.그는 아직도 미적지근한 사람들의 반응에 속으로 투덜댔다. 결국 성격이 급했던 그는 자기 지갑을 열어 여론을 만들었다....한편 권씨 가문.이혼 서류 신청하고 나온 뒤 권다솔은 비록 남태건의 차를 타고 오긴 했으나 오는 도중에 내렸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님에게도 말했다.“아빠, 엄마. 오늘 이혼 신청하러 갔으니까 이혼숙려기간만 지나면 완벽하게 남이 될 거예요. 그동안 전 아파트에서 혼자 살 거니까 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다솔아, 네가 혼자 나가 살고 싶다고 해도 엄마는 반대할 생각 없어. 하지만 너 혼자 짐을 다 옮길 순 없을 테니까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주마.”김영은이 먼저 그녀에게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권다솔은 원래 두 사람에게 부탁할 생각이 없었다.여하간에 나이가 많기도 했고 이사 업체에 연락하며 알아서 다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이사까지 부탁하면 그녀는 자신이 불효녀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두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계속 거절만 하면 두 사람에게 상처가 될까 봐 걱정되었기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랑 아빠는 물건을 옮기실 필요 없어요. 제가 이사 업체에 연락해주면 알아서 옮겨줄 거니까 두 분은 그냥 저랑 함께
그런 두 사람을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배진호였다. 배진호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권다솔에게 집에 가자고 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진호 씨, 전 권다솔 씨랑 같은 여자로서 잘 알아요. 권다솔 씨는 지금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음에도 진호 씨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해요. 전형적인 어장관리녀인 거죠.”석규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배진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전 여자를 때리지 않아요. 하지만 계속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한다면 지금 마지막 경고를 해두죠. 그 입 닥쳐요.”“진호 씨!”석규리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배진호가 대체 왜 이토록 권다솔을 사랑하는 것인지 이해 가지 않았다.하지만 적당한 선에게 멈추어야 했다. 만약 여기서 ‘적당히'를 모르고 계속 나댔다간 배진호의 분노를 일으켜 더는 수습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릴 것이다.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떠나가는 배진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곧이어 그녀는 미리 연락해둔 언론사에 다시 연락했다.“제가 찍으라고 한 건 전부 찍었죠?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일이 끝나면 약속한 남은 돈을 입금할 테니까요.”그녀가 주겠다고 약속한 금액이 꽤나 많았다. 그러니 언론사에서도 당연히 거부할 리가 없었다.빠르게 인터넷엔 권다솔의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영상 편집본까지 첨부되었다.영상 속의 권다솔은 가정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남태건의 꽃다발을 받는 모습이었다.거기에다 일전에 남태건이 김영은에게 전송했던 사진도 석규리는 언론사 기자에게 연락해 전부 기사로 내라고 했고 얼추 타임라인까지 정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권다솔은 네티즌들의 악플 공격을 받게 되었다.[그러니까 권다솔이라는 사람이 이혼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거네요? 둘이서 바닷가도 가고 가정 법원에서 나온 뒤 꽃다발도 받고? 두 사람 뭐가 이렇게 급하대요?][정말 역겹네요. 설마 이혼 신청하고 나온 가정 법원 앞
“배진호 씨.”권다솔은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배진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금방 택시에서 내린 석규리가 달려오며 대신 대답했다.“당연히 전남편의 자격으로 말하는 거죠. 권다솔 씨의 이혼이 완전하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기혼인 거죠. 그런 상태서 다른 남자의 장미 꽃다발을 받는다는 건 대놓고 바람을 피우겠다는 게 아닌가요?”권다솔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지금 나더러 바람을 피운다고 한 거야?'‘그럼 배진호는? 본인들이 한 건 뭔데?!'그녀와 남태건의 사이는 떳떳했다. 여하간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설령 두 사람 사이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고 해도 유부남을 꼬신 석규리에게 입을 열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석규리 씨, 누가 여길 오라고 했죠?”배진호는 잔뜩 화가 난 눈길로 석규리를 보았다.‘왜 매번 석규리가 나타나서 자꾸만 내 일에 방해하는 거지!'그는 석규리를 밀쳐냈다.“그쪽이 끼어들 자리는 없으니까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요!”“진호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 여자가 이 남자를 만나고 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이겠어요? 진호 씨랑 이혼하기도 전부터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고 다녔다고요. 아직도 모르겠어요?”석규리는 울면서 말했다.그녀는 배진호에게 보여줄 뿐 아니라 옆에 있던 연예부 기자들에게도 보여줄 생각이었다.정미진이 그녀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바로 둘 사이를 방해하라는 것이었다.하지만 방해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배진호는 애초에 그녀의 방해에도 넘어오지 않았다. 설령 그녀가 가정 법원 앞에서 난동을 부린다고 해도 배진호 마음속에 있는 여자는 권다솔뿐이었다.난리를 피우려면 크게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언론사에 연락했었다. 권다솔의 스캔들인데 어느 언론사가 마다하겠는가.“석규리 씨!”배진호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
배진호는 권다솔의 비꼬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저 죄책감만 잔뜩 들었다.“미안해요, 다솔 씨. 내가 정말 미안해요.”“아니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굳이 나한테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곧 우리 차례네요. 이혼을 신청하고 절차도 끝나면 배진호 씨는 당당하게 석규리 씨랑 함께 살 수 있을 거예요.”권다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신청서 제출 창구로 간 후 직원에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희는 이혼 신청서를 제출하러 왔어요.”“두 분 정말로 이혼하시려고요?”직원이 절차대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이혼하기 싫다는 말을 써놓은 것처럼 그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다.이혼숙려기간이 있는 이유는 이혼율을 낮추기 위함이었다. 직원은 그런 배진호의 마음을 눈치채고 하던 행동을 멈춘 채 계속 물었다.“부부간에 성격이 안 맞아서 싸우는 일도 있죠. 이건 다 흔한 일이에요. 그래도 이혼은 피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이 일 하면서 많은 부부를 봤거든요. 대부분 이혼하고 후회해서 다시 재혼하겠다는 부부가 많아요.”“저흰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냥 그대로 진행해주세요.”권다솔이 직원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그녀의 태도는 확고했기에 직원도 하는 수 없이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이혼숙려기간은 한 달이라는 거 아시죠? 그 기간 동안 후회가 된다면 언제든 와서 취소할 수 있어요. 이혼숙려기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완전한 남이 돼요.”권다솔은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문밖으로 나가자 남태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엔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너무도 눈에 거슬렸다.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던 온지유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려 배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원래부터 두 사람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몰아치던 차였다. 그런데 권다솔에게 다가가려는 남자가 있으니 배진호가 권다솔의 마음
“배진호 씨.”권다솔도 자꾸만 반짝이는 그의 핸드폰을 발견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전화 오면 받으면 돼요. 어차피 우린 곧 이혼할 거니까 굳이 날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이제 이혼숙려기간만 지나면 두 사람은 완전히 남이 되는 것이다.그때가 되면 서로에게 더는 신경 쓸 필요 없었다.배진호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미진의 전화를 너무도 받고 싶지 않았기에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진호야, 이틀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니?”정미진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배진호가 병실에서 홍경천 약재를 언급한 그 날 그녀는 얼른 남편을 집에 돌려보낸 후 배성연에겐 시간을 끌어보라고 했다.홍경천은 이미 성공적으로 처리해 버렸기에 배진호가 아무리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정미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심지어 배성연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오늘은 배진호와 권다솔이 이혼 서류를 접수하는 날이었던지라 정미진은 어떻게든 배진호와 통화해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다.“진호야, 오늘 가정 법원으로 가야 한다는 거 잊지 않았지?”“어머니, 그렇게 집요하게 전화를 거신 이유가 저한테 이 말을 해주시려고 그런 거예요? 가정 법원에 꼭 가라고요?”배진호는 이런 정미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혼하러 온 부부도 있고 혼인 신고하러 온 커플도 있었다.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들의 이혼을 바라며 연락하는 부모는 없었다. 정미진의 연락에 배진호는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더는 그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배진호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미진이 그의 입장을 조금만 생각해줬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니까.그는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보았다. 오늘이 지나면 권다솔과 다시 만나게 될 날은 한 달 뒤가 될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아마도 기회조차 없게 된다.“전 이미
별이는 아는 게임을 전부 말했지만 아이는 계속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아이는 더는 울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눈으로 호기심 가득 별이를 보았다.“방금 네가 말한 게임들은 어떻게 하는 거야? 난 들어본 적도 없어.”“나랑 같이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면 알게 될 거야. 어린이집엔 친구들이 많거든. 그럼 내가 말한 게임도 여러 번 할 수 있어.”별이는 일부러 게임 정보를 전부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말이다.아이는 역시나 별이의 말에 홀랑 넘어갔다.바닥에서 떼를 쓰던 아이는 일어나 별이의 손을 잡았다.“그럼 너랑 같이 들어갈래. 방금 네가 말한 게임 전부 해보고 싶어!”아이의 부모들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온지유에게 다가가 감사 인사를 하며 별이를 칭찬했다.“두 아이는 같은 반 친구일 뿐인걸요. 앞으로 아마 절친한 친구가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온지유는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딘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와 여이현은 별이를 아주 잘 키웠다.두 아이가 어린이집으로 들어가 더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온지유는 그제야 차에 올라탄 뒤 가정 법원으로 가자며 기사에게 말했다.조금 뒤면 배진호와 만날 생각에 권다솔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긴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이미 며칠 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배진호가 그간 석규리와 함께 지낸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게다가 정미진과 배상준은 배진호와 석규리가 결혼하길 바랐으니 아마 중간에서 계속 이어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와 남태건을 이어주려는 것처럼 말이다.어린이집에서 가정 법원으로 가는 길이 권다솔에겐 한 세기가 지나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온지유는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가정 법원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나타났다. 그는 혼자였다.“다솔 씨, 오랜만이에요.”권다솔을 본 순간 배진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두 사람은
“흥, 말만 잘하지.”온지유는 그를 살짝 째려본 뒤 그릇을 들고 주방에서 나갔다.만들어 둔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별이를 불렀다.“별아, 아침밥 완성되었으니까 얼른 손 씻고 와. 손 씻고 먹는 거야.”“엄마, 전 이미 손도 씻고 왔어요.”별이는 손을 들어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어린이집 선생님이 저한테 손을 깨끗하게 씻는 방법을 가르쳐줘서 깨끗하게 씻고 왔어요.”“별이 정말 말했네! 우리 별이 이젠 어른이 다 되었네!”온지유는 별이를 안아 의자에 앉힌 뒤 달걀을 까주었다.여이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우유를 꺼내 권다솔의 컵에 따라주었다.“고마워요, 대표님.”권다솔은 얼른 감사 인사를 전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앞에서 배진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뭘요. 얼른 들어요.”아침을 먹는 동안 권다솔은 아주 조용했다.그녀는 눈앞에서 웃으며 즐겁게 아침을 먹는 세 사람을 보았다. 부러움이 넘쳐 흘러나올 것 같았다.예전에 그녀도 배진호와 사이가 좋았을 때 이렇게 서로 마주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었다. 특히 임신했을 때 두 사람의 감정은 극에 달했다.만약 정미진이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이미 아기를 낳고 눈앞에 있는 온지유 가족처럼 단란하게 지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엔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상처를 받았으며 두 사람의 결말은 이것뿐이었다.오늘 아침 여이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별이와 온지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권다솔은 온하윤을 돌보는 것을 자처했다.품에 안은 아기를 보다가 거실에서 웃고 떠드는 세 사람을 보니 그녀는 마치 남의 행복을 구경하러 온 방청객 같았다.온하윤이 졸고 있자 권다솔은 온하윤을 다시 아기 흔들의자에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그녀는 방에서 온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을 때 즈음에야 나왔다.온지유가 묻자 권다솔은 대충 핑계를 댔다.“이틀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너무 졸려서 그냥 잤어요.”저녁을 먹은 뒤 그녀는 계속
물론 권용민에게 사심도 있었다.만약 권다솔이 집을 나가 혼자 살게 되면 그들이 남태건과 이어줄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아빠, 그러면 제가 매일 집에 들르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면 주방장이라도 보내서 하루 세 끼를 먹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전 기분 전환이 필요해요.”권다솔의 요구에 권용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날 밤 권다솔은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침대는 편했지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다음 날 아침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아침을 만들었고 권다솔의 몫도 만들어 주었다.“지유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배진호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 안 해. 두 사람이 이렇게 된 거엔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온지유가 만든 음식을 식탁으로 가져가려던 때 여이현이 말했다.사실 온지유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이혼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다솔 씨는 금방 유산했어. 지금 심신이 힘든 상태라 같은 여자인 나도 지금 다솔 씨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어. 그래서 난 설득하기가 조금 어려워.”“그럼 내가 가서 배진호한테 물어봐?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 파악하는 거야. 그러면 두 사람을 더 정확하게 도와둘 수 있을 거야.”“아니야, 됐어. 일단 연락하지 마.”온지유는 곰곰이 생각했다.어차피 내일 그녀는 별이를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줘야 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권다솔과 함께 가정 법원으로 갈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배진호와 만나게 될 것이고 직접 얼굴 보며 물어보는 것이 전화 통화해서 묻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나도 석규리라는 사람이 궁금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고. 대체 왜 자기가 내연녀라는 거 알면서도 기꺼이 자처하는 지도 궁금해.”석규리를 언급하면서 온지유는 미간을 구겼다.세상에 자기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연녀를 자처하는 여자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이 났기에 여이현과 온지유만큼은 행복하게 이어가길 바랐다.“그럼 저녁엔 뭐 좀 먹었어요?”온지유는 권다솔이 걱정되었다.조금 전 권다솔이 엄청 힘들어했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집으로 온 이상 손님이지 않은가.손님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걱정하지 말아요. 집에서 뭘 좀 먹고 왔어요. 저도 어른인데 당연히 몸 챙겨야죠.”“그럼 됐어요. 혹시라도 배가 고프게 되면 이모님한테 말씀드리면 돼요. 그럼 이모님이 야식거리라도 만들어 주실 거예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그러고 난 후 권다솔을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손님방은 아주 컸고 안에는 샤워실과 드레스룸도 있었다.“고마워요.”권다솔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온지유가 나간 뒤 권다솔은 혼자 방 안에 머물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권용민의 번호였다.권다솔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눈시울이 붉어졌다.“다솔아, 거기서 잘 지내고 있는 거니? 아빠가 이미 실력 좋은 경호원으로 뽑아뒀으니까 내일이면 도착할 거다. 그리고 주방장도 알아봐 뒀어. 남의 집이라고 해도 절대 끼니는 거르면 안 된다. 알겠지? 어떻게든 몸조리를 잘해. 아빠는 그래도 우리 딸이 건강하던 모습이 좋으니까.”권용민은 세심하게 당부했다.권다솔은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목이 메어왔다.“아빠,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그냥 며칠만 지내다가 갈 거예요. 월요일에 이혼 절차가 끝나면 다시 돌아갈 거예요.”“목소리가 왜 그래?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빠가 지금 바로 갈까?”권용민은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멍해졌다.권다솔이 온지유의 집에서 며칠 지내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은 이유는 권다솔이 기분 전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동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아빠로서 딸이 우는 목소리를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