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희는 반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백시윤은 그녀보다 더 빨랐고 그녀의 팔을 단번에 잡았다.“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 지유가 곧 올 거예요.”백지희는 온지유를 핑계를 댔다. 지금의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온지유 뿐이었으니까.“맹세할게. 진짜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집까지 데려다주기만 할게.”백시윤은 그녀가 믿어주지 않을까 봐 소매를 걷어 팔에 남은 주삿바늘 자국을 보여주었다.“설령 너한테 뭔 짓을 하고 싶다고 해도 그럴 힘이 없어. 며칠 동안 매일 병원에서 링거 맞고 있었거든.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조금 힘들어.”바람이 불어오며 비가 두 사람의 몸을 적셨다. 백시윤은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얼른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백지희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공허한 눈빛으로 앞만 보았다.차에 올라탄 백시윤은 마음이 아픈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이러지 마. 나한테 이러지 마. 난 며칠 동안 네 얼굴 못 봐서 힘들었어. 너도 내 마음이 어떤지 잘 알잖아... 아니다, 넌 몰라. 어쨌든 난 살면서 널 단 한 번도 속인 적 없어. 이건 진짜야. 믿어줘.”백지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절 좀 내버려 둬요. 네?”백시윤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운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호텔로 가.”호텔이라는 두 글자에 백지희는 그날 하마터면 죽을 뻔한 기억이 떠올라 순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그녀는 차에서 내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백시윤이 그녀를 꽉 안아버렸다. 급한 마음에 그녀는 백시윤의 팔을 깨물었다.하필이면 주삿바늘이 있던 부위라 백시윤은 고통에 그녀를 놓아주고 말았다.그 짧은 순간에 백지희는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기사는 얼른 차를 세웠다. 백지희는 어두운 도로에서 힘겹게 일어난 후 도망치고 있었기에 걱정스럽게 백시윤에게 물었다.“대표님, 쫓을까요?”“쫓아.”백시윤의 한 마디에 사람들이 바로 그녀를 쫓아갔다.빗속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바로 쫓아왔다고
간호사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백시윤 씨가 꼭 백지희 씨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백지희 씨가 거절한다면 병원에 민원을 넣어서 곤욕을 치르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백지희 씨,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말고 받아주세요. 게다가 이 영양 식단은 백지희 씨 건강에 좋다고요.”돈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걸까?백지희는 화가 치밀었지만 애꿎은 간호사들에게 화풀이할 수 없기에 물건들을 내려놓으라고 했다.아침을 먹은 후 백지희는 온지유에게 문자로 입원한 사실을 알리면서 퇴원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녀는 온지유가 이미 병원에 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진료실에 온지유만 있을 뿐 아니라 여이현과 백시윤도 있었다.세 사람의 안색은 좋지 못했고 분위기도 심각했다.특히 온지유는 눈물을 참고 있었고 어깨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옆에 있던 여이현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무슨 말로 위로해줘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해요.”한참 지난 후 백시윤이 이 정적을 깨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제 신장을 지희한테 이식해줘요.”온지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백시윤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백지희는 신부전 진단을 받았다. 이것을 치료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신장이식이었다. 온지유는 거액을 들여서라도 기증자를 찾아 이식 수술을 시켜주고 싶었으나 백시윤이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했다.그 순간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백시윤을 다시 보게 되었다.‘백시윤은 대체 백지희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가족애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아니면 사랑인가?'‘그것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미 결혼했잖아.'‘설령 지희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기 일부터 처리한 후에 지희의 마음을 얻어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백시윤 씨, 신장이식은 어린 애들 장난이 아니에요. 그러니 진지하게 고민하고 말하세요.”의사가 그에게 경고했다. 여하간에 백시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사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백시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의사
이 부분을 온지유는 정확히 맞혔다. 김가은은 진료실에서 나온 뒤 이 소식을 어떻게든 백지희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결국 이날 오후 옆 병실에 있던 환자를 통해 백지희는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신부전.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해방감이 들기도 하면서 억울하기도 했다.외출했다가 돌아온 백지희는 화장실에 자신을 가두었다.온지유는 사실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묻기도 전에 의사가 백지희의 상태를 알려주었기에 옆 병실에 있던 환자가 백지희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리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 일부러 소식을 퍼뜨린 것이다.그녀는 바로 김가은이 떠올랐다. 원래부터 김가은에게 불만이 많았던 온지유는 지금 이 순간 폭발해버렸다.백시윤의 병실로 성큼성큼 걸어가 바로 김가은의 멱살을 잡고 따져 물었다.“대체 왜 그런 거예요. 지희는 당신을 해친 적 단 한 번도 없는 데, 대체 왜 지희를 자꾸 괴롭히는 거냐고요!”김가은은 눈짓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온지유를 떼어내며 그녀는 다시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허, 전 온지유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전 그저 온지유 씨가 백지희 씨 친구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망상을 하고 계시면 곤란하죠. 제가 아무리 밉다고 해도 그 정도로 멍청하고 뻔뻔한 사람은 아니거든요.”“그쪽이 아니면 지희가 어떻게 안 건데요.”온지유는 다시 달려들려고 했으나 자신을 잡고 있던 사람들 때문에 다시 당겨졌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어떻게든 김가은을 혼내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지금 이 순간 온지유는 자신이 임산부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다행히 여이현과 강서준이 제때 도착해 온지유를 말릴 수 있었다. 여이현은 빠르게 온지유에게 다가가 온지유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밀쳐낸 후 등 뒤로 보내며 지켜주었다.“건들기만 해봐요. 백시윤 씨, 아내 관리 잘해요.”여이현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백시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하려고 했으나 김가은이 먼저 말을
“당연하죠. 시윤 씨, 생각해봐요. 그 사람들은 지희 씨를 아주 좋아해요. 지희 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어떻게든 도와두려고 할 거라고요. 그러니 차라리 저희가 찾아뵙는 것보단 지희 씨가 가서 부탁하는 것이 낫겠죠.”김가은의 말로 백시윤은 희망을 얻게 되었다. 대충 핑계를 대면서 김가은을 떼어낸 그는 백지희의 병실로 왔다.백지희는 그를 보자마자 바로 경계했다.“여긴 왜 왔어요. 전 백시윤 씨 얼굴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가주세요. 안 그러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예요.”백시윤은 더는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병실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보았다.“신장 기증자는 내가 이미 찾았어. 그리고 그림도 전부 찾았어. 네가 고개만 끄덕이면 지금 바로 다시 갤러리에 전시하라고 할 거야.”“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백시윤 씨는 앞으로 제 일에 신경 꺼주세요.”백지희의 태도는 전보다 더 쌀쌀맞았다. 희망을 품고 달려온 백시윤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백지희를 한참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펜과 종이를 꺼내 기증자의 집 주소와 연락처를 적은 뒤 문가에 있던 소파에 올려두고 떠났다.백지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시윤이 질척이지 않는다면 그가 무엇을 했든 관심이 없었다.병실로 돌아온 강서준은 열려있는 문을 보며 놀란 마음으로 얼른 달려갔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는 백지희를 보고 나서야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관찰력이 뛰어난 그는 소파에 있는 메모지를 발견하곤 물었다.“이건 누가 남기고 간 거예요? 신장을 팔아 아들 대학교 등록금을 마련한다니요?”백지희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불만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대답을 듣지 못한 강서준은 메모지를 들고 간호사를 찾아갔다.간호사의 입에서 백시윤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강서준은 바로 뭔가 떠올라 메모지를 든 채 백시윤을 찾아갔다. 사실인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백지희는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니까.병실 앞에 도착하자 김가은과 마주치
강서준은 병실로 들어가자마자 말했다.“메모지에 적힌 건 사실이었어요. 우리 얼른 가요.”백지희는 이해가 가지 않아 마치 괴물을 보듯 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기증자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정해진 미래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강서준은 그런 그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안아 올려 밖으로 나갔다.“뭐해요. 내려놔요.”지나가던 간호사와 환자들이 저마다 고개를 돌려 그녀와 강서준을 보았다. 백지희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강서준은 절대 그녀를 내려줄 생각이 없었다.강서준이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자 백지희는 결국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이러면 제가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요?”강서준은 시동을 걸었다.“오해예요. 전 그냥 지희 씨가 계속 살아가길 바랄 뿐이에요. 겨우 희망을 찾았는데 그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말을 하면서 그는 속도를 올렸다. 신호등까지 무시한 채 엄청나게 빠르게 세영시로 도착했다.메모지에 적힌 주소대로 걸음을 옮기자 낡고 허름한 집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당황했다.전혀 작은 구멍가게로 생계를 이어가는 집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폐가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다.“제 뒤에 있어요.”만약의 상황을 위해 강서준은 백지희를 등 뒤로 보낸 후 손을 뻗어 노크했다.문에 손이 닿자마자 열렸다.마당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강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여기가 이재진 씨 댁 맞아요?”빨래를 널던 할머니는 멈칫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들을 경계하듯 눈을 가늘게 접으며 한참 위아래 훑어보았다.그러고 난 후 고개를 끄덕였다.“이재진은 내 남편이에요. 내 남편은 왜 찾아요.”강서준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백지희와 안으로 들어갔다.할머니 앞으로 다가온 그는 먼저 백지희를 소개한 뒤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할머니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빨래를 내려
자리에 앉은 후 할머니는 찻잔을 들고나와 백지희와 강서준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낡은 두 찻잔은 자신들의 앞에 내려놓았다.강서준은 그들의 행동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묵묵히 그들이 하는 연기를 보고 있었다.이재진은 먼저 예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백지희는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기에 강서준은 두 사람이 연기하고 있음을 눈치챘다.돈이 필요해 신장을 기증하려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두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다.“아가씨는 분명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으면 되니까. 얼른 차 마셔요. 식으면 맛없거든요.”이재진은 눈물이 달린 눈으로 말했다. 연기가 수준급이었다.백지희는 눈치를 채지 못해 찻잔을 들며 마시려 했으나 강서준이 그녀의 팔을 살짝 당기며 마시면 안 된다고 작게 말해주었다.이재진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권했다.“한 모금이라도 마셔요. 어차피 차라 문제가 될 건 없잖아요. 그리고 설마 내가 생명의 은인을 해치겠어요?”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마셔버렸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재진은 고개를 돌려 강서준을 보았다.강서준은 픽 웃으며 차를 전부 바닥에 쏟아버렸다.그는 두 사람의 연극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아 백지희에게 말했다.“이 사람들은 돈이 필요해 신장을 팔려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를 여기로 유인한 건 분명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니까 우리 얼른 가요.”“가려고요? 그러기엔 늦지 않았나?”이재진은 조금 전과 다른 태도로 차갑게 웃었다. 목소리도 달라졌다. 조금 전 곧 생을 마감할 것 같은 목소리와 달리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강서준은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경계하며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백지희의 손을 잡았다. 백지희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말이다.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크게 웃더니 백지희를 보았다.“백지희 씨, 원망하려던 약속을 안 지킨 본인을 원망하세요. 그럼 두 사람은 여기서 천천히 미래를 맞이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만 가 볼 테니까.”말을
강서준은 몸을 던지며 백지희를 지켜주려고 밖으로 밀어냈다. 이내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무 조각이 강서준의 다리에 박혀버린 것이다.“서준 씨!”놀란 백지희는 얼른 기어가며 그를 불렀지만 떨어진 나무판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백지희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고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강서준이 떠오른 그녀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찾아다녔다.그러나 온지유가 마침 병실로 들어오며 바로 달려와 그녀를 다시 침대로 부축했다.“서준 씨한테 데려다줘. 지금 어떻게 된 거야? 말해줘, 서준 씨 아직 살아 있는 거지?”백지희는 온지유의 손을 꽉 잡았다. 백지희는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온지유는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위로했다.“살아 있어. 두 사람은 대체 왜 그런 곳에 간 거야? 그건 철거 예정이었던 집이었어. 언제든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팻말까지 꽂아 둔 곳인데 못 봤어?”백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백시윤이 찾아온 것부터? 아니면 강서준이 희망을 찾게 된 것부터?”어디서부터 설명해도 전부 이상할 것이다.온지유는 두 사람이 데이트하러 간 줄 알고 흐뭇하고 웃었다.“알았어. 아무리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해도 그런 위험한 곳에 가서 데이트하지 마. 짜릿한 데이트를 즐기고 싶으면 놀이공원 같은 곳에 가도 됐잖아.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으면 나한테 물어봐도 돼.”백지희는 그녀를 얄밉다는 듯 힐끗 보곤 말했다.“우린 데이트하러 간 게 아니야. 신장 기증자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속은 거야.”속았다니.놀란 온지유는 얼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백지희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해주곤 절대 백시윤을 찾으러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백시윤은 또 백지희를 해칠 생각을 했다. 그랬기에 온지유는 백지희의 당부를 들을 리가 없었다. 설령 말로는 알겠다고 했으나 속으로는 이미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백지희가 진정한 뒤 그녀는 의사가 자신
백지희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절 해친 거로 부족한 거예요?”그녀의 목소리에 백시윤은 행동을 멈추고 한참 멍한 표정으로 백지희를 보았다.강서준은 아픈 척 미간을 찌푸리며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아악, 지희 씨 너무 아파요. 누가 커다란 바늘로 자꾸 제 다리를 찌르는 것 같아요. 얼른 확인해줘요. 설마 이러다가 못 걷게 되는 건 아니겠죠?”백시윤은 들고 있던 이불을 내려놓고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강 대표님, 그럼 내가 대신 의사를 불러주죠. 지희는 이런 걸 잘 모르거든요.”“백시윤 씨는 신경 끄세요.”백지희는 바로 백시윤의 말에 반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강서준의 두 다리를 확인했다.그녀의 행동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마치 지금 살피고 있는 것이 강서준의 두 다리가 아니라 진귀한 보물인 것처럼 말이다.백시윤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숨쉬기가 힘들었다.그리곤 잔뜩 화가 난 눈길로 강서준을 보았다. 강서준은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약이 오른 백시윤은 더 화가 올랐지만 지금 상황에서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를 내는 순간 백지희의 증오만 늘어갈 테니까.한참 후 그는 진정한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희야, 할 말이 있는데 시간 좀 내줄래?”“무슨 할 말인데요. 그냥 여기서 하세요.”백지희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사과를 가져와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여긴 다른 사람이 있잖아.”백시윤은 핑계를 댔다.백지희는 강서준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서준 씨는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남이 절 구해줄 리가 없잖아요. 설령 서준 씨 말고도 다른 사람이 절 구해준다고 해도 전 서준 씨를 남 취급하지 않을 거예요.”그녀의 말에 백시윤 뿐 아니라 강서준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먼저 정신을 차린 강서준이 흥분한 얼굴로 백지희를 보며 손을 들고 맹세했다.“믿어주세요.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지희 씨를 더 잘 지켜드릴게요.”그러자 백시윤이 픽 웃었다.백지희는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